컬러영상으로 본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The Korean War in Color'.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중국의 마오쩌둥과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의 지원을 받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소비에트 연방에서 제조한 탱크로 38선을 넘어 남침해 왔다. 오전 9시경에는 개성 방어선을 격파하고 당일 오전에 동두천, 포천을 함락시켰다. 26일 오후에 의정부를, 27일 정오에는 이미 서울 도봉구의 창동 방어선을 넘고 있었다. 창동 방어선이 뚫린 대한민국 국군은 강북구의 미아동에 있는 미아리 고개에 미아리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조선인민군의 전차에 의해 붕괴되었다. 28일 새벽 2시 30분에는 한강에 있던 한강대교가 폭파되었고, 이후 서울에는 붉은 깃발이 내걸렸다. 7월 14일에는 대한민국 국군의 지휘권을 미군에게 넘겨 주었다. 정부는 대전에서 대구를 거쳐 부산까지 이전했다. 1950년 9월 15일에는 인천 상륙 작전을 펼치고 같은 해 9월 28일에는 낙동강 방어선을 넘었고, 10월 19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 평양을 함락하였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었고 그 와중에 거창 양민 학살 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1953년 7월 27일에는 휴전선을 중심으로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한국 전쟁은 원칙적으로 존속되고 있다. 


출처: 컬러영상,다큐멘터리 한국전쟁 The Korean War in Color,www.JTBC.b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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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방에 사람들과 이야기 중에 황금혼님이 한국전쟁에 대한 좋은 책이 있다길래

마침 관련 서적을 뭘 사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콜디스트 윈터를 소개해 주셨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교보로 고고! 

번역판인데 댓글에 보면 군사 용어에 미숙한 번역가가 번역했고, 번역에 대한 오류가

상당 수 있다고 적어놨다. 사실 구입하고 이 글을 봤지만, 아마

구입전에 봤었어도 일단 샀을 듯. ㅡㅡ;;; 뭐 나보다는 번역 잘 했겠지. 크힛!

내용인 즉슨 미국의 참전 동기와 거기에 따른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한국전쟁에서의 실상을 자세히 적어 놓은 책이다.

책은 중공군 개입부분 부터 시작을 하는데 마침

내가 가지고 있는 게임들의 정보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위에 보이는 왼쪽의 넥스트워는 한구건쟁을 다루긴 했지만, 내용은 미래전이다.

이 책과는 무관한 게임이지만 단체 사진에 빼면 섭섭해 할까봐 일단 끼워줬다. 고맙지?

왼쪽 부터 NextWar:Korea(다음전쟁: 한국), The Forgotten War:Korea(잊혀진 전쟁:한국), Korea: The Forgotten War:Korea(한국:잊혀진 전쟁), YALU(압록강)

보통 워게임은 히스토리를 바탕으로 시나리오가 구성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련 내용을 찾아 보게 되는데, 한국전쟁은 그런 의미에서 좀 부끄럽다.

우리의 역사이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 대해 너무나 미안한 마음까지 들 정도다.

한국전쟁에 대해서 내가 이렇게 몰랐나? 우리의 역사 의식은 점점 퇴색해 가는 것일까?

아니면 나만의 무지일까? 무지겠지..쩝.

여하튼 책도 샀으니 심도 잇는 워게임을 해보자. 특히나 디시즌에서 만든 워게임 

잊혀진 전쟁:한국에 포함되어 있는 낙동강, 장진, 지평리 이 3가지의 시나리오는 한국전쟁사에서

UN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엄청난 피해와 전쟁의 방향을 바꿀마한 큰 전투를 다루는 워게임이다.

16페이지 안에 역사적 전쟁사를 다 다룰 수는 없지만, 간접적으로 전쟁의 고통과 당시의

부대를 이끄는 장군의 고뇌를 느껴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책소개

이 책이 속한 분야



혹독했던 한국전쟁의 진실과 강대국들의 속내를 치밀하게 파헤친 책

미국 역사에서 '잊혀진 전쟁' 혹은 '불쾌한 전쟁'으로 남아 있던 한국전쟁을 새롭게 조명한 책. 베트남전 보도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마지막 유작이다. 그는 뛰어난 조사력과 저널리즘 기술을 바탕으로, 우리 역사의 또 다른 어두운 구석이었던 한국전쟁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본문은 한국전쟁에서 중대한 요소로 작용했던 참혹했던 전투의 실제 현장을 생생하게 되살려내고, 그러한 상황이 있기까지 정책의 주요 결정권자들이 얽히고설키면서 만들어낸 사건들의 인과관계에 주목한다. 저자는 한국전쟁이 남북한 간에 벌어진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미국, 소련, 중국, 일본이라는 지정학적 관계와 냉전이라는 당시 국제정세 속에서 발발한 세계전쟁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시종일관 전쟁 당사자들의 정치적 결정과 판단 착오를 숙련된 글 솜씨로 풀어내며 정확하고도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또한, 저자는 한국전쟁 자체보다는 한국전쟁을 둘러싼 미국의 국내외 정치상황과 한국 땅에 와서 고군분투했던 미군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역사의 현장을 복원해내고 있다. 리얼한 전투 장면과 생사를 넘나드는 병사들의 이야기를 통해 핵심 전투의 실제 상황까지도 숨막힐 듯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양장본]

저자소개

저자 : 데이비드 핼버스탬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저널리스트이자 역사가 중 한 사람이다. 1934년 4월 10일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하버드 대학에서 수학했다. 대학 졸업 후 작은 일간지 기자로 일하다가 [내쉬빌 테네시안]에서 자리를 얻었다. 이후 [뉴욕 타임스] 재직 시절 베트남전의 진실을 밝히는 보도로 1964년에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핼버스탬은 민권운동을 취재한 기록인 [아이들], 베트남전을 다룬 최고의 베스트셀러 [최고의 인재], 스포츠 저널리즘을 다룬 [게임] 등 모두 21권의 베스트셀러를 집필했으며, 특히 [최고의 인재]를 통해 뉴저널리즘의 창시자이자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2007년 4월 23일, 핼버스탬은 [콜디스트 윈터]의 원고 탈고 후 닷새 만에 자동차사고로 사망했으며 이 책은 그의 마지막 유작으로 남았다.


목차

프롤로그 

제1부 운산에서 얻은 교훈 
제1장 중공군과의 첫 교전 

제2부 쓰라린 날들 
제2장 인민군 남하 
제3장 관심 밖의 나라 
제4장 김일성과 스탈린의 후원 
제5장 남한군의 전비태세 

제3부 미국의 참전 
제6장 워싱턴의 참전 결정 
제7장 아서 맥아더 
제8장 핑키 맥아더 
제9장 맥아더의 정치적 행보 
제10장 미군과 인민군의 전비태세 
제11장 월튼 워커와 에드워드 알몬드 

제4부 두 대륙 간의 정치 
제12장 미국 정세와 국방 예산 
제13장 딘 애치슨과 조지 케넌 
제14장 해리 트루먼 
제15장 중국 문제와 미국 정치 
제16장 중국 국공내전 
제17장 차이나로비 

제5부 북한이 던진 마지막 주사위 
제18장 낙동강방어선전투 

제6부 전세 역전 
제19장 맥아더와 인천상륙작전 
제20장 서울 진격과 원산상륙작전 
제21장 예고된 충돌 

제7부 38선을 넘어 북으로 
제22장 국무부에 불어온 변화의 바람 
제23장 중국의 경고 
제24장 마오쩌둥과 스탈린 
제25장 웨이크 섬 회담과 맥아더의 오만 
제26장 최종 진군 

제8부 중공군의 공격 
제27장 그림자 없는 유령 
제28장 폭풍 전야 
제29장 무너지는 전선 
제30장 덫 
제31장 시련의 길 
제32장 절망과 기적 
제33장 끔찍한 현실 
제34장 침묵하는 영웅들 
제35장 대혼란 
제36장 새로운 국면 
제37장 매튜 리지웨이와 전쟁의 전환점 

제9부 중공군과 싸우는 요령 
제38장 이름뿐인 서울 재탈환 
제39장 원주에 감도는 전운 
제40장 1차 쌍굴 전투 
제41장 2차 쌍굴 전투 
제42장 달라진 준비태세 
제43장 원주 전투 
제44장 지평리 전투와 지휘권 다툼 
제45장 크롬베즈기동부대 
제46장 맥기 언덕 
제47장 지평리와 원주 전투 이후 

제10부 장군과 대통령 
제48장 불붙는 갈등 
제49장 위태로운 파면 결정 
제50장 청문회로 옮겨간 전투 

제11부 전쟁의 결말 
제51장 쓸쓸한 퇴장 
제52장 승자 없는 전쟁 
제53장 그 후의 변화 

에필로그


출판사 서평

오늘날까지 우리 현대사의 블랙홀로 남아 있는 한국전쟁의 진실을 조명한 가장 탁월한 보고서 

미국 최고의 저널리스트이자 역사가 중 한 사람이며 뉴저널리즘의 창시자로 인정받는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마지막 유작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조사력과 저널리즘 기술을 바탕으로 우리 역사의 또 다른 어두운 구석이었던 한국전쟁을 새롭게 조명했다. 시종일관 전쟁 당사자들의 정치적 결정과 판단 착오를 숙련된 글 솜씨로 풀어내며 읽는 이에게 놀랍고도 정확한 시각을 제공한다. 압록강 근방에서 중공군이 대규모로 개입하고 그 결과 더글러스 맥아더와 연합군이 급작스럽게 패퇴했던 재난과도 같은 과정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나며,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해리 트루먼, 딘 애치슨, 김일성, 마오쩌둥, 더글러스 맥아더, 에드워드 알몬드, 매튜 리지웨이 등 전쟁의 주역들에 대한 놀랄 만큼 생생하고 미묘한 초상도 빠지지 않는다. 저자 핼버스탬은 이 책에서 자신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저널리즘적인 서술을 구사함으로써 핵심 전투의 실제 상황까지도 숨이 막힐 듯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이 책의 핵심부에는 최전선에서 공포를 이겨내고 용감히 적에 맞선 병사들의 개인사가 있다. 그들은 위대한 권력자들의 위험한 실수와 힘겨운 역사의 어젠다를 오직 맨몸으로 감당해야 했다. 우리는 이 책에서 한국전쟁 참전 병사들을 만나고, 그들의 눈을 통해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전투들을 목도하게 된다. 늘 그랬듯이 핼버스탬은 범상치 않은 짐을 짊어져야 하는 사람들의 범상치 않은 용기와 결단력에 관심을 가졌다. 

핼버스탬은 그의 마지막 저술이 된 『콜디스트 윈터』를 자신의 최고 저서이자 미국 전후 외교정책에 대한 45년 저술 인생의 정점으로 꼽았다. 『콜디스트 윈터』는 가장 문학적이고 빛나는 형태의 현대사이며, 베트남전과 근래 사건들의 핵심까지도 조망하고 있는 거작이다. 그는 30년도 더 전에 처음 이 책을 쓰기로 결심했고, 집필에만 거의 10년이라는 세월을 소요했다. 이 책은 퓰리처상 수상에 빛나는 가장 위대한 저널리스트이자 동시대의 주요 역사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핼버스탬 자신을 위한, 그리고 이 책이 낱낱이 기록하고 있는 용기 있는 병사들을 위한 변치 않는 증거로서 굳게 자리매김할 것이다. 

눈을 뗄 수 없는 사건의 전개와 다큐멘터리 영화를 방불케 하는 생생한 묘사 
이 책은 한국전쟁의 전후 과정을 상술한 여타 책과는 분명한 차이점을 드러낸다. 책은 일종의 궤도를 그리듯 전개된다. 다시 말해서 이 책만의 독특한 여정이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대로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독특하게도 저자는 1950년 10월 20일 미군 제1기병사단의 평양 입성과 그 이후 10월 25일 벌어졌던 중공군과의 첫 교전 그리고 연이은 운산에서의 패배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 책은 그저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면서 발생한 위급한 순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국전쟁에서 중대한 요소로 작용했던 참혹했던 전투의 실제 현장으로 독자들을 끌고 간 후, 다시 그러한 상황이 있기까지 정책의 주요 결정권자들이 얽히고설키면서 만들어낸 사건들의 인과관계에 주목하는 것이다. 동시에 관련 국가들의 당시 상황과 더불어 정치적 배경도 상당히 심도 있게 다룬다. 이 때문에 한국전쟁의 기승전결을 다룬 책들과 뚜렷하게 구별되며, 이러한 접근법 때문에 우리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인 순간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탁 트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한국전쟁을 둘러싼 각국의 정치상황과 주요 인물들을 분석하는 저자의 눈은 날카롭기 그지없으며, 그 과정에서 일어난 소규모 전투와 그 전투를 이겨냈던 병사 개개인에 대한 묘사에는 숨이 막혀올 정도이다. 

핼버스탬은 결정적인 판단 착오가 일어났던 한국전쟁 전의 한반도는 물론, 인민군의 공격이 정점을 이루던 1950년 8월의 낙동강방어선전투,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화려한 영광을 안겨준 1950년 9월의 인천상륙작전, 혹독했던 겨울 날씨 속에 치러진 1950년 11월의 처참했던 장진호 전투, 그리고 다시 미군이 전쟁의 주도권을 잡는 신호탄이 되었던 1951년 2월의 지평리 전투에 집중한다. 전투의 진행과 전개 과정에서는 핼버스탬의 트레이드마크인 저널리즘적 서술이 빛을 발휘한다. 그가 세세하게 묘사하는 참혹한 전장과 위급한 결정의 순간을 긴박하게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거대한 역사에 가려 미처 눈에 띄지 않았던 병사들 개개인을 만나게 된다.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10년이라는 세월을 소요했고 수백 명의 참전 용사들을 만나 그들을 인터뷰했다. 핼버스탬에게 인터뷰는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과였다. 사실 그의 모든 저서는 인터뷰 자료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그의 책을 펼치면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핵심을 파고들어 사건과 인물의 고리를 찾아내는 방대한 조사와 치밀한 추적 
더글러스 맥아더, 해리 트루먼, 딘 애치슨, 김일성, 마오쩌둥, 더글러스 맥아더, 에드워드 알몬드, 매튜 리지웨이 등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적 인물들도 이 책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면모를 보인다. 저자에 따르면 더글러스 맥아더는 철저하게 만들어진 인물이었으며 지독한 고집과 잘못된 상황 인식으로 똘똘 뭉친 독선적인 지휘관이었다. 저자는 그중에서 맥아더가 내렸던 가장 위험한 결정이자 오판은 미 8군의 지휘권을 둘로 나눈 것이라고 평가한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위험하고 험준하며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지형을 가진 한반도 북쪽으로 부대를 밀어 넣었다. 사실상 그는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각 부대의 약점이 더욱 부각되는 상황을 만들어냈고 그로 인해 더글러스 맥아더라는 사람의 비열한 인간성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맥아더는 상부에서 임명한 제8군 지휘관의 역할과 독립성을 줄이고 자기만 통제할 수 있는 독립된 시스템을 만들었다. 병력을 둘로 나누자 실제로 맥아더의 통제력은 한층 더 강화되었다. 맥아더는 사실 자신의 독립적인 지휘 시스템을 만드는 것 외에는 전장의 정보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12월 말 중공군의 본격적인 공격을 한 달 정도 앞둔 시점에도 맥아더는 중공군 총지휘관이 펑더화이가 아니라 린뱌오라고 착각했으며, 중공군이 국공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것도 대단치 않게 여겼다. 1949년 9월 마오쩌둥이 집권하기 한 달 전쯤에 맥아더는 의회에서 보낸 대표단에게 중국 공산당 군대는 "지나치게 과대평가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맥아더 자신은 인정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부대원들은 모두 맥아더의 과신이 큰 재앙을 낳았다고 인정했다. 육군 참모총장 조 콜린스의 증언에 따르면 안타깝게도 맥아더 본부는 중공군의 특성에 대해 도무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와 반대로 마오쩌둥의 판단에 따르면 맥아더의 성격은 중공군에게는 엄청난 성공 요인으로 작용했다. 

마오쩌둥은 맥아더가 "오만하고 고집이 세기로 유명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고 아주 흡족해했다고 한다. 오만한 적은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실제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무엇보다도 맥아더의 오만함을 뒷받침해주던 참모들이었다. 그들은 맥아더가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 저지르고 말았으며 그의 예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요소들은 최소화했다. 무선 통신 기자였던 클라크 리와 제2차 세계대전 내내 맥아더를 따라다니며 취재했던 전쟁 사진가 리처드 헨셀에 따르면 맥아더의 참모들은 맥아더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맥아더의 성격 중에서 최악의 요소들만 자극하여 극대화시킨 장본인들이었다. 

저자의 치밀한 조사에 따르면 그러한 맥아더의 성격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그의 내력은 부친인 아서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시작된다. 아서 맥아더는 남북전쟁에서 북군의 영웅적인 장교였으며 후에 필리핀 봉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서 맥아더 역시 조심성이 있거나 겸손한 인물은 아니었다. 불행히도 그는 항상 자신이 옳아야만 하는 인물이었다. 군사적인 전술뿐 아니라 중요한 정치적 판단도 오로지 자기 생각대로 결정했으며 주변 사람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의 보좌관이었던 이넉 크라우더 대령은 아서 맥아더를 두고 "그의 아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내가 본 가장 이기적인 인물이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더글러스 맥아더의 눈에 비친 아버지 아서 맥아더는 신화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신화는 아서 맥아더의 아내이자 더글러스의 모친인 핑키 맥아더가 치밀하게 계획하여 아들에게 끊임없이 주입했던 것이었다. 핑키 맥아더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야망과 기대에 미치지 못한 씁쓸했던 경력과 유별났던 자아도취가 함께 끝이 나자 아들의 경력 관리에 몰두했다. 

결국 더글러스 맥아더라는 인물은 어머니가 만든 셈이다. 핼버스탬은 맥아더가 "폭군 같은 어머니를 두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비롯한 역사상 그 어떤 인물보다도 마마보이였다. 의회 명예훈장을 받았고 적의 공격에 무모하리만큼 용감하게 맞섰지만 마마보이였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말한다. 사실 맥아더의 모친 핑키 맥아더는 아들의 경력을 이뤄낸 주요 설계자였으며, 정신의 틀을 만들고 때로는 맥아더의 위대한 재능을 덮어버리거나 반감시키기도 했던 독특한 자아도취를 창조해낸 인물이었다. 그녀 아래서 맥아더는 성공을 위해서라면 인간의 다른 자질 따위는 기꺼이 저버릴 수 있는 인물로 자랐다. 늘 완벽하거나 적어도 완벽해 보여야 한다고 배운 맥아더는 자신의 약점을 감추고 오류를 인정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이처럼 맥아더를 비롯한 모든 등장인물들의 성격적 특징에 대한 놀라울 정도로 치밀한 묘사는 이 책 전반을 통해 언급되며, 특히 한국전쟁 초반의 거듭된 판단 착오를 이해하는 데 주요한 키워드로 작용한다. 

오판에서 비롯한 전쟁의 포화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 7개 사단이 3주 안에 남한 땅 전체를 점령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침을 감행했다.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말에 따르면 "모든 전쟁은 어떤 식이든 일종의 계산 착오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양측 군대가 내린 모든 결정이 하나같이 잘못된 계산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에서 독특했다." 우선 1950년 1월 12일 워싱턴에서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미국의 아시아 방어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한다는 발언을 했고, 모스크바에서는 이를 한반도에서 어떠한 무력 도발이 있더라도 미국이 가만히 있을 거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미국의 중요 외교정책 결정자로서 자신의 연설 내용이 공산 진영의 판단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걸 감안하지 않은 크나큰 실수였다. 결국 소련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김일성에게 남한을 침략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런가 하면 김일성도 계산 착오를 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는 미국이 남한을 방어하려고 군대를 보낼 리 없다고 잘못 판단했다. 또 혁명가로서 자신의 인기만으로도 인민군이 남한에 입성하면 남한 농민들이 봉기할 거라고 착각했다. 한편 미국은 전쟁에 발을 디디면서 인민군의 저력을 무척 과소평가했다. 미군은 중공군의 경고 신호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 38선 이북으로 밀고 올라가는 무모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중공군이 참전하지 않을 거라고 큰소리치면서 압록강까지 적군을 추격한 일이었다. 그로 인해 더글러스 맥아더의 부대는 압록강 근처에서 아무런 지원 없이 처절하게 싸우다 패배하고 말았다. 그 결과 마오쩌둥은 자기 부대원들의 정치적 대의명분과 혁명 정신이 미군의 우수한 무기를 능가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마오쩌둥 역시 북쪽에서 거둔 승리의 기세를 몰아 다시 남쪽 끝까지 밀고 내려왔다가 큰코를 다치고 말았다. 한동안 원하는 것을 얻은 사람은 스탈린뿐인 것 같았지만 냉혹하고 계산에 밝았던 스탈린조차 몇 차례 계산 착오를 했다. 우선 애초에 미국이 이번 전쟁에 개입할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처음에는 소련과 가까운 지역에서 두 나라가 전쟁을 벌이는 것이 달갑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소련의 입장도 조금 복잡해졌다. 중국은 전쟁 초반에 몇 차례 심각한 고비를 맞았는데도 소련이 도와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앙금을 풀지 않았고, 그 결과 몇 년 후에 벌어진 중소분쟁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미국 그리고 한국전쟁 
인민군이 공격을 했을 당시 1950년 6월 25일 밤 브리핑에서 더글러스 맥아더는 아주 여유로웠다. 초기 보고 당시 그는 북한의 남침이 확정적인 사실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이 전투기를 요청했다면서 남한군이 이를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사기 진작 차원에서 몇 대 보낼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존 무초 주한 미국대사는 미국인 여성과 어린이들의 즉각적인 철수를 지시했지만 맥아더는 성급한 결정이라고 주장하면서 "서둘러야 할 이유가 없다."라고 밝혔다. 실제 상황과 맥아더 사령부의 상황 인식 사이의 간극은 너무나도 컸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남한 상황에 무관심한 맥아더의 태도는 사실 한국을 대하는 미국인들의 태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국은 정치 과정이나 정신적인 측면에서 미국과 전혀 관련이 없었다. 한국에 도착한 최초의 미군 지휘관 존 하지 장군은 한국인들이 일본 식민지 지배자들을 얼마나 싫어했는지, 그리고 일제 치하가 얼마나 잔혹했는지 등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일본 경찰력으로 질서를 유지할 정도였다. 1945년에 시작된 한국과 미국, 정확하게 말하면 남한과 미국의 동맹은 냉전의 산물이었다. 둘은 다분히 군사적인 관계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리 편안한 관계는 아니었다. 남한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비참했던 식민지 시대가 종결되자 또 다른 제국주의 세력인지도 모르는 새로운 강대국의 패권에 의해 분단된 현실이 불만스러웠다. 하나였던 한반도가 둘로 나뉜 것만으로도 통탄할 일인데 조국의 운명을 또다시 다른 나라의 결정에 맡겨야 할 판이었다. 결국 긴장과 오해로 가득 찬 관계가 시작된 셈이었다. 양국 관계의 상호 가치와 이해를 강화시키는 것은 냉전 체제뿐이었다. 그러므로 핼버스탬은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기꺼이 막아야 할 세계 공산화의 위협이 없었다면 미국이 한국에 신경 쓰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냉철하게 지적하기도 한다. 

한반도의 정세를 결정한 미국의 정치적 상황 
미국인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던 미국 내 정치상황의 해석과 그러한 정치적 판단이 한국전쟁에 끼친 영향과 결과를 퍼즐처럼 맞추어 읽는 것은 이 책이 가진 또 하나의 특징이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해리 트루먼이 제2차 세계대전 전에 힘든 시기를 보내며 실패를 거듭할 때 맥아더는 이미 국가적인 영웅이었다. 처음부터 트루먼은 자신의 영역 밖에 있는 지휘관이 못마땅했고, 그가 맥아더의 해임을 자주 고려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맥아더에게는 막강한 후원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해임하는 데 따르는 정치적 여파가 너무나 컸다. 한국전쟁 초기에 존 포스터 덜레스가 트루먼에게 지휘관 교체를 건의한 바 있지만 트루먼은 맥아더가 미국에서 너무 오랫동안 정치적인 행보를 이어왔기 때문에 손을 쓸 여지가 없다면서 그가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언급되고 있다고 말했다. 트루먼은 "맥아더를 영웅으로 만든 미국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오지 않고는 그를 해임시킬 수가 없네."라고 덧붙였다고 한다. 이는 군 통수권자가 싫어할 뿐 아니라 신뢰하지도 않고 무엇보다 정치적인 이유로 해임시키지도 못하는 장군이 멀리 떨어진 이국땅에서 전쟁을 앞두고 군대를 지휘하고 있다는 놀라운 고백이었다. 

둘의 입장 차이는 1950년 10월 중순에 있었던 웨이크 섬 회담에서는 그리 극명하게 드러나지 않았고, 이는 한반도에 또 다른 비극적 요소로 작용했다. 맥아더는 트루먼에게 "중국이나 소련이 개입할 확률이 어느 정도입니까?"라고 물었는데 맥아더는 "그럴 가능성은 거의 희박합니다."라고 대답했다. 트루먼 대통령이나 측근들 중 누구도 맥아더의 발언에 대한 세부 사항을 따져보려 하지 않았다. 만약 중국이 정말 전쟁에 개입하여 공군 부대의 포위망을 피해가기라도 한다면 그다음 상황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아무도 거론하지 않았다. 중간선거가 임박한 상황이라 다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서 비롯한 영광을 조금이라도 나눠 가지는 데만 관심이 쏠려 있었다. 

1950년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은 더글러스 맥아더의 마지막 성공작이었다. 해군 작전참모들과 합동참모들의 반대가 심했는데도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고 밀어붙인 결과였다. 대범하고 독창적인 데다 예상 밖의 행동을 서슴지 않고 일반적인 사고의 틀을 과감히 거부하는 맥아더의 장점에 행운이 따른 결과이기도 했다. 맥아더의 일대기를 집필한 제프리 페렛은 이렇게 썼다. "맥아더의 인생에서 군인으로서 천재성을 인정받은 날은 1950년 9월 15일 하루였다. 위대한 사령관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큰 업적을 이루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대개는 그때 총지휘관으로서 실력을 인정받아 당대 다른 지휘관들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오른다. 맥아더에게는 인천상륙작전이 바로 그런 기회였다." 「타임」지 종군기자로 활약했던 프랭크 기브니의 말을 빌리자면 "인천은 지금까지 미국이 맛본 승리 중에서 가장 값진 것이었다. 이로 인해 맥아더 장군은 완전히 신격화되었고 뒤이은 끔찍한 패배마저도 다 이해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후에 딘 애치슨은 맥아더를 '인천의 마법사'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맥아더는 트루먼 행정부에게는 단순히 군사적 반대 세력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경계해야 할 세력으로 성장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맥아더를 경계하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야말로 한국전쟁에서 가장 큰 비밀이었을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이후 미국 시민들을 포함한 모두가 더 큰 승리를 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대통령으로서는 정치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미 아시아 문제에 너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비판을 받는 와중에 인민군을 추격하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또 한 번 큰 정치적인 반발이 일어날 게 분명했다. 결국 1950년 9월 27일에 마침내 북으로 진격하여 38선을 넘으라는 공식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미군이 20세기에 범한 최대의 실수는 맥아더가 군대를 압록강까지 몰아붙인 거였다. 둘로 나뉜 그의 부대는 종종 위험할 정도로 연락망이 허술해지는데도 갈수록 열악해지는 날씨를 견디며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그동안 중공군은 높은 언덕 지대를 점령하여 미군이 후퇴하거나 달아날 수 있는 좁은 길을 모두 봉쇄할 준비를 마치고 미군이 올라오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혹독하기 짝이 없는 한국의 겨울 날씨를 견디며 전투를 벌이는 일이 없도록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한다며 인천이 공동 상륙 작전의 적임지라고 말했던 그가 이번에는 한반도를 넘어 겨울이 이미 시작된 만주 지역까지 군대를 보낸 것이다. 그 즉시 11월 2일~4일 함경남도 수동에서 제10군단 예하 해병부대가 거센 공격을 받아 44명이 전사하고 162명이 부상을 입었다. 중공군은 마치 미끼를 매달아 유인하는 것처럼 미군을 압박해 북쪽으로 더 깊이 들어오게 만드는 치밀하게 계산된 공격을 펼쳤다. 수동전투는 운산의 전황이 매우 심각하며 단순한 공격이 아니라 연계된 유인책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이때가 북진을 중단하고 뒤로 물러나 중국과의 확전을 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워싱턴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딘 애치슨은 훗날 "우리는 맥아더가 악몽을 실행하는 동안 마치 마비된 토끼처럼 그냥 앉아 있었다."라고 회고록에 기록했다. 

한국전쟁은 과연 무엇이었나 
전쟁사가 새뮤얼 마셜은 한국전쟁을 가리켜 "금세기에 일어난 소규모 전쟁 중 가장 혹독한 전쟁"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한반도의 산악 지형은 미군과 유엔군이 장갑차량 같은 우수한 전투 장비를 사용할 수 없게 만든 반면 적에게는 진지와 은신처를 마련해주었다. 이 때문에 전쟁이 끝나고 몇 년 후 딘 애치슨은 "세계 최고의 전략가들에게 저주받은 전쟁을 치르기에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최악의 장소를 물색해보라고 했다면 만장일치로 한국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미국 일각에서는 '원치 않은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제2보병사단 23연대 대대장이었던 조지 러셀 중령은 한국전쟁에서 최악의 상황은 "한국 그 자체"였다고 기록했다. 군수 산업과 군사 장비, 특히 전차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미군에게 한국 지형은 그야말로 최악의 조건이었다. 러셀 중령이 표현한 것처럼 미군의 눈에 비친 한국은 "모든 산이 다른 산들과 이어져 있었다." 

베트남전과 달리 한국전쟁은 미국이 텔레비전 뉴스의 출현과 함께 매스미디어 사회로 발전하기 전에 발발했다. 한국전쟁 당시 텔레비전 뉴스는 저녁마다 15분 정도 방영되었는데 방송 시간이 짧고 재미도 없었기 때문에 영향력이 거의 없었다. 당시 기술로는 한국에서 촬영한 전쟁 현장이 며칠이 지나서야 뉴욕의 뉴스 편집실에 도착했기에 국민들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도 못했다. 미국 국민들은 주로 신문에 난 흑백 기사를 통해 전쟁 소식을 접했고, 이 때문에 그들의 의식 속에 한국전쟁은 오래된 흑백사진으로 남아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한국전쟁에 직접 참전한 용사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미국인에게 한국은 역사적으로 블랙홀 같은 존재였다. 미군들은 자신들의 희생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할뿐더러 미국 국민들이 자신들이 참전했던 전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아 소외감을 느끼기도 했다. 실제로 일상 대화에서 한국전쟁에 관해 예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미국인들이 기꺼이 조국의 젊은 피를 한국 땅에서 흘리고자 했으며 정복자나 제국주의적인 포부를 안고 한국을 도와준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 책의 본문은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저작답게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폴 맥기 중위의 인터뷰에 관련된 일화를 마지막으로 끝이 난다. 맥기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은 누가 뭐라 해도 옳은 일이었다고 확신했다. 본인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고 지평리 전투처럼 최악의 상황까지 겪긴 했지만 한 번도 참전 자체를 후회한 적은 없었다. 그 후 5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생각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끄는 전쟁은 아니었기에 이제 한국전쟁을 기억하는 나라는 거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참전 용사인 자신과 전우들에게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다들 그곳에서 모진 고생을 하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인민군이 두 번 다시 남한을 넘보지 않았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미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은 정당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했다." 핼버스탬은 폴 맥기가 마치 지난 55년 동안 자신이 찾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린 사람 같았다고 전한다. 맥기는 어제 겪은 일을 떠올리듯 아주 생생하게 모든 것을 기억했으며, 자신의 힘겨웠던 전투를 세세하게 묘사해주었다. 핼버스탬은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저자로서 자신이 "할 일에 충실했고 그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7년 4월, 데이비드 핼버스탬이 자동차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언론은 일제히 미국이 "가장 훌륭하고 명석한 사람"을 잃었다고 보도했다. 그는 비록 없지만 이 책 『콜디스트 윈터』는 데이비드 핼버스탬과 그가 기록하고 있는 용기 있는 병사들을 위한 변치 않는 증거로서 굳게 자리매김할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북로그 리뷰 (2) 전체보기 쓰러가기

  • 다시 번역이 필요한 책 ra**ho67 | 2009-08-21 | 추천: 3 | 5점 만점에 2점
    한국전쟁을 전쟁의 정치적 배경과 현장에서 잘 설명한 책이다. 
    방대한 분량과 비록 미군 중심으로 기술을 했지만 상세하게 현장감 있는 설명이 있었다. 정치적으로도 맥아더와 트루만의 갈등 그리고 트루만, 맥아더, 팽덕회, 이승만, 김일성의 개인적인 배경이나 출신 취행 및 그것이 의사결정에 미치는 영향까지도 잘 설명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번역에 대해서는 정말 할말이 많다.  나로서는 번역자에게 영한사전이라도 하나 사주고 싶은 심정이다. 물론 군사용어에 대해서는 군대를 안 갔다 온 사람이라 그렇던지 그 분야의 문외한이어서 그럴 수 있다고 볼수 있겠다. 그러나 다음의 예는 어떨까? 
      
    Wind Chill: 번역: 풍속 온도지수, 실제: 체감온도.  그뿐이니다. 중공군이 폭격을 했다고 하지 않나 (실은 중공군은 포격을 한 것이다). Ridgway장군이 있지도 않았던 공군 (공군은 2차대전이후에 있었으며 그 양반은 82 공수부대 사단장이었다) 출신 이었다고 번역을 하고 내가 기억하는 곳만 10여곳이 넘는다. 그렇다고 이렇게 긴 책을 다시 영어로 읽자니 돈도 아깝다. (물론 원서가 다소 싼데 구하기가 조금 복잡하다). 
      
    그리고 편집에서도 난 왜 이런책을 항상 Hardcover로 나와서 책값을 비싸게 하는지 모르겠다. Paperback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번역자의 선정에 있어서도 수많은 메니아들이 거저라도 번역을 해줄텐데 보수를 적게주려고 했는지 너무도 초보에게 애벌번역을 시키고 그것을 교정없이 출판했다. 
      
    이건 책으로 출판하기에는 번역이 너무 나쁘다. 한국전쟁에 대해 충분한 사전지식이 없다면 읽고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클 것이다.    
      
    다만 한국전쟁 관련 도서가 오랜만에 나왔다는 것은 뜻깊은 일이고 그래서 별을 하나 추가했다. 닫기
  • 한국전쟁의 진실들... di**cat | 2009-06-14 | 추천: 0 | 5점 만점에 5점

    한국전쟁의 진실 
      
     벌써 60년이 되어간다. 나는 이 전쟁에 대한 특별한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나처럼 이 전쟁을 직접 겪지 않는 세대에게는 피부에 와닿지 않는 기억들이다. 학창시절, 교과서에 나오는 몇 줄의 문장과 해마다 이 맘때면 볼 수 있는 특집기사들이 전부가 아닐까? 
      
      이 책을 읽은 후, 주변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내가 알아왔던, 이 전쟁에 관한 의문점들에 대해서 질문을 던저 보았다.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나처럼 한국전쟁의 기본적인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한국전- 서울시철에 걸린 인공기 
         
      이 책은 퓰리쳐상을 수상한 최고의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유작이다. 저자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나 책들은 꽤 있지만, 한국전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자료는  흔하지 않다. 물론 국내저자의 책으로  박태균 교수의 '한국전쟁' 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박교수의 책은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한 국내의 상황과 시대상을 그리고 있다. 반면 핼버스템의 ' 더 콜디스트 윈터'는 국제적인 관점에서 한국전의 이념관계와 기록을 좀 더 자세하고 큰 스케일로 분석 표현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은 도박이었다. 
      
    이 작전의 성공이 한국전쟁의 최대 불운일 수도 있다. 이 작전은 도박이었다. 모두들 엄청난 행운이 따랐다고 말하고 있다. 
      
    해병대 선임장교 빅터 크루락이 그의 곁에서 병력과 군 장비를 육지로 옮기는 데 꼭 필요한 수륙양용장갑차 LVT가 하나둘 밖으로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크루락이 지나가는 말로 LVT가 정말 우수한 첨단 장비라고 말하자 알몬드는 이렇게 되물었다. “ 그럼 LVT는 물에 뜰 수도 있는 건가?” 크루락은 그날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 나는 즉시 그 말을 열 명도 넘는 사람에게 퍼뜨렸다. 세상에,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는 총책임자라는 사람이 LVT를 보고 저런 것도 물에 뜰 수 있냐고 묻다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책의 본문처럼, 이러한 책임자들이 지휘하는 전쟁이었고, 작전이었다. 무엇이 하나가 제대로 되어 있었겠는가? 아무것도 제대로 된 것은 없었다. 썩은 동앗줄에 우리의 운명을 맞겨두었다.    
     잭팟이라고 할까? 이것은 행운이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맥아더는 영웅이 되었다. 이로인해 그는 최고의 독재자로 변하고 있었다. 이 작전의 성공이 그를 더 힘있고 독선적인 영웅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에게는 내릴 수 있는 명령만 있을 뿐, 어떠한 말을 듣지도 , 들리지도 않았다. 
      
    당시 전장의 군인들은 맥아더를 ‘ 빅 에고 (Big Ego)'라고 불렀다. 당시 한국에 있던 군 세력을 둘로 나눈다면 전장에서 무조건 밀고 나가라는 잔인한 명령을 받은 장병들과 자신의 실수로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도쿄사령부 사람들로 구분할 수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맥아더의 적들 
    사실 맥아더는 우리가 알고있던 그 인물이 아니었다. 맥아더는 한반도보다 중국대륙에 더 관심을 보였다.  맥아더는  한반도에 침공한 중공군을 몰아내려는 의지도 없었다. 이러한 맥아더의 태도로 인해 한국전쟁은 필요 이상의 낭비와 무의미한 대가를 치루는 중이었다. 맥아더의 적은 중공군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를 꺽으려고 하는 미국대통령과 정권의 핵심들이었다.  애치슨과 대통령은 맥아더의 해임을 자주 고민했지만,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결국 이러한 싸움은 맥아더의 퇴진으로 끝이 난 듯 보였다. 
      
    ‘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라는 가사였습니다. 그 노래에 나오는 노병처럼 나는 이제 군 생활을 마무리하고 조용히 사라질까 합니다. 주어진 의무를 완수하고자 최선을 다했습니다. 신께서는 내게 주어진 의무를 확실히 볼 수 있도록 밝은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미국을 통틀어 겸손과는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 한 말 치고는 굉장히 겸손한 표현이었으나 사실 그는 전혀 사라질 의향이 없었다. 
      
    청문회를 끝으로 맥아더는 물러 났다. 아마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나에게 ' 노병은 죽지 않는다' 라는 맥아더의 말을 실체적인  의미를 모른체 그 문장만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맥아더는 항상 자신이 원하는 자기만의 이미지를 만들어 왔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이 좀 더 자연스럽고, 가공되지 않았다면 , 역사는 그를  훌륭한 영웅으로 남겨두었을 것이다. 
      
    리지웨이가 세운 주요 공격 작전이 막 시작될 무렵이면 갑자기 맥아더가 몇몇 측근을 이끌고 도쿄 본부에서 한반도로 날아와 관련 본부를 돌면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새로운 계획에 대한 언론의 찬사를 빼앗아갔다. 리지웨이 쪽으로 기울어지는 언론의 관심을 돌리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결국 욕심이라는 것에 맥아더는 지배당했다. 인천상륙작전이 끝나고 맥아더가 퇴임했더라면,  그는 역사에서 진정한 영웅으로 남아있을지도 모르겠다. 맥아더에게서의 가장 큰 적은 욕심이었다. 
       
               
    맥아더 와 애치슨            
      
    한국전 -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나?   
     1950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소련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양극주의 형태를 여지 없이 들어 냈으며, 이러한 이념의 대립은 자국의 실리와 개개인의 욕심으로 인해 변질된 모습, 그 자체였다.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이 전쟁에서 기억나는 것을 꼽으라면, 단연 인천상륙작전과 맥아더 장군이다. 나 또한 이러한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기억들은 무차별적으로 깨지기 시작하였다. 내가 생각했던 맥아더 장군의 이미지는 "어떻게 한국에서 몇년 간 전쟁을 수행하면서 전장에서 하룻밤도 머물지 않았던  사실들 " , " 전략과 전술보다는 언론 플레이에 더 관심을 가졌던 부분등 .." 
        
    한편,  1950년 1월 , 미국의 국무장관인 에치슨은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미국의 아시아 방어선을 알류샨열도- 일본- 오키나와 - 필리핀으로 연결하는 에치슨라인을 발표했고, 이 발표는 모스코바로 하여금 한반도의 무력 도발을 묵인한다는 미국의 의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북한군은 같은 해 6월 25일을 기점으로 전쟁을 시작되었다. 이러한 전쟁으로 인해 애치슨은 공화당의 비난을 받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정치적인 활용면에서는 성공적이었다. 
      
    전쟁은 한반도에 일어났지만, 미국의 정치인들은 매우 바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전 미국의 국방부 예산은 130억 달러였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예산은 무려 550억 달러가 되었다. 이런 사실에 대해 전쟁이 끝난 후, 애치슨은 프린스턴 대학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서 그 순간을 회고 했다. “ 사실 한국이 우리를 살린 겁니다.” 
      
     마지막의 '한국이 우리를 살린 겁니다.' 라는 문장을 읽는 순간 , 나는 정상적인 책읽기를 할 수가 없었다. 이 땅의 젊은 목숨들이  담보가 되어, 바다 건너에 있는 나라의 정치가들을 살려준 셈인가? 
      
     힘이 없던 60년 전, 우리는 미국의 군인에게   미래와  현실을 맞겨 두었고, 그들에 의해  운명 또한 예측할 수 없었다.  이 또한  우리의 뜻이 아닌, 그들의 실리와 목표에 맞게 수정되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었고, 현실이 되었다. 
      
     이 책은 한국전쟁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어쩌면 종군기자로써 전쟁에 참가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생생하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사실에 바탕을 두고 , 객관적인 관점으로  기술하였다는 점이 이 책의 가치를  높게 만든다.  작가 이전에 저널리스트와 역사가로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한국인으로써 너무나 한국전쟁에 대해서 몰랐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이 책을 통해 좀 더 많은 사실을 정확히 알게 해 준 , 고인이 된 작가에게  감사를 하고 싶다.   


이 게임은 3가지의 시나리오를 담고 있는데, 지령리 전투, 낙동강 전투, 장진호 전투, 

이렇게 시뮬레이션을 해 볼 수 있다. 그중에 박스 표지에 있는 그림은

장진호 전투에 대한 내용이였던 것이다.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대가 밀려오는 중공군에 

맞서 싸우며 흥남까지 후퇴하게 된 전투이다. 덕분에 많은 민간인과 

군인들이 후퇴를 할 수 있었는데, 바로 1.4후퇴인 것이다.

<게임 박스 표지>

2010년 캠프 펜들터 미 해병대기지에서 열린 장진호전투 기념비 제막식 모습

기념비에 보면 게임의 박스 표지가 보일 것이다.

바로 이것이 포가튼 워: 코리아의 표지 박스 그림의 원본인 것이다.



현충일이 6월 6일인 이유는?

 

 

  6월 6일, 오늘은 현충일입니다. 현충일은 애국선열과 국군장병들의 충절(忠節)을 추모하기 위해 국가가 정한 공휴일로 국권회복을 위하여 피를 흘리며 국가를 지키기 위해 싸워 한 송이 꽃이 되어 하늘나라로 가신 고귀한 분들의 정신을 위하여 희생한 전몰 호국 용사들의 숭고한 애국 애족정신을 기리고 명복을 기원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올해는 전 국민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천안함 사태 이후 맞는 현충일이라 더욱 의미 있고 가슴 깊이 새겨야 할 현충일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현충일이 6월 6일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9살 난 저의 동생에게 물어 봤더니, "6.25전쟁과 관련 있지 않을까?"라고 답을 했습니다. 물론 그러한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현충일의 날짜 제정에는 이 현명한 답변 보다 더 깊은 역사적 이유가 있습니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역사적 풍습]

 

 

 

적에는 이 시기가 보리 베기와 모내기에 적당한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조상들은 이 시기에 보리를 수확케 해 준 것에 대한 감사와 모내기를 한 벼들이 풍년이 들게 해주기를 기원하는 감사와 기원의 제사를 지내는 풍습을 가졌습니다.

 

  또한 예로부터 24절기 중 이 없다는 청명일과 한식일에는 사초와 성묘를 하고, 고려 현종 5년 조정에서 6월6일 장병의 뼈를 집으로 봉송하여 제사를 지내게 했다는 기록에 남아 있는 바와 같이 망종(芒種)에는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란? : 날 수를 따라 동서남북 네 방위를 돌아다니며 사람의 활동을 방해한다는 귀신을 말하며 이것이 없는 날을 이삿날 등으로 선정합니다.

 

*[청명일]과 [한식일]이란? : 4월 5일을 전후한 시기로 한식은 청명의 다음날입니다. 청명일에는 조상의 묘소를 찾아 무덤과 주변의 잔디를 살피고 훼손된 것을 손질하며, 한식일에는 묘소를 찾아 성묘를 합니다.

 

*[망종(芒種)]이란? : 망종이란 까락 곡식(까끄라기가 있는 곡식 : 보리, 벼 등)의 종자를 뿌려야 할 적당한 시기인 24절기의 하나로 태양 황경(黃經)이 75°에 달한 날, 즉 6월 5일, 6일 또는 7일이 됩니다.

  

 

 

 또한 6월은 많은 장병들이 호국의 수호신으로 산화한 6·25 전쟁이 발발한 달입니다. 현충일이 처음으로 제정된 1956년에도 6월 6일은 망종일이었는데, 당시에는 6.25 전몰군경을 추모하는 날로 인식되어 왔으나 1991년 행사부터 모든 순국선열 및 호국 영령을 추모하는 개념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충원 사진 공모전 금상 수상作 [강태수 - 애절]

 

 

 

  이 번 현충일이 일요일이라며 하루 더 쉬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워 할 것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 희생하신 고귀한 생명의 넋을 추모하며 가슴 깊이 감사를 되새길 수 있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대한민국의 그 날을 잊지 맙시다.


자료출처: http://mpva.tistory.com/297




이번에 구입한 게티스버그의 총

독특한 시스템에 이끌려 구입을 하게 되었다. 전투가 상당히 전술적인 느낌이 

강하던데..실제로 해보면 어떨지 상당히 궁금하다. 역시나 나무 조각에 스티커를

붙여야 하는 귀차니즘이 있지만, 뭐 해보니 금방 붙이긴 했다. 

그러나 같이 들어 있는 카운터 홀더가 두개가 있는 딱! 붙어 있더라는..

동영상 찍을 때는 한손이라 잘 안떨어 지나 보다~~~했는데, 그게 아니였던...

두개를 분리 하느라 꽤나 애먹었고, 극기야 흠집까지 났다. 크게 난건 아니지만

은근 눈에 가시같다. 에효... 좀 말리고 포장좀 하시지...쩝! 


경기병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경기병(Light Cavalry)은 경무장 및 경갑한 말탄 병사들을 가리키며 중무장한 기수들인 중기병과 반대의 의미와 용도를 가진 기병이다. 경기병의 사명은 보통 정찰, 소전투, 습격으로 중요하게는 연락으로 주로 창, 검, 활이나 훗날에 등장할 마상총으로 무장하였다. 경기병은 그리스와 로마제국에 의해 드물게 사용되었으나 중아시아의 유목민족과 그의 군대에서는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훈족투르크족몽골인그리고 헝가리인들은 경기병과 기마궁수들로 훈련되었다. 유럽에서의 봉건제도와 기사도의 쇠퇴로 하여 경기병은 유럽 대륙국가들의 군대에서도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들 중 많은 수는 이전시기에는 활을 사용하였다면 그 당시에는 화기로 무장하였다.

역사적 이용[편집]

경기병과 중기병의 분류는 기병이 등장한 이래 적과의 백병전을 위해 중갑옷으로 무장한 중기병이 출현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초의 중장기병이 아케메네스 왕조 시기에 출현하면서 처음으로 경기병과 중기병의 분류가 나타났고,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헤타이로이를 통해 중기병의 목적을 충격력을 통한 적진 돌파로 확립함으로서 경기병과 중기병의 존재 목적이 확연하게 갈라지기 시작한다.

로마-게르만 전쟁시기 군대들은 경기병을 순찰대나 무장한 정찰로, 특히 지역전투때 최전방 공격수로 사용하였다. 포에니 전쟁시기 카르타고군이 로마군보다 우수한 이유의 하나는 누미디아경기병의 광범위한 사용에 있었다. 부분적으로나마 이런 사실 때문에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2차 포에니 전쟁시기 튀니지를 침공하기전에 시칠리에서 그 자신의 기병들을 모집하였다.

전략, 전술적 이용[편집]

경기병은 대규모 전면전보다는 소규모 접전이나 약탈전, 정보전에 특화된 기병이었다. 이들은 전투를 직접 실행하기보다는 전투 이전 적의 마을 등을 공격해 약탈하여 경제적 손실을 야기하거나 적을 정찰하고, 전투 시에는 적을 유인하거나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는 것이 그 용도였다. 이러한 특성에서 나아가, 경기병의 용도는 시대적, 경제적 배경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사용될 수 있었으며 몽골을 비롯한 유목국가의 경기병대는 전면전에서도 다양한 활약을 할 수 있었으며, 후사르나 울란과 같은 경기병들은 일반적인 경기병과 달리 돌격을 통한 충격력의 확보가 목적이 되기도 했다.

특성[편집]

경기병 부대는 비교적 경장의 무장과 작고 빠른 말을 장비로 삼았으며 본 목적이 약탈과 패주하는 적의 추격, 살육 등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부대와는 다른 특성을 띄게 되었다. 이들은 주로 중기병에 비해 하층민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전면전이 아닌 약탈전이나 소규모 접전에 특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체로 거칠고 난폭한 병사들이 주를 이루기 쉬웠으며, 뚜렷한 대열이 필요하지 않은 특성상 나타나는 자유로운 규율 때문에 제멋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용병으로 고용된 경기병대의 경우, 백산 전투 당시 신교도 측에 고용되었던 트란실바니아 경기병대 처럼 고용주 측 지휘관의 명령을 듣지 않고 전황이나 개인적 이익에 따라 제멋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아 전투에서의 패배를 야기하기도 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경기병대의 원활한 사용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으며, 이들이 전면전에 적합하지 않은 다른 이유이기도 했다. 이러한 특성은 경기병을 주력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유목국가나 민족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으며, 국민개병제를 통한 체계적인 병력 수급 체계가 잡히기 이전까지 경기병의 용도는 부수적인 목적에 머물렀다.

중세기[편집]

중세기에 들어와서야 여러가지 유형의 경기병들이 발달하였다.



중기병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오스만 제국의 맘루크 중기병

중기병(重機兵, Heavy Cavalry)은 적부대와 서로 맞붇어 싸우는 기병의 한 종류로, 일명 충격기병이라고 한다. 이들의 장비는 지역과 역사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크고 든든한 말과 함께 사슬갑옷찰갑옷, 쇠사줄로 엮어 만든 갑옷 또는 금속박판을 엮어서 만든 갑옷과 검, 곤봉 또는 창을 들고 있다.

그리스[편집]

3,000년 전에 이미 메소포타미아에서 여러 가지 종류의 기병이 쓰였지만 전차가 당시 군대에서 큰 병력과 함께 달리면서 공격할 수 있는 병력으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기원전 600년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갑옷을 입은 기병이 출현하기 시작하였지만 실지로 진짜 중장기병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갑옷 입은 기병을 보통 보호되었다 또는 갑옷 입었다고 하였다. 로마인들에게 쓰이기 시작하여 유럽에서 중세기에 이르기까지 보통 중장기병은 갑옷 입은 기병으로 불렸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기병들과 함께 중장기병은 그리스 도시국가들 간의 전쟁까지 중앙그리스의 산줄기와 (고대그리스의)중무장보병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전투 때문에 그리 큰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그와는 반대로 북그리스의 넓고 평평한 초원지대에서 중무장기병은 매우 효율적이었다. 결과적으로 페르시아기병과 싸우는 과정에 그리스는 대체로 말을 유지할 수 있는 상류계급시민들로 꾸려진 자기대로의 기병인 Hippeis를 건설하였다.

한편 기병이 그리스전쟁에서 더욱더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 역할은 그저 척후, 소전투, 추격 같은 데 머물러 있었다. 크고 든든한 말들과 함께 말안장의 발전은 필리포스 2세통치시대 때 발전한 마케도니아 정예기병인 헤타이로이기병 발전에로 이끌었다. 이 기병은 후날 필리포스 2세의 아들인 알렉산더 대왕에 통해 큰 역할을 맡게 되었는데, 주로 적 측면에서 기병돌격을 사용하는 데 쓰였다.

그것의 역할과 장비에서 헤타이로이기병은 첫 번째 진짜 중장기병으로 인정되었다. 헤타이로이기병은 마케도니아군대의 정예부대였으며 고대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기병이었다. 마케도니아제국의 영향으로 생겨난 디아도코이에서는 여전히 이 중기병을 그들 자신의 군대에서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다.

페르시아[편집]

고대 이란의 파르티아 제국은 전쟁에서 갑옷입은 기병의 사용에서 첫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이름을 날렸고 중갑한 사슬갑옷을 입은 기병의 전통이 자라났다고 믿고 있다. 이들은 보통 중기병보다 완전히 역할이 다른 중장기병이었는데 검든 보병대형을 한쪽으로 몰아놓거나 두 가지 기능을 가진 즉 말탄 궁수나 사슬갑옷 입은 기병으로 다시 말하여 정예 습격부대였다.

사르마티아[편집]

5세기까지 사르마티아기병은 브리타니아 주둔 로마기병의 한 부분으로서 민족 대이동시기에 유럽에 로마 중장기병의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로마제국[편집]

사슬갑옷 입은 중장기병의 뿌리는 스텝지대에서 사는 유목민들속에서 나왔다. 그들의 갑옷기병의 전통은 당시 한심한 생활에서 살던 고대근동인들에게 전달되었다. 서그리스가 먼저 페르샤전쟁에서 이 강력한 중장기병과 맞다들었다. 로마인들은 이 그리스에서 기병에 대한 전술을 이어받고 그 결과로 당시 서유럽의 기사에 만족하였던 그들에게 중장기병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게 하였다.

비잔티움 제국[편집]

비잔티움제국기병은 당시 그들의 전성기때 매우 두려운 부대로서 이름을 떨쳤다. 니케포르스 2세는 10세기 비잔티움제국의 유능한 장군출신의 황제로서 그의 중장기병을 군대의 핵으로 여겼으며 말탄 궁수와 중장기병을 두대로 무어 중장기병은 적이 무너질 때까지 말탄 궁수의 지원밑에 계속공격게 하는 즉 ‘오래견디게 하는 전법’을 구사하였다.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비잔티움기병은 로마기병이나 사산왕조의 기병처럼 완전무장을 갖추지 못하였다. 10세기 비잔티움제국 중기병은 대체로 중산층 농민들로부터 나왔으며 그 후 제국의 정규군으로 자라났다.

아직까지 어느 시기에 사슬갑옷기병이 마지막 종말을 보았는지는 명백치 않으나 결국은 사슬갑옷 기병과 기사는 중세기기병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중 중기사(heavy knight)만이 살아남아 오늘까지도 전해져 오고 있다.

기사[편집]

중세기초기에는 기사의 지위가 현저하게 막연하였다. 봉건시기에 대체로 이 기사라는 것은 전문 싸움을 하는 사람으로서 존재하였다. 그들을 대체로 빈농층과 같은 가난한 사람들로 무어지였다. 그러나 차츰 시대가 지나면서 이 전문 싸움을 하는 사람들은 후기 카롤링거 왕조시대에서 매우 현저하게 나타났으며 점차 땅을 사고 상속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해졌다. 결국은 말을 타고 싸우는 것은 정예무사제도와 동등하게 되었다. 12세기로부터 기사라는 이름은 보통 기병과 귀족으로 평가되었고 고대시기에 이름을 떨친 그리스 기병대와 거의 똑같게 되었다. 기사의 장비비용과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더는 단순한 중세기상태로는 유지하기 힘들어 지자 봉건제도에게는 왕에게 복무하는 기사의 충실성을 안전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나섰다. 기사도는 곧 유전적인 칭호였고 보통적으로 아버지로부터 그 맏아들에게 상속되었다. 모든 앞으로 기사로 될만한 기사들은 유년시절부터 기사도의 엄격한 전통밑에 전쟁과 같이 훈련하였다.

아프리카와 아시아[편집]

맘루크 기병, 1810년

을 쏘며 달리는 몽골 경기병(케식)은 1260년에 바이바르스가 이끄는 이집트 맘루크 중장기병이 그들을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격파하기 전까지 아시아와 동유럽에서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강력한 기병이었다. 무슬림군대는 사하라 등 아프리카 일대를 중장기병의 위력으로 진출하였으며 중세 유럽의 기사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중국에서 중장기병은 벌써 나라 시기에 군대의 한 개 단위로 되었다. 사람과 말이 다같이 금속으로 완전무장한 갑옷한 중갑기병은 이미 기원 4세기부터 쓰이기 시작하였으며, 남북조시대에 이르러서는 대다수 북쪽 왕조가 유목민족들이 세운 나라였던만큼 왕조의 기본 편제의 부대로서 활동하였다.나라시기에 경기병과 보병의 역할이 높아지고 중기병은 드물게 이용되곤 하였지만 나라시기에 다시 중기병이 그의 적이었던 서하, 그리고 몽골을 상대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한반도의 삼국시대에도 고구려가야에 개마무사(鎧馬武士)라고 불리는 강력한 중장기병이 존재했다. 이들는 온 몸에 총 70kg에 달하는 중장비로 무장하였다. 유목민족의 후예로 일찍부터 기마병을 운용했던 고구려로써는 주변에 산재하여 자신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또다른 유목민족들의 경기병에 대한 효과적인 대비책으로, 영토였던 요동지역에서 생산되었던 많은 양의 우수한 철을 바탕으로 자연적으로 중장기병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경우, 서양이나 가야의 개마무사와는 다르게 가죽갑옷 위에 사각모양의 철조각을 연달아 덧씌운 판갑을 써서 어느 정도의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었고, 말 역시 판갑으로 된 덮개를 씌워 돌격시 적의 화살이나 투석에 의한 부상을 막아주었다. 무기로는 대개 장창 혹은 화극으로 주된 무장을 하고 보조무장으로 환두대도와 단검, 그리고 던지는 용도로 수리검 등으로 알려진 형태의 작은 단검 등을 소지하였으며 유목민족의 후예였던만큼 말 위에서 사용하기 위해 단궁이라는 개조된 활도 썼다. 이 개마무사는 광개토왕의 대외팽창정책의 주력이 되어 강력하고 거대한 제국의 건설을 가능하게 하였다. 신라에서도 5세기 중반부터 고구려가 신라를 침입했던 왜구를 대신 물리쳤던 일을 계기로 비슷한 기병을 운용하게 되었다. 또한, 가야 역시 개마무사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고구려와 달리 판갑이 아닌 철갑을 써서 기동성과 유연성이 몹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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