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병
경기병(Light Cavalry)은 경무장 및 경갑한 말탄 병사들을 가리키며 중무장한 기수들인 중기병과 반대의 의미와 용도를 가진 기병이다. 경기병의 사명은 보통 정찰, 소전투, 습격으로 중요하게는 연락으로 주로 창, 검, 활이나 훗날에 등장할 마상총으로 무장하였다. 경기병은 그리스와 로마제국에 의해 드물게 사용되었으나 중아시아의 유목민족과 그의 군대에서는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훈족, 투르크족, 몽골인그리고 헝가리인들은 경기병과 기마궁수들로 훈련되었다. 유럽에서의 봉건제도와 기사도의 쇠퇴로 하여 경기병은 유럽 대륙국가들의 군대에서도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들 중 많은 수는 이전시기에는 활을 사용하였다면 그 당시에는 화기로 무장하였다.
역사적 이용[편집]
경기병과 중기병의 분류는 기병이 등장한 이래 적과의 백병전을 위해 중갑옷으로 무장한 중기병이 출현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초의 중장기병이 아케메네스 왕조 시기에 출현하면서 처음으로 경기병과 중기병의 분류가 나타났고,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헤타이로이를 통해 중기병의 목적을 충격력을 통한 적진 돌파로 확립함으로서 경기병과 중기병의 존재 목적이 확연하게 갈라지기 시작한다.
로마-게르만 전쟁시기 군대들은 경기병을 순찰대나 무장한 정찰로, 특히 지역전투때 최전방 공격수로 사용하였다. 포에니 전쟁시기 카르타고군이 로마군보다 우수한 이유의 하나는 누미디아경기병의 광범위한 사용에 있었다. 부분적으로나마 이런 사실 때문에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2차 포에니 전쟁시기 튀니지를 침공하기전에 시칠리에서 그 자신의 기병들을 모집하였다.
전략, 전술적 이용[편집]
경기병은 대규모 전면전보다는 소규모 접전이나 약탈전, 정보전에 특화된 기병이었다. 이들은 전투를 직접 실행하기보다는 전투 이전 적의 마을 등을 공격해 약탈하여 경제적 손실을 야기하거나 적을 정찰하고, 전투 시에는 적을 유인하거나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는 것이 그 용도였다. 이러한 특성에서 나아가, 경기병의 용도는 시대적, 경제적 배경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사용될 수 있었으며 몽골을 비롯한 유목국가의 경기병대는 전면전에서도 다양한 활약을 할 수 있었으며, 후사르나 울란과 같은 경기병들은 일반적인 경기병과 달리 돌격을 통한 충격력의 확보가 목적이 되기도 했다.
특성[편집]
경기병 부대는 비교적 경장의 무장과 작고 빠른 말을 장비로 삼았으며 본 목적이 약탈과 패주하는 적의 추격, 살육 등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부대와는 다른 특성을 띄게 되었다. 이들은 주로 중기병에 비해 하층민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전면전이 아닌 약탈전이나 소규모 접전에 특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체로 거칠고 난폭한 병사들이 주를 이루기 쉬웠으며, 뚜렷한 대열이 필요하지 않은 특성상 나타나는 자유로운 규율 때문에 제멋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용병으로 고용된 경기병대의 경우, 백산 전투 당시 신교도 측에 고용되었던 트란실바니아 경기병대 처럼 고용주 측 지휘관의 명령을 듣지 않고 전황이나 개인적 이익에 따라 제멋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아 전투에서의 패배를 야기하기도 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경기병대의 원활한 사용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으며, 이들이 전면전에 적합하지 않은 다른 이유이기도 했다. 이러한 특성은 경기병을 주력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유목국가나 민족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으며, 국민개병제를 통한 체계적인 병력 수급 체계가 잡히기 이전까지 경기병의 용도는 부수적인 목적에 머물렀다.
중세기[편집]
중세기에 들어와서야 여러가지 유형의 경기병들이 발달하였다.
중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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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병(重機兵, Heavy Cavalry)은 적부대와 서로 맞붇어 싸우는 기병의 한 종류로, 일명 충격기병이라고 한다. 이들의 장비는 지역과 역사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크고 든든한 말과 함께 사슬갑옷, 찰갑옷, 쇠사줄로 엮어 만든 갑옷 또는 금속박판을 엮어서 만든 갑옷과 검, 곤봉 또는 창을 들고 있다.
그리스[편집]
3,000년 전에 이미 메소포타미아에서 여러 가지 종류의 기병이 쓰였지만 전차가 당시 군대에서 큰 병력과 함께 달리면서 공격할 수 있는 병력으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기원전 600년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갑옷을 입은 기병이 출현하기 시작하였지만 실지로 진짜 중장기병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갑옷 입은 기병을 보통 보호되었다 또는 갑옷 입었다고 하였다. 로마인들에게 쓰이기 시작하여 유럽에서 중세기에 이르기까지 보통 중장기병은 갑옷 입은 기병으로 불렸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기병들과 함께 중장기병은 그리스 도시국가들 간의 전쟁까지 중앙그리스의 산줄기와 (고대그리스의)중무장보병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전투 때문에 그리 큰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그와는 반대로 북그리스의 넓고 평평한 초원지대에서 중무장기병은 매우 효율적이었다. 결과적으로 페르시아기병과 싸우는 과정에 그리스는 대체로 말을 유지할 수 있는 상류계급시민들로 꾸려진 자기대로의 기병인 Hippeis를 건설하였다.
한편 기병이 그리스전쟁에서 더욱더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 역할은 그저 척후, 소전투, 추격 같은 데 머물러 있었다. 크고 든든한 말들과 함께 말안장의 발전은 필리포스 2세통치시대 때 발전한 마케도니아 정예기병인 헤타이로이기병 발전에로 이끌었다. 이 기병은 후날 필리포스 2세의 아들인 알렉산더 대왕에 통해 큰 역할을 맡게 되었는데, 주로 적 측면에서 기병돌격을 사용하는 데 쓰였다.
그것의 역할과 장비에서 헤타이로이기병은 첫 번째 진짜 중장기병으로 인정되었다. 헤타이로이기병은 마케도니아군대의 정예부대였으며 고대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기병이었다. 마케도니아제국의 영향으로 생겨난 디아도코이에서는 여전히 이 중기병을 그들 자신의 군대에서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다.
페르시아[편집]
고대 이란의 파르티아 제국은 전쟁에서 갑옷입은 기병의 사용에서 첫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이름을 날렸고 중갑한 사슬갑옷을 입은 기병의 전통이 자라났다고 믿고 있다. 이들은 보통 중기병보다 완전히 역할이 다른 중장기병이었는데 검든 보병대형을 한쪽으로 몰아놓거나 두 가지 기능을 가진 즉 말탄 궁수나 사슬갑옷 입은 기병으로 다시 말하여 정예 습격부대였다.
사르마티아[편집]
5세기까지 사르마티아기병은 브리타니아 주둔 로마기병의 한 부분으로서 민족 대이동시기에 유럽에 로마 중장기병의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로마제국[편집]
사슬갑옷 입은 중장기병의 뿌리는 스텝지대에서 사는 유목민들속에서 나왔다. 그들의 갑옷기병의 전통은 당시 한심한 생활에서 살던 고대근동인들에게 전달되었다. 서그리스가 먼저 페르샤전쟁에서 이 강력한 중장기병과 맞다들었다. 로마인들은 이 그리스에서 기병에 대한 전술을 이어받고 그 결과로 당시 서유럽의 기사에 만족하였던 그들에게 중장기병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게 하였다.
비잔티움 제국[편집]
비잔티움제국기병은 당시 그들의 전성기때 매우 두려운 부대로서 이름을 떨쳤다. 니케포르스 2세는 10세기 비잔티움제국의 유능한 장군출신의 황제로서 그의 중장기병을 군대의 핵으로 여겼으며 말탄 궁수와 중장기병을 두대로 무어 중장기병은 적이 무너질 때까지 말탄 궁수의 지원밑에 계속공격게 하는 즉 ‘오래견디게 하는 전법’을 구사하였다.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비잔티움기병은 로마기병이나 사산왕조의 기병처럼 완전무장을 갖추지 못하였다. 10세기 비잔티움제국 중기병은 대체로 중산층 농민들로부터 나왔으며 그 후 제국의 정규군으로 자라났다.
아직까지 어느 시기에 사슬갑옷기병이 마지막 종말을 보았는지는 명백치 않으나 결국은 사슬갑옷 기병과 기사는 중세기기병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중 중기사(heavy knight)만이 살아남아 오늘까지도 전해져 오고 있다.
기사[편집]
중세기초기에는 기사의 지위가 현저하게 막연하였다. 봉건시기에 대체로 이 기사라는 것은 전문 싸움을 하는 사람으로서 존재하였다. 그들을 대체로 빈농층과 같은 가난한 사람들로 무어지였다. 그러나 차츰 시대가 지나면서 이 전문 싸움을 하는 사람들은 후기 카롤링거 왕조시대에서 매우 현저하게 나타났으며 점차 땅을 사고 상속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해졌다. 결국은 말을 타고 싸우는 것은 정예무사제도와 동등하게 되었다. 12세기로부터 기사라는 이름은 보통 기병과 귀족으로 평가되었고 고대시기에 이름을 떨친 그리스 기병대와 거의 똑같게 되었다. 기사의 장비비용과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더는 단순한 중세기상태로는 유지하기 힘들어 지자 봉건제도에게는 왕에게 복무하는 기사의 충실성을 안전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나섰다. 기사도는 곧 유전적인 칭호였고 보통적으로 아버지로부터 그 맏아들에게 상속되었다. 모든 앞으로 기사로 될만한 기사들은 유년시절부터 기사도의 엄격한 전통밑에 전쟁과 같이 훈련하였다.
아프리카와 아시아[편집]
활을 쏘며 달리는 몽골 경기병(케식)은 1260년에 바이바르스가 이끄는 이집트 맘루크 중장기병이 그들을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격파하기 전까지 아시아와 동유럽에서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강력한 기병이었다. 무슬림군대는 사하라 등 아프리카 일대를 중장기병의 위력으로 진출하였으며 중세 유럽의 기사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중국에서 중장기병은 벌써 진, 한나라 시기에 군대의 한 개 단위로 되었다. 사람과 말이 다같이 금속으로 완전무장한 갑옷한 중갑기병은 이미 기원 4세기부터 쓰이기 시작하였으며, 남북조시대에 이르러서는 대다수 북쪽 왕조가 유목민족들이 세운 나라였던만큼 왕조의 기본 편제의 부대로서 활동하였다.당나라시기에 경기병과 보병의 역할이 높아지고 중기병은 드물게 이용되곤 하였지만 송나라시기에 다시 중기병이 그의 적이었던 요, 금, 서하, 그리고 몽골을 상대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한반도의 삼국시대에도 고구려, 가야에 개마무사(鎧馬武士)라고 불리는 강력한 중장기병이 존재했다. 이들는 온 몸에 총 70kg에 달하는 중장비로 무장하였다. 유목민족의 후예로 일찍부터 기마병을 운용했던 고구려로써는 주변에 산재하여 자신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또다른 유목민족들의 경기병에 대한 효과적인 대비책으로, 영토였던 요동지역에서 생산되었던 많은 양의 우수한 철을 바탕으로 자연적으로 중장기병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경우, 서양이나 가야의 개마무사와는 다르게 가죽갑옷 위에 사각모양의 철조각을 연달아 덧씌운 판갑을 써서 어느 정도의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었고, 말 역시 판갑으로 된 덮개를 씌워 돌격시 적의 화살이나 투석에 의한 부상을 막아주었다. 무기로는 대개 장창 혹은 화극으로 주된 무장을 하고 보조무장으로 환두대도와 단검, 그리고 던지는 용도로 수리검 등으로 알려진 형태의 작은 단검 등을 소지하였으며 유목민족의 후예였던만큼 말 위에서 사용하기 위해 단궁이라는 개조된 활도 썼다. 이 개마무사는 광개토왕의 대외팽창정책의 주력이 되어 강력하고 거대한 제국의 건설을 가능하게 하였다. 신라에서도 5세기 중반부터 고구려가 신라를 침입했던 왜구를 대신 물리쳤던 일을 계기로 비슷한 기병을 운용하게 되었다. 또한, 가야 역시 개마무사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고구려와 달리 판갑이 아닌 철갑을 써서 기동성과 유연성이 몹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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