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랑 맡 에 갔다가 나름 득탬을 했다.
이마크에가면 한쪽 구석에 반품된 것들을 모아서 아주 저렴하게 파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서 지아이조2 DVD를 발견 하고는 냉큼 집어 들었다. 뭐 다운로드 해도 되고 썩 땡기는 영화는 아니였지만, 580원 이라는 매력적인 가격이길래 구입을 결정했다. 집에와서 저녁에 봤는데 몇몇 장면들은 정말 훌륭했다. 하지만 전반적인 스토리 전개는 다소 싱거웠으며, 전 편 주인공을 등장이나 시키지 말지 어설프게 초반에 죽여버린다. 뭐 어쨌든 가격을 떠나서 볼만한 영화를 싸게 구입해서 봤으니 된거지뭐. 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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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루리웹  <--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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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이야기! 실감나게 대사하는 것이 목표! ㅎㅎㅎ



오우~~ 나으 아들 등장!

포스가 느껴 지는가?























왼쪽 끝 남자애!






























ㅎㅎㅎ 이거 곰장어 인데 어ㅣ 돼지코 처럼 보여 한컷!

대구막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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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들어 주는 요리.

늘 아들이 맛있다고 해준다. 하핫!

첨 해볼 때는 낯설고 뭘해야 하나 싶지만, 몇번 해보고 나면

레시피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럼 요리는 끝!

손가는 대로 만들어보자.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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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다음지식



거꾸로 읽는 세계사

지은이:유시민
펴낸이:김장천
펴낸곳:도서출판 푸른나무
1988년 7월 30일 초판 1쇄 발행
1998년 4월 20일 재판 15쇄 발행
입력일:1999년 8월 28일
입력자명:송가람
교정자명:임종욱
점역출판:부산맹인점자도서관


차례

머리말
드레퓌스 사건
진실의 승리와 더불어 영원한 이름
피의 일요일
혁명과 전쟁의 시대가 열리다
사라예보사건
총알 하나가 세계를 불사르다
러시아 10월 혁명
세계를 뒤흔든 붉은 깃발
대공황
'보이지 않는 손'의 파산
대장정
중화인민공화국을 낳은 현대의 신화
아돌프 히틀러
벌거벗은 현대 자본주의의 얼굴
거부하는 팔레스타인
피와 눈물이 흐르는 수난의 땅
미완의 혁명 4.19
자유의 비결은 용기일 뿐이다
베트남전쟁
골리앗을 구원한 현대의 다윗
검은 이카루스, 말콤 X
번영의 뒷골목 할렘의 암울한 미래
일본의 역사왜곡
일본제국주의와 부활 행진곡
핵과 인간
해방된 자연의 힘이 인간을 역습하다
20세기의 종언, 독일 통일
통일된 나라 분열된 사회


지은이:유시민
유시민은 1959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대구 심인고교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대구 재학 중에는 민주화운동으로 두 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저서로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가 있으며 공저로는 '광주민중항쟁--다큐멘터리 1980'이 있다.


머리말

"거꾸로 읽는 세계사"가 세상에 나온 지 벌써 일곱 해가 되었다. 당시만 해도 이런 책이 널리 읽히는 풍토가 아니어서 누가 사서 보기나 할까 기대 반 의심 반 책을 내놓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내가 기대한 것보다 몇십 배나 많은 독자들이 그 동안 이 책을 일어 주었다. 처음에는 기뻤다. 하지만 좀 지나니깐 왠지 모를 부담감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더니 나중에는 겁이 더럭 났다. 그 많은 동자들의 관심과 사랑이 과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해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그렇지만 헛수고였다. 딱 한 사람을 빼면 아무도 이 책을 공개적으로 그리고 진지하게 비판해 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딱 한 사람'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로 잇는 역사학자였다. 그분은 간행물을 심사하는, 내 생각으로는 별로 좋지 않은 일을 하는 정부기관이 발행하는 서평잡지에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평하는 짧지 않을 글을 실었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분은 이 책을 두고 "1980년대 청년 지식인의 지적 반항"이라고 했다. 정말이지 지금 생각해 보아도 보탤 수도 뺄 수도 없이 정확한 말이다.
이 책의 앞 절반은 박종철 씨 고문살해사건에서 6월 항쟁에 이르는 격동기에 군사독재정권 타도투쟁을 선동하는 유인물을 찍을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쓴 것이다. 나머지 절반은 6.29선언을 속임수라고 비난하는 유인물을 만든 죄로 경찰에 쫓기던 1987년 막바지에서 다음해 봄 사이에 곰팡내 나는 반 지하 자취방에 숨어 지내면서 썼다. 하루 종일 최루탄 가스 마시며 돌을 던지고 돌아와 밤새워 썼으니 점잖고 온순한 글이 나올 수야 없는 일이다.
초판 서문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 책을 군사독재정권과 양식 없는 보수주의자들이 교과서와 매스컴을 제멋대로 주물러 국민에게 주입한 맹목적 반공주위와 냉전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이다. 그래서 여기 실을 글들이 "자본주의를 혐오하고 사회주의를 은근히 찬양하는 이념적 편향성"을 지니고 있다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없니 않았다. "나치즘을 벌거벗은 현대자본주의의 얼굴이라 단죄하면서도 스탈린이 저지른 독재와 야만 행위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다"거나 "이미 실패한 사회주의를 자본주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인 양 끌어안고 있다"는 식의 비판도 다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그 사이에 세상이 참 많이도 변했다. 국제무대에서는 냉전이 막을 내렸고 나란 안에서도 이른바 '문민정부'가 들어서는 등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거꾸로 읽는 세계사"같은 '지적 반항'을 낳았고, 제대로 역사 공부를 하니도 않은 얼치기 '역사학도'가 쓴 이 책을 꾸준히 잘 팔리게 만든 일그러진 법 제도와 사회 분위기는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이 개정판의 내용도 초판과 크게 다른 점이 없다. 개정판을 내게 된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첫째로는 지난 몇 해 동안 중요한 사건이 많이 일어났으므로 그 내용을 여기저기 보충하였다. 초판에 '최근' 또는 '요사이'에 있었다고 한 일이 케케묵은 옛이야기가 되어버리기도 해서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특히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체제가 갑자기 무너지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이스라엘 정부가 평화협정을 맺는 등 큰 사건을 고려하여 어떤 글은 제법 많은 양을 보충하였다.
둘째로는 잘못 쓴 문장을 힘닿는 대로 바로잡았다. 여러 사람들이 글이 좋다며 비행기를 태우는 바람에 자만하는 마음조차 없지 않았는데 지난해 이오덕 선생이 쓰신 "우리 글 바로 쓰기"를 읽고 나니 얼굴에 모닥불을 부은 듯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워낙 오랫동안 서양말과 일본말에 오염된 문장을 읽고 쓴 탓에 곱고 바르게 쓰려고 노력은 하였으나 제대로 고쳤다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고치는 김에 눈에 띄게 감정 섞인 표현이나 논리 비약이 심한 곳도 여러 군데 손을 보았다. 요즈음 고등학생들이 많이 읽는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이 일을 더 미룰 수가 없었다.
셋째로는 소련 동유럽 사회주의체제 붕괴와 독일 통일에 해안 글을 하나 덧붙였다. 여기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신문방송 보도와 책들이 나온 바 있기 때문에 과정을 상세히 이야기하는 대신 그것이 20세기 인류역사에서 가지는 의미를 해석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독자들이 이 글을 책 전체의 마무리로 삼아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은 "거꾸로 읽는 세계사"가 "자본주의체제를 지나치게 미워하고 은근히 사회주의를 선동하는" 비뚤어진 역사의식을 담고 있지 않느냐는 비판에 대한 짤막한 답변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 나라에서 사회주의와 스탈린 체제를 욕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달리 없었다. 그러나 사회중의 세계에 대한 모든 정보가 정보기관의 검열을 거친 후에야 국민에게 전해지고 사회중의체제의 장점을 말하는 것이 감옥에 끌려가는 이유가 되는 사회에서 진정 양심 있는 지식인이라면 떳떳이 사회주의를 비판할 수 없다. 강요된 이데올로기에 맞서 누군가 소신껏 사회주의체제의 장점을 말할 자유를 박탈당할 때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함께 싸우는 사람만이 진정 거리낌없이 사회주의를 비판할 자격이 있다. 우리 사회를 비판할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 않고 사회주의를 연구할 자유조차 없는 사회에서 자본주의와 사는 일이 아닐까. 짧게나마 소련 동유럽 사회주의 몰락에 대한 글을 실은 것은 그 거대한 실험을 정리해 볼 때가 되었기 때문일 뿐 그런 식의 '공정한 역사'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다. 서로 다른 사상과 견해를 자유롭게 토론함으로써 올바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이는 민주주의를 가꿀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진짜 민주주의 사회에 살게 된다면 얼치기 역사학도가 쓴 "거꾸로 읽는 세계사" 같은 책이
서점에 나와 앉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나는 1995년 오늘 이 개정판 서문을 쓰게 된 것을 진심으로 슬퍼한다. 역사를 쓰는 데 필요한 자료를 정치권력이 제멋대로 통제하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과 토론을 억압하는 그릇된 풍토가 사라져 아무도 이 책이 전하는 '지적 반항'에 귀기울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내가 진정 바라는 일이기 때문이다.
1995년 2월
유시민


드레퓌스 사건
진실의 승리와 더불어 영원한 이름

평범한 육군대위 드레퓌스

1894년 9월 어느 날, 프랑스 육군 참모본부 정보국 요원이 프랑스 주재 독일대사관 우편함에서 편지 한 장을 훔쳐냈다. 독일대사관 무관 슈바르츠코펜 앞으로 가는 봉투 안에는 프랑스 육군 기밀문서의 내용을 자세히 적은 '명세서'가 들어 있었고 모낸 사람은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잖아도 프랑스 군대에 대한 정보를 독일에 팔아먹는 스파이를 찾아내느라 골머리를 썩이고 있던 참모본부는 이 명세서를 만든 사람이 참모본부 안에서 일하고 있거나 적어도 그 가까이 잇는 인물이라고 단정하고 조사를 벌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범인'이 붙잡혔다. 참모본부에서 일하고 있던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였다. 정보국의 수사관들은 '명세서'의 글씨가 드레퓌스의 것과 같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스파이로 점찍었다. 드레퓌스는 끝끝내 자기가 결백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군사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아야 했다.
인류에게 '자유, 평등, 우애'의 정신을 가져다주었다는 대혁명의 나라 프랑스를 내전에 버금가는 정치 혼란과 분열에 빠뜨린 이른바 드레퓌스 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드레퓌스는 아주 평범한 육군장교에 지나지 않았다. 남다른 점이 있다면 유태인이면서 프랑스를 조국으로 섬겼다는 사실뿐이다. 그는 독일 국경 가까운 알사스 지방의 한 도시에서 방직공장을 경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남부럽지 않은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열 한 살이던 1870년 독일이 프랑스와 전쟁을 벌여 알사스 지방을 빼앗아 버렸다. 드레퓌스는 이것을 보고 정치가 사람들의 생활을 크게 바꾸어 놓을 수 있으며 약한 세력이 정의를 짓밟는 때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래서 군인으로서 조국 프랑스에 봉사하기로 결심했다. 가족들도 기꺼이 격려해 주었다.
드레퓌스는 진지하고 성실했지만 말이 적고 융통성이 모자라는 편이어서 친구들 사이에서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게다가 학교에서나 군대에서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놀림을 당하고 차별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조국에 대한 사랑과 군대에 대한 충성심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군인으로서 착실하게 생활해 나갔다. 서른 한 살에 대위가 된 드레퓌스는 같은 유태인인 루시 아다마르와 결혼했다. 가냘프고 온순한 루시는 남편을 편안하게 하는 어진 아내였다. 둘은 아들딸을 하나씩 낳아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 평온한 가정이 어느 날 갑자기 절망의 골짜기에 떨어지고 말았다. 진짜 문제는 드레퓌스의 글씨가 아니라 그가 유태인이라는 사실이었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앞서 유태인을 차별하는 법률을 폐지한 나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천 년이 넘게 유태인을 박해한 유럽 사회의 뿌리깊은 악습이 하루아침에 사라 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군대와 같은 보수 집단에는 그런 유태인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다. 글씨가 비슷하다는 이유 하나만 가지고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몰아세운 참모본부의 상관들도 모두 그런 사람들이었다. 
드레퓌스는 재판정에 섰다. 물론 프랑스 군부는 이 군사재판을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자 평소에도 내놓고 반유태주의를 선전하던 몇몇 신문사가 들고나섰다. 육군 참모본부의 한 장교가 반역죄를 저질러 체포당한 사건을 공개하라고 떠들어댄 것이다. 이 신문들은 드레퓌스가 저질렀다는 간첩 행위에 대한 온갖 뜬소문을 날마다 대문짝 만하게 실어 내보냈다. 이렇게 해서 드레퓌스는 재판을 다 받기도 전에 벌써 반역죄인이 되고 말았다. 1894년 12월 군사법원은 비밀재판을 열어 드레퓌스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만약 드레퓌스가 죄가 없다면 군부의 체면이 땅에 떨어지게 된다고 생각한 참모본부의 상관들은 여러 가지 문서를 거짓으로 꾸며 증거로 제출했다. 재판장을 드레퓌스가 그 증거들에 대해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재판을 끝내 버렸다. 반유태주의에 젖은 신문들은 드레퓌스가 "프랑스를 파멸시키고 프랑스의 영토를 차지하려는 유태인 국제조직의 스파이"라고 하면서 반드시 사형시켜야 한다고 까지 했다.
그러나 양식 있는 일부 언론인과 변호사들은 확실한 증거를 밝히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참모본부는 "반역자 드레퓌스는 종신형을 받았으며, 확실한 증거가 있지만 국가안보를 위해서는 공개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너무 중요한 군사 기밀이기 때문에 만약 공개하면 독일과 전쟁을 벌일 각오를 해야 한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드레퓌스는 유죄를 선고받았을 분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계급장을 뜯기고 군대에서 쫓겨나는 모욕까지 당해야 했다. 그런 다음 아무도 모르게 아프리카 기아나의 적도 부근 바닷가의 외딴 섬으로 끌려갔다.
드레퓌스는 어른 키 두 배나 되는 담이 두 겹으로 둘러싼 조그만 돌 감옥에 갇혔다. 스물 네 시간 감시를 받았고 밤에는 두 발에 겹으로 된 쇠사슬을 차야 했다. 적도의 무더위에 짐승 취급을 받으면서도 드레퓌스는 다섯 해 가까운 세월을 견뎌 냈다. 그것은 아마도 아내 루시가 편지에 써 보내 준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사랑 덕분이었을 것이다.
나는 당신의 아내라는 것이 자랑스러워요. 이 무서운 불행이 덮치기까지 우리가 누렸던 그 완전하고 깨끗한 기쁨을 맛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답니다. 그 행복했던 생활을 되찾으려면 이 무서운 수수께끼를 푸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겠지요. 나는 믿어요. 내 믿음을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답니다.
드레퓌스도 끝까지 주저앉지 않았다.
어떤 악마가 정직한 우리 가족에게 이런 불행과 치욕을 안겨 주었을까? 그러나 나는 체념하지 않소. 진실을 반드시 드러나는 법이오. 이것이 바로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라오. 나는 온 세상을 향해 내 결백을 외치고 싶소. 내 숨이 끊어질 때까지, 내 피의 마지막 한 방울이 남을 때까지, 나는 날마다 쉬지 않고 외칠 것이오. 나는 죄가 없다고!
시간이 하루하루 지나면서 세상 사람들은 드레퓌스라는 이름을 잊어버렸다. 나중에는 가족과 편지를 주고받을 수도 없게 되었다. 아내 루시와 형 마티외가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었다. 루시는 남편이 갇혀 있는 '악마섬'에서 살게 해달라고 당국에 청원서를 냈다. 그러나 그마저 차갑게 거절당하였다. 악마섬의 형무소에서 병들어 죽는 것이 드레퓌스가 짐 진 운명인 듯 보였다. 그런데 재판이 끝난 지 열 다섯 달이 지난 1896년 3월 드레퓌스의 앞날에 한 줄기 빛이 찾아 들었다.

진짜 스파이 에스테라지 소령

참모본부 정보국에서 일하는 조르쥬 피카르 중령은 또 다른 스파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우연히 드레퓌스 사건에 관한 서류를 읽어보았다. 그는 뜻밖에도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하나는 드레퓌스 대위가 반역죄를 범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문제의 '명세서' 글씨가 보병 대대장 에스테라지 소령의 글씨와 똑같다는 사실이었다.
피카르 중령은 드레퓌스와 군사전술 동창생으로 높은 책임의식과 올곧은 양심을 지닌 능력 있는 장교였다. 그는 이 놀라운 사실을 곧바로 상관에게 알리고 에스테라지를 체포해서 재판을 다시 열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그 일이 도무지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한사코 드레퓌스 사건을 그래도 묻어 버리려고 했다. 피카르 중령은 칭찬을 듣기는커녕 오히려 옥을 먹었다.
"도대체 자네는 무엇 때문에 그 유태인을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나?"
"그 사람은 죄가 없으니까요."
"이봐! 국방장관과 참모총장이 이미 끝난 사건이라고 하는데, 그래 자네는 다시 재판을 열자는 말인가?"
"장군님, 그 사람은 무죄입니다."
"국방장관과 참모총장이 진실이라고 하면 내게는 그게 진실이야. 자네만 입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닌가!"
"장군님 말씀을 듣자니까 구역질이 납니다. 아직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제가 이 비밀을 죽을 때까지 감추지는 않을 겁니다."
피카르 중령은 자신도 목숨이 위험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어떤 변호사에게 이 사실을 전해 주었다. 그 변호사는 다시 어떤 국회의원에게 진실을 알렸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은 유태인과 한통속이라고 사람들이 헐뜯을까 겁이 나서 이것을 발표하지 못했다. 그래서 드레퓌스의 운명에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 피카르 중령의 건의를 장군들이 받아들였다면 드레퓌스라는 이름은 오늘날 역사책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진짜 반역자가 체포당하고 누명을 쓴 장교가 명예를 되찾는 것으로 사건이 끝나 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모본부의 장군들이 국가안보를 위해서는 진실을 짓밟고서라도 군부의 위신을 지켜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에 사로잡힌 탓에 사건은 곧 눈사태처럼 커지고 말았다.
동생의 목숨을 구하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던 마티외는 마침내 어떤 신문에 속임수 기사를 하나 실어 내보내는 데 성공했다. "반역자 드레퓌스의 죄를 증명할 수 있는 뚜렷한 증거가 있다. 그런데도 그것을 밝히지 않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아직도 드레퓌스가 죄를 짓지 않았을 지 모른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는 만큼 지금이라도 그 증거를 공개하는 것이 좋겠다." 루시는 남편이 군사법원에 제출된 증거 서류를 보지도 못한 채 유죄선고를 받았으니 재판을 다시 받게 해달라고 의회에 청원서를 냈다. 이렇게 해서 다시금 드레퓌스라는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가운데 드레퓌스와 유태인을 욕하고 헐뜯는 데 앞장섰던 신문 "르마탱"이 특종을 터뜨렸다. "드레퓌스의 범죄를 입증하기 위해" 어디선가 명세서 사본을 구해 큼직하게 실은 것이다. 사태는 정말로 심각해졌다. 독인 무관 슈바르츠코펜은 그 신문을 보고 놀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프랑스 정보원이 우편함에서 훔쳐가 버렸기 때문에 그는 사실 그 명세서를 본 적이 없었다. 슈바르츠코펜은 에스테라지의 글씨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기와 거래하는 스파이의 이름을 알려줄 수는 없는 일이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자기의 글씨가 신문에 나자 에스테라지 소령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겉보기에는 제법 훌륭하게 장교 노릇을 했지만 실제로는 간첩짓을 하거나 돈 많은 과부를 꼬드겨 만든 돈으로 사치스럽고 방탕하게 사는 비열한 사람이었다. 에스테라지는 자기의 죄를 감추려고 쉴새 없이 새로운 음모를 꾸미고 다녔다. 참모본부의 장교들은 진상을 뻔히 알면서도 그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그러나 명세서의 글씨가 드레퓌스의 것과 다르다는 이야기는 꾸준히 퍼져 나갔다. 어느 날 에스테라지를 잘 아는 증권 브로커가 마티외를 찾아와 에스테라지 소령의 글씨가 명세서와 똑같다는 사실을 귀뜸 해 주었다. 마티외는 곧바로 에스테라지를 고발했다. 그러나 당국은 겉치레로만 조사를 할 뿐 그를 구속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신문을 통한 불꽃 튀는 싸움이 벌어졌다. 대부분의 신문들이 참모본부를 싸고돌았다. "드레퓌스 재판을 다시 하라는 것은 군부, 나아가 프랑스를 파멸시키려는 유태인 국제조직이 꾸민 음모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군의 위신과 사기를 꺾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군대와 관청에서 일하는 유태인을 모조리 쫓아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이러한 편파왜곡보도의 흙탕물 속에서도 "피가로"라는 신문이 맨 처음으로 에스테라지가 진짜 범인이라고 주자하고 나섰다. 하지만 유태인 추방을 선동하는 신문들의 아우성에 맞서기에는 그 목소리는 너무나 가냘 펐다.
에스테라지는 하루 종일 신문사에 죽치고 앉아, 있지도 않은 유태인 국제조직에 대한 정보를 날조하여 흘려보냈다. 프랑스 의회는 군에 대한 국민의 믿음을 어지럽히는 악질 선동꾼들을 뿌리뽑고자 결의했다. 군사법원은 재판을 열어 에스테라지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엉뚱하게도 변호사에게 "군사기밀을 누설했다"고 하여 피카르 중령을 체포해 버렸다.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온 세계의 내노라 하는 신문들은 이 사실을 다투어 보도했다. 유럽 여러 나라의 신문들은 하나같이 "이제 프랑스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며 이 뒤집힌 판결을 비난했다. 어떤 신문은 "사기꾼들이 사기를 예찬했고 협잡꾼들이 협잡 기념비를 세웠다"고 탄식했다. 뒷날 수상으로서 프랑스 국민을 이끌고 제1차 세계대전의 불바다를 헤쳐나간 '호랑이' 클레망소는 이 신문들을 읽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정치가로서는 드물게 드레퓌스를 옹호했던 사람이다. 민주주의와 지성의 나라임을 자랑삼던 프랑스가 문명세계의 비웃음을 사는 처지로 굴러 떨어진 셈이었다.
드레퓌스 재판을 다시 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프랑스 국민은 두 패로 갈라섰다. 재심 요구파와 재심 반대파가 그것이다. 민주주의와 프랑스대혁명의 이념에 반대한 왕정복고주의자와 옛 귀족들, 드레퓌스를 감옥으로 보낸 군부, 유태인 박해에 앞장선 과격한 카톨릭 사제와 신도들,
보수적인 정치가들, 군대의 힘을 키우는 것을 가장 높은 국가 목표라고 믿는 군국주의자들, 그리고 이들을 지지한 수많은 신문들이 재심 반대를 외치며 모여들었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유태인 국제조직의 음모에 맞서 국가안보를 지키려면 군부의 위신을 높여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양심 곧은 지식인과 법률가들, 공화주의자와 진보적인 정치가들, 그리고 몇 안 되는 신문들만이 재심 요구파에 가담했다. 처음에는 이 사건을 "유산계급의 집안싸움" 이라며 팔짱을 끼고 있었던 사회주의자와 노동조합이 뒤늦게 여기에 합류했다. 미국과 유럽의 지식인들도 이들에게 지지 성원을 보냈다. 그러나 재심 요구파의 수와 힘은 여전히 너무나 초라했다. 드레퓌스의 앞날은 변함없이 깜깜한 먹구름 속이었다.
그런데 1898년 1월 13일, 절망을 희망으로 뒤바꿔 놓은 큰 폭풍이 몰아쳤다. 클레망소가 운영하던 신문 "로로르"에 프랑스가 낳은 가장 위대한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인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는 글을 발표한 것이다. 그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이 편지를 하루 밤 하루 낮, 그리고 또 하루 밤을 꼬박 새우며 썼다. 졸라는 에스테라지가 진범인 이유를 하나하나 밝힌 다음, 드레퓌스를 죄인으로 만들어 참모본부의 잘못을 감추려 한 장군들과 엉터리 증언을 한 글씨 감정전문가, 드레퓌스에게 유죄를 선고한 첫 번째 군사재판과 에스테라지에게 무죄를 선고한 두 번째 군사재판을 무섭게 꾸짖었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궁극적 승리에 대해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더욱 강한 신념으로 거듭 말합니다. 진실이 행진하고 있으며 아무도 그 길을 맛을 수 없음을! 진실이 땅속에 묻히면 자나라 더 무서운 폭발력을 축적합니다. 이것이 폭발하는 날에는 세상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릴 것입니다.
내가 한 행동은 진실과 정의의 폭발을 앞당기기 위한 혁명적인 조치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그토록 많은 것을 이루었고 행복하게 살 권리를 가진 인류에 대한 뜨거운 정열뿐입니다. 나의 불타는 항의는 바로 내 영혼의 외침입니다. 그 때문에 법정에 끌려간다 해도 나는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를 심문하여 주십시오! 나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글이 이처럼 막강한 힘을 떨친 일은 세계 역사에서 달리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보잘것없는 신문이던 "로로르"는 이날 무려 30만 부가 팔렸다. 세계 곳곳에서 편지와 전보가 3만 통이나 날아와 졸라에게 힘을 보태 주었다.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은 "뉴욕 헤럴드"에 이렇게 썼다.
나는 졸라에게 깊은 존경과 가없는 찬사를 보내고 싶다. 군인과 성직자 같은 겁쟁이 위선자 아첨꾼은 한 해에도 백만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다르크나 에밀 졸라 같은 인물이 나오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 프랑스는 문명세계의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 드레퓌스가 결백하다는 사실이 뚜렷이 드러날수록 재심 반대파는 제정신을 잃었다. 그들은 군중을 선동하여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졸라를 죽여라!" "유태인을 죽여라!" "군대 만세" 따위의 구호를 외치면서 유태인을 죽이고 그들이 경영하는 상점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짓밟았다. 재심 반대파가 깡패와 가난한 사람들을 선동하여 앞장세운 이 폭동은 그야말로 정신병자들의 집단발작이라고 할 만했다.
흥분한 군중은 졸라의 집에 몰려가 돌을 던졌다. 그러자 그 동안 숨죽이고 있던 지식인들이 참다 못한 나머지 일제히 나서서 졸라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만들고 서명을 했다. 두 패로 갈라선 프랑스 사람들은 아예 생활을 내팽개쳐 버렸다. 책을 읽지 않았으며 그 좋아하던 극장에도 가지 않았다. 신문을 읽고 말다툼과 주먹다짐을 벌이는 것이 생활이 되었다. 목숨을 결투를 하는 사람들까지 곳곳에서 생겨났다. 이러한 열병이 사회를 휩쓰는 가운데 법원은 군사법원을 중상모략 했다는 이유로 에밀 졸라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반유태주의자들의 공격 목표가 된 졸라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영국으로 망명했다. 재심 반대파는 전국에서 유태인 상점의 물건을 사지 않는 운동을 조직했고 재심 요구파에 참여한 교수들을 대학에서 쫓아냈다. 드레퓌스를 편든 정치가들은 대부분 선거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총칼을 들지 않았을 뿐이지 전쟁이나 다름이 없는 이 싸움에서 재심 요구파의 힘은 여전히 보 잘 것이 없었다.
그런데 1898년 8월 39일, 아무도 내다보지 못한 사건이 일어나 싸움의 판세를 단번에 뒤집어 놓았다. 참모본부에 근무하는 앙리 중령이 면도칼로 목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다. 그는 피카르 중령을 감옥에 집어넣으려고 에스테라지와 짜고 여러 가지 문서를 날조한 인물이었는데 진상이 탄로 날까 두려워 그만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군국주의자와 반대유태주의자의 영웅' 에스테라지는 잽싸게 영국으로 달아나 버렸다. 그는 영국의 어떤 출판사에서 많은 돈을 받고 자기 이야기를 책으로 써냈는데, 자기는 상부의 명령을 따라 독일의 기밀을 캐내기 위해 독일 무관에게 접근했다는 내용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독일 쪽에서는 자기네를 위해 일하는 스파이로 알았지만 사실을 프랑스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이중첩자 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참모본부의 장군들은 할 말이 없었다. 파리의 신문들은 이제 너나없이 참모본부를 비난하고 나섰다. 재심 반대파의 집단발작도 잦아들었다. 누가 보아도 드레퓌스 재판을 다시 열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1899년 6월 3일, 고등법원은 마침내 드레퓌스에게 무지징역을 선고한 1894년 12월의 재판이 무효라고 판결하면서 재판을 다시 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드레퓌스 앞에서 아직도 험한 가시밭길이 가로놓여 있었다.

진실이 거짓을 누르다

악마섬에서 세상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하고 다섯 해를 산 드레퓌스는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는 도대체 프랑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기억하고나 있을지 조차도 의심스러웠다. 사실 말이 '드레퓌스 사건'이지 그가 할 일이라고는 영문도 모른 채 잡혀가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한 것밖에는 없었다. 물론 악마섬 감옥에서 절망하여 자살하거나 병들어 죽어 버렸다면 이 사건은 그대로 묻혀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니만 그마저도 아내 루시가 보내 준 믿음과 사랑이 없었더라면 어려웠을 것이다. 어쨌든 드레퓌스는 대서양을 건너 브레타뉴에 있는 군 형무소로 돌아왔다. 에밀 졸라도 망명 생활을 끝내고 돌아왔고 피카르 중령도 풀려났다.
다시 군사재판이 열렸다. 드레퓌스는 자기에게 죄가 없다는 것 말고는 아무 할 말이 없었다. 참모본부의 상관들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라보리 변호사는 법원으로 가는 길에 총을 맞아 병원으로 실려 갔다. 재판 결과는 변함이 없었다. 재판관 일곱 가운데 둘만이 드레퓌스 편에 섰기 때문이다. 달라진 것이라면 드레퓌스가 많은 고생을 했기 때문에 "정상을 참작하여" 종신형 대신 십 년형을 내린 것뿐이었다.
에밀 졸라는 다시 펜을 들었다.
이것이 정상참작이란 말인가? 이것은 피고인을 위한 정상참작이 아니라 재판관들을 위한 정상참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위해 정상참작을 한 것이다. 이런 결정은 그들이 규율과 양심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하고 말았음을 고백한 데 지나지 않았다. ... 정의를 실현하려는 외침은 ... 머지않아 온 세계를 뒤흔들 것이다. ... 프랑스는 어디에 있는가? 프랑스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훌륭하고 정의로운 병사 말고는 아무도 "내가 여기 있다"고 대답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정말 그랬다. 유럽과 아메리카의 프랑스 대사관 앞에는 이 재판에 항의하는 군중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이듬해 파리에서 열릴 예정이던 세계박람회에 참여하지 말자고 결의하고 자기네 정부에 압력을 넣었다. 세계에서 손꼽는 신문들이 한결같이 "드레퓌스가 아니라 프랑스가 범죄자"라는 사설을 실었다. 
클레망소와 장 조레를 비롯한 프랑스의 양식 있는 정치가들은 정부를 공격해댔다. 견딜 수 없게 된 대통령은 1899년 9월 19일 드레퓌스에서 특별사면을 내렸다. 자유를 되찾은 드레퓌스는 그리던 아내 곁으로 돌아왔다.
졸라는 변호사 라보리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나는 싸움이 벌써 끝났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이제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방법으로 정직한 사람과 도둑놈에게 똑같이 특별사면을 준 것입니다. 사면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자기의 죄를 인정해야 앞뒤가 맞다. 그런데 드레퓌스는 죄가 없다 면서도 사면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 동안 진실과 정의를 위해 싸운 많은 사람들은 실망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군가기밀을 누설했다는 얼토당토않은 죄로 재판을 받아야 할 피카르 중령은 누구보다도 크게 낭패를 보았다. 하지만 벌써 다섯 해씩이나 고생한 드레퓌스로서는 무죄판결을 받을 때까지 감옥에 남겠노라고 버틸 수 없는 노릇이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드레퓌스 사건을 그만 잊어버리고 싶었다. 모두들 여러 해 계속된 싸움에 넌덜머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드레퓌스는 자기가 겪은 일은 쓴 "악마섬 일기"를 펴내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에밀졸라도 "진실"이라는 소설을 썼다. 그밖에도 이 사건에 대한 책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어떤 책도 실제 일어났던 사건 자체보다 더 감동적일 수 없었다.
에밀 졸라는 빼어난 글과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인류의 양심'이라는 찬사와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정의가 이기는 것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1902년 뜻밖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한밤에 석탄난로 가스가 빠지지 않아 잠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못한 것이다. 사고가 아니라 계획된 살인이라는 이야기도 떠돌았지만 분명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드레퓌스 사건을 소재로 장편소설을 쓴 적이 있는 작가이자 비평가인 아나톨 프랑스는 장례식에서 졸라의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폭력과 억압으로 사회정의와 공화국의 이념과 자유로운 정신을 목조르기 위해 손잡은 세력의 음모를 백일하에 드러냈다. 그의 외침은 프랑스를 잠 깨웠다. 운명과 용기가 그를 높은 곳으로 밀어 올려 한 순간 인류의 양심이 되게 한 것이다.
드레퓌스는 1904년 3월 재심을 청구했다. 1906년 7월 12일 대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비로소 막을 내렸다. 발표하면 독일과 전쟁을 해야 할만큼 중요하다고 하던 참모본부의 '중대한 기밀문서' 따위는 아무 데도 없었다. 진실을 감추고 국민을 속이려고 만든 가짜 증거 문서들만 역사의 뒤안길에 쓰레기로 남았다.
드레퓌스는 무죄선고를 받은 지 열흘만에 군대로 돌아왔다. 사관학교 연병장에서 열린 행사에서 그는 육군 소령 계급장과 레종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드레퓌스는 형 마티외와 아들 피엘을 양편에 세우고 지붕 없는 차에 올랐다. 그들은 연병장을 나서자 스스로 모인 20만 군중이 모자를 벗어들고 따뜻한 축하를 보냈다. 창백한 드레퓌스의 얼굴에 잔잔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두 팔을 번쩍 들고 외쳤다. "프랑스 만세! 진실 만세!" 군중들이 맞받았다.
"드레퓌스 만세! 정의 만세!"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전투에 두 번 참가하여 중령을 진급했다. 그리고 1935년 7월 11일 병으로 오래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뒷이야기에 따르면 독일 무관 슈바르츠코펜은 드레퓌스가 죄 없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했지만 자기의 조국에 충성하기 위해서 못 본 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917년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프랑스말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들어 봐라, 프랑스 사람들아. 드레퓌스는 죄가 없다. 모두가 거짓말이고 모략이다. 그 사람에게는 티끌 만한 잘못도 없다.

20세기를 연 드레퓌스 사건

지금까지 드레퓌스 사건을 짧게 뭉뚱그려 살펴보았다. 서로 믿고 사랑하면서 험한 가시밭길을 헤쳐 나간 드레퓌스 가족의 삶은 오늘날에도 큰 감동을 준다. 그러나 우리가 더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은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꽃피우기 위해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싸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드레퓌스 개인의 생명이나 자기네의 이익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사회진보를 위해 싸웠다. 
올곧은 양심과 참다운 용기를 보여 준 피카르 중령, 행동하는 지성인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몸으로 가르쳐 준 에밀 졸라, 현명하면서 정열적이었던 정치가 클레망소, 진실의 편에 힘을 보탠 수없이 많은 이름 없는 시민들, 프랑스 민주주의가 무너질 위험에 빠진 것을 안타까워하며 응원을
모낸 다른 나라의 양식 있는 시민들, 이들 모두가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끈 주인공이다. 그들은 유태인에 대한 그릇된 편견을 부채질하여 진실과 정의를 짓밟으려 하 거짓말쟁이 권력자들의 음모를 꺾어 버리고 프랑스혁명의 정신과 민주주의를 지켜 냈다. 그들은 이 싸움에서 이김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의 문을 열어 젖혔다.
무엇보다도 프랑스 국민들은 내전에 버금가는 극심한 사회 혼란을 겪으면서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아프게 깨달았다. 드레퓌스 사건이 사회문제로 번진 것은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가 결백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공정한 절차에 따라 재판을 하지 않았고 증거가 뚜렷하지 않은데도 유죄를 선고했다는 데 있었다. 만약 절차가 공정했다면, 그리고 증거에 따라 판결을 내렸다면 드레퓌스는 첫 번째 재판에서 풀려났을 것이다. 죄를 지었다는 의심이 간다고 해서 사람을 함부로 잡아두고, 공정한 절차에 따라 재판을 하지 않고, 게다가 뚜렷한 증거도 없이 감옥에 보내는 사회에서는 민주주의가 꽃필 수 없다는 것이 이 사건의 첫 번째 교훈이라 하겠다.
다음으로 프랑스 육군 참모본부와 국방부 장군들은 군부, 다시 말해 군대를 지휘하는 고급장교 집단의 위신과 이익을 지키는 것이 곧 국가안보를 튼튼히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군대는 합법적으로 폭력을 쓸 수 있는 특별한 집단이다. 그리고 어떤 사회에도 군대를 능가할 만큼 큰 폭력을 가진 집단은 없다. 이 때문에 군부가 자기 이익을 국가 이익이라고 착각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큰 문제가 일어난다. 오늘날 민주주의 나라에서라면 어디에서나 군대는 국민이 선출한 국가원수의 말을 잘 따라야 하고 또 잘 따른다. 이른바 문민 우위 전통이다. 드레퓌스 사건은 이 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준다.
마지막으로 이 사건은 지식인들이 이끄는 여론이 얼마나 큰 힘을 낼 수 있는가를 증명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서양 속담처럼 졸라의 글은 재심 반대파가 일으킨 폭동을 이겨 냈다. 졸라는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참다운 지식인으로서 본보기를 보여 주었다. 그래서 불합리한 사회제도에 맞서 사회를 개혁하는 일에 적극 뛰어드는 것이 프랑스 지식인 사회의 자랑스런 전통으로 뿌리내렸다.
드레퓌스 사건은 문화 선진국이며 대혁명의 나라인 프랑스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유럽과 북아메리카 여러 나라의 시민들도 이 거대한 드라마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관심 있게 지켜 보았다. 따라서 모든 일이 끝난 뒤 프랑스 국민들이 얻은 이러한 교훈은 문명세계 전체의 귀중한 보물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어떤 학자들은 드레퓌스 사건이 20세기를 열었다고 한다. 서로 다른 두 세계관과 철학이 충돌한 데서 빚어진 사건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하나는 19세기 막바지까지 끈질기게 살아 남을 낡을 세계관이요, 다른 하나는 20세기에 문명사회를 이끈 철학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사건에서 드레퓌스가 한 일은 별로 없다. 에스테라지도 특별히 중요하지 않다. 당시 프랑스 육군에 유태인 피를 이어받은 장교와 다른 나라에 정보를 팔아먹은 스파이들은 그 두 사람 말고도 숱하게 많았다. 따라서 꼭 드레퓌스와 에스테라지가 그런 역할을 맡았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그러나 어떤 사건을 계기로 삼든 간에 이 두 세계관을 지닌 사회집단 사이의 대결은 피할 수가 없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재심 반대파를 만든 사람들은 오늘날 사람들이 널리 받아들이는 민주주의 이념에 반대했다. 공화정치 자체를 미워한 왕정복고주의자와 옛 귀족의 피붙이들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자기가 국가안보라고 믿는 것을 위해서라면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고 무시해야 한다고 확신한 군국주의자 또는 국가주의자들, 있지도 않은 유태인 국제조직을 들먹이면서 유태인을 박해한 인종 차별주의자와 과격한 기독교도들, 사회 혼란은 무조건 경제 번영을 해친다고 생각한 대기업 소유자들이 모두 재심 반대파에 가담했다.
드레퓌스 재판을 다시 열자고 한 이들은 누구인가? 대혁명의 정신을 따르고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해야만 국가안보도 가치가 있고 또 실제로 지킬 수 있다고 확신한 공화주의자들, 인종차별과 인권유린에 반대한 양심 바른 지식인들, 공정한 재판 절차 없이는 정의를 실현할 수 없다고 본 법률가들, 차별과 불평등은 어떤 것이든 거부하면서 자본가들과 맞섰던 사회주의자와 노동조합원들이 바로 재심 요구파였다.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겠지만 20세기는 인류가 민주주의를 더 넓게 그리고 더 철저하게 실현하여 온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드레퓌스 사건에서 재심 요구파를 이룬 바로 그런 사람들이 낡은 세계관과 철학을 가진 세력을 역사의 무대에서 밀어냄으로써 발전하였다. 이렇게 보면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를 싸움터로 삼아 이 두 세력이 벌인 피할 수 없는 한판 싸움이었으며 20세기에 들어선 첫걸음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피의 일요일
혁명과 전쟁의 시대가 열리다
@ff
20세기에는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체제가 나타났다. 인간은 오래
전부터 모든 사람들이 고르게 잘사는 세상을 꿈으로 간직해 왔다. 16세기에
살았던 영국 사람들이 고르게 잘사는 세상을 꿈으로 간직해 왔다. 16세기에
살았던 영군 사람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라는 책에서 그런 사회의 모습을
자세히 그렸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는 모든 시민이 재산을 공동소유하고
수공업과 농업에 종사한다. 누구나 생산한 물건 가운데 필요한 만큼을 갖다 쓸
수 있으며 공무원을 선거로 뽑는다. 모어는 인간이 이런 사회를 만들지 못하는
것은 바로 사유재산제도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19세기 서유럽 자본주의 나라에서는 노동자들이 너무 가난하고 거지가 날로
늘어나는 것이 가장 큰 사회문제였다. 그 시대의 유명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
예를 들어 로버트 오웬, 생시몽, 푸리에 같은 이들도 모어와 마찬가지로
사유재산제도를 사회악과 불평등의 근본 원인이라며 매서운 비판을 퍼부었다.
"공산당선언"과 "자본론"으로 이름난 칼 마르크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단지 사유재산제도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제도를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체제가 망하고 공산주의체제로 넘어가는 것이 역사의 필연이라고
말했다. 공산주의사회에서는 생산에 필요한 모든 수단이 개인의 손을 떠나
사회 전체의 것으로 되고 인간에 대한 착취와 불평등이 사라지며 사람들은
능력껏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어 받는다. 사회는 자유로운 개인의 결사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아름다운 이야기는 끝 모를 상상력을 가진 천재와
이상주의자들의 말과 글로만 존재했을 뿐이다. 그런데 20세기 들어 일어난
전쟁과 혁명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이 꿈을 현실로 만들어 보려는 야심을
지니고 한 나라의 권력을 차지한 사람들이 있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을
지도자로 한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가들이었다. 물론 그들이 토마스 모어가
그린 유토피아를 만들지 못했으며 인간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모두 없애
버리지도 못했다. 처음에는 눈부신 성공을 거둔 듯 보이던 사회주의는 20세기
막바지에 이르러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해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한때 지구 표면의 절반을 붉은 깃발로 뒤덮을 만큼 큰 힘을 떨쳤으며 20세기를
그 이전의 모든 시대와 구별할 수 있게 만들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벌어진 대학살
1905년 1월 9일, '피의 일요일'. 말고 글이 아닌 실제 사회주의 나라를
출현하게 한 끔직한 대학살이 일어난 날. 역사가들은 그날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 차르(황제) 니콜라이 2세가 통치하던 제정 러시아 수도 성
페테르부르크(독일식 이름인 페테르부르크는 1차대전이 터진 후
페트로그라드로 바뀌었다가 러시아 10월 혁명 후에는 레닌그라드로, 뒷날
소련이 해체되는 가정에서 페테르부르크로 다시 바뀌었다). 차르가 살던 동궁
앞 광장에서 벌어진 비극이다. 이 사건은 거대한 제국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국가권력을 빼앗을 수 있었는지를 더없이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이날 동궁 앞에는 20만 명이 넘는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모여들었다. 여자와
노인은 물론이요 어린아이들까지 섞여 있었다. 무기라고는 아무 것도 들지
않았다. 그들은 황제의 초상화를 들고 찬송가를 불렀다. "하느님이시여, 차르를
구해주소서!" 그들은 너무 가난하고 굶주린 나머지 '자비로운 아버지 차르'에게
고통을 호소하고 자비를 구하러 가는 길이었다. 러시아 정교회 신부인 가퐁이
맨 앞에서 노동자들을 이끌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폐하, 저희들 노동자와 주민들... 처자식과 늙은 부모들이 진리와 보호를
얻으러 폐하께 갑니다. 저희들은 거지나 다름없이 억눌리고 살아 숨이
넘어가고 있나이다. 이런 고통을 계속 견디며 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습니다. ... 저희가 바라는 것은 고작 일하는 시간을 하루 여덟 시간으로
줄이고 규정시간 밖의 노동을 없애 달라는 것, 품삯을 적어도 하루
1루블만이라도 받게 해달라는 것뿐이나이다. ... 마지막 구원을 바라는 저희
신민 들을 제발 도와주십시오. ... 그러면 ... 폐하의 이름을 우리들과 후손들의
가슴에 영원히 새기게 될 것입니다. 만일 폐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저희들은 폐하의 궁전 앞 이 광장에서 죽을 것입니다.
가퐁 신부는 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의 호소를 듣고 '아버지 차르'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대열을 이끌었다. 길 가던 구경꾼들도
황제의 초상을 보고 찬송가를 들으며 가슴에 십자를 그었다. 경찰은
교통정리를 해서 이 평화로운 행진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동궁 앞 광장에서
그들을 맞아 준 것은 자비로운 차르가 아니라 바리케이드를 치고 총을 겨눈
군대였다. 노동자들은 행진을 그만두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래서 자꾸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황제의 자비로운 목소리 대신
귀를 찢는 총소리가 광장을 뒤덮었다.
하얗게 언 눈 위로 노동자들의 붉은 피가 흘렀다. 대열은 순식간에 무너져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텅 빈 광장에는 수없이 많은 시체가 뒹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호기심에 끌린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소식을 듣고 분개한
학생들도 몰려왔다. 동궁 안에는 무장한 군인들이 2만 명이나 진을 치고
있었다. 군중은 군대와 경찰을 향해 욕을 하고 야유를 퍼부었다. 군인들은
또다시 총탄을 퍼부었다. 이렇게 해서 이날 5백 명이 넘게 죽고 수천 명이
총에 맞아 다쳤다. 물론 확실한 통계는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어쨌든 '피의
일용일'이라는 이름이 결코 지나치지 않을 만큼 많은 피가 흐른 것만은
분명하다.
차르가 인자한 손길을 내밀어 주기를 바라면서 찾아갔던 노동자들은 자비가
아니라 무자비한 총탄 세례를 받았다. 광장을 뒤덮은 붉은 피와 시체를 보고
그들은 차르가 인자한 아버지가 아니라 잔인하기 짝이 없는 압제자임을
깨달았다. 차르에 대한 동화 같은 환상에서 깨어난 러시아 민중은 황제의
충성스러운 신민 이기를 그만두고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차르체제를 타도하자고 선동해 온 혁명가들이 드디어 대중의 마음을 얻은
것이다. 수천 년 억눌리며 살아온 러시아 민중은 쌓이고 쌓인 분노를 한꺼번에
터뜨렸다. '자비로우신 차르가 머무는 성스러운 도시' 페테르부르크 거리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세운 혁명가들은 무리를 들고 차르 군대와 맞섰다.
페테르부르크에서 솟아오른 혁명의 불꽃은 얼어붙은 땅을 녹이며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가퐁 신부는 나라 밖으로 달아났다. 그는 차르 앞으로 모든 존칭을 생략하고
쓴 짤막한 편지를 보냈다.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순결한 피는, 오! 영혼의 파괴자인 그대와 러시아
민중 사이에 영원히 놓여 있을 것이다. 그대와 그들 사이의 도덕적인 결속을
다시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흘러야 할 그 모든 피가, 살인자여,
그대와 그대의 가족에게 흘러 떨어지리라.
그런데 차르 니콜라이 2세는 이 사태가 왜 일어났으며 제정 러시아
사회체제가 얼마나 위험한 지경에 빠져 있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죄 없는 백성이 수천 명이나 죽고 다친 그날 밤, 그는 이런 일기를 써
놓았다.
슬픈 날이다. 노동자들이 동궁에 들어오려고 했을 때, 성 페테르부르크에서는
질서가 파괴되는 중대한 사태가 일어났다. 군대가 여러 곳에서 총을 쏘아야만
했다. 주님, 이 얼마나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데카브리스트, 나로드니키, 마르크스주의자
페테르부르크에서 대학살을 저지른 차르체제는 바람 앞에 선 등불과 같은
위험한 처지에 빠졌다. 낡아빠진 전제정치의 나라 러시아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한번 터지면 세상을 단숨에 날려 버릴 만한 내부 모순이 켜켜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동궁 앞에서 벌어진 대 학살은 이 화약더미에 불을 질렀다.
제정 러시아 사회는 이미 산업혁명을 이룬 서유럽 나라들에 비해 경제와
정치가 모두 크게 뒤떨어져 있었다. 19세기 초반 러시아 인구는 삼천만이 조금
넘었다. 이천만 명이 넘는 농노들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비참한
삶을 살았다. 귀족한테 집과 땅을 받아 농사를 지으면서 돈과 농산물을
바치거나 귀족 집에 얹혀 살면서 집안의 온갖 궂은일을 다 하는 종으로 평생을
마쳐야 했다. 스스로 소와 말처럼 일하면서 가축과 한 방에서 먹고 자고
아이를 낳았다. 마음대로 다른 곳으로 이사할 수도 없었다. 글을 읽거나 쓰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제정 러시아는 바로 이런 농노제도를 바탕으로 한 사회였다. 차르는 그야말로
하느님과 맞먹는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귀족들은 차르의 보호를 받으면서
농노들이 피땀 흘려 생산한 것을 빼앗아 먹고 마시고 연애하고 사치를 부리는
데만 정신을 팔았다. 19세기 러시아 소설에 주인공으로 나오는 젊은 귀공자나
페테르부르크 사교계를 주름잡은 아름다운 귀부인들은 모두 이런
사람들이었다. 러시아 귀족들은 유럽 문화를 부러워하여 부지런히 흉내를
냈는데 그 가운데서도 으뜸은 프랑스여서 '교양 있는 귀족과 귀부인'이라면
자기네끼리도 프랑스 말을 할 정도였다. 농노는 사람이 아니라 '말하는
짐승'쯤으로 여겨 소설에서도 다루지 않았다. 투르게네프, 푸슈킨, 체호프,
톨스토이가 소설에서 농노들을 인간으로 보고 쓴 것은 예외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회가 발전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19세기에 들어서도 러시아는 여전히
중세사회 그대로였다. 이같이 완고한 차르체제에 대하여 최초의 반란을 일으킨
것은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하여 유럽으로 출정했다가 자유로운 사회를 경험한
일군의 청년 장교들이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에 쳐들어오자 젊은 귀공자들이
너나없이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러시아의 지독한 겨울을 당해 내지 못해
물러난 나폴레옹 군대를 뒤밟아 유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흘러
넘치던 자유주의사상을 맛보았다. 이 청년장교들은 한 떼의 제비처럼 철 이른
봄소식을 물고 조국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러나 몇몇 지식인들 말고는 아무도
그들이 가져온 자유주의사상을 반겨주지 않았다.
러시아 민중을 전제정치에서 해방시키려는 포부를 가진 청년 장교들은 삼천
명쯤 되는 반란군을 모아 차르에게 총부리를 디밀었다. 1825년 12월 14일
일어난 데카브리스트당 반란이다. 알렉산드르 1세 1825년 12월 14일 일어난
데카브리스트당 반란이다. 알렉산드르 1세를 뒤이어 니콜라이 1세가 새로 황제
자리에 오르는 날이었다. 데카브리스트는 러시아 달력으로 12월을 말한다.
반란군은 변변히 싸워 보지도 못하고 포위공격을 당했다.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보드카와 빵을 주며 격려했지만 그들은 민중의 힘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고 방법도 몰랐다. 그래서 굶주림과 추위에 떨다 총 맞아 죽거나
붙잡혀 총살당했다. 한겨울에 날아든 제비 떼는 이렇게 해서 모두 얼어죽고
말았다.
첫날부터 반란을 겪은 니콜라이 1세는 또 그런 일이 일어날까 겁이 나서
황제 자리를 지킨 30년 동안 자유주의사상을 무지막지하게 탄압했다. 그러나
자유주의사상은 자꾸 밀려들어와 러시아에도 서유럽과 같은 의회정치를
들여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식인 집단이 생겼다. 가난과 학대를 견딜 수 없게
된 농노들은 곳곳에서 수십 차례나 폭동과 반란을 일으켰다. 이런 가운데
알렉산드르 2세가 황제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는 제법 현명한 사람이어서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산업을 발전시키겠노라고 약속했다.
알렉산드르 2세는 1861년 농노제도를 폐지하고3년 뒤에는 지방자치의회인
젬스트보를 설치했다. 또 재판제도를 손질하고 귀족이든 평민이든 모두
군복무를 하도록 징병제도를 뜯어고쳤다. '해방자 황제' 알렉산드르 2세는 이런
과감한 개혁을 했지만 민중의 생활이 금방 눈에 띄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농민들은 형식상으로는 해방을 얻었지만 새로운 돈벌이를 찾은 것은 아니었고
자기네의 대표를 뽑을 권리를 받지도 못했다. 그러나 농노해방 덕분에 시간이
흐르면서 러시아 사회는 크게 바뀌게 되었다.
자본주의 근대산업이 발전하려면 두 가지가 있어야 한다. 하나는 생산에
필요한 기계와 공장과 원료들, 다시 말해 자본이다. 다른 하나는 실제로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 곧 노동자이다. 노동자는 노예가 아니라 자본가와
근로계약을 맺고 임금을 받으면서 일할 수 있는 자유인인 동시에 "팔
것이라고는 노동력밖에 없다"는 면에서도 자유인이다. 알렉산드르 2세 덕분에
'토지와 신분제도의 속박'에서 풀려난 농민들은 돈을 벌기 위해 공장이 있는
도시로 옮겨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러시아 정부는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나라에서 엄청나게 많은 자본을 빌려 왔다. 러시아에도 이렇게 해서
자본주의 근대산업이 생겨났고 그와 더불어 임금노동자 집단이 형성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정치는 1881년 갑자기 멈추어 버렸다. 어떤
테러리스트가 폭탄을 던져 '해방자 황제'를 죽였기 때문이다. 그 뒤를 이은
알렉산드르 3세와 니콜라이 2세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고 했다.
막 싹튼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금지하고 자유주의 지식인들을
박해했다. 대학의 자치권도 빼앗아 버렸다. 지방자치의회도 활동할 수 없도록
묶어 버렸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제 그런 방법으로 다스릴 수 없는 나라였다.
러시아 산업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다. 19세기 마지막 20년 동안
공업생산이 두 배로 불어났다. 시베리아를 가로지르는 철도가 생겼고 도시에는
큰 공장이 앞다투어 들어섰다. 그리고 그런 만큼 도시에서는 머지않아 러시아
전제정치를 뒤집어엎을 새로운 사회계급이 빠르게 성장했다. 바로
노동자계급이었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주로 큰 공장 주변에 몰려 살았다. 같은
시기 독일은 산업이 러시아보다 훨씬 앞선 나라였지만 노동자들 가운데
14%만이 종업원이 5백 명 넘는 큰 공장에서 일했다. 그런데 러시아에서는 그
비율이 35%에 가까웠다.
노동자들은 농노 시절과 다름없이 가난하고 비참했다. 12시간 넘게 일하면서
좁고 더러운 방에서 남녀노소가 한 덩어리로 엉클어져 밥을 먹고 잠을 잤다.
티푸스와 콜레라를 비롯한 전염병이 쉴 새 없이 나돌아 생명을 빼앗아 갔다.
산업재해와 직업병에 대해서도 아무 대책이 없었다. 자본가들은 실컷
부려먹고도 마음 내킬 때 주고 싶은 만큼만 임금을 내놓았다. 글을 읽을 줄
아는 노동자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불만은 많았지만 어떻게 해야 자기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지를 몰랐다. 정말 참을 수 없을 때는 폭동을 일으켰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독한 보드카를 마시고 만사를 잊어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농민들도 다르지 않았다. 당시 러시아 사람 열 가운데 여덟이 농민이었다.
굶어 죽으나 싸우다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느끼는 때 농민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때로 한 지역을 점령하고 지주들을 죽였다. 그러나 차르
군대를 당해 날 수는 없어 번번이 반란은 실패로 끝났다. 군대도 밑바닥이
흔들리고 있었다. 농민의 아들인 병사들은 형편없는 대우를 받으면서 힘든
일을 하고도 귀족 장교들한테서 멸시와 설움을 당하였다. 그러니 그들이
남몰래 반역을 꿈꾸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을 터전 삼아 19세기 막바지에 차르체제에 반대하는 세 갈래
정치세력이 움텄다. 나로드니키와 마르크스주의자와 온건한 개혁주의자들이다.
가장 두드러지게 일을 벌인 것은 나로드니키였다. 나로드니키는
인민주의자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꼭 들어맞는 번역은 아니다. 그들은
1860년대와 1870년대에 농촌으로 뛰어들어 농민들을 깨우치려고 했다.
"농민들은 타고난 무정부주의자이다. 농민의 혁명 에너지를 터뜨리는 데는 단
하나의 불꽃만 있어도 충분하다. 청년들이 농촌에 뛰어들어 그 불꽃을 던져라!"
혁명가 바쿠닌의 이런 가르침에 따라 그들은 농민들에게 모든 사회악이
사유재산제도 때문이라고 가르치고 그것을 폐지하기 위해 싸우자고 선동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거꾸로 재산을 늘리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래서 혁명투쟁에
나서기는커녕 돌팔매로 나로드니키를 쫓아버리거나 붙잡아서 경찰관에게
넘겨주었다. 이리하여 정열과 희생정신으로 끓어 넘치던 청년들이 벌인
'브나르도(인민 속으로)' 운동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농민의 혁명 에너지'에
불을 붙이는 데 실패한 나로드니키는 도시에 돌아와 수많은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폭력과 테러로 차르체제를 뒤집어엎는 쪽으로 방법을 바꾼 것이다.
그들은 정부의 높은 관리를 여럿 죽였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알렉산드르
2세까지도 암살했다. 나로드니키는 나중에 사회혁명 당을 만들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별 힘이 없었다.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라고
하는 플레하노프가 그 지도자였다.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마르크스가 쓴 책을
읽고 그 사상을 받아들여 공장 노동자에게 전파하고 그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동자가 아닌 농민을 혁명 주체로 그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동자가 아닌 농민을 혁명 주체로 삼은 나로드니키를
비판하는 데 열을 올렸다. 차르 경찰은 골칫덩어리 나로드니키를 공격하는
마르크스주의자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마르크스주의를 담은 책이 마구
돌아다녀도 눈감아 주었다. 그러자 많은 젊은이들이 이 책을 읽고
마르크스주의자로 변했다. 그들은 1898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만들었다.
이 정당은 당원도 많지 않고 별로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경찰이 손을
대자 핵심인물들은 대부분 나라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 그래서 차르 정부는
가장 위험한 적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또 하나의 정치세력은 온건 개혁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혁명세력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 전제정치를 입헌 군주제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그나마 제대로 아는 자본가와 일부 귀족들이 여기에
참여했다. 하지만 귀족과 지주들은 대부분 변함없이 전제정치를 칭송하면서
낡은 사회질서를 지키려고 했다.
이 세 갈래 정치세력 가운데 어느 편도 민중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러시아
민중은 아직 '아버지 차르'를 쫓아내 버리자는 혁명가들의 과격한 주장을
받아들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상황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진 것이다.
볼세비키와 멘세비키
그러면 그날 20만 군중을 이끌고 동궁으로 간 가퐁 신부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이 셋 가운데 어느 편에 선 인물인가? 이상한 이야기지만 그는
어느 편도 아니었다. 미남에다 아는 것도 많고 웅변도 기막히게 잘한 서른 두
살의 이 젊은 신부는 톨스토이의 사상에 푹 빠진 휴머니스트였을 뿐
개혁주의자도 혁명가도 아니었다. 가퐁은 다만 하루살이처럼 비참하게 사는
노동자들을 성서가 가르치는 대로 살도록 이끌고 싶었다. 따라서 차르에게
대항하려는 마음을 품은 적도 없었다.
당시 러시아에는 '경찰사회주의'라는 것이 있었다. 노동자들이 "사회주의자의
선동에 감염되지 않도록"하려고 경찰이 이것을 만들어 냈다. 수많은 경찰
앞잡이들이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면서 노동자들 속에 들어가 노동운동을 온건한
방향으로 이끌려 했다. 그런데 가퐁 신부는 경찰보다는 "하느님 은총을 받는
교회"가 이 일을 하는 것이 좋다고 열심히 관리들을 설득했다. 남몰래 경찰의
허락을 받은 가퐁 신부는 여러 가지 '건전한 사업'을 벌여 노동자들을 끌어
모았다. '여가 시간을 차분하고 바람직하게 보내기', '도박 안 하기', '술주정뱅이
없애기', '신앙심과 애국심 불어넣기', '근로조건과 노동자 생활을 합법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조직활동' 따위를 목적으로 내걸고 만든 '러시아
공장노동자동맹'은 크게 성공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기계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 거의 모두가 이 조직에 들어왔다. 가퐁은 사회주의 혁명가들보다
훨씬 능수 능란하게 노동자를 끌어 모아 고용주와 싸우면서도 "하느님, 차르를
구해 주소서"라는 노래를 부르게 했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가퐁은 경찰
스파이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1904년 12월 어느 날, 페테르부르크에서 제일 오래된 기관차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났다. 이 공장 노동자들이 근로조건을 개선해달라는 요구를 적어
냈다고 사장이 해고해 버린 것이다. 그러자 노동자들은 파업을 하면서 가퐁
신부에게 자기네를 '자비로우신 아버지 차르'에게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가퐁은 한참을 고민한 끝에 몰래 차르에게 편지를 보내 이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비극은 여기서 싹텄다. 만약 차르가 노동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면 가퐁에게나 차르에게나 다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일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다.
사회주의자와 나로드니키들은 가퐁을 비웃었다. 압제자에게 도움을 청하러
가다니, 마치 전쟁하는 군인이 적에게 승리를 구걸하러 사는 것과 한가지
아닌가? 하지만 그들은 차르에 대한 환상을 깨뜨릴 힘이 없었다. 노동자들이
원했기 때문에 혁명가들도 할 수 없이 대열에 끼어 동궁으로 갔다. 기관차공장
노동자와 똑같은 처지에 있던 다른 노동자들도 이 소식을 듣고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이렇게 해서 조그만 기관차공장에서 일어난 싸움이 엄청난
유혈사태로 번진 것이다.
혁명가들이 무기를 들고 싸우는 동안 가퐁은 나라 밖으로 달아났다. 온 세계
신문기자들이 이 '혁명 지도자'를 만나려고 몰려들었다. 그는 한번도 혁명을
꿈꾸지 않았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혁명가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에
걸맞게 레닌을 비롯한 망명 혁명가들을 만나 무장 봉기를 일으켜 차르체제를
타도해야 한다고 큰소리를 쳤다. 가퐁은 무기를 사서 러시아에 가지고
들어가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다른 일도 모두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한동안 기가 죽어 숨어 지내다가 몰래 귀국해서 다시 경찰과
손을 잡았다. 그러자 1906년 4월 테러를 전문으로 하는 사회혁명 당 당원들이
이 '배신자'를 붙잡아 어는 시골집 서까래에 목을 매달아 버렸다.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인생이었다. 아무튼 가퐁 신부는 1905년 혁명 등장인물
가운데 유일한 희극배우라고 할 수 있다.
차르 정부는 안팎으로 위기에 빠졌다. 러시아와 일본은 조선을 차지하려고
오랫동안 으르렁거리다 전쟁을 벌였다. 다름 아닌 러일전쟁이다. 러시아 육군은
싸우기만 하면 졌다. 게다가 러시아가 자랑삼던 발트함대 마저 1905년 3월
일본 해군에게 전멸 당하고 말았다. 전쟁에서 진 나라에서는 혁명이 일어나기
쉽다. 그래서 전쟁과 혁명은 쌍둥이라고도 한다. 예컨대 노동자와 빈민들이
파리를 점령해서 자기네끼리 혁명정부 파리코뮌을 세운 것은 프랑스 군대가
독일 군에게 항복한 직후인 1871년에 일어난 일이다. 모택동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가운데 장개석이 이끈 국민당 군대와 싸우면서 사회주의혁명을 일구어
냈다. 러시아 군대가 일본군에게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하자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물론이요 온건한 자유주의자들까지도 내놓고 정부를 공격해 댔다.
1905년 혁명에서 가장 힘있게 싸운 것은 노동자들이었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야말로 차르체제가 무엇보다 두려워해야 할 무서운
적이라는 사실도 이때 드러났다. 혁명이 막 터졌을 때 마르크스주의지도자들은
거의 모두 유럽 다른 나라에 가 있었다. 차르 경찰을 피해서 또는 시베리아
유배지를 탈출해서 망명한 것이었다. 그들은 혁명소식을 전해 듣고 러시아로
달려갔다. 그들이 1898년 만든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경찰의 단속 때문에
무너져 버렸다. 나라 밖에서 다시 만든 당도 혁명가들 사이의 의견 다툼으로
쪼개져 있었다. 이 때문에 이들이 당장 혁명을 이끌기는 어려웠다.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혁명을 어떤 방법으로 할 것이지를 놓고
끝없이 싸움을 벌였다. 한편에서는 기회가 올 때까지 힘을 기르면서
기다리자고 했다. 아직 노동자들 수가 너무 적고 사회주의를 이해하는
노동자는 더욱 적으니 노동자계급은 우선 차르 정부와 사우는 자본가계급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정치적인 자유를 보장받아
사회주의를 더 널리 퍼뜨리고 노동자들을 튼튼히 조직해서 사회주의혁명을
준비하자는 주장이었다. 마르토프를 비롯한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노동자계급이 곧바로 정치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자본가계급이 권력을 차지하는 것도 차르체제와 형식은
다르지만 소수자의 독재이기는 마찬가지라고 믿었다. 서유럽과는 달리
러시아에서는 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을 노동자계급과 농민이 연합해서
한꺼번에 해치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차르 정부를 타도하고 세울 정부를
가리켜 레닌은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또는 "절대다수의 소수에
대한 독재"라고 했다. 이 견해를 따른 혁명가들은 스스로를 볼세비키라고 했고
반대파를 멘세비키라 했다. 그리고 레닌을 지도자로 한 혁명가들이 1917년
정치권력을 차지했기 때문에 이 혁명을 10월 혁명 또는 볼세비키 혁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레닌이 언제나 다수파의 지도자였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소수파로 몰린 때가 훨씬 많았다. 하지만 이 두 혁명가 집단이 1903년에 서로
비난하면서 당을 쪼개고 갈라섰을 때 레닌을 지지하는 대의원 수가 조금
많았다. 볼세비키가 1905년 4월 런던에서 제3차 당대 회를 열자 멘세비키는
참가하지 않고 이 대회를 비난하였다. 두 세력은 이때부터 서로 다른 당을
꾸려 나갔다.
이런 가운데 두 당에 다 참여하고 있던 레온 트로츠키가 남보다 먼저
페테르부르크로 뛰어들었다. 그는 여러 노동자 집회에서 차르 정부를 타도하고
임시혁명정부를 세우자고 선동했다. 이 타고난 혁명가는 불같은 웅변과 빼어난
글로 단숨에 노동자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겨우 스물 여섯 나이에
페테르부르크 혁명운동을 이끄는 지도자가 된 것이다. 레닌은 그와 달리 한참
늦게 러시아로 돌아와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조직을 챙기기 시작했다.
소비에트, 그리고 레닌과 트로츠키
러시아가 어디로 가는 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이미 불붙은 혁명을
되돌리기에는 차르 정부가 너무나 무능했고 사회주의 혁명가들 역시 이 불길을
다스려 마음먹은 대로 끄고 갈 힘이 없었다. 5월1일 세게 노동자의 날에
노동자들은 일손을 놓고 거리로 몰려 나와 무기를 들고 군인, 경찰과 맞붙었다.
6월에는 오데사 항구에 닻을 내리고 있던 흑해함대 포템킨호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차별대우에 불만을 품고 있던 병사들이 썩은 음식을
배급받자 더 참지 못하고 들고일어난 것이다. 7월에도 곳곳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10월이 되자 전국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시작했다. 철로 위에는 기관차가
달리지 않았고 전기와 수도가 끊어졌다. 공장 굴뚝에서는 연기가 오르지
않았다. 신문도 나오지 않았고 방송도 들을 수 없었다. 한 마디로 온 나라가
멈추어 선 것이다. 러시아 민중은 빵과 자유를 달라고 외쳤다. 그리고 이런
소망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페테르부르크 공장 노동자들은 백 명에 하나씩 대표를 뽑아
소비에트(평의회)를 만들었다. 소비에트는 노동자들이 만들어 낸 의회이자
집행기관이었다. 소비에트는 "이즈베스차"라는 신문을 만들어 신문과 전기가
끊어져 어둠에 덮인 페테르부르크 시내에 뿌렸다. 소비에트는 이때 임시정부
노릇을 했는데, 뒷날 권력을 손에 넣은 볼세비키는 소련 정치체제를 바로 이런
방식으로 조직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차르 정부는 마침내 시늉으로나마 무릎을 꿇었다.
니콜라이 2세는 입헌군주제 헌법을 제정하여 국민이 뽑은 대표로 의회를
만들겠다고 선언하고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신앙,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겠노라고 약속했다. 이른바 '10월 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말로 한약속일 뿐 차르 정부는 이것을 실천하지 않았다. 그러자
트로츠키는 "이즈베스차"에 그 약속을 믿지 말라고 썼다.
헌법을 주겠다고 한다. 집회의 자유도 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군대는 집회를
포위하고 있다. 언론의 자유를 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예전과 다름없이 검열이
존재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세운다고 한다. 그러나 감옥은 갇힌 사람으로
넘쳐흐르고 있다. ... 전제정치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하지만 우리는 아무 것도 받지 못했다.
젊은 트로츠키는 불같은 연설과 빛나는 글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소비에트를 이끌고 나갔다. 그러나 레닌은 소리나지 않게 조직을 만들었다.
아주 다른 개성을 지닌 이 두 혁명가는 각자 자기 일에 파고들었다.
트로츠키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찾아다녔지만 레닌은 일하기에 좋은 직책을
원했다. 트로츠키는 되도록 많은 사람이 자기를 따르기를 바랐지만 레닌은
수가 적어도 성실하고 말 잘 듣는 집행부를 만들려고 애썼다. '외로운 늑대'
트로츠키는 대중이 갈채를 보내는 영웅이었지만 레닌은 톱니바퀴처럼 정확한
조직의 지도자였다. 트로츠키는 스스로 어떤 조직에도 복종하지 않았고 또
말과 글로 설득할 수 없으면 어떤 조직도 자기 손아귀에 넣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레닌은 볼세비키가 다른 사회주의 정당과 세력을 지배하도록 하려고
골머리를 썩였다. 트로츠키에게 정당은 별 의미가 없었지만 레닌은 잘 짜인
정당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1905년 혁명에서는
오직 트로츠키만이 빛났다.
트로츠키의 말대로 10월 선언은 노동자들을 분열시켜 파업을 깨뜨리기 위한
속임수였다. 노동자들은 마치 차르 정부를 타도하기나 한 것처럼 환호성을
올렸다. 트로츠키가 있는 힘과 재주를 다해 10월 선언이 속임수라고 외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파업을 그만두는 사람이 점점 늘어갔다. 파업을 하느라 임금을
받지 못한 탓으로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비에트는 어쩔 수 없이
파업을 일단 중지하고 10월 선언에서 약속 받은 것을 실제로 이루어 내기 위한
싸움을 시작했다. 정치범 석방과 사면, 신문 검열 폐지와 출판 자유, 하루
8시간 노동제 따위가 당장 이루어야 할 목표였다.
그러나 차르 정부는 약속을 지키는 대신 특공대를 만들어 여러 곳에서
노동자들을 공격했고 노동자들도 무기를 들고 여기에 맞섰다. 소비에트는 다시
파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경찰은 소비에트 간부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
군대는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를 덮쳐 의장 트로츠키를 체포했다. 재판에 넘어간
트로츠키는 시베리아에서 평생 유배생활을 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붙잡히지
않은 혁명가들은 다시 나라 밖으로 빠져나갔다. 페테르부르크 무장봉기는
정부군이 펼친 대공세로 주저앉고 말았다. 모스크바 노동자들이 벌인 총파업도
한가지였다. 여기서는 군대가 마구잡이로 총을 쏴 천 명이 넘게 죽거나 다쳤다.
페테르부르크 동궁 앞에서 벌어진 대학살로 시작된 1905년 혁명은 이렇게 해서
막이 내렸다.
가퐁 신부의 저주가 실현되다
"경험은 바보에게도 가장 좋은 학교"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역사를 보면
경험에서도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숱하게 많다. 니콜라이 2세와 제정 러시아
귀족들이 바로 그렇다. 그들은 자기네가 민중의 피땀을 쥐어짜서 부기영화를
누린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동궁 앞 광장에서 피 흘리며 죽어간
노동자들이 무엇 때문에 그곳에 모였는지, 백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왜
총파업을 벌였는지 진지하게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차르를 위해 찬송가를 부르던 노동자들이 왜 갑자기 정부를 뒤집어엎고
임시혁명정부를 세우자고 선동하는 혁명가들을 따르게 되었는지 되짚어 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얼마 후 역사가 내린 무서운 벌을 피할 수 없었다.
파업과 폭동을 진압하고 나서 차르는 의회선거를 실시했다. 그런데 여기서
차르체제에 반대하는 혁명정당들이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민중이 정부에
등을 돌린 탓이었다. 그러자 차르는 의회가 가진 권한을 다 빼앗아
있으나마나한 껍데기로 만들어 버렸다. 1906년 수상 자리에 앉은 스톨리핀은
10월 선언을 깡그리 짓밟는 악명 높은 반동정치를 폈다. 수상으로 일한 5년
동안 스톨리핀은 무려 4천여 명을 목매달아 죽이고 수만 명을 시베리아
귀양보냈다. 사람들은 스톨리핀이 하도 많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교수대를
두고 '스톨리핀 넥타이'라고 할 정도였다. 스톨리핀이 편 반동정치에 대해서는
뒤에 볼세비키혁명을 다루면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한다.
어쨌든 스톨리핀이 권력을 휘두르는 동안 러시아 사회는 적어도 겉보기에는
퍽 조용했다. 그런데 1911년 어떤 테러리스트가 이 뱃심 좋은 독재자를 암살해
버렸다. 그러자 러시아 민중은 한숨을 돌리고 다시 싸울 채비를 갖추었다.
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이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농민들도 폭동을 일으켰다.
이때 제1차 세계대전이 유럽과 러시아를 덮쳤다. 너무나 무능해서 자기
백성조차 제대로 거두지 못한 차르 정부가 전쟁이라고 해서 잘할 리는 만무한
일이었다. 일할 만한 젊은이는 남김없이 전쟁터로 끌어간 데다 전쟁하는 데 온
힘을 쏟아 넣다 보니 그렇지 않아도 먹고살기 힘들었던 러시아 민중은 굶어
죽지 않고 하루하루 견디는 일도 힘든 처지로 내몰렸다.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게 되겠지만 1917년 다시 혁명이 일어났을 때
차르체제는 마치 썩은 문짝과도 같았다. 레닌과 볼세비키, 그리고 그 뒤를 따른
노동자들이 한 일은 그 썩은 문짝을 한 번 힘껏 걷어찬 데 지나지 않았다.
러시아 민중은 전쟁을 그만두고 빵과 자유를 주겠노라고 한 볼세비키가 권력을
차지하는 것을 지켜보거나 환영했다. 부귀영화를 누렸던 러시아 귀족들 가운데
그나마 운 좋은 사람들만이 땅과 재산을 다 내팽개치고 유럽의 다른 나라로
달아날 수 있었다. 볼세비키에 맞서 싸우거나 나라 안에 숨은 이들은 거의
남김없이 비참한 죽음을 맞아야 했다.
가퐁 신부는 혁명가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한 예언은 그대로 실현되었다.
동궁 앞 광장을 적셨던 노동자들의 피는 결국 차르와 그 처자식들에게 흘러
떨어졌다. 1905년 1월이 오기 전까지 러시아 민중은 '아버지 차르'를 섬겼다.
나로드니키든 사회주의자이든 혁명세력은 한 줌에 지나지 않았고 그 힘은
보잘것없었다. 부질없는 가정이긴 하지만 만약 니콜라이 2세와 제정 러시아
지배층이 조금만이라도 양보를 하고 어느 정도 개혁을 하여 민중의 불만과
고통을 덜어 주었다면 러시아 역사가 크게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ff


사라예보사건
총알 하나가 세계를 불사르다
@ff
사라예보는 우리 여자 탁구선수들이 처음으로 세계대회 우승을 차지한 일로
우리 나라에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도시는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티토가
이끈 유고슬라비아 연방 보스니아의 수도였고 한 차례 겨울올림픽이 열리기도
한 아름다운 곳이다. 그러나 유고 연방이 해체되면서 세르비아 사람과
크로아티아 사람, 그리고 회교도들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 지금은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사라예보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그런데
갑자기 총소리가 한가로운 거리를 뒤흔들었다. 길모퉁이를 돌던 호화로운
승용차 한 대가 잠깐 멈칫거렸다. 그리고 거기에 타고 있던 사람 둘이 총에
맞아 나란히 쓰러졌다. 다름 아닌 오스트리아 제국 황태자 페르난디트와 아내
조세핀이었다. 총을 쏜 사람은 열 아홉 살 먹은 세르비아 청년 가브릴로
프린시프였다. 프린시프는 곧바로 붙잡혔고 황태자 부부는 15분 남짓 지나
숨을 거두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사라예보사건이다.
프린시프는 폐결핵을 앓고 있던 허약한 젊은이였는데 자신이 세르비아
사람인데도 오스트리아 국적을 가져야 하는 현실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세르비아는 중세기에 큰 나라를 이루었지만 1389년 오스만 터키에게 무너져 옛
영광을 잃어버렸다. 그후 세르비아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리저리 찢어져 러시아,
오스트리아, 터키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1878년 러시아와 터키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틈타 터키가 지배하던 지역 세르비아 사람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켜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나 보스니아 지역은 1908년 오스트리아 제국에
합병 당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세르비아 사람들은 오스트리아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굴복하지 않고 싸워 끝내
독립을 찾으려 한 세르비아 사람들의 민족주의는 젊은 프린시프의
가슴속에서도 뜨겁게 불타고 있었다.
한편 페르난디트는 "위대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명예"를 한 몸에 짊어진
야심만만한 황태자였다. 그는 이날 가까운 곳에서 열린 육군 훈련을 지켜보고
돌아가는 길에 사라예보에 들렀다. 아내 조세핀은 보헤미아 백작집안
딸이었는데 신분이 낮아 황태자비에 걸 맞는 대접을 받지 못하는 처지였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 상류사회 귀족들은 이 여자를 따돌렸고 왕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나라 황태자가 제 나라에서는 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황태자비를 데리고 잔뜩 위엄을 부리면서 보스니아를 찾은 것을 보고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프린시프는 이 같은 증오와 원한을 실어 오스트리아 황태자에게 총을
쏘았다. 그런 점에서 이 사건은 우리 안중근 의사가 조선 침략을 주도한
이등박문을 사살한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프린시프는 자기가 한
일이 어떤 소용돌이를 몰고 올 것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다만 조국
세르비아가 다른 민족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랐을 뿐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바싹 마른 들판에 던져진 한 점 불씨와 같았다. 프린시프가 쏜
총알은 세상을 단숨에 집어삼킬 것처럼 무서운 전쟁으로 번져 나가 스스로
인류사회를 이끌어 가는 문명세계라고 자랑하던 유럽을 피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사라예보사건은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수없이 많은 살인사건
가운데서 첫손꼽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유럽의 화약고 발칸반도
황태자가 죽었는데도 오스트리아 왕가는 변함없이 냉담했다. 축복 받지 못한
결혼 때문에 살아 있을 때도 구박을 받았던 황태자 부부는 죽어서도
찬밥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황제는 물론 가까운 친척들도 장례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졸지에 부모를 잃어버린 세 아이만 웅장한 왕궁 후미진
방에서 슬피 울었을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때 화약냄새와 피비린내를 잔뜩
머금은 먹구름이 유럽대륙을 뒤덮기 시작했다.
사라예보사건이 일어난 때 유럽 나라들은 크게 보아 두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고 그 둘이 날카롭게 마주친 곳이 바로 '유럽의 화약고' 발칸반도였다.
발칸반도에는 오늘날 루마니아, 알바니아, 그리스, 불가리아, 유고 등 여러
나라가 몰려 있다. 중세기부터 터키가 지배한 이 곳에서는 19세기 막바지에
이르러 민족운동이 세차게 일어났다. 게다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강대국들이 눈독을 들인 탓으로 외교분쟁과 전쟁이 끊일 날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발칸의 심장부인 사라예보에서 사건이 터진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1867년 헝가리 지주계급과 함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만들었다. 오스트리아 왕실은 중세기에 동유럽 일대를 지배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광'을 되살리려는 야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러시아의 힘이 발칸반도에 미치지 못하도록 막아내야 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는 동유럽 여러 나라 슬라브계 민족들이 러시아를 중심으로
단결하자는 이른바 '범슬라브주의'에 휩쓸리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런 판에 황태자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게 살해당하자 오스트리아는 이를
세르비아 왕국과 범 슬라브주의자들이 벌인 짓으로 단정하고 세르비아에
보복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러시아는 이를 비난하면서 세르비아
뒤에 러시아가 있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나섰다. 만약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침략하도록 내버려둔다면 동유럽 슬라브계 민족을 볼 낯이 없는
데다 발칸반도를 손에 넣으려고 쏟아 부은 노력이 물거품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편 1871년에 통일을 이루어 새로운 강대국으로 떠오른 독일은
오스트리아 편에 섰다. 두 나라가 같은 말을 쓰고 문화도 비슷한 데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비록 이웃나라지만 황태자가 살해당한 일을 두고 크게 화를
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프랑스는 앙숙인 독일이 힘을
키우는 것을 막아 보려고 영국 러시아와 3국 협상을 맺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에 엄청나게 많은 돈을 꾸어 주기까지 했다. 그래서 "세르비아와
러시아는 친구이고 프랑스는 러시아와 동맹을 맺은 나라"라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 영국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만약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면 프랑스를 돕겠다"고 공식 선언하고 나섰다. 유럽을 뒤덮은 불길한
먹구름은 날이 갈수록 짙어만 갔다.
1914년 7월 23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띄워 보냈다.
"오스트리아에 반대하는 단체를 해산하고 그런 출판물을 금지할 것",
"오스트리아에 반대하는 운동을 뿌리뽑기 위해 협의회를 만들고 암살 관련자
재판에 오스트리아 대표를 참여시킬 것" 등 세르비아 전부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독일은 "동맹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낸
최후통첩이 온건하고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며 거들고 나왔다. 세르비아는 그
가운데 몇 가지를 받아들이겠다고 대답했다. 협상은 깨졌고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이렇게 해서 먹구름은 폭풍우로 변하여 유럽
대륙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하니만 그 전쟁이 예전 전쟁과 어떻게 다를
것인가를 정확하게 내다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장 먼저 동원명령을 내린 나라는 러시아였다. 1905년 '피의 일요일'에
시작된 러시아 혁명운동은 잠시 숨을 죽였다가 스톨리핀이 죽은 1911년부터
다시 고개를 들었다. 파업과 농민반란, 나로드니키와 사회주의자들이 내놓고
벌인 혁명운동에 진저리를 치고 있던 러시아 정부는 발칸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을 두손들어 반겼다. 다른 나라와 싸우려고 온 국민이 무기를 들고나서면
혁명운동이 설자리가 없어지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니콜라이 2세는 집안에
있는 적을 피하기 위해 기꺼이 동원명령을 내렸다. 독일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독일 정부는 러시아를 향해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겨냥한 동원명령을
취소하지 않으면 자기네도 육군을 동원하겠노라고 엄포를 놓았다. 러시아는
물론 이것을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러자 독일 정부는 선전포고를 내놓았다.
당사자인 세르비아는 뒷전으로 밀려나 버리고 강대국들 사이에 국제전이
벌어진 것이다.
독일은 프랑스를 보고 "중립을 지키면서 독일 군에게 군사요새를
제공"하라고 요구했다. 이 괴상한 요구를 들어줄 이유가 없었던 프랑스 정보는
국방장관에게 육군을 동원할 권한을 내주었다. 독일 군은 기다렸다는 듯
프랑스 국경을 넘어 파도처럼 밀어닥쳤고 내친 김에 벨기에와 룩셈부르크까지
쳐들어갔다. 영국은 독일이 중립국 벨기에를 침략했다는 것을 구실 삼아
전쟁에 뛰어들었다.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죽은 일을 이유로 들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전쟁이 터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에게도 조국은 있다.
모든 나라 정부는 똑같은 구호를 내걸었다. "조국을 위해 총을 들자!" 그리고
자기네가 전쟁에 뛰어든 것을 합리화하는 선전책자를 만들어 뿌리면서
지원병을 모집했다. 그런데 20세기 전쟁은 단지 정부끼리 벌이는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감히 정부가 내린 결정에 반대하고 나선 조직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 여러 나라 사회주의정당들이 손잡고 만든
제2인터내셔널은 머지않아 국제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내다보고, 이 전쟁이
영토를 넓히고 식민지를 한 뼘이라도 더 많이 차지하는 데 혈안이 된 부르조아
정부 사이의 제국주의전쟁이라고 선언했다. 이 조직은 만약 전쟁이 터지면
각국 노동자계급이 일제히 들고일어나 정쟁을 사회주의혁명으로 전환하자고
뜻을 모았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내던 날, 사회주의자들은 파리, 빈,
런던, 베를린 등 유럽 큰 도시에서 시위를 벌였다. "평화! 평화! 전쟁 반대!"
평화를 요구하는 시위행렬이 거리를 휩쓸었다. 7월 25일 독일 사회민주당
기관지 "전진"에 실린 논설에서 독일 사회주의자들은 자기네 정부와는 달리
이렇게 주장했다.
프란츠 페르난디트와 그 아내가 한 청년이 쏜 총에 맞아 피를 흘렸기 때문에
바야흐로 수천 수만 노동자 농민이 피를 흘리게 되었다. 이 청년이 한 일이
미치광이 같은 범죄행위에 파묻히려는 것이다. 최후통첩은 그 말투와 요구
조건이 다 너무나 염치가 없고 뻔뻔스럽다. 자기 나라 국민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각오를 하지 않는 한 세르비아 정부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일단 전쟁이 시작되자 사태는 제2인터내셔널이 전혀 원하지 않았던
쪽으로 흘러갔다. 독일 사회민주당 의원들은 전쟁비용을 마련하지 위해 정부가
빚을 얻도록 하는 법률안에 "4백만 노동자의 이름으로" 찬성표를 던졌다.
"오스트리아의 터무니없는 야망 때문에 우리 독일 군이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려서는 안 된다"고 한 당중앙위원회 성명서는 그저 듣기 좋은 말에 지나지
않았다.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침략국 독일의 사회주의자'와 협력하지를
거절했다. 러시아 좌익노동자당을 대표해서 "위대한 러시아 민주주의는 공격해
오는 적을 단호하게 물리칠 것임을 확신한다"고 연설한 케렌스키는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합법활동을 통해 세력을 키운 영국 노동당도 전쟁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는 했지만 노동자와 열성당원들이 앞다투어 입대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조국이 없다.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일찍이
마르크스는 외쳤다. 그러나 유럽 노동자들은 너나없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전선으로 달려갔다. 전쟁은 제일 먼저 사회주의자들이 만든
국제조직을 날려 버렸다.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오로지 내셔널리즘만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제2인터내셔널이
원래 결의한 그대로 전쟁을 사회주의혁명으로 바꾸려고 노력했고 또 성공을
거둔 것은 레닌이 이끈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전쟁이
3년 넘게 지난 후였다.
사회주의 혁명운동 때문에 골머리를 썩었던 각국 정부는 한숨을 돌렸다.
그래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얼굴 가득 인자한 웃음을 지우며 국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쟁이 시작되면 모든 당파가 사라지고 우리는 이제 모두 형제가 된다.
평화로운 시대에는 모든 당파가 나를 공격했지만 이제 나는 진심으로 그들을
용서하노라.
유럽전쟁에서 세계전쟁으로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과학기술을 눈부시게 발전시킨 유럽 사람들은 다른
대륙을 모조리 정복했다. 그리고는 유럽만이 문명세계라고 하면서 아시아,
아프리카 수억 민중을 지배했다. 그들은 유럽을 다른 대륙과 다르게 만든 것이
바로 자기네가 가진 과학기술이라고 자랑했다. 그런데 전쟁이 터지자 꼭
그렇지만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훌륭한 과학기술을 써서 만든 새로운
무기일수록 "가능한 한 짧은 시간에 최대한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더
야만스러운 무기였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과학기술은 화려한
문명뿐만 아니라 잔인하기 짝이 없는 야만과도 손잡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끔찍스러운 대량학살이 처음으로 일어난 전투는 프랑스 세느강 지류 마른강
부근에서 벌어진 이른바 '마른 전투'였다. 독일 군과 프랑스군은 이 전투에서
서로 엄청난 총아로가 포탄을 퍼부었는데, 그 양이 일본과 러시아가
러일전쟁에 쓴 것과 맞먹을 정도였다. 두 나라 참모본부는 원래 포탄을 하루
2만 발 쓸 계획을 세웠지만 실제로는 그 스무 배를 쓰고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발트해 근처 '탄넨베르크전투'에서 독일 군은 1만2천 명이 죽거나 다쳤다. 그와
맞선 러시아군은 열 배나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이렇게 큰 전투를
치렀는데도 전체 전쟁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소모전에 지친 각국 군대는 참호를 파고 장기전을 벌일 준비를
갖추었다. 군인들만 괴로운 것이 아니었다. 후방 국민들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전쟁비용을 대야 했다,. 하지만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일처럼 이 일은
끝이 없었다. 현대전쟁은 전선에서 군인들끼리 벌이던 옛날 전쟁과는 사뭇
달랐다.
이런 가운데 더 많은 나라들이 스스로 전쟁에 뛰어들거나 마지못해
끌려들어왔다. 흑해를 두고 오래 전부터 러시아와 맞서 온 터키는 독일과
한패가 되었다.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 영토가 탐나 1915년 영국과 프랑스가
이끄는 연합국 편에 가담했다.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를 차지하려고 독일과
손잡고 세르비아로 쳐들어갔다. 중립을 내세우던 루마니아는 자기네 영토를
지키려고 연합국 편에 들어갔다가 독일,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연합군에게 온
나라가 짓밟히는 비극을 겪었다. 그리스는 불가리아가 동맹국인 세르비아를
침략하자 연합국 진영에 참가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인들끼리 벌인 전쟁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온 세계를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황태자와는 정말 아무관계도 없는
나라들까지 전쟁에 뛰어들었다. 터키가 지배하던 아라비아반도에서는 당시
'메카의 수호자'로 아라비아 민중에게 존경받던 후세인과 그 아들들이 사막
유목민들을 불러모았다. 이들은 아라비아반도를 터키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영국군과 손잡고 터키 군대와 맞붙었다. 영국은 전쟁을 도와주면
독립시켜 주겠다면서 인도 사람들을 꼬드겼다. 그러자 영구의 식민지배에
대항해 싸우던 인도 민족주의자들이 이 약속을 믿고 영국을 힘껏 도왔다. 물론
나중에 영국 정부는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동아시아라고 해서 조용할 리 없었다. 일본은 여러 해 전에 미국과 뒷거래를
해서 미국이 필리핀을 차지하는 데 시비를 걸지 않는 대신 조선을 차지하기로
했으며 실제로 청나라와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까지 벌이면서 조선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그 정도로 만족할 수가 없어서 중국 대륙에까지 손을
뻗었다.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는 것을 명분 삼아 1914년 8월 독일
동양함대를 공격하여 궤멸시켰다. 그리고는 중국 청도와 남태평양에서 독일이
가지고 있던 이권을 모두 빼앗아 가졌다.
미국 정부는 전쟁에 끼어 들지 않는다는 원칙을 거듭 밝히고 이른바
'명예로운 고립'을 선택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어떻게 해서든 미국을
자기편에 세워야 했다. 외무장관 발포어가 미국으로 달려갔다. 그는 미국
정치에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유태인들을 움직여 보려고 장차 팔레스타인에
유태인 나라를 세우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이 바로 발포어선이다.
아라비아 사람에게는 독립을 약속하고 유태인에게는 그 땅에 새 나라를 세워
주겠다고 한 것이다. 30년 뒤 유태인들은 정말로 이스라엘을 세워
팔레스타인을 점령했고 그 때문에 여러 차례 중동전쟁이 일어났는데 그 불씨를
준 것이 바로 발포어였다. 이 문제는 팔레스타인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다시 다루기로 한다.
미국 정부는 어쨌든 구경만 할 수는 없게 되었다. 1915년 5월 독일 잠수함이
영국 장삿배 루시타니아호를 격침시켰는데 그 배에 타고 있던 미국사람 백
몇십 명이 떼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17년 독일 잠수함이 군함이든
아니든 연합국 쪽 배는 무조건 공격하는 작전을 쓰자 마침내 독일과 국교를
끊고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은 이때부터 연합국 군대에 엄청나게
많은 전쟁물자를 안겨 주었다. 이렇게 해서 유럽 나라들끼리 시작한 전쟁은
세계대전으로 번져 나갔고 5대양 6대주에 화약연기와 피비린내가 나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다.
전쟁은 끝나도 오지 않은 평화
전쟁은 많은 것을 뒤바꿔 놓았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일은
아무래도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이라 해야 할 것이다. 제정 러시아 정부는
반란과 혁명을 피하려고 서둘러 전쟁에 뛰어들었지만 결국 제 무덤을 파고
말았다.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낡은 전제국가의 무덤 위에 붉은 깃발을
꽂았다. 그 혁명은 군인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막이 올랐다.
1917년에 접어들 무렵 제정 러시아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러시아
병사들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독일 군이 아니라 추위와 굶주림이었다.
병사들은 진흙구덩이 참호에서 옷도 신발도 먹을 것도 제대로 없이 겨울을
지내야 했다. 가난에 지친 노동자 농민들은 땅과 빵과 평화를 요구하면서
곳곳에서 파업과 폭동이 일으켰다. 그러나 차르 정부는 그들의 소원을 들어줄
마음도 능력도 없었다. 참다 못한 병사들은 장교들을 쏘아 죽이고 전선에서
도망쳐 나왔다. 마침내 페트로그라드(독일과 전쟁을 시작한 뒤 독일식 이름인
페테르부르크를 이렇게 고쳤다) 주둔군이 마침내 차르에게 총부리를 들이댔다.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는 왕좌에서 끌려 내려왔다. 그런데
케렌스키가 이끈 임시정부는 민중의 바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쟁을
계속했다. 소비에트라는 권력기관을 만든 사회주의 혁명가들과 노동자들은
임시정부마저 무너뜨리고 볼세비키 지도자 레닌에게 권력을 맡겼다.
인류역사에서 처음 보는 사회주의 국가권력이 탄생한 것이다.
레닌은 전쟁의 소용돌이를 틈타 권력을 잡은 다음 그 전쟁에서 재빨리 빠져
나왔다. 트로츠키를 비롯한 혁명가들이 너나없이 반대를 했는데도 레닌은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1918년 3월 독일과 단독강화조약을 맺었다. 그것도 독일
쪽 요구를 거의 다 들어주는 굴욕을 참으면서. 다른 혁명가들은 유럽 다른
나라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러시아 사회주의 권력이 자본주의
강대국의 공격을 견뎌 낼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레닌은 유럽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아도 러시아에 이른바 '일국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고
자기 주장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러시아와 강화조약을 맺어 한숨 돌린 독일은 동부전선 병력을 빼서 프랑스와
싸우는 서부전선으로 모아 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프랑스 솜므 부근 전투에서
연합국 군대에 크게 패하여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게다가 1918년 9월
불가리아가 마케도니아전투에서 대패하자 휴전협정을 맺어 버렸다. 이렇게
되자 그 동안 마치 독일 군이 싸우기만 하면 이기는 것처럼 국민을 속여 온
독일 정부도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위대한 독일제국이 세계를
제패한다"고 하던 허황한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 대신 하루라도 빨리
휴전을 하든지 총으로 자살하는 수밖에 없다는 절망감이 널리 퍼져 나갔다.
독일에도 마침내 혁명이 찾아들었다. 1918년 10월 북부 독일 키일 군항
해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러시아를 본떠 재빨리 노동자,
병사 평의회를 조직했다. 11월 9일에는 베를린 노동자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나
빌헬름 2세를 황제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독일 공화국 수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이 혁명과 더불어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세상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고 평화도 오지 않았다.
유럽 강대국들은 세계를 지배하려고 서로 싸웠다. 유럽 밖에서 보면 이긴
쪽이나 진 편이나 제국주의 침략자이기는 매한가지였다. 미국 대통령 윌슨은
"크고 작은 모든 나라의 정치적 독립과 영토 보존"을 약속했다. 수억 식민지
민중은 큰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쟁에서 진 나라가
지배하던 지역에서만 통하는 약속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저항한 유럽
약소민족은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등 독립국가를 세웠다.
아라비아 사람들은 터키를 물리쳤지만 영국과 미국이 벌인 분열공작에 휘말려
요르단, 시리아 등 여러 나라로 분열되었으며 정치적으로는 독립했지만
실제로는 미국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아라비아 사람들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영국은 인도를
독립시키겠다고 약속해 놓고서는 뻔뻔스럽게도 독립운동을 더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일본은 조선 사람들의 3.1독립투쟁에 오직 총칼로만 대답했다. 중국
민중도 5.4운동을 비롯하여 힘있게 반일투쟁을 벌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유럽
강대국과 미국도 중국 대륙 한 귀퉁이라도 뜯어먹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기는
일본과 마찬가지였다.
미국과 영국 등 전쟁에서이긴 나라들은 자기네를 중심으로 세계질서를 다시
짰다. 그러나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식민지 민중에게는 아무런 좋은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밀려났지만 다른 나라의 식민지를
빼앗으려는 제국주의 강대국들 사이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겨우
20년 뒤에 훨씬 더 무시무시한 전쟁이 세계를 뒤흔들게 된다. 이 두 세계전쟁
사이 20년 세월은 결코 평화시대가 아니라 더 끔찍한 재앙이 폭발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던 것이다.
달이라도 삼킬 제국주의
이제 사라예보사건을 일으킨 주인공에게 잠깐 눈을 돌려보자. 폐결핵을 앓고
있었던 대학생 프린시프는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사형선고만은 모면하였다. 그러나 자기가 불지른 전쟁이 끝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18년 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세르비아 사람들은 이 전쟁이
끝난 뒤 그토록 그리던 독립국가를 세웠다.
하지만 그들이 평화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프린시프의 고향인 보스니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치 독일에게 침략 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 고부터
1980년대 막바지까지는 티토가 이끈 사회주의 유고연방에 들어가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동유럽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보스니아 지역은 또다시
전쟁터로 변했다. 세르비아 사람과 크로아티아 사람, 그리고 회교도들이 싸움을
벌였기 때문이다. 벌써 몇 년째 계속 된 이 전쟁으로 사라예보는 폐허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세르비아계 군대는 유엔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가
평화협정을 맺게 하려고 애쓰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틈만 나면 다른 민족을
공격하고 주택가와 시장을 폭격해서 많은 민간인을 죽이곤 했다. 강대국에게
그토록 큰 고통을 당하면서 살아온 민족이 자기보다 약한 민족을 괴롭히는
것을 보면 민족주의가 원래부터 두 얼굴을 가진 사상이라는 말이 맞는 모양이.
하지만 가브릴로 프린시프가 목숨 바쳐 따랐던 것이 이런 추악한 민족주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1차대전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 전쟁이 사라예보사건에서 시작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사라예보사건이 제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약 프린시프가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쏘지 않았다면 그런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전쟁이 일어난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이다.
힘센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정복하여 지배하는 일은 늘 있었다. 고대에는
보물을 약탈하고 여자와 노예를 잡아오려는 정복전쟁을 벌였다. 세계를
제패하려는 지배자의 야심 때문에 벌어진 침략전쟁도 많이 있었다. 그런데
20세기 제국주의는 시저나 징기스칸 시대에 일어난 정복전쟁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크게 다르다. 식민지를 가장 많이 가졌던 영국이나 프랑스는 단순한
군사대국이 아니라 제일 먼저 산업혁명을 통해 자본주의체제를 세운 나라였다.
한 발 늦게 식민지 쟁탈전에 생긴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과 이론이
있지만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 발전과 관련지어 설명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을
듯하다.
19세기가 끝날 무렵 이들 나라에서는 자본 규모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동시에 몇 안 되는 자본가들의 손에 그 자본이 집중되었다. 그런데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일본 모두가 기계화된 대규모 공장이 쏟아내는 상품을 다 팔아
치우기에는 땅도 좁고 인구도 너무 적었다. 게다가 그런 대량생산을 뒷받침할
값싼 원료를 나라 안에서 다 구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생산을 줄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전거가 달리지 않으면 쓰러지는 것처럼 자본가도 계속해서
이윤을 얻어 자본을 키우지 않으면 다른 자본가와 경쟁해서 이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업국가의 자본가들은 더 넓은 시장과 더 값싸고 풍부한
원료를 찾아서 나라 밖으로 달려나갔다. 자본가들이 돈으로 정부를 쥐락펴락
했고 또 자본가들이 이익이 남는 사업을 찾지 못하면 결국 자기네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밀려나게 될 터라 정부도 자본가들을 힘껏 도왔다.
산업국가 자본가들은 돈벌이를 찾아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가장 뒤떨어진
지역까지 빠짐없이 손을 뻗쳤다. 그들의 정부는 영업활동을 보호한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워 군대를 보냈다. 일단 군대가 발을 들여놓으면 그곳은 새로운
식민지가 되었다. 말을 듣지 않는 원주민은 무자비하게 죽여 버렸다. 한번
식민지로 삼은 곳에는 다른 나라 군대가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는 그럴
듯한 이름을 가진 조직을 만들어 식민지에 있는 귀중한 자원을 마구 빼앗아
갔다. 영국이 만든 동인도회사니 일본이 만든 동양척식회사니 하는 것이 다
그런 기관이었다.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이렇게 해서 지구 표면을,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한
조각도 남김없이 쪼개어 점령했다. 인도, 이집트, 수단, 홍콩,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를 먹어치운 대영제국은 스스로를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자랑했다. 프랑스는 그보다는 조금 적지만 베트남과
알제리 등 인도차이나반도와 북아프리카를 차지했다. 독일은 남서쪽과
동쪽에서 아프리카 대륙을 먹어 들어가는 중이었고 벨기에는 콩고를,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지배했다. 아시아에서 하나뿐인 제국주의나라 일본은
조선을 침략한 다음 중국 대륙에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일본에 져서 조선에서
밀려난 러시아는 발칸반도에서 얼지 않는 항구를 얻기 위해 애쓰고 있었지만
별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한때 세계의 중심이라고 큰소리쳤던 중국은
제국주의 나라들이 몰려와 제 살을 마구 뜯어먹는데도 변변히 소리도 못
지르는 반식민지 종속국 신세로 떨어졌다. 미국은 자기네 땅이 워낙 넓은 탓에
한동안은 서부개척을 내세우며 인디언이 살던 땅을 빼앗는 일에 몰두했다.
그리고 그 일이 끝나자 멕시코 땅을 빼앗고 라틴아메리카에 손을 뻗쳤다.
하지만 너무 늦게 나선 탓에 1898년 스페인에게서 필리핀을 빼앗은 것을 빼면
별로 가진 것이 없는 셈이었다.
'임자 없는 땅'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그나마 좋았다. 지구 표면을 모조리
정복하고 나자 문제가 심각해졌다. 이제 식민지를 넓히려면 이미 다른 나라
군대가 차지하고 있는 곳을 빼앗는 수밖에 없었다. 특히 뒤늦게 산업화를
시작한 독일과 일본이 그런 야심을 가지고 군사력을 기르는 데 열심이었다.
이렇게 서로를 향해 으르릉 거린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그때그때 이해관계에
따라 이리저리 동맹을 맺어 기회만 나면 한판 싸움을 벌일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유럽의 화약고라는 발칸반도에서 프린시프가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쏘아 죽인 것이다.
사라예보사건은 전쟁에 불을 붙이는 도화선 구실을 했지만 전쟁의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일이 아니었더라도 당시 국제정세로 보아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꼭 1914년이었을 필요도 없고 황태자가 반드시
죽었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도 없다. 전쟁을 처음 시작한 나라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가 아니었어도 좋다. 하지만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식민지를 넓히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남의 것을 빼앗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에
전쟁은 피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보면 제1차 세계대전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인 것이다.
역사는 언제나 우연한 사건으로 뒤죽박죽이 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그런
우연한 사건들 가운데서도 뚜렷한 인과관계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사라예보사건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삼아 터져
나온 제국주의전쟁은 현대문명이 지닌 추악한 속살을 발가벗겨 보였다. 돈과
권력에 눈이 어두운 인간이 과학기술로 무장하고 벌인 현대전쟁은 칼과 창을
들고 하던 옛날 정쟁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참혹한 재앙을 불러들였다.
그 전쟁은 '인간을 말살하는 공장'이었다. 그런데도 인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보다 더한 전쟁을 또 한번 벌였고 오늘날까지고 '위대한 조국을
위하여'라느니 어쩌니 하는 달콤한 말로 민중을 현혹하여 싸움터로 내몰려는
집단이 곳곳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 과학기술은 발전하지만 인간정신에는
진보가 정말 없는 것일까?
@ff
러시아 10월 혁명
세계를 뒤흔든 붉은 깃발
@ff
핀란드역에서
1917년 어느 봄날 러시아 페트로그라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전쟁을
시작한 뒤 독일식 이름인 페테르부르크를 이렇게 고쳤다) 교회 핀란드 역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 작고 초라한 정거장을 핀란드선 철도 러시아 쪽
종점이었다. 이윽고 핀란드에서 러시아 국경을 넘어 열차 한 대가 도착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붉은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는 가운데 군악대가
프랑스혁명 노래인 '라 마르세에즈'를 연주했다. 핀란드 역에는 러시아 황제가
쓰던 전용 휴게실이 있었는데 거기서 모자를 쓰고 코트 앞단추를 풀어 젖힌
작달만한 남자가 커다란 장미꽃다발을 들고 걸어 나왔다. 잠시 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간부들이 줄줄이 연단에 올라와 환영사를 늘어놓았다.
마침내 차례가 되자 그 남자는 군중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
사랑하는 동지 여러분, 그리고 병사와 노동자 여러분! 나는 여러분과 함께
러시아혁명의 승리를 맞이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전세계 프롤레타리아 군대의 전위대로 맞이하는 바입니다. ... 제국주의
약탈전쟁은 유럽 전체의 내란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계
사회주의혁명의 새아침은 이미 밝아 오고 있습니다. 독일에서도 세상이 들끓고
있습니다. ... 머지않아 유럽 자본주의는 전면적으로 붕괴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은 러시아혁명을 이룸으로써 그 신호탄을 울리고 새시대로 가는 길을
열었습니다. 세계 사회주의혁명 만세!
군중은 흥분하여 미친 듯이 '라 마르세에즈'를 부르면서 그 남자에게로
몰려들었다. 병사들은 일제히 '받들어 총'을 하여 예의를 갖추었고 시베리아
유배지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 군중은 오직 한마디 말밖에
모르는 것 같았다. 바로 그 남자의 이름이었다. 1917년 4월 3일 핀란드 역에서
벌어진 이 광경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아노프, 다시 말해 레닌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사람이 돌아온 것을 환영하는 행사였다. 스위스에 망명했던
레닌은 이날 아내 크루프스카야와 함께 차르체제가 무너진 러시아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일찍이 칼 마르크스는 유럽 자본주의에 시한부 삶을 선고했다. 레닌은, 비록
자본주의가 제대로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눈여겨보지 않았던
러시아에서이긴 하지만, 이 사형선고를 실제로 집행한 혁명가이다. 그 때문에
우리 나라 같은 반공국가에서는 권력자들이 이 사람이 한 일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하게 법으로 금지해 놓고 덮어놓고 무슨 큰 악당이나 되는 양 비난을
했다. 그러나 러시아혁명을 알지 못하면 반세기 넘게 세계를 두 쪽으로
갈라놓았던 냉전시대 역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그리고 레닌이라는
인물을 빼놓고 러시아혁명을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레닌은 상황에 떠밀려
혁명에 뛰어든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가능하다고 믿는 방향으로 혁명을 끌어
나간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에서 혁명이 일어난 일은 숱하게
많았지만 러시아혁명만큼 한 개인의 의지와 인격이 그 혁명에 뚜렷한 영향을
준 예는 달리 없다고 하겠다.
청년 마르크스주의자 레닌
레닌은 1870년 4월 22일, 볼가강 근처 심비르스크에서 태어났다. 할머니가
몽고계통 타타르 사람인 탓으로 레닌은 보통 러시아 사람과는 달리 광대뼈가
눈에 띄게 불거진 데다 코도 납작했다. 아버지는 성실한 교육관리였는데 너무
열심히 일한 나머지 여섯 아이를 남겨 두고 일찍 죽었다. 그때 레닌은 열 여섯
살이었다. 어머니 마리아는 혁명운동과 관련하여 적어도 한 번씩 체포당한
여섯 아이를 돌보느라 평생 모진 고생을 했지만 아들 레닌이 혁명 러시아의
최고권력자가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16년에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는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소설을 읽어 주고 영어와 프랑스어, 독일서의 기초를
가르치는 등 자녀들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큰아들 알렉산더는 어머니를 닮아 깎아 놓은 듯 잘생긴 청년이었다.
우유처럼 흰 살결과 숱이 많은 머리칼, 짙은 눈썹과 깊숙한 눈길을 가진
알렉산더는 조용하고 내성적이었으며 도스토예프스키 소설과 자연 과학을
좋아했다. 그런데 아버지를 닮아 키가 작고 머리는 달걀처럼 동그란 데다 작은
눈에 서른도 되기 전에 벌써 이마가 벗겨질 만큼 머리숱이 적었던 레닌은
언제나 떠들썩하고 활발했으며 역사와 문학을 좋아했다. 레닌이 가장 좋아한
작가는 투르게네프와 톨스토이였다. 알렉산더와 레닌 형제는 심비르스크
고등학교에서 언제나 일등을 하는 우등생이었다.
알렉산더는 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 진학하여 동물학을 공부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과격한 혁명사상에 젖어 테러활동에 발을 들여놓았다. 1887년
알렉산더는 다른 청년 여섯 명과 함께 황제 알렉산드르 3세를 암살하려고
폭탄을 만들다가 그만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 마침 동생을 찾아왔던 맏딸
안나도 같이 체포당했다. 알렉산더는 법정에서도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조국을 위해 죽는 것보다 더 훌륭한 죽음은 없다.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은
그런 죽음 안에서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나는 일편단심 불행한
러시아 인민은 도우려고 했을 따름이다." 알렉산더가 늠름하게 자기 소신을
밝히는 것을 보고 재판관과 차르도 감동했다고 한다. 안나는 풀려났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처형당하고 말았다. 겨우 스물 한 살 나이였다.
형이 사형 당하고 난 뒤 레닌은 예전과는 달리 매우 냉정한 사람으로 변해
갔다. 그리고 러시아 사회와, 여러 갈래로 움터 오르기 시작한 혁명운동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레닌은 볼가강 중류 지방 카잔 대학교에 들어가
법학과 정치경제학을 공부했다. 그런데 어느 날 사소한 교내시위 사건 때문에
경찰 조사를 받는 바람에 그만 황제를 암살하려다 사형 당한 사람의
동생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대학은 물론이고 그 도시에서도 추방당하고 말았다.
레닌은 외가에서 누이 안나와 함께 책을 읽거나 장기를 두면서 한가한
나날을 보냈다. 어머니 마리아가 나서서 관계당국을 찾아다니고 진정서를 낸
끝에 겨우 카잔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레닌은 카잔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불과 일 년 만에 혼자 대학 4년 과정을
공부해서 법과대학 졸업시험을 통과했다. 그리고는 1892년 어떤
법률사무소에서 일하면서 마르크스가 쓴 책을 모조리 일어치웠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 경제상황에 대한 정부 통계와 보고서와 논문을 손에 넣는 대로 읽고
정리했다. 레닌은 농민들을 깨우쳐서 차르 전제정치와 싸우게 해야 한다는
나로드니키의 주장을 배척했다. 그 대신 노동자계급을 혁명 주체로 본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공장 노동자가
많이 몰려 사는 페테르부르크로 떠났다. 스물 세 살이 되던 1892년 가을이었다.
페테르부르크에 온 레닌은 마르크스주의 서클을 찾아 거리를 떠돌았다.
"볼가 지역에서 온 박식한 마르크스주의자" 레닌은 곧 그곳 혁명가들의 눈길을
끌게 되었다. 그는 다음해 봄 파티처럼 꾸민 마르크스주의자 비밀모임에서
노동자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한 여성혁명가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평생 동안
동지로서 비서로서 아내로서 삶을 나눈 나데즈다 크루프스카야가 바로 그
여성이었다. 레닌은 크루프스카야와 함께 문맹 퇴치반에 참가하여
노동자들에게 "자본론"을 가르쳤다.
레닌은 평생을 두고 누군가와 싸웠다. 그런데 1917년 10월 혁명이 마지막
고갯길에 오른 때를 빼면 싸움 상대는 언제나 차르 경찰이나 군대라기보다는
다른 생각을 가진 혁명가들인 경우가 많았다. 레닌은 혁명세력이 하나의
사상과 이론과 조직으로 뭉치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혁명운동 진영 내부에 있는 '그릇된 여러 경향'을 가차없이 공격했다. 그가 맨
처음 공격대상으로 삼은 세력은 한창 위세를 떨치고 있던 나로드니키였다.
레닌은 1894년 "인민의 멋이란 누구이며 그들은 사회민주주의자와 어떻게
싸우는가"라는 팜플렛을 써서, 농민들을 계몽하거나 비밀결사를 만들어 테러를
함으로써 혁명을 하려 한 나로드니키를 세차게 비판했다.
다음 상대는 '합법 마르크스주의'였다. 듣기에 좀 이상한 이 '합법
마르크스주의'는 무식한 차르 경찰과 검열관들 때문에 생겨난 말이다. 차르
경찰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사사건건 나로드니키를 비판하는 것을 보고
콧노래를 불렀다. 나로드니키는 알렉산드르 2세를 죽이고 또 그 다음 차르를
죽이려다가 실패한 골칫거리들이었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보통
사람들이 잘 알아듣기 어려운 말투를 쓰는 데다 나로드니키를 일삼아
공격해대니까 훨씬 덜 위험해 보였다. 그래서 경찰은 마르크스주의 책이 마구
나돌아다녀도 적당히 눈감아 주었다.
젊은 지식인들은 이 틈을 타서 열심히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고 활발하게
토론을 벌였다. 그런데 차르 경찰과 검열관들이 허락해 주는 범위 안에
머무르다 보니 이 '합법 마르크스주의'는 혁명사상이 되기 어려웠다. 예를
들자면 러시아에 자본주의가 발전해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라는 새로운
사회계급이 나타났다고 설명하는 책은 별 문제가 없었다. 그렇지만
노동자들에게 차르체제와 자본주의 착취에 대항해서 혁명투쟁을 하자고
선동하는 책은 출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레닌은 '합법 마르크스주의'가
호기심 많은 지식인들이 벌이는 말장난에 그치든가, 아니면 러시아에서도 많은
세월이 흐르면 사회주의가 개량을 통해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환상을
퍼뜨릴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당시 유명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레닌은 1895년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실천하기 위해 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계급 해방투쟁동맹'이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그는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마르크스주의자 서클과는 다르게 사회주의 혁명가와
노동자들을 한 조직에 묶어 세우려고 했다. 레닌은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키자 이것을 지원하기 위해 전단을 만들어 뿌렸고 "노동자의 대의"라는
신문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 신문은 햇빛도 보지 못한 채 작업장을 덮친 경찰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레닌은 이 일로 해서 14개월이나 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3년 동안 시베리아에서 유배 생활을 하라는 선고를 받았다. 여덟 달
뒤에는 크루프스카야도 체포당했다. 마찬가지로 3년 동안 시베리아에서
유배생활을 하라는 선고를 받았다. 여덟 달 뒤에는 크루프스카야도 체포당했다.
마찬가지로 3년 유배형을 받은 크루프스카야는 레닌이 있던 슈센스코예로 가
결혼식을 올렸다.
무엇을 할 것인가
레닌은 유배지에서 "러시아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유명한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공업뿐만이 아니라 농업분야에서도 자본주의가 발전하여 러시아에
사회주의혁명을 일으킬 노동자계급이 대규모로 생겨났다는 것을 논증하려고
했다. 물론 이 책은 여전히 농민을 혁명주체로 보고 전통적인 러시아
농촌공동체를 토대로 사회주의를 건설하려한 나로드니키를 공격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레닌은 사회주의혁명을 이끌 정당을 조직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했다. 그런데 1898년 민스크에서 다른 혁명가들이 모여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창당대회를 열었다. 하지만 차르 경찰은 창당대회가 끝나기가
무섭게 이 정당을 탄압하여 있으나마나 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레닌이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레닌이 싸움을 벌일 또 다른 세력이
나타났다.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가
파멸할 것이라고 한 마르크스와 달리 기술이 발전하고 생산력이 높아지면
폭력혁명이 없이도 자본주의가 서서히 사회주의로 이행해 갈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의회활동을 통해 자본주의체제를 개혁해 나가자는 이론을
내놓았다. 독일 사회민주당이 마르크스주의 혁명운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기 때문에 베른슈타인의 이론은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때마침
경제호황을 느리던 러시아에도 비슷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아직
러시아에서는 자본주의가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우선 노동조합 활동과 임금 인상투쟁을 도와주고 민주주의를 위해 차르체제와
싸우는 자유주의자들을 후원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베른슈타인과 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은 칼 마르크스가 말한 공산주의 사회를
세우는 데는 매우 긴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믿었다. 서유럽의 사회를 세우는
데는 매우 긴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믿었다. 서유럽 산업국가에서는 여전히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민주주의가 점차 확대되어 가는 중이었고 20세기 들어
노동시간은 줄어들고 실질임금도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였다. 그래서 합법적
평화적으로 사회주의 개혁을 해나갈 수 있다고 보는 이들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레닌은 차르와 귀족 계급이 무자비한 독재정치를 하는 후진국 러시아
혁명가여서 이런 견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러시아에서는 당장
혁명을 해야만 하고 또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근처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정치범들을 모아 이런 흐름을 비판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나중 레닌이 이끄는 볼세비키가 혁명을 해서 권력을 잡았고 또 동유럽과
중국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운동이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베른슈타인과 비슷한
이론을 편이들은 '수정주의자'라는 낙인을 받았다. 이 말은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오랫동안 지독한 욕설로 통했다. 하지만 실제 역사를 보면
서유럽에서는 오직 '수정주의자'들만이 정치세력으로서 목숨을 이어 갈 수
있었고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때로는 정 부의 탄압 때문에 그리고 때로는
대중이 등을 돌렸기 때문에 힘을 쓸 수 없는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레닌은 시베리아에서 3년을 보낸 다음 1900년에 서유럽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이때부터는 여러 가지로 쓰던 가짜이름을 모두 버리고 레닌이라는 이름
하나만을 썼다. 레닌은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 플레하노프를 비롯한
망명 혁명가들을 규합하여 "이스크라"(불꽃)라는 정치신문을 만들었다. 물론
이것은 보통 신문과는 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보를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방송이 아니라 신문이었다. 레닌은 이 신문을 러시아에 들여보내
배포하는 과정에서 앞으로 혁명을 이끌어 갈 거대한 조직을 만들어 보려고
했다. 러시아에 있는 크고 작은 공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스크라" 편집부에
알려주고 곳곳에 흩어져 있는 마르크스주의 서클과 혁명가들에게 신문을
전달하는 일을 통해 능력 있는 일꾼을 가려내고 그들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사상을 전파하게 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레닌에게 "이스크라"는
"혁명세력 내부에 있는 기회주의와 수정주의에 맞서 싸우는 십자군"이었고
"노동자들이 품은 불만과 분노를 모아 혁명이라는 큰불로 키워 내는 거대한
풀무"였던 셈이다. 그리고 "이스크라"에 글을 써 보내고 그것을 편집하는
일꾼들로 장차 혁명 참모본부를 꾸릴 심산이었다.
레닌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더 높이 발전시키지는 못했지만 독특한
혁명이론과 조직이론을 세웠다. 1902년 3월 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작은
책에서 레닌은 뒷날 '레닌주의'라는 이름을 얻은 혁명이론과 조직이론의 기초를
놓았다. 그는 이 책에서 서유럽 흉내를 내려는 '수정주의자'들에게 두손들고
복종 하든가 아니면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서 나가라고 요구했다. 레닌은
'단순한 노동자들의 정당'이나 '순진한 민주주의'를 가지고는 러시아에서는
혁명을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노동계급만으로는 또 그들 자신이 하는 노력만으로는 오직 노동조합의
식만을 발전시킬 수 있다. ... 순수하고 소박한 노동조합주의는 노동자가
부르주아지 이데올로기에 예속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 우리의 임무는
노동운동을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날개 아래 옮겨 놓는 일이다. ... 노동자가
어떤 계급에게 영향을 받든 간에 모든 형태의 폭정과 억압, 폭력과 학대에
맞서 싸우도록 훈련받지 않으면 노동자의 계급의식은 진정한 정치의식으로
나아갈 수 없다.
레닌은 무작정 노동자들이 원하는 것을 도와주고 대중의 나가는 방향으로
따라가려고만 하는 사람들을 '꽁무니주의자'라고 맹렬하게 비난하였고 당을
혁명가의 조직이 아니라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노동자 대중조직으로 만들려고
한 다른 혁명가들을 비웃었다.
민주주의를 하려면 우선 공개토론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모든 직책을 선거로
뽑아야 한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당 대회를 공개적으로 하니까 민주주의를 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혁명활동의 모든 분야에서 만사에 비밀을 지켜야 하고
비밀공작을 해야 하는 조직에서 어떻게 민주적으로 일할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누가 훌륭한 노동자인지 일반대중이 그 정체조차 알 수 없는 판에
어떻게 민주적인 선거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멀리 유럽에 망명해 있으면서
실정도 모르고 일반론만 가지고 호언장담하는 자들만이 우리더러 반민주적이니
어쩌니 떠드는 것이다. 암흑 같은 전제정치 아래 비밀경찰이 판을 치는
사회에서 폭넓은 당내 민주화란 결국 백해무익한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 장난감 같은 민주주의는 생각해 볼
가치가 없으며 ... 다만 책임의식이 강하면 된다. 혁명가조직은 못마땅한 당원을
서슴없이 잘라 버린다는 것을 그들은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레닌은 노동자들 스스로 사회주의 혁명의식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에
혁명가들이 그것을 가져다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폭넓은
노동자 대중정당'이 아니라 '강철같은 규율을 가진 혁명적 전위정당'이라야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레닌주의'의 특징은 바로 이러한 '사회주의혁명의
목적의식'과 '혁명가들의 전위정당'을 강조하는 데 있다. 레닌은 이 책 덕분에
혁명가들 사이에서 이론가로서 널리 인정을 받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이 원칙을
굽히지 않았다.
끝없는 집안싸움
1902년이 저물어 갈 무렵 레닌은 런던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그 동안
'페라'(펜이라는 뜻)라는 이름으로 "이스크라"에 빼어난 글을 보냈던 청년이
찾아왔다. 레프 데이비도비치 브론슈타인이라는 스물 세살 난 젊은이였다. 그는
1905년 트로츠키라는 이름으로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를 이끌었으며 혁명이
성공한 후 일어난 내전에서도 볼셰비키 군대를 이끌고 승리를 일구어 내
혁명영웅이 되었다. 레닌은 트로츠키를 당장 "이스크라" 편집인에 앉혔다.
"이스크라"를 매개로 삼아 자기 조직을 만든 레닌은 1903년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에서 주도권을 잡을 준비를 갖추었다.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허름한 밀가루 창고에서 열린 이 대회에는 대의원 43명이
의결권 51표를 가지고 참가했다. 레닌을 따르는 대의원들이 가진 표는 22표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은 다수파가 될 수 있었다. 유태인
동맹 대표들이 자치권을 달라고 요구하다가 일이 잘 풀리지 않자 퇴장해
버렸고 그밖에도 여러 대의원들이 이런저런 불만을 이유로 대회장을 떠났기
때문이다.
레닌은 이때부터 자기가 이끄는 그룹을 볼셰비키(다수파), 마르토프를
중심으로 한 반대세력을 멘셰비키(소수파)라고 했다. 플레하노프가 화해를
시키려고 애를 썼지만 두 세력은 끝내 서로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갈라서고
말았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둘로 분열되었으며 멘셰비키는 나중 10월
혁명 뒤에는 반혁명세력에 가담하여 볼셰비키와 내전을 벌이기까지 했다.
레닌은 당 대회가 끝난 다음 "일보 전진 이보 후퇴"라는 긴 글을 써서 당 대회
진행 과정을 자세히 밝히면서 볼셰비키가 떳떳하게 당 주도권을 장악했다는
것을 혁명가들에게 알렸다. 레닌은 자기를 중심으로 강력한 분파를 만들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혁명가들을 한 당 안에서 굳게 단결하게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이런 상태에서 1905년 혁명을 맞았기 때문에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 혁명을 제대로 지도해 내지 못했다. 혁명이 실패한
뒤에도 여러 차례 여러 곳에서 당 대회를 열었지만 단결하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더 험악한 분파투쟁을 벌였을 뿐이다.
1905년 혁명을 진압한 다음 차르 정부에서 실권을 쥔 스톨리핀은 혁명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면서 민중이 혁명가들의 과격한 주장을 따르지 않도록 제법
폭넓은 개혁정책을 폈다. 스톨리핀은 '현장 군법회의'라는 규칙을 만들어
혁명가나 테러리스트는 붙잡는 즉시 그 자리에서 총살하도록 했다. 테러에
희생당한 사람이 땅에 묻히지 전에 범인을 붙잡아 재판을 하고 처형하는
절차를 모두 끝마치도록 한 것이다. "러시아는 집안 청소를 깨끗이 해야 해!"
이런 소신에 따라 정부와 황실에 빌붙어 부정부패를 일삼던 사람들도 과감히
쓸어 냈다. 이 때문에 스톨리핀은 좌익 혁명가뿐만 아니라 극우
폭력배들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었다.
스톨리핀은 혁명가들 속을 빤히 들여다보기라도 하듯 효과 있는 개혁을
실시했다. 러시아에는 '미르'라고 하는 농촌공동체가 있었다. 1861년
농노해방령이 내린 뒤에도 미르는 그대로 남았다. 농민들이 나누어 받은
땅값을 낼 책임을 진 것도 이 공동체였다. 그래서 미르는 마을 주민 수가 크게
변하면 그때마다 땅을 다시 나누었다. 스톨리핀은 이런 이유 때문에 농민들이
혁명가들이 선동하는 공산주의 이념에 쉽게 젖어든다고 생각했다. 개인 소유를
원칙으로 해야 이 같은 공산주의 이념을 억누를 수 있고 사회질서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본 스톨리핀은 농민들이 미르에서 탈퇴하여 땅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는 토지법과 농지자금 대여법을 제정하고 그런 농민들에게 평등한 시민권을
주었다. 이것을 두고 레닌은 '건전한 반동정치'라고 했다.
스톨리핀은 두마(의회)를 해산시켰다. 사회주의 정당들이 제1대 두마 선거를
보이콧한 것이 잘못이었음을 인정하고 제2대 두마 선거에 참여하여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스톨리핀은 선거법을 고쳐 농민 투표권을 전반으로,
노동자 투표권은 3분의 1로 줄여 버렸다. 그러자 제3대 두마 선거에서
사회주의 세력은 보잘것없게 되었다.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그런 선거에 더
이상 참가하지 말자는 주장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레닌은 "필요하다면
돼지우리 안에서라도 싸워야 한다"며 그런 견해를 비판했다.
1911년 9월 14일 키에프에 있는 극장에서 끝내 배후가 밝혀지지 않은 한
암살자가 스톨리핀을 쏘아 죽였다. 차르 정부는 중심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혁명가들은 여전히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한편에서는 이제 지하정당을 해산하고 합법정당을 만들어 의회에서 싸우자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반대편에서는 사회민주노동당 대표들을 있으나마나한
두마에서 불러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이러한 '청산주의'와 '소환주의'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퍼부었다. 혁명을 위해서는 지하정당과 합법활동이 다
필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레닌은 농민에 대한 생각을 크게 바꾸었다. 사회주의자들은
볼셰비키든 멘셰비키든간에 농민을 혁명주체로 본 나로드니키를 비웃었다.
그들은 농민이 낡은 사고방식을 가진 데다 땅을 소유하는 데 집착하기 때문에
혁명주체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 인구 대부분이
농민이었고 차르체제에 큰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농민들의 협력을 얻지 못하면
어떤 혁명도 불가능했다. 레닌은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농민을 혁명세력
편에 세우는 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 강철 같은 사회주의 혁명가도
가슴속에는 옛 나로드니키 투사들과 한가지로 농민을 사랑하는 전통을
간직하고 있었던 셈이다.
멘셰비키는 1905년 성급하게 무기를 든 것이 잘못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레닌은 거꾸로 더 단호하고 확실하게 무기를 들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반박했다. 그래서 무장봉기 전략전술을 깊이 연구하는 한편 당의 허락을 받지
않고 군사조직과 전투기술을 다루는 조직을 몰래 만들었다. 멘셰비키가 이것을
눈치채고 레닌을 폭력단체 배후로 몰아붙였지만 그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예언자 라스푸친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불 지옥이 덮치자 러시아 정부는 안팎으로 겹친
우환에 몸을 가누지 못했다. 처음 전쟁을 시작했을 때는 분위기가 좋았다.
차르가 동원명령을 내리자 백만 명이 넘는 징병 대상자들이 기꺼이 총을
들었다. 그러나 힌덴부르크 원수와 총 참모장 루덴도르프가 지휘하는 독일
군이 오합지졸 같은 러시아 군대를 무참하게 유린하자 사태는 달라졌다. 전쟁
일 년만에 러시아군은 사망 15만, 부상 70만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무려
90만 명이 적군에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서부 공업지대에서 독일 군에
밀려난 탓에 물자가 부족해져 물가는 몇 배로 오르는 등 경제가 엉망이
되었다. 임금이 자꾸 내려간 탓으로 파업이 날마다 꼬리를 물고 일어났고
상인들도 장사가 안 된다고 아우성을 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어머니
러시아'기름진 땅이 애타게 손짓하는데도 병사들은 들판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늙은 농부들은 언제 끝날지 전쟁을 원망했다. 전쟁은 러시아 사회를 벼랑 끝에
몰아세웠다.
하지만 러시아 황실 안에는 전쟁보다 더 큰 위기가 싹텄다. '건전한
반동정치가' 스톨리핀이 사라져 버린 뒤 러시아 황실은 시베리아에서 온
괴상한 인물에게 농락 당하고 있었다. 러시아처럼 큰 나라를 통치하려면
차르는 뱀처럼 교활하고 맹수처럼 무자비해야 할 터인데 니콜라이 2세는 보통
사람에도 못 미칠 만큼 나약하고 무능한 황제였다. 독일 공주로서 러시아에
시집온 황후 알렉산드라는 이 무능한 황제를 제 마음대로 쥐고 흔들었다.
거만하고 고집 센 알렉산드라는 선악관념이 부족해서 자기 비위에 맞으면
악이라도 환영하고 그렇지 않으면 선이라도 배척했다. 아들 낳는 것이
소원이었던 알렉산드라는 미친 듯이 신비주의에 몰두해서 그 주위에는
마술사와 돌팔이 의사와 사기꾼들이 들끓었는데 그 덕택인지 황태자를 낳긴
낳았다. 그런데 그렇게 낳은 황태자 알렉세이가 혈우병 환자였다. 이번에는
혈우병은 치료할 수 있다고 자랑하는 돌팔이들이 몰려들었다. 그 가운데
시베리아 농민 아들로 태어나 제대로 교육받은 일도 없는 자칭 예언자가
황후를 사로잡았다. 바로 라스푸친이다.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라스푸친은 기도를 해서 황태자의 병을 다스렸다. 알렉산드라는 오직
라스푸친에게만 희망을 걸었다. 라스푸친은 황후의 신임을 등에 업고 궁정을
주름 잡으면서 온갖 음탕한 짓을 다 하고 돌아다녔다. 심지어 황후와 같이
잔다는 소문까지 떠돌았다. 귀족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러시아가 독일 군대가
아니라 시베리아 돌 중놈 손에 망하겠구나." 하지만 알렉산드라는 라스푸친을
욕하는 말을 절대 믿지 않았다. 라스푸친이 술 난장판을 벌여 경찰이 출동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신비주의에 푹 빠진 황후에게 라스푸친은
언제나 옛 성자들처럼 아무 잘못도 없이 저주받고 박해 당하는 예언자여야
했다. 총사령관 니콜라스 대공이 보다 못한 나머지 라스푸친을 죽일 계획을
꾸몄다. 그러자 라스푸친은 황후를 부추겨 총사령관 전쟁장관, 외무장관을
쫓아내 버렸다.
1916년 9월 니콜라이 2세는 스스로 총사령관이 되어 전선으로 나갔다. 이
무능하고 게으른 황제는 그 아내와 한가지로 자기보다 잘난 사람들과는 잘
지내지를 못했다. 그래서 능력 있는 장군일수록 황제에게 자주 욕을 먹었다.
전선에 나가 있는 동안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도 날씨와 잡다한 생활
이야기와 가족 이야기 말고는 쓴 것이 없었다. 알렉산드라가 라스푸친의 말을
듣고 "내 친구가 밤에 계시를 받았는데, 라트비아 부근을 공격해야
한답니다."하고 편지를 보내자 니콜라이 2세가 이 '작전지시'를 그대로 따른
일까지 있을 정도였다.
페트로그라드 귀족사회에서는 황후를 내쫓고 황후를 내쫓고 라스푸친을
처형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고 시민들이 적국 독일 여자 알렉산드라를
내쫓으라고 데모를 벌이는 일까지 생겼다. 참다 못한 태후가 --알렉산드르
3세의 아내요 니콜라이 2세에게는 어머니이다―전선으로 아들을 찾아가
충고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1916년이 저물 무렵 몇몇 귀족이 마침내 일을
저질렀다. 라스푸친을 초대해서 독이 든 술과 과자를 먹인 것이다. 그런데 이
괴상한 예언자는 죽어 넘어지기는커녕 노래를 부를 테니 기타를 쳐 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해서 '겁에 질린 암살자'들은 기타를 치고 '시체가 되었어야
할 ' 라스푸친은 흥겹게 마시며 노래부르는 희한한 광경이 두 시간 반이나
이어졌다. 암살자들은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라스푸친을 총으로 쏘아 죽인
다음 네바강 얼음 아래 집어넣었다. 사흘이 지나 시체가 발견되었다. 차르
경찰은 시체를 '엄격하게 조사'해서 사망 원인을 발표했는데 엉뚱하게 독살도
총살도 아닌 '익사'였다. 독약을 마시고 총을 맞은 시체가 물에 빠져 죽었다니
참으로 별난 일이었다.
라스푸친은 죽기 전에 황제 앞으로 편지를 하나 썼다. 그런데 이 편지를
보면 이 별난 사나이가 위대한 예언자까지는 못 되더라도 아주 돌팔이
사기꾼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편지에서 한 예언이 대부분 그
다음해에 현실로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년 1월 1일이 되기 전에 죽을 것 같습니다. ... 만약 나를 죽이는
사람이 보통 백성, 특히 내 형제인 러시아 농민이라면 당신은 아무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계속 옥좌에서 통치할 것이며 아이들에
대해서도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그들은 앞으로도 수백 년 동안 러시아를
통치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귀족들 손에 죽는다면 그들 손은 내 피로 젖을
것이며 25년 동안은 그 피를 지우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러시아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형제끼리 서로를 죽이고 미워할 것입니다. 25년 동안 이 나라에는
귀족이 없을 것입니다. ... 만일 나를 죽인 사람이 당신 친척이라면 당신 자녀와
친척들은 2년을 넘기지 못하고 모두 죽게 될 것입니다.
로마노프 왕조의 비참한 종말
유럽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이 터지기 전에는 "자본가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
노동자들을 동원해서 서로 쏘아 죽이게 만드는"일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런데 막상 전쟁이 시작되자 그들은 하루아침에 '신성한
조국을 지키기'위해 정부와 손잡았다. 러시아 볼세비키 조직에서도 이탈하는
사람이 잇달았다. 물론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다 그랬던 것은 아니다. 특히
레닌도 자기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곤경에 빠졌다.
1914년 8월 7일 오스트리아 경찰이 러시아 간첩이라는 혐의를 씌워 레닌을
체포했다. 게다가 아내 크루프스카야는 큰 병을 얻어 앓아 누워 있었다. 레닌이
감옥에 있는 동안 밖에서는 오스트리아 농민들이 "러시아 간첩이 사형 당하지
않고 살아 나오면 붙잡아 눈알을 뽑고 혀를 잘라 버리자"고 떠들어댔다.
아들러라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지도자가 아니었다면 레닌은 정말 그곳에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들러는 레닌이 차르를 지독하게 미워하는 사람이니까
풀어 주면 러시아 정부와 싸울 것이고 그러면 오스트리아에도 이익이라며
내무장관을 설득했다.
레닌은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스위스로 도망쳤다. 그리고 달리 일을 벌일
만한 형편이 아니었으므로 한동안 부지런히 책을 붙들고 씨름을 했다. 1916년
레닌은 "제국주의 : 자본주의 최고 단계"라는 책을 끝마쳤다. 현대자본주의를
다룬 이 책은 내용 면에서 영국 학자로서는 닿기 어려운 데까지 생각을 펼쳐
나갔다.
레닌은 이 책에서 자본주의가 1870년대 이후 "건설적이고 평화적인 단계"를
지나 독점자본주의 단계에 들어섰다고 진단했다. 이 단계에 들어선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값싼 노동력과 원료를 얻을 수 있고 대량생산한 상품을 비싸게 팔
수 있는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레닌은 마르크스가 내다본 것과 달리 서유럽 산업국가에서 아직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독점자본가들이 식민지 민중을 착취해서
얻은 이윤 가운데 한 몫을 떼어 주어 그 나라 노동자계급 상층부를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체제가 오래가지는 못할 것으로 보았다. 전세계 금융의
80%를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이 가지고 있고 영국, 프랑스, 독일 세 나라가
세계 식민지의 80%를 지배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더 넓은 식민지를 차지하려고
세계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으므로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결국 무너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주의혁명은 선진 공업국가보다는 식민지 민족해방혁명이나
러시아처럼 뒤떨어지고 식민지가 없는 자본주의나라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레닌은 러시아 같은 나라를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약한 고리'라
하고 전쟁이 이런 나라에서 혁명을 촉진할 것이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는 조국
러시아가 전쟁에 지도록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과학자들이 보기에 이
이론이 어떨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레닌 말대로 독일 군에게 밀려 허덕이던
러시아 정부는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나지 않아 허망하게 무너졌고 2차 대전
뒤에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난 곳도 소련군대가 점령한 동유럽을 빼면 모두
식민지와 반식민지 종속국이었다.
러시아에서 1917년은 파업과 더불어 열렸다. 첫 두 달 동안에만 파업이
1,300건이나 일어나 70만 명이 참가했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먹을 것과 땔감이
바닥나 배급제를 실시했다. 배급소 앞에는 검은 빵 한 덩이를 얻으려는
여자들이 영하 20도 추위를 무릅쓰고 뱀처럼 길게 줄을 늘어섰다. 그런데
나누어 줄 빵이 다 떨어지고 말았다. 굶주림과 분노에 사로잡힌 여자들이 빵
가게와 식료품 점을 습격했다. 그들은 대부분 가난한 여성노동자이거나 병사의
아내였다. 이것이 2월 22일에 일어난 사건이다.
다음날 사회주의자 단체들은 '부녀자의 날'을 선포하고 먹을 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로 번져 나갔다. 배고파서
우는 아이들을 집안에 남겨 두고 사람들은 거리로 몰려나왔다. "차르를
타도하자"는 정치구호가 섞여 나오기 시작했다. 그 다음날에는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40만 가운데 절반이 일제히 일손을 놓고 몰려나왔다. 시위대는
너나없이 "전제정치는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쳤고 '라 마르세에즈'를 목청껏
불렀으며 손에는 붉은 깃발을 들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얼어붙은 네바강을
건너 도심으로 밀려들었다. 페트로그라드를 지키는 15만 명의 경찰과 군인들도
같은 심정이었다. 그들은 부모형제와 처자식이 끼어 있는 시위대에 총을 쏘고
싶지 않았다.
2월 25일에는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였다. 학생들도 시위에 가담했다.
전차가 멈추었고 신문도 나오지 않았다. 페트로그라드 시내는 시위군중으로
가득 찼다. 니콜라이 2세는 거리에서 일어난 혼란을 정지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병사들이 시위군중과 한마음이라는 사실을 아는 장교들은 발포
명령을 내릴 수가 없었다. 해가 저물자 차르 비밀경찰이 시위 주동자를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지하혁명가들은 사태가
눈사태처럼 커지는 데도 당 지도부에서 아무런 지령도 받지 못했다.
합법정당들은 간부들이 체포당하거나 도망친 탓으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파업과 시위는 다음날 아침까지 이어졌다. 병사들은 시위 노동자들과 다정한
눈웃음을 나누었다. 그런데 장교들이 발포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은 일부러
하늘에다 총을 쏘았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총에 맞아 죽고 다친 사람이
150명이나 생겼다. 병사들은 하늘로 올렸던 총부리를 뒤로 돌려 장교들을
겨누었다. 장교들이 달아나자 시위군중은 환호성을 올렸고 병사들은 무기를
나누어주었다. 총을 든 시위군중은 법원 청사에 불을 지른 다음 황제가 있는
동궁으로 몰려갔다. 누군가가 동궁 꼭대기에 올라가 황제의 깃발을 끌어내리고
붉은 깃발을 꽂았다. 다음날 노동자들은 프랑스대혁명 때 파리 시민이
바스티유감옥을 점령 한 것처럼 피터 앤 폴 요새감옥을 점령했다. 일이 여기에
이르자 내각이 총 사퇴를 하면서 황제에게 새 정부를 구성하라고 건의했다.
두마 의원들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허둥댔다. 총을 든 노동자들은
누군가가 나서서 할 일을 가르쳐 주기를 원했다. 이때 서른 여섯 살 난 엘리트
정치가 케렌스키가 나섰다. "장관들을 모조리 체포하시오. 우체국과
전신전화국, 철도역과 정부 청사를 점령하시오."군중은 그 말을 따랐다.
두마는 상황에 떠밀려 임시집행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런데 노동자와
병사들도 재빨리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 임시집행위원회'를 조직했다.
병사들은 중대마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천 명에 하나씩 대표를 뽑았다. 이렇게
해서 두마 청사 안에서 '서로 다른 두 러시아'가, 다시 말해 모든 것을
잃어버릴 위기에 빠진 지배계급의 러시아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권력을 향해 행진하는 노동자의 러시아가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소비에트 임시집행위원회는 "이즈베스차"(뉴스)라는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1905년 잠깐 나타났던 소비에트가 거짓말처럼 되살아난 것이다.
그런데 니콜라이 2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착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런
성명을 내놓았다.
짐은 제위를 포기하기로 결심했노라. 오늘 세시까지 아들 알렉세이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했지만 생각을 바꾸어 동생 미카엘에게 물려주기로 했노라.
짐은 그대들이 한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해 주리라고 믿는다.
군중에게 이것을 읽어 준 두마 의원은 하마터면 밟혀 죽을 뻔했다. 황제는
가족과 함께 차르스코예 셀로라는 곳에 갇혔다.
외로운 레닌 빛나는 트로츠키
이 글 맨 앞에서 우리는 레닌이 러시아에 돌아온 날 핀란드 역에서 일어난
일을 살펴보았다. 레닌은 스위스 취리히를 출발해서 독일 영토를 지나서
귀국했다.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고 있던 독일 정부는 레닌이 돌아가 러시아
사회를 더 큰 혼란에 빠뜨리면 자기네에게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열차를
주선해 주었다. 레닌은 나중 독일 정부가 기대한 대로 또 한번 혁명을 일으켜
권력을 잡은 다음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고 전쟁을 그만두었다.
레닌이 러시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2월 혁명이 일어나고 한 달 넘게
지나서였다. 그런데 두마 왕당파 의원들은 여전히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주장만 늘어놓았고 입헌민주당 자유주의자들은 소비에트가 벌이는 활동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은 상태였다.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는 "썩은 문짝 같은" 차르
정부를 걷어차 쓰러뜨리기는 했지만 그 폐허 위에 어떤 집을 지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다. 소비에트에서 주도권을 잡은 멘세비키는 자유주의자들이
권력을 잡는 것이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공장과 군대에는 새 세상을 목말라
하는 노동자와 병사들이 숱하게 많았지만 그들의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조직이 없었다. 막 글을 깨친 노동자와 병사들은 마치 마른 해면이 물을
빨아들이듯 신문이건 전단이건 읽을거리라면 무엇이나 받아들였다. 하지만
눈앞을 환하게 밝혀 주는 글은 별로 없었다. 이런 가운데 "톱니바퀴처럼
정확"하기로 이름난 볼세비키 지도자 레닌이 돌아왔다. 그의 첫마디는
"사회주의혁명 만세"였다. 그런데 이 외침을 듣고 눈앞이 훤히 트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레닌은 다음날이 4월 4일 유명한 "4월 테제"를 발표했다. 그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 아래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볼세비키의
영향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의회제 공화국이 아니라
아래에서 솟아오르는 노동자 농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목표로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레닌은 여기서 지주의 재산과 땅을 몰수하고 노동자 소비에트가
모든 생산시설을 장악해야 한다고 하면서 당 이름도 사회민주노동당에서
공산당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멘세비키와 한 당으로 통합하는 데에도
단호하게 반대했다.
가장 충성스러운 볼세비키 몇몇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레닌의 주장에
찬성하지 않았다. 모든 정차가 "4월 테제"를 비난했다. 어떤 개인이나 조직도
이 테제에 서명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레닌은 이것을 자기 이름으로
발표했다. 레닌은 혼자 혁명을 하려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그는 비록 3주일이
넘게 걸렸지만 끈질기게 토론을 벌인 끝에 볼세비키가 이 선언을 공식
지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다른 정치세력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것은 아주
불가능했다. 볼세비키는 이름만 다수파일 뿐 보잘것없는 소수파에 지나지
않았다.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민주주의 시대를 지나서야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는 도그머를 믿은 멘세비키에게 "4월 테제"는 미친 소리가 아니면
잠꼬대처럼 들렸다. 게다가 그들은 "혁명을 지키려면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견해를 버리지 않았다. 그러니 레닌을 따르는 볼세비키와 손잡는 일은 생각할
가치도 없었다. 볼세비키는 페트로그라드 공장노동자대회에서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6월 초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 전국대회가 열렸을 때 대표 자격으로
참가한 볼세비키는 대의원 6,090명 가운데 105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에 비해
멘세비키는 248명, 나로드니키가 세운 사회혁명 당은 285명이나 되었다.
소비에트 전국대회는 볼세비키의 제안을 거부하고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볼세비키가 이기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사기가 오른 임시정부는 내친 김에 독일군대를 물리쳐 인기를 더 높여
보려고 갈리시아 지방에서 총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결과는 대 참패였다. 독일
군은 전투에서이긴 여세를 몰아 더 기세 좋게 쳐들어 왔다. 러시아 군인들은
무리를 지어 전선을 빠져 나와 후방으로 돌아왔다. 볼세비키는 임시정부를
무너뜨리려고 팔을 걷어붙였다. 임시정부는 볼세비키가 독일 정부에서
활동자금을 받아쓰고 있으며 레닌은 독일 간첩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레닌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볼세비키는 지하로 숨어들었고 레닌은 핀란드로
빠져나갔다.
그러자 레닌보다 한 달 늦게 돌아온 트로츠키가 레닌을 대신해서 임시정부를
괴롭혔다. 트로츠키는 충성스런 볼세비키가 아니었지만 전쟁을 계속하는 데
반대하고 임시정부의 권력을 소비에트에 넘겨야 한다는 데서는 볼세비키와
생각이 똑같았다. 트로츠키는 임시정부가 볼세비키를 박해하고 레닌을
체포하려 한 것을 맹렬히 비난하고 다녔다. 임시정부는 트로츠키를 감옥에
집어넣었고 볼세비키는 그를 중앙위원으로 선출했다. '6월 대공세'가 실패하자
임시정부의 위신이 떨어지는 만큼 전쟁에 반대하는 볼세비키의 인기는
높아졌다. 특히 먹을 것 입을 것도 없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던 병사들이
볼세비키를 따랐다. 병사들이 임시정부에 총부리를 겨눌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10월에 열릴 소비에트 전국대회에 보낼 대표를 뽑기 위해
선거를 했다. 그런데 여기서 볼세비키가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이때 아무도
내다보지 못한 사건이 일어났다. 차르체제를 그리워하던 육군 참모총장
코르닐로프가 8월 15일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깜짝 놀란 임시정부 수반
케렌스키는 사회주의자들의 도움을 얻어서라도 코르닐로프 군대가
페트로그라드에 들어오는 것을 막아 보려고 감옥에 있는 트로츠키를 풀어
주었다. 철도노동자들이 열차를 세우는 바람에 쿠데타는 실패했다.
이 사건으로 볼세비키는 더 큰 인기를 얻었고 트로츠키는 영웅이 되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 뽑혔다. 트로츠키는 볼세비키가 장악한 공장
소비에트에 '붉은 군대'를 만들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하여 의장을 맡았다. 볼세비키는 곧이어 모스크바 소비에트까지 손에
넣었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해서 1905년 혁명이 실패한 후 12년만에 다시 한번
맹활약을 할 무대를 얻었다.
레프 브론슈타인, 즉 트로츠키는 1879년 우크라이나 켈손에서 유태혈통을
가진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생일은 묘하게도 볼세비키혁명이 일어난 10월
25일이었다. 트로츠키는 흑해 항구도시 오데사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는데
거기서 유럽 사회에 대한 책을 읽고 차르체제를 미워하게 되었다고 한다.
수학과 작문을 잘했던 이 열혈 청년은 그 무렵 혁명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로드니키로서 혁명운동을 시작했지만 '남부러시아노동자동맹'이라는 조직과
관계를 가지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트로츠키는 여러 번 경찰에 붙잡혀
경찰서를 들락날락하다가 4년 짜리 시베리아 유배형을 받았다. 레닌과
마찬가지로 유배지에서 결혼을 했는데 아내 알렉산드라는 여섯 살이나 나이가
많았다. 트로츠키는 레닌이 쓴 글을 보고 반한 나머지 시베리아를 탈출해서
런던으로 찾아가 혁명동지가 되었다.
트로츠키는 가끔씩 볼세비키와 멘세비키 사이를 왔다갔다했지만 중요한 때는
언제나 레닌 편에 서서 그 뛰어난 능력을 다해 도와주었다. 레닌이
케렌스키에게 쫓겨 핀란드에 가 있는 동안 볼세비키를 다수파로 키워 10월
혁명 준비를 다 갖춘 사람이 바로 트로츠키였다. 귀족과 지주, 사회혁명 당
우파와 멘세비키가 한패가 되어 자본주의 열강의 지원을 받으며 혁명정부를
공격해 왔을 때 '붉은 군대'를 이끌고 싸워 내전을 승리로 이끈 것도 바로
'사자' 트로츠키였다.
밑바닥과 꼭대기를 뒤집은 혁명
레닌은 10월 25일 열릴 예정이었던 소비에트 전국대회를 며칠 앞두고 몰래
러시아로 들어왔다. 몇 달 전만 해도 보잘것없는 소수파였던 볼세비키는 그
사이 자체 군대까지 가진 거대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이것은 곧
낡은 러시아의 종말을 의미했다.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 전국본부는 페트로그라드 변두리 네바 강변에 있는
스몰니학원이었다. 이곳은 제정시대 귀족 딸들만 다닌 유명한 학교였다. 10월
혁명 전야에 이 학원에서는 서로 다른 두 세계가 공존하고 있었다. 아래층 큰
홀에는 차림새가 남루하기 짝이 없는 노동자와 병사들이 몰려들어
5코페이카짜리 싸구려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는 떠들썩하게 농담을
주고받거나 마룻바닥에서 아무렇게나 누워 잠을 잤다. 대 위원 자격
심사위원회가 있는 2층에는 번듯한 식당이 있었다. 여기서는 말쑥하게 차려
입은 멘셰비키 신사들이 버터를 두텁게 바른 빵을 먹으면서 '더럽고 무식한'
아래층 사람들을 욕했다. 멘셰비키는 두 번째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 대표
선거에서 볼셰비키에게 참패를 당했기 때문에 이런저런 이유를 달아 대회를
벌써 한 달 가까이 미루고 있는 참이었다. 아래층에 모여든 새 대표들은
그야말로 낡은 러시아 밑바닥에서 권력 꼭대기까지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10월 21일,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비밀회의를 열었다. 그들은 10월 25일
새벽에 "먼저 권력을 장악한 달음 대회에서는 그 권력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지를 논의하기로" 결정했다. 남은 일은 페트로그라드를 점령하는
작전계획을 짜서 집행하는 일뿐이었다. 혁명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소비에트의
'붉은 군대'와 페트로그라드 수비대가 신속하게 시내를 점령했고 제2차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 전국대회는 혁명 승리를 선언했다. 레닌은 "노동자 농민의
정부" 인민위원회 의장으로 뽑혔다. 볼셰비키는 간단하게 임시전부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빼앗았다. 그러나 권력을 지키는 일은 그보다 훨씬
힘들었다. 볼셰비키가 혁명을 일으키자 왕당파와 자유주의자는 물론이요
그때까지만 해도 혁명세력이었던 멘셰비키와 사회민주당 우파까지 모든
정치세력이 총은 들고 볼셰비키와 맞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본주의 열강은
"사회의 밑바닥과 꼭대기를 뒤집어 놓은 불온한 사회주의혁명"을 목조르기
위해 반혁명세력을 지원하거나 직접 군대를 파견했다.
제일 먼저 볼셰비키 혁명정부에 반기를 든 것은 제정 러시아 장교와 귀족,
자본가와 지주계급이었다. 제정시대부터 나름대로 자치권을 누린 돈강과
볼가강 유역 코사크들도 볼셰비키 정권을 인정하지 않고 무기를 들었다.
볼셰비키는 반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정식으로 법령을 만들어 "노동자와 농민은
붉은 군대"를 창설했다. 자주의 땅을 나누어 받은 농민들은 볼셰비키를
지지했다. 레닌은 독일과 휴전을 하지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하자 단독으로
동맹국과 휴전협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독일 군은 너무나 지나친 조건을
제시하면서 페트로그라드를 향해 계속 전진했다. 레닌은 거의 모든 혁명가들이
반대했지만 끝까지 밀어붙여 결국 1918년 폴란드 브레스트 리토프스크에서
독일과 단독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발트해 여라 나라와 폴란드,
우크라이나가 독일 군 손아귀에 넘어갔고 핀란드도 러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났으며 러시아는 엄청난 전쟁배상금까지 물기로 약속했다. 레닌이 미리
내다보았는지는 모르겠으나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은 얼마 뒤 독일이
패전함으로써 무효가 되었다.
전쟁에서 빠져 나온 볼셰비키는 반혁명 군대와 싸우는 제 힘을 모았다.
그러나 이것을 쉽지 않았다. 영국, 프랑스 등 협상국 편에서 보면 사회주의
혁명정권이 들어선 것만 해도 큰 문제인데다 협상국 진영을 무시하고 혼자
전쟁에서 빠져나간 것도 얄밉기 짝이 없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러시아 반혁명
군대를 지원하기로 비밀협정을 맺고 기회를 노렸다. 1918년 러시아 군대에
포로로 잡혔던 체코 군대가 붉은 군대와 충돌했다. 그러자 협상국들은 체코
군대를 구출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대를 파견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는 영국
군대가 쳐들어왔다. 볼셰비키는 공업도시를 중심으로 혁명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국경지역 농촌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반혁명 군대와 협상국
군대는 우크라이나, 우랄,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를 점령하여 볼셰비키 정부를
위기에 빠뜨렸다. 볼셰비키 정부는 징병제를 실시하여 붉은 군대를 강화한
다음 대반격을 펼쳐 1919년에 전세를 뒤집었고 1920년에는 반혁명세력을 거의
완전하게 궤멸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름 제각기 전쟁 피해를
복구하느라 여유가 없어진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어쩔 수 없이 군대를
철수하였다. 볼셰비키 정권은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그 자신도 피투성이가
되었다.
니콜라이 2세는 가족과 함께 에카테린부르크라는 곳에 갇혀 지내다가 어느
지하실에서 참혹하게 총살당했다. 옛 귀족들 가운데 운 좋게 살아 남은
사람들만이 나라 밖으로 빠져나갔다. 라스푸친의 예언 그대로 여러 해 동안
형제끼리 서로를 죽이는 비극이 벌어졌고 러시아 땅에서 귀족이 사라졌다.
권력을 잡은 볼셰비키 앞에는 혁명 그 자체보다도 더 험난한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과 내전으로 산업 시설을 폐허가 되었고 기름진 땅은
황무지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과 거래 관계도 모두 끊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어려운 문제는 그 누구도 사회주의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모른다는 데 있었다. 볼셰비키는 너나없이 마르크스를 스승으로 모셨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연구한 끝에 그 다음에 사회주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내다보았을 뿐 어떻게 그 사회를 건설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위대한 실험의 슬픈 종말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낡은 체제를 파괴하는 일을 끝내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작업에 막 손을 댄 1924년, 혁명 지도자 레닌이 겨우 54살 한참 일할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사망 원인은 뇌일혈이었다. 레닌이 죽은 뒤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인 끝에 권좌에 오른 것은 혁명에서 별로 큰공을 세운 일이 없는
요시프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사회주의 사회의 기초를 놓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이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새로운 사회체제가 눈부신 성공을 거두는 듯 보였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국제사회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터져 독일이
소련을 침략했을 때이다. 겨우 2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낡은 전제정치
아래 신음하던 후진 농업국가"에서 "히틀러 독일과 현대전을 벌일 수 있는
강력한 산업국가"로 탈바꿈한 이 나라는 세계를 놀라세 했다. 그러나 그
눈부신 성공의 뒤안길에는 장차 이 체제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심각한
모순이 자라고 있었다.
볼셰비키혁명은 인간 역사에 굵은 획을 그은 사건이다. 토마스 모어가
"유토피아"를 쓴 이후 불평등과 억압을 미워하는 수많은 이상주의자들이
사유재산제도가 없는 사회를 꿈꾸었다. 마르크스는 그런 사회가 꿈이 아니라
밤이 지나면 아침이 찾아오는 것만큼이나 필연적으로 찾아들 미래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을 받아들인 혁명가들은 우선 정치권력을 빼앗은
다음 그 꿈을 현실로 바꾸러 놓으려고 했다. 러시아혁명은 인간이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스스로를 조직하여 낡은 사회 질서를 파기하고 자기 계획대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낼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볼셰비키 혁명가들은 이
땅 위에 억압과 불평등이 없는 이상사회를 세우려는 위대한 실험을 시작했다.
이 위대한 실험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슬프고도 허망한 실패로 끝났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독일 통일을 다룬 마지막 글에서 자세히 다룰 터이니
여기서는 몇 가지만 되짚어 보기로 하자.
첫 번째로 들 수 있는 이유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말로 합리화한
공포정치이다. 마르크스는 "공산당선언"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말하는 '개인의
자유'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그가 개인의 자유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물질적인 평등으로 뒷받침하지 않으면 개인의 자유란 아무
가치 없는 빈 껍데기이거나 눈속임에 불과하다고 했을 뿐이다. 마르크스가
그린 사회주의 사회는 개인이 물질적 불평등에 제약을 받지 않고 온전하게
자유를 누리는 사회이다. 그런데 스탈린에 이끈 소련 정부는 개인의 자유 그
자체를 말살하고 모든 정체적 반대세력을 오직 폭력으로만 억눌렀다. 소련
정치지도자들 스스로 마르크스가 그토록 비난한 자본주의 권력자들과
마찬가지로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싶은 충동을 이겨 내지 못했다. 더욱이
공산당이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일당독재체제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보다
더 포악한 독재가 판을 쳤다. 그 폭력의 첫손꼽는 희생자는 혁명 일등공신
트로츠키이다. 트로츠키는 권력투쟁에서 진 뒤 분열주의자로 몰려 당에서
쫓겨났으며 1940년 멕시코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스탈린이 보낸 자객 손에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1928년부터 1930년대에 걸쳐 농촌을 사회주의
집단농장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농민 수백만 명이 단지 "땅을 남보다 많이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당했다.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대숙청'
때는 대부분의 고참 볼셰비키가 직장과 군대에서 쫓겨나거나 처형을 당했다.
대숙청 피해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도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 모든 희생자가 덮어쓴 죄는 하나같이 '인민의 적', '반당 분자', '국제
파시스트 앞잡이', '트로츠키주의자' 따위였다. 스탈린을 비롯한 권력자들이
모두 '타고난 악당'이 아니었고 차르독재와 목숨을 걸고 싸운 이상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았는데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 말마따나
"과격함이 미덕으로 통하는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이유는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효율적인 경제체제라면 국민이 원하는 재화를 필요한 만큼 생산하되 비용은
되도록 적게 들어야 한다. 그러면서 꾸준히 생산력 수준을 높이고 국민 모두가
고르게 살면 더욱 좋다. 그런데 소련은 처음부터 자본과 기술이 뒤떨어진
나라인데다 자본주의 강대국, 특히 미국과 군사력 대결을 벌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동유럽 사회주의 나라와 제3세계 사회주의운동을 지원하는 데도
많은 비용을 쏟아 부었다. 이런 가운데 중화학공업과 군수산업, 항공우주산업에
우선 투자를 하다 보니 당연히 국민 생활을 높이는 데 필요한 소비재를 제대로
생산할 수 없었다. 공장과 기업과 협동농장은 정부에서 정해 준 생산목표를
채우는 데만 몰두해 자원과 노동력을 터무니없이 낭비했다.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사회주의 혁명정신과 사회적 책임감으로 사람들을 일하게 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혁명에 참가한 세대가 죽은 뒤 그
자리를 물려받은 새로운 세대 노동자들은 그러한 기대에 어긋나게 행동했다.
러시아 노동자와 농민들은 빵과 땅과 평화를 원했기 때문에 볼세비키를
따랐다. 그런데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이끈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그들이
그토록 욕했던 '수정주의자'들이 참여하여 만든 북유럽과 서유럽 시장경제를
따라잡지 못했다. 먹고사는 것은 어느 정도 해결했지만 1970년대 이후 경제가
제자리걸음을 쳐 격차는 점점 더 벌어졌다. 열심히 일하든 빈둥거리든 비슷한
임금을 받는 탓으로 노동자들은 집권층의 희망과는 달리 대체로 빈둥거리는
쪽을 택했다. 아무리 혁명구호를 외쳐도 소용이 없었다. 사람을 혁명정신이나
사회적 책임감만으로 열심히 일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한
고르바초프가 계획경제 틀 안에서 경쟁과 시장체제를 도입하려 했지만 때가
너무 늦었다. 그 동안 특혜를 누렸던 공산당과 군부 보수파가 일으킨 쿠데타는
소련 사회를 되 돌이킬 수 없는 혼란으로 밀어 넣었다. 모두가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은 했지만 낡은 체제를 솜씨 있게 개혁할 만한 정치세력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스탈린 이후 소련 지도자들은 자기네만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하는 노동자
농민의 나라라고 자랑했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사회는 앞서간 사회주의
사상가와 혁명가들이 추구한 이상과는 전혀 달랐다. 칼 마르크스를 성인처럼
숭배하고 레닌의 시신을 살아 있는 것처럼 만들어 붉은 광장에 전시해
놓고서는 정작 그들이 지녔던 빛나는 이상은 철저하게 짓밟은 것이다. 만약
레닌과 같은 인물이 몇십 년 늦게 태어나 이런 사회에서 살았다면
솔제니친이나 사하로프보다 더한 반 테제 투사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소련 지도자들이 틀에 박힌 이념이나 이론보다 사회주의 정신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여 자본주의보다 훨씬 나은 사회를 만들었다면 그 거대한
나라가 바닷가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인류의
미래고 훨씬 밝을 것을 것이다.
볼세비키혁명을 이끈 레닌은 차르체제와 싸운 혁명가이고 제국주의
세계전쟁이 문명세계를 뒤흔든 시대에 살았던 러시아 지식인이다. 그러니 백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 그와는 전혀 다른 나라, 다른 사회에 사는 우리가
볼세비키혁명 역사에서 레닌이 세운 혁명이론과 전략전술을 배울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역사가 자기 시대에 지운 무거운 짐을 기꺼이 지고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과 공동체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는 자세를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레닌의 평생 동지요 아내였던
크루프스카야가 남편의 장례식장에서 한 말은 곱씹어 음미해 볼 가치가 있다.
동지 여러분! 요 며칠 동안 나는 블라디미르 일리치의 관 옆에서 그 사람의
일생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내가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그
사람이 노동자들 모두를, 억압받는 계급 전체를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 스스로는 이런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고 나도 그랬습니다.
이런 엄숙한 시간을 빌려 처음으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ff
대공황
'보이지 않는 손'의 파산
@ff
문명사회에 지옥 불을 퍼부은 첫 번째 제국주의 세계전쟁이 끝난 뒤
자본주의 선진국에서는 '번영으로 가는 새로운 시대'를 예찬하는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쟁에서 진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전쟁배상금에 짓눌려 허덕였고 아시아 아프리카 식민지 종속국 민중이
제국주의 지배와 억압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었지만 미국과 유럽
강대국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영국을 중심으로 금본위제도를 다시
세워 국제무역도 제자리를 잡았다. 강대국들 사이에는 군사력을 키우려는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지만 겉으로는 국제연맹이 세계평화를 위해 힘쓰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제 전쟁이 먼 옛날 일인 것처럼 생각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세계경제 중심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옮아갔다.
미국은 30억 달러나 빚을 지고 있다가 몇 해 사이에 다른 나라에 150억 달러나
돈을 빌려준 첫손꼽는 채권국으로 올라섰다. 미국 자본가들은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유럽에 막대한 돈을 투자하여 엄청난 돈을 벌었다. 이렇게
호경기가 계속되자 세계경제의 심장이 된 뉴욕 월스트리트 증권 거래소는
하루같이 오르기만 하는 주식을 사러 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일찍이 아담 스미드는 "국부론"에서 모든 개인이 오직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기만 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 사회 전체의 번영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고
말했는데 정말 그런 것 같았다. 1929년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번영의 꼭대기에
올라섰다. 자본주의 사회제도에 대한 절망과 비관은 모두 사라졌고 미래는
아름다운 장미 빛으로 물들었다. 특히 미국에서 스미드의 낙관적 이론은
경제이론을 넘어 하나의 신앙으로 자리 잡았다. 그 누구도 바로 코밑에
지옥으로 가는 낭떠러지가 입을 벌리고 있으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1929년 10월 24일도 증권거래소가 문을 열기 전까지는 좋은 날이었다.
그런데 이날 하루 동안 모든 일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주식 값이 갑자기
곤두박질을 시작한 탓이다. 무슨 뚜렷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굳이
원인을 따지자면 사람들이 너나없이 주식 값이 덜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면서 주식을 팔아 버리려고 한꺼번에 몰려나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당장 파산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오후 들어 월스트리트에 있는 어떤 높은 건물
꼭대기에 웬 남자가 나타났다. 그러자 이 남자가 뛰어내리는 것을 보려고
구경꾼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 남자는 사실 다른 일 때문에 옥상에
올라갔는데 구경꾼들이 오해를 한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오해를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실제로 이날 하루 동안 주식 값이 떨어져
알거지가 된 주식투자가 가운데 무려 11명이 이런저런 방법으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다. 이때 월스트리트에서 시작된 주가폭락은 세계대공황으로 번져 나가
인류에게 그 이전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재앙을 안겨 주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이날은 '검은 목요일'이라고 기록했다.
주식 값은 잠시 멈칫거리다가 닷새 지난 화요일에 또다시 곤두박질을 쳐
하루에 무려 절반이나 떨어졌다. 절망의 골짜기는 끝없이 깊었다. 해가 바뀌고
다음해 여름에 접어들 무렵 주식 값은 1929년 9월에 비해 8분의 1 수준까지
내려갔다. 주식 값 폭락은 무시무시한 폭풍우로 변해 세계경제를 강타했다.
미국에서만 5천 개 은행이 부도를 냈고 그 바람에 저금통장 9백만 개가 쓸모
없는 휴지조각이 되었다. 파산한 기업은 그 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 폭풍우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단숨에 뛰어넘어 런던, 파리,
베를린, 동경 등 모든 증권거래소에 밀어닥쳤다. 월스트리트를 덮친 '검은
목요일'은 자본주의 경제제도가 존재하고 있던 모든 나라, 모든 도시, 모든
공장, 그리고 그곳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의 가정에 빠짐없이 찾아와 그 어둡고
불길한 그림자를 짙게 드리웠다.
자유방임시장이 몰고 온 비극
대공황이 일어난 원인을 두고 경제학자들은 여러 가지 학설을 내놓았지만
어느 것도 완전하지는 않다. 그러나 일정한 간격을 두고 주기적으로 찾아드는
공황이 자본주의가 타고난 고질병이라는 데는 대체로 의견을 같이한다. 공황은
19세기 초반 이후 10여 년마다 반복해서 찾아들었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1920년대 번영이 언젠가는 공황을 불러들일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조차도 그처럼 폭넓고 파괴적인 공황이 여러 해 계속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1920년대 유럽과 미국 자본주의 선진국에서는 공업생산이 빠르게 늘어났다.
식민지 종속국에서도 농산물과 원료 생산이 크게 늘어났다. 자본가들은
눈부시게 발전한 기술 덕분에 노동력을 절약하는 새로운 기계를 들여왔다.
그래서 상품생산은 빠르게 늘어났다. 하지만 소비자의 구매력은 그것을 다
사서 소비할 만큼 빨리 성장하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팔리지 않은 농산물과
원료가 창고에 쌓였고 결국 1920년대 중반 국제시장에서는 농산물 가격이
떨어지자 자본가들은 임금을 더 적게 주고 생산비를 줄일 수 있어서 잠시
기뻐했다. 그러나 소비자인 노동자 농민의 소득이 줄어든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어서 공업분야에서도 불길한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25년부터
미국에서는 건축산업이 내리막기로 접어들었고 1929년 6월부터는 공업생산이
제자리걸음을 시작했다.
그런데도 주식 값은 1929년 내내 오르기만 했다. 사람들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경기가 좋을 것이라고 내다보고 너도나도 주식을 사려고 덤벼들었기
때문이다. 전에는 서부에서 금광을 찾으러 다니는 것이 유행이었지만 이제는
한 건 하려는 사람들이 모두 증권거래소로 몰려들었다. 평범한 점원이나
간호원이 주식을 사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떠돌아다니는 가운데
처음에는 제법 부유한 의사나 변호사들이 주식을 샀다. 그러니 주식 값은
비누거품처럼 부풀어 하늘 끝까지라도 올라갈 듯 기세 좋게 치솟았다.
그런데 곧 호경기가 끝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퍼져 나가면서 사태는
하루아침에 거꾸로 돌아섰다. 불황이 시작되면 주식 값이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 사람들은 남보다 한 발 먼저 주식을 팔아치우려고 나섰다. 살
사람은 없는데 모두가 팔려고만 하니 불경기가 오기도 전에 주식 값이 먼저
내려앉았다. 그리고 주식 값이 떨어질 기색을 보이자 더 많은 사람들이 주식을
팔려고 몰려나왔다. 그러면 그럴수록 주식 값은 더 큰 폭으로 떨어졌다.
어제까지는 돈을 꿔서라도 주식을 사려고 설치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것을 팔지
못해 야단법석이었다. 10월 24일 '검은 목요일'은 이런 일이 막 시작된 날이다.
사람들은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이 비누거품처럼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10월 1인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주식 값은 870억 달러
어치였다. 그런데 11월 1일에는 그 액수가 550억 달러로 줄어들었고 1933년
3월에는 겨우 190억 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무려 7백억 달러에 가까운 돈이
증권거래소 게시판에서 녹아 없어진 것이다. 꼭 마술을 보는 것만 같았다.
주식을 잡히고 은행돈을 꾼 사람들은 그 주식을 다 팔아도 빚을 갚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제일 먼저 파산하여 땅과 집을 빼앗겼다. 빌려 준 돈을 제대로
돌려 받지 못하자 몇몇 은행이 부도를 냈다. 은행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
시민들은 예금통장을 들고 은행에 몰려와 예금 한 돈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을
쳤다. 은행은 그들이 맡긴 돈 가운데 일부만 현금으로 남기고 다 누군가에게
빌려준 탓에 한꺼번에 몰려든 예금주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은행들이
추풍낙엽 마냥 쓰러졌다. 요즘 같으면 정부나 중앙은행이 나서서 은행부도를
막아 주겠지만 당시 미국에는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것을 죄악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강했고 그렇게 할 만한 중앙은행제도도 갖추고 있지 않았다.
시민들은 휴지조각으로 변해 버린 예금통장을 보며 한숨을 내쉬다가 어쩔 수
없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지출을 줄였다. 물건이 잘 팔리지 않아 재고가 쌓이자
기업가들은 생산을 줄이고 노동자를 해고했다. 실업자가 늘어날수록 소비자의
구매능력은 더 줄어들었고, 그래서 기업가들은 더 많은 노동자를 해고했다.
그리고 자금이 부족한 기업이 줄줄이 파산하자 실업자는 더 늘어났다.
처음에는 불경기가 올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주식 값이 폭락했다. 그런데
나중에는 주식 값 폭락이 더 지독한 공황을 불러왔다. 국가가 개입하지 못하게
하고 모든 것을 개인의 판단과 결정에 맡겨 두는 자유방임 자본주의는 이렇게
해서 끔찍한 종말을 맞았다. 자본주의는 결코 내버려두어도 번성하는 들꽃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썩어 가는 오렌지, 굶주리는 아이들
대공황은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돌릴 수 없는 이상한 사건이다. 시민들은
나름대로 무얼 사 두면 재산을 늘릴 수 있을까를 따져 본 끝에 주식 값이 오를
때 샀고 내릴 때는 팔았다. 자본가들은 경기가 좋으면 투자를 늘렸고 물건이
안 팔리면 생산을 줄였다. 소비자들은 소득이 줄고 일자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씀씀이를 줄였을 뿐이다. 모두가 현명한 행동을 했는데 사회 전체가
불행해졌으니 서로 원망할 수 도 없는 일이었다.
창고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가득 쌓아 놓고도 밖에서 얼어죽고 굶어 죽는
사람이 있다면 바보가 아니면 정신병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대공황이
위세를 떨치는 동안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그런 짓을 했다. 그것도 스스로
세계를 이끄는 문명사회를 만들었노라고 자랑하던 사람들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여러 해에 걸쳐서.
상점과 공장 창고에는 팔리지 않은 물건이 그득그득 쌓여 있었다. 그런데
거리에는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쓰레기통을 뒤지며 돌아다녔다. 상품은 너무
많은데 그것을 쓸 사람들에게는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쉴
사이 없이 돌아가던 기계는 거기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노동자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열심히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기업가는 물건이
팔리지 않기 때문에 공장을 돌릴 수 없었고 그래서 그들을 고용할 수 없었다.
상점 진열대도 그대로였고 은행에서 발행한 현금도 누군가의 금고에 들어
있었지만 아무도 그 돈을 투자하려 들지 않았다. 야적장에는 석탄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경내 떨며 살았고 거지꼴을 한
아이들이 철조망 사이로 석탄을 훔치려 다녔다. 캘리포니아 농장에서 오렌지
공급을 줄이려고 농장주들이 멀쩡한 오렌지에 석유를 뿌려 썩이는 동안 뉴욕
빈민가 어린이들은 영양실조로 죽어갔다. 새로운 기계와 신품종 오렌지를
개발한 과학자들은 창고를 상품으로 가득 채우는 데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그것을 지혜롭게 나누어 쓰는 문제에 대해서는 과학자도 정치가도 기업가도
뾰족한 대책을 세울 수 없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공항 때문에 손해를 보지는 않았다. 부자들은 더 큰
부자가 되었다. 그들은 쓰러진 경쟁기업을 헐값에 사들이고 값이 떨어진
주식을 긁어모았다. 대공황이라는 폭풍우를 견뎌 낸 기업은 시장을 지배하는
독점기업으로 성장했다. 한편에서 가난과 절망이 켜켜이 쌓여 가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더 많은 재산을 쌓아 올린 것이다.
자유방임시장은 결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주지 않는다. 그
가운데 오직 돈이 뒷받침하는 것만을 줄뿐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눈물겨운
호소에는 냉혹하지만 돈 가진 사람들의 사치스런 요구에는 더없이
고분고분하다. 그래서 부잣집 마나님은 못생긴 개한테 먹일 스테이크를 손쉽게
구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귀중한 아이들에게 썩은 감자나마 배불리 먹이기가
힘들었다.
대도시 빈민구호소 앞에 긴 줄을 이룬 실업자들은 몸과 마음이 다 부서졌다.
장래에 대한 희망도 없었고 처자식을 볼 낯도 없었다. 참다못해 일자리를
요구하며 여러 곳에서 시위를 벌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정부는
공산주의자들이 시위를 조종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서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1932년에는 1만 명이 넘는 퇴역군인들이 워싱턴에 모여
연금을 미리 달라며 시위를 벌이는 일까지 일어났다. 현대산업은 알라딘이
호리병에서 불러낸 말 잘 듣는 거인과는 사뭇 달랐다. 자본주의 선진국
정치지도자들과 국민들은 스스로 만들어 낸 경제제도와 거대산업이 콧잔등을
후려치자 어쩔 줄 모르고 비틀거리고만 있었던 것이다.
공황은 미국에만 머물지 않고 온 세계로 퍼져 나갔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 기업은 유럽 여러 나라에 많은 자본을 투자하여 해마다 엄청난
무역흑자를 올렸다. 유럽 여러 나라에 많은 자본을 투자하여 해마다 엄청난
무역흑자를 올렸다. 유럽 산업국가들은 이 빚을 갚으려고 있는 힘을 다해
수출을 장려했다. 그런데 대공황이 미국경제를 덮치자 미국 사람들은 유럽
상품 수입을 줄였을 뿐만 아니라 투자도 더 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유럽 나라들도 달러가 없어 미국 상품을 살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모든
나라가 똑같은 무역정책을 들고 나왔다. 자기 나라 시장 문을 닫아걸고 관세를
높이면서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시장을 열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수입과 수출이 균형을 이루어야 국민경제에 좋다는 경제학 이론에 따르면
어떤 나라도 자기와 거래하는 모든 나라에 대해 수입 수출액을 맞출 필요는
없다. 그저 총액만 비슷하면 된다. 그런데도 미국과 유럽 산업국가들은 사정이
다급해지자 무역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 하나 하나에 대해 수출입 액수를
맞추려고 했다. 이른바 '두 나라 사이 무역수지 균형'을 추구하는 정책이었다.
이렇게 되니 국제 무역전쟁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가 수출을
늘리려고 애쓸수록 전체 무역 규모는 그만큼 더 줄어들었고 세계경제는 더
깊은 불황에 빠져들었다.
1930년대 불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몇 가지 통계수치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1923년에서 1925년 사이 평균 지수를 100으로 잡고 비교하면 1933년
미국 공업생산은 60, 건축은 14, 고용은 61, 노동자 임금은 38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실업자는 1930년 300만이던 것이 1933년에는 1,500만을 넘었다.
국민총생산액은 1928년 850억 달러에서 1930년 680억, 1932년에는 370억
달러로 줄어들었다. 미국만이 아니라 세계가 다 그랬다. 세계 공업생산액은
1925__29년 평균을 100으로 할 때, 1929년 이사분기에는 113.1이었지만 1932년
삼사분기에는 65.9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세계 무역량은 70%가 넘게
줄어들었고 실업자는 5,000만 명을 넘어섰다. 말 그대로 대공황이었다.
케인즈 혁명
대공황은 수억 인류에게 끔찍한 굶주림과 절망을 안겨 주었다. 그
이전까지는 모든 사람이 다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산업국가를 이끌어 온
정치가와 자본가들만은 자본주의가 '영원한 번영'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각자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만 하면 그것을 사회의 번영으로 이끌어
준다던 '보이지 않는 손'은 꾸며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이기적 욕망과 자본주의 경쟁은 사회의 생산력을 높이는 데는 큰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자유방임시장은 그렇게 해서 생산한 재화를 지혜롭게
나누어 쓰는 일에는 눈 뜬 장님이나 한가지여서 사회는 거대한 늪과 같은 불황
밑바닥으로 자꾸만 가라앉았다.
아담 스미드가 처음 찾아냈고 그 뒤를 따른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신의
손'이라고까지 예찬해 마지않았던 '보이지 않는 손'은 사실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 뉴욕, 동경, 서울과 같은 거대도시에서는 천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매일 아침 신선한 우유를 마시고 잉크 냄새 풍기는 신문을 읽는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들이 먹고 살 야채와 식료품이 이 도시들에 들어오고 누군가가
그들이 살집을 짓는다. 여러 가지 말썽거리가 있기는 하지만 누가 명령하지
않는데도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그런 대로 잘 돌아간다.
모든 경제체제는 몇 가지 핵심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즉 어떤 재화를 어떤
방법으로 얼마만큼 생산해서 어떻게 나누어 가져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정부가 계획을 세워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이
과제가 저절로 해결된다. 자본가는 제한된 자본으로 되도록 높은 이윤을 얻기
위해 시장에서 잘 팔리는 물건을 비용이 가장 적게 드는 방법으로 생산한다.
소비자는 제한된 소득으로 되도록 큰 만족을 얻기 위해 자신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재화를 산다. 모든 개인이 오직 자기의 이익을 위해 생산하고
소비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 사회 전체가 번영하도록 이끌어 준다. 어떤 상품이
너무 많이 오르면 그 상품이 소비자가 원하는 것보다 적게 생산되었다는
신호이다. 그러면 자본가는 생산을 늘리고 더 많은 자본가들이 그 사업에 새로
뛰어든다. 상품의 가격변동을 통해 소비자와 생산자는 시장상황에 대한 정보를
얻어 소비와 생산계획을 조정한다. 노동의 가격은 임금이고 자본의 가격은
이자이다. 모든 소비자와 생산자가 모두 나름대로 가장 큰 만족과 높은 이윤을
얻으려고 노력하면 생산 활동 전반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손의 축복'이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자본주의 생산의 무정부성'이라고 한다. 보이지 않는 손이 지닌
가장 큰 약점은 돈 가진 사람에게만 싹싹하고 친절하다는 것이다.
부잣집 마나님 은 아무리 지독한 불경기에도 목욕하는 데 쓸 우유를 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집 담벼락 아래서 영양실조로 죽어 가는 거지 소년에게는
보이지 않는 손이 축복을 내리지 않는다. 아무리 절박하게 우유를 원하더라도
돈이 없으면 헛일이기 때문이다. 자유시장은 사람들의 '필요'가 아니라 돈으로
뒷받침하는 '수요'에 대해서만 알은 체를 한다. 그래서 상상력이 풍부한
사상가들은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거지 소년과 같은 상황에 빠지게 되면
우유회사도 살아 남지 못할 것이라고 했는데 대공황이 닥치자 정말로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꽝스럽지만 대공황이 일어나기 전까지 경제학자들은
상품이 너무 많이 생산되어 팔리지 않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믿었다.
그들은 반세기나 앞서 "노동자계급이 점점 가난해지는 가운데 생산력은 빠르게
발전하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심각한 과잉생산공황에 빠질 것"이라고 한
마르크스의 학설은 "과학이 아니라 정치적 신념"이라고 비웃었다. 1870년대
이후 유럽 산업국가는 약 10년마다 심각한 불황을 경험하곤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고집불통이었다. 세이가 "상품은 상품에 대해서 출구를 열어 준다."는
소위 '판로설'을 내놓은 뒤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 머리에는 "공급은 같은
크기의 수요를 만들어 낸다"는 미신이 십계명처럼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
학설에 따르면 어떤 상품이 한때 너무 많이 생산될 수는 잇다. 그러면 이
상품은 값이 떨어져 소비자들은 값이 비싼 다른 상품 대신에 이것을 더 많이
사게 되고 생산자들은 생산을 줄인다. 그리고 구하는 것보다 적게
생산되었음이 분명하다. 이 상품은 값이 올라 수요가 줄고 공급은 늘어난다.
이렇게 해서 수요와 공급은 균형을 회복한다. 따라서 모든 상품이 너무 많이
생산되는 전반적 과잉생산이란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실업문제를 인정하지 않았다. 실업자가 늘어나면 임금이 내려가
자본가들이 노동자를 더 많이 고용하게 되기 때문에 노동시장에서도 저절로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업이란 기껏해야
일시적으로 생기는 현상이거나 노동자들이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문제일 뿐이다. 이렇게 보면 실업자는 게을러서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거나 분수에 넘치게 많은 임금을 받으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욕심꾸러기들이다.
대공황이 콧잔등을 후려쳐도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미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세계에서 제인 유명한 경제학자로 손꼽던 어빙 피셔는 세계경제가 곧
불황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진단했는가 하면 미국 대통령 후버는 경기가
밑바닥으로 가라앉은 1932년에 벌써 공황이 끝났다고 큰소리쳤다. 하지만
현실은 그들의 희망과는 전혀 다르게 돌아갔다. 미국 물가지수는 1926년을
100으로 할 때 1933년에는 65.9를 기록했다. 그러나 물가가 이렇게 내려도
상품은 여전히 남아돌았다.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손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무언가 색다른 주장을 한 경제학자 케인즈의
말에 귀기울이기 시작했다.
케인즈는 철두철미 자본주의를 옹호한 보수주의자였지만 불황과 실업이
자본주의가 안고 태어난 고질병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믿음을 거두어 들였다. 그래서 그는 1936년 세상에 내놓은 "고용, 이자와
화폐의 일반이론"이라는 책에서 자본주의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이
고질병을 다스릴 수 있는 방안을 내놓았다.
케인즈는 국민경제가 균형을 이룬 가운데서도 실업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이론으로 증명하였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일하고 싶어하고 일할 능력을
가진 사람이 오랫동안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은, 그들 자신만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경제체제와 사회제도의 결함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케인즈의 이론을
한마디로 줄여 말하자면 유효수요, 다시 말해 화폐의 뒷받침을 받는 수요가
부족해서 생산설비와 노동력이 남아도는 불황이 생긴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생산능력은 큰데 사람들이 돈이 없어 소비를 못해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단에 따라 그는 별로 어렵지 않은 처방을 내렸다. 사람들이 소비할
능력이 모자라니 정부가 나서서 대신 소비해 주라는 것이었다. 정부가
앞장서서 도로를 닦고 병원을 짓고 발전소를 지으면 많은 노동자들의 소득이
되며 그들은 이 돈으로 빵과 옷과 땔감을 산다. 그리고 그들이 지출하는 돈은
기업으로 흘러 들어가 소비재를 만드는 자본가와 거기서 일하는 다른
노동자들에게 이윤과 임금을 안겨 준다. 공장이 장 동아가면 기업가는 새
기계와 원료를 주문하고 공장을 넓히게 된다. 그러면 기계를 만들고 공장을
짓는 생산재 산업도 덩달아 활기를 찾고 그 분야 자본가와 노동자도 새로운
소득을 얻는다. 모든 사람이 더 많은 소득을 올리면 소비가 늘어나고, 소비가
늘어나면 소비재 산업이 번창하며 당연히 생산재 산업도 살아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정부 재정지출을 늘리라는 것인데, 케인즈는 우스개를 좀
섞어 이런 처방을 내렸다.
재무부가 헌 병에 돈을 가득 채워 폐광에 적당히 묻고 그 위를 도시에서
나온 쓰레기로 덮은 다음, 많은 시련을 겪은 자유방임주의에 따라 사기업으로
하여금 그 돈을 다시 파내어 쓰게 한다면 ... 더 이상 실업이 있을 필요가 없다.
... 주택을 짓도록 한다면 더욱 현명하다고 하겠다. 정치적으로 실제적으로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 하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가들은 케인즈의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완전한 자유경쟁
또는 자유방임주의라는 '신앙'에 따르자면 정부가 경제에 간섭하거나 개입하는
것은 큰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은 공산주의 선동가들이나
주장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케인즈는 기자들에게서 혹시
공산주의자가 아니냐는 질문을 여러 번 받았다.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케인즈는 주식투기를 귀신같이 해치워 돈을 많이 번 뛰어난
장사꾼이자 여러 사람의 머리를 한데 모아도 모자라는 천재였다. 고급
포도주와 발레 따위의 귀족 취미를 자랑삼는 부르주아였으며 "자본론"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서 그것이 경제학에는 쓸모가 없다고 단정해 버릴 정도로
지독하게 공산주의를 싫어한 인물이었다.
기업가와 산업국가 정치지도자들은 케인즈를 의심하고 냉대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금방 젊은 경제학도들을 사로잡았고 그리 오래지 않아 미국과
유럽 자본주의 경제학계를 정복했으며 모든 나라 경제관료들을 추종자로
만들었다. 자유방임주의와 보이지 않는 손에 파산선고를 내린 것이다. 케인즈는
이론가로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인물이었지만 새로운 사상체계를
세우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케인즈가 낡은 자유방임주의를
무너뜨린 것을 두고 '케인즈 혁명'이라고 한다. 이것은 분명 과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자본주의 나라 치고 케인즈가 권유한 재정정책을 쓰지
않는 나라는 없다.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것을 공산주의라고 욕하다가는
웃음거리가 된다. 혁명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케인즈가 엄청나게 큰 일을
한 것만은 사실이다.
루즈벨트와 히틀러
대공황은 그 자체만으로 세계를 뒤흔든 비극이다. 그러나 그 뒤를 밟고
따라와 또 한차례 세계를 불바다로 만든 제2차 세계대전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
편이다. 세계 자본주의 열강은 대공황에서 탈출하려고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무역전쟁을 벌이다가 군비경쟁으로 나아갔고 끝내는 원자폭탄까지
터뜨리면서까지 서로 죽이고 죽는 대량학살을 저질렀다.
보이지 않는 손은 국제무역을 일찍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큰 혼란에
빠뜨렸다. 모든 산업국가들이 남아야 어떻게 되든 간에 혼자만이라도
대공황에서 빠져 나오라고 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너나없이 더 깊은
골짜기로 떨어져 갔다. 산업국가들은 서로를 불신하면서 다른 나라에 투자했던
자본을 도로 빼오는 한편, 자기가 가진 외화를 금으로 바꾸어 나라 안으로
가지고 왔다. 당시 금본위제도에서 지폐는 은행에서 금으로 바꿀 수 잇는
이른바 태환 지폐였다. 국제금융질서가 무너져도 국제거래에서 지불수단으로
쓸 수 있는 것이 바로 금이었기 때문에 자본주의 강대국 사이에는 때아닌
중금주의 무역전쟁이 일어났다.
1931년 9월, 영국 정부가 견디다 못해 파운드화를 금으로 바꾸어 주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나서자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도 무너진 적이 잇는
금본위제 국제금융질서는 또다시 붕괴하고 말았다. 서로가 다른 나라 화폐를
믿을 수 없어서 물건값을 금으로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세계 금 보유량은
국제무역을 뒷받침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세계무역량은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자본주의 열강은 국내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장벽을 높이고
경기를 북돋우기 위해 여러 가지 통제정책을 폈다. 영연방 국가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1932년 오타와에서 회의를 열어 연방과 식민지를 블록으로 묶어 그
내부에서는 자유무역을 하면서 다른 나라 상품에 대해서는 높은 수입관세를
물리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다른 나라들도 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 결과 세계는
파운드, 달러, 마르크, 프랑 등, 같은 화폐를 쓰는 제국주의 종주국과 식민지를
묶은 여러 블록으로 나누어졌다. 무역전쟁이 치열해지면서 국제관계가
험악해지자 강대국들은 다가올 전쟁에 대비한 군사력 경쟁으로 들어갔다.
국제연맹은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전략하였다.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평화와 번영의 시대"가 겨우 20년 만에 끝장이 나고 만 것이다.
국제관계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산업국가 노동자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가난과 실업을 증오하면서 과격한 사회주의 혁명운동에 휩쓸려들었다. 전세계
식민지 종속국 민중은 제국주의 침략자들에 맞서 날아갈수록 맹렬하게
민족해방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그 투쟁을 이끈 지도자들 가운데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사상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점점 늘어갔다.
제국주의 정부들은 사회주의 혁명운동과 식민지 민족해방투쟁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자본주의 산업국가 정부들은 자기네가 민주주의를 하는 문명국가라고 늘
자랑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어느 정도 조화로운
동반자처럼 보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공황은 그 둘 사이에 깊은 골짜기를
파놓았다. 제국주의 정부들은 식민지에 자본주의를 옮겨 심는 데는
열심이었지만 민주주의는 한 조각도 나누어주지 않았다. 나라 안에서 일어난
혁명운동을 진압하는 데 민주주의는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을 달래자면 자본주의체제를 많든 적든 수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민주주의가 그나마 제대로 자리잡고 있던 영국, 프랑스, 미국에서는 정부가
개입하여 자본주의를 손질했다. 그러나 독일과 일본처럼 뒤늦게 자본주의
산업발전을 시작한 나라에서는 막 싹터 오르던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국가이익이라는 이름아래 오직 자본가계급의 이익만을 옹호하는 파쇼체제가
등장하였다.
히틀러는 케인즈 경제학에 대해서 뭔가 아는 바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가 권한 바로 그런 정책을 제일 먼저 실행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진
탓으로 엄청난 전쟁배상금을 짊어진 독일 경제는 대공황이 덮치자 돌이킬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의 불만을 틈타 '위대한
독일제국 부활'이라는 환상을 부추김으로써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잡았다. 그는
제일 먼저 유태인을 쫓아내고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체포했으며 나중에는
노동조합 간부와 자유주의 지식인, 심지어는 독재를 비판하는 신부와
목사들까지 모조리 잡아들였다. 군인과 경찰 수를 늘리고 경찰서와 교도소를
짓고 군수품 공장을 세우고 도로와 비행장을 닦았다. 이렇게 재정지출을
확대함으로써 케인즈가 말한 '유효수요'를 만들어 낸 것이다. 히틀러 식
경제정책은 큰 효과를 냈다. 몇 해 지나지 않아 실업자가 사라졌고 독일
경제는 대공황이라는 긴 동굴을 제일 먼저 빠져 나왔다. 일본도 비슷한 정책을
펴면서 중국대륙을 침략함으로써 불황에서 벗어났다.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히틀러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루즈벨트는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것을 자본가들이 결사적으로 반대하는데도 이른바
'뉴딜정책'을 집행했다. 미국 정부는 테네시 계곡에 큰 댐과 발전소를 세우고
곳곳에서 건설사업을 일으키는 한편 독점을 규제하는 법률을 강화하고
임금협상에도 간섭했다. 미국이나 영국 정부가 이렇게 온갖 일에 돈을
투자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대공황을 이겨 낼 수 없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터져 군수물자를 생산하는데 밑도 끝도 없이 돈을 쏟아 붓지 않았다면 아마도
대공황은 1940년대까지 꼬리를 끌었을 것이다.
하지만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는 탱크와 전투기를 아무리 많이 생산해
보아야 국민생활이 나아질 리 없었다. 제국주의 열강은 식민지의 자원을
쥐어짜며 버텨 나갔다. 그러나 나라가 작아 자원과 시장이 모자라고 변변한
식민지도 없었던 독일과 일본은 더 이상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다시 한번
약한 나라를 침략하거나 다른 나라 식민지를 빼앗기 위해 침략전쟁을 벌여야만
했다. 이번에는 유럽대륙만이 아니라 중국대륙과 태평양까지도 전쟁터가
되었고 수천만 명의 생명과 건강과 재산이 화약연기 속에서 허망하게
사라졌다. 잿더미가 된 독일은 미국, 영국, 프랑스 군대가 점령하였고 일본은
몇십 배나 큰 나라인 미국에 대들었다가 두 도시가 미국 원자폭탄 위력
실험장이 되는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다.
대공황이 남긴 것
경험은 바보에게도 가장 좋은 학교이고 필요는 발명을 낳는 법이다. 인간은
대공황 때문에 크나큰 고통을 당했지만 많은 것을 배웠고 다시는 그런 비극을
겪지 않으려고 여러 가지 새로운 제도를 만들었다.
대공황은 무엇보다도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믿음과 자유방임주의
경제이론을 무너뜨렸다.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많은 장점을 지녔지만 그에 못지
않는 결점도 있기 때문에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들꽃처럼 번성하는 제도가
아니라는 교훈을 배웠다. 자본주의는 곁가지를 쳐 주고 바로잡아 주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는 온실 안의 꽃과 같은 불완전한 제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나라들은 '보이지 않는 손'을 완전히 폐지하지는 않았지만 '정부의
보이는 주먹'도 함께 갖추게 되었다.
가장 심각한 피해를 당한 미국 정부는 연방준비제도라는 중앙은행체제를
만들어 통화량과 이자율, 물가수준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또 여러 가지
보험제도와 법률을 정비하여 대공황 때처럼 은행이 한꺼번에 파산하거나
시민들의 예금통장이 휴지조각으로 변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다. 선진
산업국가에서는 어디서나 소득이 높을수록 세율이 높아지는 누진세제도를
확대하고 실업보험과 의료보험제도를 실시하여 불경기에도 최소한의
소비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누진세제도 아래서는 호경기에 소득이
늘어나면 자동적으로 세율이 높아져 세금이 소득보다 더 빠르게 늘어나고 소비
증가는 누그러진다. 불경기에 실업자가 늘어나면 저절로 세금수입이 줄어드는
반면 실업보험금은 더 많이 지급되기 때문에 소비가 너무 빨리 줄어드는 것을
막아 준다. 그래서 이런 것을 두고 경기변동을 누그러뜨리는
'자동안정장치'라고 한다.
산업국가 지배층은 자유방임시장이 분배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도
인정했다. 사회집단 사이에 소득격차가 너무 커져 국민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면 사회질서를 뒤집어엎으려는 혁명세력이 생겨날 수밖에 없고
사회는 안정을 잃고 만다. 그래서 그들은 누구나 똑같은 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의무교육제도를 확충했다. 그리고 헌법과 법률로 힘이 약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사용자와 단체협상을 하고 파업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였다. 독점대기업이 시장을 지배하면서 소비자를 착취하지 못하도록
독점금지법과 공정거래법을 만들었다. 그리고 국민들에게는 필요하지만
사기업이 투자하기 어려운 교통, 전신전화, 도로건설 따위의 공공산업, 무역에
대해 정부가 전혀 손을 대지 않는 자본주의 나라는 하나도 없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자본주의라는 말을 이제 적당하지 않으니 복지국가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그보다 '수정자본주의'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모두가 저 혼자만이라도 살아 보려고 발버둥치다가 국제무역 전체를 망치고
전쟁으로 치달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자본주의 선진국들은 전쟁이
끝난 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을 만들어 국제금융질서를
안정시켰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을
만들어 '공정한 국제거래질서'와 자유무역은 뒷받침하려고 했다.
대공황은 기억하기 싫을 만큼 끔찍한 고통을 안겨 주었지만 어쨌든 지난
일이 되었다. 반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그 정도로 심각한 공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가능성마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양상은
다르지만 경기변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경제학자들이 그 원인을
시원스럽게 밝혀 낸 것도 아니다. 케인즈 식 처방도 낡아 버렸다. 케인즈
이론에 따르면 불황 때는 물가가 내려가야 한다. 그러나 요즘에는 어느 나라
정부나 높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현상 때문에 골치를
썩인다. 흔히 말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케인즈가 준 처방을
믿고 쓸 수 없다. 불황이라고 재정지출을 늘렸다가는 물가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공황은 그 힘이 전보다 많이 약해졌지만 아주
죽어 버리지는 않았다.
국제무역도 여전히 말썽거리다.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은, 당연한
일이지만, 자본금을 댄 몇몇 강대국 손아귀에 들어 있다. 자유무역이 좋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부자와 가난뱅이가 뒤섞여 사는 국제사회에서는 얹나
선진국이 저개발국을 협박하는 무기로 쓰인다. 선진국들은 중요한
핵심산업분야에서 자유무역을 요구한다. 만약 말을 듣지 않으면 후진국이
생산한 소비재를 수입해 주지 않겠다고 협박한다. 이렇게 나가면 아마도 지금
뒤 처진 나라는 영원히 '별 볼일 없는 소비재'나 생산하면서 높은 기술이
필요한 상품은 언제나 턱없이 비싼 값을 주고 사다 쓰는 신세가 되기
십상이다.
자본주의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사회의 생산능력을 눈부시게 발전시켜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대공황과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경기변동은 인간이 이 제도를 마음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대공황은 사람들이 인간을 위해 상품을 생산한다는 명백한 진리를
망각하고 마치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하는 것 자체가 목적인 양 자본주의의
장점에만 도취되어 있던 바로 그때 세계를 덮쳤다. 만약 인간이 자기가 제대로
다스리지도 못하는 제도를 아무 비판 없이 예찬하고 무작정 섬기는 잘못을
되풀이한다면 또다시 대공황과 같은 재앙을 불러들이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이야말로 대공황이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ff
대장정
중화인민공화국을 낳은 현대의 신화
@ff
모택동, 중국을 통일한 영웅
중국은 세계에서 제일 큰 나라이다. 땅이 넓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열 사람
가운데 하나가 그곳에 살만큼 인구도 많다. 우리 역사에 자주 나오는 길림성,
요령성, 흑룡강성 따위는 만리장성 너머에 있는 동북지역 변장에 불과하다. 이
넓은 나라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거대한 강이 둘 흐른다. 위는 황하요
아래는 양자강이다. 발해 만에서 바다와 만나는 황하 이북은 타이항산맥을
경계로 하북성과 산서성으로 나뉜다. 두 강 사이는 하남, 산동, 강소, 안휘,
호북성이고 양자강 아래에는 호남, 강서, 귀주, 광서, 광동, 절강, 복건성이
자리잡고 있다. 인도차이나반도에 맞닿는 지역은 운남성이고 서북 내륙
티벳고원과 고비사막에 둘러싸인 산악지역에는 사천, 감숙, 섬서성이 있다.
일찍이 위, 오, 촉 세 나라가 맞섰던 삼국시대에 위나라 조조는 양자강 북쪽을,
오나라 손권은 양자강 남쪽을, 그리고 촉나라 유비는 서쪽 내륙을 근거로 삼아
패권을 다툰 바 있다. 이 성들은 모두 제각기 나라를 이룰 만큼 크다.
수천 년 중국 역사에서 이 넓은 대륙을 통일한 영웅은 몇 안 된다. 기원전
3세기에 진시황이 처음으로 대륙을 통일했지만 제대로 된 국가를 세우지는
못했다. 최초로 '아시아적 전제국가'를 세운 인물은 기원전 202년 항우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었다. 그 뒤에도 이 나라에서는 신해혁명으로
청 왕조가 무너지기까지 일곱 차례나 통일왕조가 흥망성쇠를 되풀이했다.
한나라가 망하자 삼국시대가 열렸고 당나라가 무너진 후 5대 10국시대가 온
것처럼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무너지자 중국 대륙은 각 성을 지배하던
지방군 벌 손아귀에 들어가 혼란에 빠졌다. 영웅주의 역사관으로 보면 걸출한
영웅이 나타나야 이러한 혼란 상태를 끝내고 통일국가를 세울 수 있다. 주가
멸망한 후 5백 년 동안 계속된 춘추전국시대를 진시황이 마감하였고 진시황이
죽은 다음 벌어진 대 혼란을 한 고조 유방이 수습한 것처럼 신해혁명 이후
열린 군벌시대를 끝내는 일도 뛰어난 영웅이 아니고는 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의 요구에 나름대로 응답하고 나선 인물이 바로
장개석과 모택동이었다.
중국 역사에서 보기 드문 영웅들끼리 벌인 가장 흥미진진한 대결로는 항우와
유방이 맞붙은 초 한전과 조조, 손권, 유비가 벌인 전쟁을 꼽을 수 있는데,
장개석과 모택동이 벌인 싸움은 초 한전과 비슷한 데가 많다. 모택동은 유방과
마찬가지로 늘 몰리고 도망 다니는 신세였지만 막판에 전세를 뒤집어 승리를
거두었다. 유방이 천하무적 항우를 꺾은 것은 그 자신이 잘난 덕분이기도
하지만 소하, 한신, 장량과 같은 능력 있는 참모를 자기 옆에 두고 재주를
발휘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모택동 역시 주덕, 팽덕회, 임표, 주은래 같은
인문들과 손잡고 일할 수 없었다면 장개석을 이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모택동은 중국 대륙을 통일한 여덟 번째 영웅이다. 그런데 그는 진시황,
유방, 유비, 조조, 주원장, 징기스칸, 누르하치 등 앞선 시대 영웅들과는 전혀
다른 나라를 만들었다. 이전 영웅들은 수백만 농민 군이나 몽고 또는 만주의
'야만족'을 이끌었지만 언제나 멸망해 버린 나라와 본질적으로 똑같은 나라를
세웠다. 그래서 왕조의 이름이 바뀐 것만 빼면 별로 다른 데가 없는
전제국가가 2천 년이나 중국을 지배했다. 그러나 장개석과 모택동을 달랐다.
장개석은 봉건적 전제국가가 무너진 자리에 자본주의 경제제도와 독재권력을
심으려 했다. 모택동은 낡은 봉건적 질서를 쓸어 내는 동시에 막 떡잎이 나온
자본주의마저 부정하고 '노동자와 농민의 사회 주의국가'를 세우려고 했다.
모택동은 장개석이 이끈 국민당 군대와 일본제국주의 침략군을 상대로 30년
동안이나 싸운 끝에 북경 천안문 광장에 붉은 깃발을 꽂았다. 그로부터 5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 중국은 모택동이 설계한 것과는 무척 다른 나라로
변하였다. 모택동이 '새로운 민주주의'라고 했던 중국 정치체제는 공산당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일당독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면에서는
시장제도를 들여와 요 몇 년 동안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자랑하고 있다. 옛 소련이나 동유럽 사회주의나라들과 달리 중국이 시장경제를
확대하면서도 일당독재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중국공산당이 머지않아 소련공산당과 같은 신세가
될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대도시와 수도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다음 나라 전체를 사회주의체제로 바꿔 나간
러시아나, 소련 군대가 점령한 가운데 탄생한 동유럽 사회주의와는 전혀 다른
과정을 거쳐 생겨난 사회주의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중국
사회주의혁명의 특수성이 무엇보다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모택동이
이끈 대장정이다.
국공내전의 뿌리
만주족이 세운 나라 청 왕조는 19세기 서유럽 제국주의 세력에게 침략
당하면서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없는 처지에 빠졌다. 청 왕조는 조선 지배권을
두고 일본과 벌인 전쟁에서도 맥을 추지 못하고 졌다. 청 왕조 멸망을
확실하게 만든 사건은 1911년 10월 10일 호북성 무한에서 일어난 혁명이다. 이
혁명을 신호로 한 달 안에 산서, 운남, 산동, 광동, 사천성 등 열 여섯 성이
독립을 선언했다. 이들 성 대표들은 상해에 모여 임시정부를 세우고 유럽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돌아 온 손문을 임시 대 총통으로 내세웠으니 이것이
신해혁명, 즉 제1혁명이다.
청 왕조는 북부 군대를 지배하던 원세개를 시켜 혁명세력과 협상을 벌였다.
혁명세력은 힘이 부족했고 각 성을 실제로 지배하는 세력은 부패하고 완고한
지방군벌이었기 때문에 손문은 "청 황제를 내쫓고 민주공화국을 세우는" 것을
조건으로 임시 대 총통 자리를 원세개에게 넘겨주었다. 진시황 이후 2천 년을
내려온 전제군주제도는 1912년 선통제가 물러남으로써 마침내 막을 내렸다.
그런데 원세개는 약속과 달리 공화국 헌법을 짓밟고 혁명세력과 의회를
탄압하면서 자기가 새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그러자 강서, 강소,
안휘, 복건, 광동, 호남 등 남부 여러 성 혁명세력은 1912년 7월 다시 독립을
선언했다. 이것이 제2혁명이다. 원세개는 북부 군대를 동원하여 혁명군을
공격했다. 손문은 국민당을 조직하여 광동에 정부를 세웠다. 하지만 국민당
정부는 허약하기 짝이 없었고 지방군벌은 각 성을 자기 왕국처럼 지배하면서
청 왕조 시대보다 더 혹독하게 민중을 착취하고 억압했다. 이런 군벌시대는
10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모택동은 바로 이런 시대상황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1893년 호남성
상담현 소산마을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양자강 동정호가 있는
호남성은 예로부터 혁명 전통이 매우 강한 곳으로 백팔 명의 호걸이 등장하는
"수호지"의 무대이기도 하다. 곡물장사를 한 아버지는 아들이 무조건
복종하기를 요구했으며 낮에는 농사일을 시키고 밤에는 장부 정리를 시켰다.
그리고 출세하는 데 도움이 되는 유교경전을 공부하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모택동은 이런 낡은 가치관을 받아들이지 않는 '반항아'여서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고 고향에서 50리나 떨어진 상향의 신식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유교경전
대신 "삼국지"나 "수호지" 같은 고대 전기소설을 읽으며 영웅이 되기를
꿈꾸었고 신식학교에서 중국과 세계 역사를 배우면서 중국사회의 모순에
눈떴다.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모택동은 호남 혁명군에 들어갔다. 하지만 손문이 남경
정부를 세우자 혁명이 끝났다고 생각해서 여섯 달 만에 손을 떼고 호남성 수도
장사로 가 호남 제일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이 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는
"혁명을 하려면 체력이 튼튼해야 한다"며 서리가 내리는 들판에서 야영하고
겨울 강에서 수영을 하는 등 체력 단련에 열을 올렸다. 그리고 1917년 다른
젊은이들과 함께 '신민학회'라는 지식인 단체를 만들어 혁명활동을 시작했으며
스승의 딸이자 역시 혁명가인 양개혜와 1921년에 결혼하였다.
호남사범을 졸업할 때까지 모택동은 아직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북경대학 도서관에서 일하는 동안 중국 공산주의운동의 창시자라는 진독수를
만나고 "공산당선언"과 칼 카우츠키의 "계급투쟁"을 읽으면서 공산주의사상을
받아들였다. 1921년 여름 상해에서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열었는데 말이 전국대회 일 뿐 참석자가 열두 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모임에
지나지 않았다. 이 대회가 끝난 뒤 모택동은 고향으로 돌아간 공산당 호남성
지부를 조직하여 맹렬한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의 힘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한편 손문은 자본주의 열강이 지방군벌을 지원하면서 각종 이권을 따내는 데
혈안이 되어 날뛰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러시아공산당과 손을 잡았다.
"러시아공산당의 조직 기술과 훈련 방법을 배우는 것이 중국혁명을 승리로
이끄는 지름길"리라고 판단하고 1922년 러시아 사회주의정부의 원조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중국공산당과 합작을 제안 한 것이다. 중국 공산당원들은
이 제안에 따라 국민당에 입당하고 광동에 있던 국민당 정부에 참여했다.
이것이 바로 '제1차 국공합작'이었다.
국민당 정부는 러시아 군사고문의 지도를 받아 광동에 황포군관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 교장은 당시 두각을 나타냈던 젊은 장교 장개석이 맡았는데
묘하게도 정치주임은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청년 공산주의자
주은래였다. 주은래는 뒷날 서안사건에서 장개석의 목숨을 구해 주었고
중화인민공화국 외교관으로서 온 세계에 이름을 떨치게 된다.
1925년 국민당은 북쪽의 군벌을 토벌하는 이른바 '북벌' 준비를 갖추었다.
그런데 마침 손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러시아 고문단은 장개석에게
총사령관 자리를 맡겼다. 국공합작 혁명군은 1926년 북벌에 나섰다. 군벌의
횡포에 신음하던 민중은 혁명군을 힘껏 도왔다. 그 사이에 도시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당원을 6만 명이나 확보한 공산당도 전심전력으로 북벌에 협력했다.
군벌과 지주의 착취 때문에 가난에 허덕이던 농민들이 누구보다도 더 열렬히
혁명군을 환영했다.
호남성에 농민을 조직하던 모택동은 중국의 혁명이 러시아혁명과는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1927년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농민운동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는 중국이 농민의 나라이기 때문에 농민이 혁명의
'주요세력'이라 주장하면서 혁명이 광동이나 상해, 북경처럼 제국주의 열강과
국민당 군대와 군벌이 장악한 대도시가 아니라 농촌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래서 가난한 농민들을 혁명세력에 끌어들이려면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는 농업강령을 채택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혁명의 전위는
산업노동자'라는 마르크스 레닌주의 교의를 따른 당 지도부는 모택동의 제안을
무시해 버렸다.
제1차 국공합작은 1927년 4월 12일에 끝장이 났다. 국민당 장개석이 그
유명한 쿠데타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지주와 상인,
대자본가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장개석은 북벌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자 혁명군 내부에 잇는 사회주의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국민당 군대는 남경과 상해에서 공산당원과 노동자들을 대량
학살했다. 장개석의 정치참모였던 주은래는 구사일생으로 달아낫다. 살아 남은
공산당원들은 농촌으로 숨어들었다. 국민당 군대가 얼마나 잔혹한 대학살을
저질렀는지는 앙드레 말로가 쓴 "인간 조건"이라는 소설을 보면 잘 알 수도
잇는데 공산당원 열 가운데 여덟이 살해당하는 바람에 당원이 1만 명도 남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의 국공내전은 이 쿠데타에서 시작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강산 소비에트의 탄생
사회주의자들을 쓸어 내고 영국, 일본, 미국, 프랑스 등에 막대한 이권을
내준 장개석은 제국주의 열강의 총아가 되어 반공 연합전선을 형성했다. 살아
남은 공산당원들은 지하로 숨어들어 조직을 재건했다. 총서기 진독수는 해임
당하였고 새 지도부는 도시 노동자 봉기를 통해 혁명을 일으키려는 이른바
'이립삼주의'를 따랐다. 그러나 공산당이 일으킨 몇 차례 도시봉기는 국민당
군대에게 무자비하게 진압 당하고 말았다.
모택동은 일찍부터 장개석의 속마음을 의심하면서 국민당과 손잡는 일에
반대했다. 그러던 중 장개석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그는 호남성 장사에서
농민조합과 광부, 그리고 국민당 반란군을 조직했다. 장개석과 모택동 사이에
벌어진 22년간의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1927년 8월 1일, 강서성 수도 남창에서 전설적인 홍군 지도자 하룡과 엽정이
봉기를 일으켜 국민당 군대와 맞섰다. 모택동은 다음달 호남성에서 최초로
노동자 농민 부대를 만들어 추수봉기를 일으켰으니 이 부대가 '노농
제1군'이었다. 이때 모택동은 국민당에 협력하는 민단 병사들에게 붙잡혔지만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2백 정도 안 되는 소총을 가진 패잔병 1천여 명을 이끌고
호남, 강서, 광동성으로 통하는 전략 요충지 정강산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공산당 지도부는 이것을 두고 '소총 운동'이라고 비난하면서 그를 정치국에서
해임하고 모든 관계를 끊어 버렸다. 하지만 정강산에는 유격대 지원병들이
계속해서 찾아들었고 모택동은 호남성 방면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선거를
실시하여 중국 최초의 소비에트를 비롯하여 당 지도노선에 따라 일으킨
도시봉기는 국민당 군대의 집중공격을 받아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1928년 5월, 주덕이라는 혁명가가 정강산에 나타났다. 주덕은 모택동과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부터 모험을 좋아하고 영웅을 동경하여 운남성 신식
군대에 들어갔다. 그는 1912년의 2차 혁명 때 젊은 장교로서 보기 드문 용맹을
떨친 후에 출세를 거듭하여 운남부 공안국 장관이 되었다. 당시 높은 관리들이
보통 그랬던 것처럼 주덕도 아내를 여럿 두었고 아편중독자였다. 하지만
인정이 많은 사람이어서 혁명이 일어나도 여전히 가난하기만 한 농민들에 대해
깊은 동정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외국에서 공부하고 운남성으로 돌아온
몇몇 유학생을 사귀면서 주덕의 인생행로는 정반대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는
군벌정권이나 자본주의체제가 형식은 다르지만 착취제도인 점에서는
전제군주제도나 마찬가지라는 젊은 학생들의 견해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나이가 벌써 마흔에 가까운 이 사나이는 어느 날 갑자기 아편을 끊고 나타나
아내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준 뒤 홀연히 길을 떠났다. 독일로 건너간 주덕은
독일 말을 한마디도 못하면서도 고집스럽게 젊은 유학생들에게 마르크스주의를
배웠다. 그의 과거를 아는 이들은 "썩어 빠진 군벌 앞잡이"라고 손가락질을
했지만 주덕은 모든 수모를 참고 견뎠다. 하지만 이런 주덕을 도와주고 격려한
젊은이가 하나 있었는데 다름 아닌 주은래였다.
1925년이 저물 무렵 중국으로 돌아온 주덕은 남은 재산을 정리하여 공산당에
바치고 장개석 다음 가는 국민당 실력자 주배적 장군의 부하로 들어갔다.
1927년 주덕의 부대가 양자강 남부를 점령하고 있을 때 남창에서 공산당이 8월
봉기를 일으켰다. 그는 진압 명령을 받자 거꾸로 공산당 군대와 합류하여
남쪽으로 도망쳐 여려 차례의 전투와 생사를 넘나드는 위험을 넘긴 끝에 몇 개
소대에 불과한 추종자들을 이끌고 정강산으로 들어가 모택동이 숨어 있는 곳을
찾아냈다. 이렇게 해서 유방과 한신, 유비와 제갈 공명의 결합에 버금간다는 두
영웅의 결속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수호지"에 나오는 양산박 호걸들처럼
정강산을 중심으로 여러 현을 점령하여 난공불락의 군사요새를 건설했다.
주덕은 그후 수백 차례의 전투에서 천재적인 전술을 펼치면서 홍군의
전투력을 막강하게 키워 냈다. 그는 줄곧 홍군 총사령관으로 있었지만
병사들과 똑같이 먹고 입었다. 계급장도 없이 맨발로 다니면서 식량이
떨어지면 똑같이 풀뿌리를 먹었다. 하지만 명에 걸리지도 않았고 불평하지도
않았으며 대장정 때는 자기 말을 부상병에게 내주고 태반을 걸어다녔다.
병사들은 누구나 직접 그에게 불만을 호소할 수 있었고 부하들이 인사를 하면
꼭 모자를 벗어 답례했다. 농민들 사이에서는 그가 사방 백 리를 본다느니,
축지법을 쓴다느니, 도술로 비바람을 일으킨다느니, 심지어는 총알을 맞아도
죽지 않는다느니 하는 온갖 소문이 떠돌았다. 사실 주덕을 너무 미워한 국민당
군대는 여러 차례 그를 사살했다고 발표하고 숨을 거두는 장면을 자세히
보도하기까지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주덕이 부활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이처럼 뛰어난 군사지도자와 손잡은 덕분에 모택동은 정강산을 중심으로 한
강서 소비에트지구에서 정치지도자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국민당이 홍비, 즉
붉은 도적 떼라고 한 홍군은 겨우 두 해 만에 대부분 장개석 군대에게서
빼앗은 5만 정의 소총으로 무장한 군대로 성장했고 강서, 호남, 복건성 일대에
광대한 소비에트를 세웠다. 그들은 그곳에서 군수공장을 세우고 산업을
건설했으며 사회주의적 경제개혁과 정치교육을 실시했다. 홍군이 장악한
지역은 국민당 정부와 지방군벌이 지배하는 중국대륙 한 귀퉁이에 솟아난
'이상한 나라'였다. 홍군은 국민당 군대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세력이었지만
정강산 일대에 근거지를 만들어 장기전을 벌일 태세를 갖추었다.
다섯 차례의 '초공전'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상해에 있었다. 1930년 6월 공산당은 홍군에게
대도시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혁명의 새로운 고조기를 맞아 몇몇 성에서
선구적인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는 것이 당 지도부의 결정이었다. 그러나 이
명령을 따른 결과 홍군은 물론 모택동 개인도 큰 상처를 입었다. 팽덕회가
이끈 홍군 주력은 장사를 점령하여 이립삼을 주석으로 하는 호남성 소비에트를
세웠다. 모택동과 주덕도 홍군을 이끌고 남창을 공격했다. 그러나 호남성
소비에트는 1928년 광동성 해륙풍 소비에트와 마찬가지로 국민당 군대의 집중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열흘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홍군은 다시 농촌지역으로
후퇴해야 했다.
이렇게 되자 도시 노동자를 중심으로 사회주의혁명을 이루려 한 이립삼과
스탈린 주의자들이 당 지도부에서 밀려났다. 홍군은 큰 타격을 입었지만 이
공격을 통해 전세계에 중국공산당과 홍군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모택동은 아내 양개혜와 하나뿐인 여동생을 잃었다. 국민당군에 잡혀
중국공산당을 버리든가 목숨을 버려야 하는 처지에 빠졌을 때 그들은 의연히
신념을 택하고 목숨을 빼앗겼다. 장개석은 불과 몇 해 사이에 제법 큰 규모로
성장한 "홍비를 소탕하기 위해서는 그 본거지인 강서 소비에트 지역을
청소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본격적인 국공내전의 막이 오른 것이다.
1930년 말, 장개석은 10만이 넘는 병력을 동원해 소비에트 지구를 포위했다.
홍군은 4만에 불과한 데다 무기도 아직 형편없이 모자랐다. 하지만 국민당
군대(이제부터는 백군이라 한다)는 홍군을 이길 수가 없었다. 홍군은 백군을
소비에트 지구 깊숙이 끌어들인 다음 교묘한 유격전을 펼쳐 궤멸시켰다. 적이
공격해 오면 홍군은 도망쳤다. 그러나 추격하던 적이 진을 치면 그때부터
끊임없이 크고 작은 공격을 가했고 적이 전투를 피하려고 하면 더욱 매몰차게
추격했다. 홍군은 백군보다 훨씬 빠르게 이동하면서 병력을 한곳에 집중하여
흩어진 백군부대를 순식간에 섬멸하였다. 이렇게 하여 "악랄한 공산주의자들의
본거지를 소탕"하기 위해 장개석이 감행한 제 1차 초공전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장개석은 1931년 5월, 20만 병력을 동원해서 제 2차 초공전을 벌였다.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모두 일곱 방향에서 소비에트 지구를 공격한
백군 가운데 여섯이 홍군에게 격파 당하였다. 홍군은 열 나흘 동안 행군하면서
여섯 번 전투를 벌여 모두 이겼다. 분통이 터진 장개석은 불과 한 달 뒤에
"홍비를 남김없이 쓸어 내겠다"고 큰소리를 치면서 30만 대군을 이끌고 몸소
전선으로 달려갔다. 그는 하루 80리씩 기세 좋게 소비에트 중심부를 향해
전진했다. 그런데 3만에 불과한 홍군 주력부대는 눈부신 기동전을 선보이면서
닷새 동안 백군 부대 서른 다섯을 공격하여 수많은 포로를 잡고 총포와 탄약과
군사장비를 무더기로 손에 넣었다. 때마침 일본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했기 때문에 장개석은 어쩔 수 없이 제 3차 초공전을 중단하고 남경으로
돌아갔다. 사기가 오른 홍군은 12월 정식으로 중앙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하고
모택동을 주석으로, 그리고 주덕을 홍군 총사령관으로 선출하였으며 복건성과
광동성 쪽으로 세력을 넓혀 나갔다.
그냥 앉아서 구경만 할 수 없게 된 남경 정부는 1933년 4월, 네 번째
초공전을 시작했다. 홍군은 25만의 백군을 상대로 벌인 첫 전투에서 사단장을
포함하여 2개 사단을 통째로 사로잡았고 낙안현 대룡평이라는 곳에서 치른
전투에서 포로 1만3천을 잡고 엄청난 물자를 노획했다. 백군 52사단과
11사단은 전멸했다. 장개석은 일생일대의 치욕스런 패배를 맛보았다. 국민당
군대는 홍군의 보급부대 노릇을 했다. 홍군은 전투를 할 때마다 수가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빼앗은 무기로 더 단단하게 무장을 갖추었다.
장개석은 같은 해 10월부터 다음해 가을까지 90만 대군을 이끌고 제5차
초공전을 벌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백군은
수도 많았지만 비행기 4백 대와 기관총 등 신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홍군은
겨우 18만 병력에다 무기래야 소총 10만 정이 고작이었다. 장개석은 독일
군사고문 팔켄하우젠의 권고에 따라 도로와 토치카를 건설하면서 매우 느리게
진격하는 새로운 전술을 펼쳤다. 예전처럼 유격전을 하기가 어려워진 홍군은
백군의 진지전에 정면으로 맞섰다가 큰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백군은 홍군의
유격전을 봉쇄하기 위해 점령한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쫓아내는
초토화작전을 썼다. 홍군은 주력부대를 잃지는 않았지만 병력을 6만이나
잃었고 농민들이 백만 명이나 살해당하거나 굶어 죽는 참사가 일어나 근거지를
태반이나 빼앗겼다. 정강산을 중심으로 한 강서 소비에트를 더 이상 지켜 낼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소비에트를 더 이상 지켜 낼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소비에트 지도부는 혁명 근거지를 서북 내륙으로 옮기는 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백군이 포위망을 바짝 죄어 들어온 1934년 10월
16일 홍군 군사위원회는 마침내 장정개시 명령을 내렸다.
장개석은 승리가 눈앞에 다가왔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홍군이 무슨 계획을 꾸미고 있는지 몰랐다. 홍군은
중국대륙 남쪽을 반 바퀴 돌아 서북 내륙지방으로 근거지를 옮기는 대탈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공산당은 이것을 "항일구국전쟁을 위한 대장정"이라고
하였지만 내놓고 말하자면 도망이었다. 도망은 도망이되 그냥 군대만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세운 강서 소비에트라는 나라 전체가
도망치는 셈이었다.
홍군 주력부대는 강서성 남부에 집결한 다음 남쪽으로 내려가 호남성과
광동성 백군 진지에 기습공격을 퍼부었다. 이것이 세계를 놀라게 한 대장정의
신호탄이었다. 선두에서 9만 홍군 주력부대가 길을 열고 수십만 농민이 그
뒤를 따랐다. 남녀와 노소, 공산주의자와 비 공산주의자를 막론하고 국민당과
군벌의 횡포를 피하고 싶은 사람들은 너나없이 그 대열에 끼어 들었다. 그들은
무기와 기계설비, 농기구와 가축 등 가지고 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길을
떠났다. 끝없는 행군과 전투의 소용돌이 때문에 그들은 결국 남아도는 총과
탄약을 길가에다 묻어야 했고 부상병은 농민들 속으로 숨어들었다. 유격대
6천명이 후방에서 백군과 혈투를 벌이는 동안 주력부대는 일단 적의 추격을
벗어났다. 그래서 장정은 시간이 흐르면서 홍군 병사들 가운데서도 강한
자만이 살아 남는 군사이동으로 변해 갔다.
살아 남는 것이 승리인 대장정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사이에 격렬한 전투를 수반하며 펼쳐진 숨바꼭질은
정확히 말해서 368일 동안 이어졌다. 백군은 홍군이 달아나는 길목을 자르고
포위망을 쳤다. 그러나 홍군은 1934년 10월 21일 강서성의 첫 번째 백군
저지선을 돌파했고 11월 3일 두 번째 저지선을 뚫었으며 일주일 후에는
제3선을 무너뜨렸다. 고아동성을 지나 광서성 제4저지선을 돌파한 홍군은
갑자기 북으로 방향을 돌려 호남성으로 뛰어 들어 사천성을 향해 똑바로
나아갔다. 남경 정부를 따르는 하건과 백승희 등 지방군벌들이 무려 110개
연대 병력을 동원하여 가로막았다. 이들을 뿌리치고 귀주성에 도착했을 때
홍군 병력은 벌써 3분의 1로 줄어 있었다. 게다가 귀주에는 백군 20만이 길을
막고 있었다. 홍군이 장개석의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홍군은 일직선 행군을 포기했다. 무거운 장비를 땅에 묻고 낮에는 숨어서
백군 비행기를 피했다. 행군할 수 있는 시간은 밤뿐이었다. 그런데 양자강이
홍군을 가로막았다. 사천성으로 가려는 홍군의 계획을 눈치챈 장개석은 모든
나룻배를 강 북쪽에 묶어 두고 도로를 차단하였으며 들판의 곡식을 남김없이
거두어들인 다음 홍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홍군은 귀주성에서 넉 달 동안
싸우면서 5개 사단을 격파하여 병력 2만을 보충하고 서쪽 운남성으로
들어갔다.
운남성은 험준한 곳이어서 양자강이 협곡과 산봉우리 사이를 빠르게 흐르고
강 양쪽에는 수직에 가까운 절벽 투성이다. 백군은 나루터를 미리 점령하고
배를 불태웠다. 홍군은 양자강 상류 몇 안 되는 도강 지점 가운데 하나인
여강나루에 접근하여 대나무로 다리를 만들었다. 장개석은 다리를 만들었다.
장개석은 다리를 만드는 데 몇 주일이 걸릴 것으로 보고 홍군을 포위하기 위해
병력을 그 부근으로 불러모았다.
그런데 어느 날 홍군 1개 대대가 몰래 지나온 길을 되돌아갔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들은 하루 낮 하루 밤사이에 무려 135킬로미터를 걸어 교평도에
도착했다. 그곳은 여강나루를 빼면 그 일대에 하나뿐인 나루터였다. 홍군
특공대는 소리 없이 적진으로 들어가 백군 수비대를 사로잡았다. 그리고는
수비대 장교를 시켜 건너편 나루터에 신호를 보내 배 한 척을 보내게 한 다음
그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마작에 열중하고 있던 건너편 수비대를 처치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그 사이 여강 나루에 있던 주력부대는 밤을 틈타
장거리 역행 군을 감행하여 다음날 점심참에 교평도에 도착했다. 홍군은 큰 배
여섯 척으로 아흐레 동안 밤낮없이 병력을 실어 날랐다. 그들이 단 한 명의
인명 손실도 입지 않고 사천성으로 들어가자 뒤쫓아온 국민당 군대는 닭 쫓던
개꼬리 되고 말았다.
손안에 든 적을 놓친 장개석은 비행기를 타고 사천성으로 날아갔다. 그곳
병력을 동원하여 또 다른 양자강 지류에서 홍군을 저지할 계획이었다. 한편
홍군은 재빨리 북진하여 매우 호전적인 부족국가 독립로로국 땅에 들어섰다.
로로족은 예로부터 한족을 증오하는 야만족이었다. 한족은 여러 번 국경을
넘어 로로족을 공격했지만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싸우는 로로족을 정복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피투성이가 되어 쫓기고 있는 홍군으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싸움을 피해야만 했다. 다행히 홍군 선봉부대 지휘관 유백승이라는
사람이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했다.
유백승은 사천성 출신으로 로로족 말과 풍습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추장을
만나 소수민족을 탄압하는 '백색 한족'과 자치권을 보장하는 '적색 한족'이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고 공동의 적인 백색 한족에 맞서 함께 싸우자고
설득했다. 로로족은 그렇다면 무기와 탄약을 달라고 했다. 홍군은 자기네로서는
목숨과 다름없는 무기를 넘겨주었다. 유백승은 닭모가지를 잘라 피를 나누어
마시고 동맹을 맺었다. 임표가 이끈 제1군단 선봉대는 로로족 전사가 안내해
주는 대로 따라가 안순장 강변마을을 점령했다. 여기서 빼앗은 배는 세 척
뿐이어서 일개 사단이 강을 건너는 데만 사흘이 걸렸다.
백군 추격대가 바로 뒷덜미까지 다가온 가운데 모택동, 주덕, 임표, 팽덕회
등 홍군 지도자들은 긴급 군사회의를 소집했다. 다른 도강지정을 찾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맨발의 홍군은 즉각 안순장에서 서쪽으로 4백 리나
떨어진 노정교를 향해 떠났다. 배를 타고 북쪽으로 건너간 부대도 강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서로 함성을 질러 격려하며 달렸다. 만약 노정교를 점령하지
못하면 2천 리나 되는 먼길을 걸어야 했고 그것은 홍군의 전멸을 의미했다.
그들은 밤낮없이 걸었다. 계곡이 넓어져 서로 볼 수 없는 곳에서는 영원히
헤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칠흑 같은 밤에도 횃불을 들고
걸었고 10분밖에 안되는 짧은 휴식시간에는 이 전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설명하는 정치공작원들의 연설에 귀를 기울였다. 이 행군은 팽덕회가 말한
대로 "승리는 삶이요, 패배는 죽음"인 그런 싸움이었다.
강 건너 홍군은 백군과 전투를 벌이느라 뒤로 처졌다. 강 남쪽 주력부대는
더 무서운 속도로 나아갔다. 맞은편에서 노정교를 봉쇄하러 가는 백군 부대가
나타났다. 양측은 하루 종일 생사가 걸린 경주를 벌였다. 그러나 먼저 노정교에
도착한 것은 홍군이었다. 백군 병사들은 다리 하나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빨리 달리지 않았다.
길이 60미터 쇠줄 열 개를 걸어 나무판자를 깐 노정교 건너편에는 또 다른
백군 연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나무판자를 절반이나 걷어낸 탓으로
홍군 앞에서 다리 가운데까지는 쇠사슬만 덩그라니 걸려 있었다. 기관총을
들이댄 백군은 미친 사람들이 아니고는 강을 건너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홍군은 그야말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홍군은 배군 증원병력이 도착하기 전에 무조건 다리를 빼앗아야 하는 절박한
처지였다. 무수한 지원자들 가운데에서 뽑힌 정예병 30명이 소총을 매고
쇠줄에 매달려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홍군은 백군 진지에 엄호사격을
퍼부었다. 아래에는 세찬 물살이 넘실거리고 앞에서는 백군 기관총이 불을
뿜는 가운데 몇몇이 강에 떨어졌다. 하지만 몇몇은 다리바닥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홍군 특공대는 불길을 뚫고 적진에 뛰어들었다. 남쪽 강가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두 시간 후 홍군은 고친 다리 위를 즐겁게 노래 부르면서
걸었다. 홍군 사령부는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전사들에게 최고의 명예를
상징하는 금성훈장을 주었다.
양자강을 건넌 홍군은 사천성 서부지역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러나 장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섯 개의 거대한 산맥과 3천 킬로미터의 먼 여정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티벳고원이 내려다보이는 대설산을 넘느라
남부 출신 병사들이 수없이 얼어죽었고 공래산을 넘을 때도 숱한 인명과 말을
잃었다. 1935년 7월 20일, 홍군은 사천성 북부 소비에트에 도착하여 한 달 가량
쉬었다. 그러고는 주력부대 3만이 북쪽 감숙성을 향해 길을 떠났다. 그들은
호전적인 미개부족이 사는 티벳 삼림지대를 지나서 열흘을 걸어도 사람을 볼
수 없는 대초원과 습지를 가로질러 만리장성 바로 아래 섬서성에 도착했다.
굶주리고 발이 부르터 기진맥진한 가운데서도 홍군은 이곳에서 백군, 동북군,
회교군대와 싸워 말을 수천 마리나 빼앗았다. 홍군이 2년 먼저 와 소비에트
권력 근거지를 만들어 놓은 제25, 26, 27사단을 만남 것은 정강산을 떠난 지
1년 만인 1935년 10월 20일이었다. 대장정은 마침내 끝났다.
장정 기간 홍군은 평균 하루 한 차례 꼴로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다. 시간을
따지자면 368일 가운데 235일을 주간행군에, 그리고 18일을 야간행군에 썼다.
평균 130킬로미터를 이동한 다음에야 휴식다운 휴식을 가졌다. 그토록 빈약한
수송수단을 가지고 그처럼 대규모 군대가 세계에서 가장 험난한 지열을 그렇게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홍군은 중국대륙을 반 바퀴
돌아 약 1만 킬로미터를 걸었는데 이것은 미국을 두 번 횡단하는 거리와
비슷하다. 산맥을 열 여덟 개 넘었는데 그중 다섯은 만년설로 뒤덮인 대
산맥이었고 강을 건넌 일도 스물 네 번이었다. 열두 성을 지나면서 여섯
민족이 사는 예순 두 군데 도시와 마을을 점령했으며 백군 포위망을 열 차례나
돌파했다. 홍군의 적은 백군만이 아니었다. 추위, 더위, 굶주림, 갈증, 산과 강,
숲과 늪, 독충과 질병과 야만족이 모두 그들의 적이었다. 열흘 넘게 풀뿌리와
날 음식만 억은 일도 있었고 맨발로 만년설을 정복하기도 했다. 빗속에서 서로
껴안고 잠을 잔일도 많았고 물 한 모금 없이 며칠을 걸은 일도 있었다. 그래서
강서를 출발한 홍군 주력 9만 가운데 죽거나 낙오하지 않고 장정을 완수한
사람을 1만 명도 되지 않았다. 그중 여성은 35명이었고 모택동의 두 번째 아내
하자정은 임신한 몸으로 장정을 견뎌 냈다.
장정은 국민당군의 포위를 벗어나 서북 내륙에 새 근거지를 찾기 위한
전략적 후퇴요 필사의 탈출이었다. 하지만 홍군은 주력부대를 보존한 가운데
목적지에 도착했으며 이를 일본 침략군과 싸우기 위한 진국이라고 선전했다.
홍군은 인류 역사에서 다시 보기 어려운 군사이동을 하면서 무려 2억이 넘는
사람들을 만났다. 전투가 끝나면 마을을 점령하여 대중집회와 연극공연을
열었고 관리와 지주와 세금징수원 등 '민족반역자'들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홍군을 직접 보고 연설을 들은 농민들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홍군은 "땅을 경작 농민에게"라는 공산당 강령을
실행하고 항일투쟁정책을 설명하였으며 유격대를 조직하여 농민들을
무장시켰다. 이 유격대는 두고두고 남경 정부를 괴롭혔다.
끝없는 행군으로 수만 명이 죽고 낙오했지만 농민, 노예, 국민당 탈영병과
노동자들이 빈 자리를 메꾸었다. 홍군은 이렇게 하여 언젠가는 붉은 열매를
맺을 혁명의 씨앗을 뿌린 것이다.
홍군은 '로빈훗 군대'인 셈이었다. 농민들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단지 '가난한 사람의 군대'라는 이유만으로 홍군을 환영했다. 그래서 농민
대표단이 홍군 부대를 찾아와 자기네 마을을 '해방' 시켜 달라고 부탁하는 일도
있었고 심지어는 소유애 선생을 만나게 해달라고 청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무식하기로 소문난 보건성 군벌 노흥방은 "도처에서 못된 짓을
저지르고 다니는 소유애를 생포하거나 사살하는 자에게 큰 상금을 주겠다"며
방을 붙였다. 하지만 '소유애 선생'이 정말 있다 한들 농민들이 친구를 밀고할
리는 없는 터였다.
만사를 젖혀 두고 추격전을 벌였지만 결국 홍군을 잡는데 실패한 장개석은
빈손을 쥐고 남경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홍군, 지지 않는 군대
장개석은 열 배가 넘는 병력과 각종 신무기를 동원하고서도 홍군 주력을
무너뜨리는 데 실패했다. 장정을 끝낸 홍군은 섬서, 감숙, 산서성 일대 광대한
지역에 소비에트를 건설하면서 끊임없이 군사력을 증강했다. 그로부터 15년 후
장개석은 그 많은 군대를 다 잃고 대만으로 달아나는 신세가 되었다.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목숨을 걸고 내륙으로 도망친 홍군이 그
짧은 기간에 전세를 뒤집은 비결은 도대체 무엇일까.
백군은 무엇보다도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불태우는" 잘못을 저지른 탓에
민중의 원성을 샀다. 그리고 국민당 정부는 비참하기 짝이 없는 민중의 생활을
개선하기는커녕 도리어 악화시키기만 했다. 이것이 홍군이 성장할 사회경제적
토양을 제공해 주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1929년 여름, 서북지방 여러 성에 지독한 가뭄이 찾아들었다. 이 가뭄으로 약
6백만 명이 굶어 죽었다. 먹을 것이 없는 농민들은 땅과 집을 팔고 그것도
모자라 아내와 딸까지 팔았다. 그마저 팔 것이 없으면 죽는 수밖에 없었다.
마을은 폐허가 되고 옥토는 황무지로 변했다. 지주들은 동전 몇 푼으로 엄청난
땅을 사들였다. 도시에는 구호 식량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관리들은
보낼 생각을 않고 기생들과 노닥거렸다. 서북방 군벌과 동쪽 국민당 군대가
열차를 빼앗기지 않을까 서로를 의심하여 열차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북경과
천진 등 대도시 구호위원회는 굶주린 사람들에게 식량을 보낼 수가 없었다.
농민들이 굶어 죽어 가는 바로 그때 지주와 부자들은 돈을 주고 산 농민의
아내와 딸들을 희롱하면서 상이 서른 여섯 번 바뀌는 진수성찬을 즐겼다.
가난한 농민들은 소출의 반을 세금으로 빼앗기는데 지주들은 세금 한 푼 내지
않았다.
도시 노동자들 처지도 마찬가지였다. 4.12쿠데타 이후 남경 정부는 모든
형태의 노동운동을 금지하였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송두리째 빼앗아 버렸다.
나이 어린 소녀들도 하루 16시간 넘게 일하고 재봉틀 아래 솜 더미에 쓰러져
잠을 자야 했다. 파업을 선동하다가는 당장 끌려가 공산주의자라는 죄명을
쓰고 사형 당하기 일쑤였다.
국민당과 지주들은 "비적의 습격을 막는다"며 민단, 즉 지방 민병대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농민을 착취하는 폭력집단이 되었다. 그러니 농민들이
그보다 더 악질 정부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홍군을 환영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장개석이 서북 내륙의 홍군을 쓸어 내기 위해 여섯 번째 초공정을
준비하던 1973년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안휘, 섬서, 감숙, 귀주성의 국민당
점령지역에서 약 3천만 명이 굶주리고 있었다. 사천성 기근구호위원회의
보고에 따르면 나무껍질과 관음토라는 보드라운 진흙 따위로 연명하는 사람도
수만 명이나 되었다. 섬서성에서 40만, 귀주성에서 3백만 명이나 되는 이재민이
생겼다. 농촌인구의 10%밖에 안 되는 부농, 지주, 관리, 고리대금업자들이
농토의 70% 이상을 소유한 데 비해 65%가 넘는 빈농, 소작농, 농업
노동자들이 가진 경작지는 15%에 불과한 터라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국민당 정부는 농업 통계를 발표하지 못하게
하였다.
더 큰 문제는 제5차 초공전에서 국민당 군대가 쓴 초토화작전이었다. 그들은
소비에트를 공격하면서 홍군에게 협조한 주민들을 집단 학살하거나 강제
추방하고 농경지를 황무지로 만들어 버렸다. 1933년 12월, 홍군 지휘관
서해동이 호북, 안휘, 하남성 접경지역에 만든 '악예환 소비에트'에는 절반이
황무지로 바뀔 정도였다. 호북 4개 현, 안휘 5개 현, 하남 3개 현 등 동서 4백
리, 남북 3백 리에 걸친 땅에 살든 주민이 모두 살해당하거나 추방당한 것이다.
1933년 11월 '천대산 소비에트'에는 6만 명이 살았는데 두 달 후에는 3백
명으로 줄어들었다. 백군은 편족을 하지 않거나 단발을 한 여자는 모조리
공산주의자로 몰아 쏘아 죽였고 젊고 예쁜 여자는 장교들이 차지했으며
나머지는 사병들에게 내맡겼다. 그들은 이 여자들을 도시 인신매매조직에 팔아
넘기면서 "홍비에게 학살당한 농민의 처자식"이라고 선전했다. 홍군가족은
특히 가혹하게 죽였는데 한구 부근 황파현 출신 서해동의 경우 일가친척 예순
여섯이 몰살당할 정도였다. 그래서 홍군은 백군을 더욱더 증오하게 되었고
농민들도 남경 정권을 저주했다.
홍군은 정반대로 행동했다. 지주의 땅을 빼앗아 농민에게 나누어주자는
토지강령으로 농민들의 환심을 샀다. 지주에게서 몰수한 땅은 반드시 소비에트
정부를 통해 처리하였고 가난한 농민의 것은 절대로 빼앗지 않았다. 홍군이
농민의 마음을 얻으려고 얼마나 고심하였는지는 홍군이 실시한 여덟 가지
규칙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1. 민가를 떠날 때 문짝을 제자리에 걸어둔다(중국 문짝을 떼어서 임시
침상으로 쓸 수 있었다).
2. 잠잘 때 쓴 짚단은 묶어서 제자리에 갖다 놓는다.
3. 인민을 예의 바르고 정중하게 대하고 할 수 있으면 무슨 일이든 도와준다.
4. 빌려쓴 물건은 반드시 돌려준다.
5. 부서진 물건은 바꾸어 준다.
6. 농민들과는 정직하게 거래한다.
7. 구입한 물건은 반드시 값을 낸다.
8. 위생에 관심을 쓰고 특히 변소는 멀리 떨어진 곳에 만들어 민가에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
홍군의 세 가지 임무는 "적과 목숨을 걸고 싸운다", "인민대중을
무장시킨다", "투쟁을 뒷받침하기 위해 자금을 모은다"는 것이었다. 홍군은
이렇게 하여 농민의 '정치적 지지'를 얻었다. 장정 당시 농민들은 홍군이
지나가면 물과 음식을 주고 짚신을 삼아 주었다. 백군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묻어 두었던 곡식을 파내어 주기도 했다. 백군 병력이동에 대한 정보를 알아다
주고 백군이 오면 우물에 독약을 풀고 도망치는가 하면 홍군 유격대에게
지름길을 안내하고 부상병을 숨겨 주었다. 모택동은 홍군이 성장한 비결을
이렇게 설명했다.
홍군이 승리를 거두면서 군사력을 증강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홍군과
소비에트 정부가 지역내의 모든 인민을 바윗덩이처럼 단단하게 묶어 세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단결할 수 있었던 것은 소비에트의 모든 사람이 자기 정부를
위해 억압자들과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자기 이익과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스스로 깨닫고 싸웠기 때문이다. 둘째로 소비에트 투쟁에서는 유능하고 용기
있는 사람들이 자기가 처한 상황에 맞는 전략적,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요구를 깊이 이해하면서 인민을 이끌고 있다. 처음에는 결의에 찬 혁명가들이
겨우 소총 몇십 자루를 들고 시작했는데도 홍군이 수많은 승리를 거둔 것은
인민 속에 굳건한 기반을 만들어 일반 민중은 물론이고 백군 가운데서조차
지지자를 끌어 모았기 때문이다. 적은 군사적인 면에서는 우리보다 엄청나게
강하지만 정치적인 면에서는 아무 힘도 쓰지 못한다.
홍군은 농민의 정치적 지지를 밑거름 삼아 적은 병력과 무기를 가지고도
강한 적을 상대할 수 있는 유격전술을 개발했다. 홍군은 확실하게 이길 수
있다는 판단이 서지 않으면 절대로 적과 맞서지 않았다. 유격대는 지원병력도
호방기지도 병참선도 통신망도 없는 부대였으므로 언제나 기습을 주요전술로
삼았다. 통신시설이나 철도, 교량, 도로가 전무하다 시피 한 농촌지역에서
백군은 우수한 신무기를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홍군은 기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공격하기 전에 후퇴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고 교란, 유인, 복병, 양동, 도발
등 이른바 성동격 서책을 주무기로 쓰면서 적의 주력부대는 피하는 대신
치명적인 약점만 골라 때리곤 했다. 나아가 유격대는 단순한 전사가 아니라
농민들에게 혁명사상을 퍼뜨리는 선전대이자 그들을 무장시키는
군사지도자였다. 팽덕회의 말을 빌자면 "억압자를 때리는 인민의 주먹"이었던
것이다.
붉은 중국의 모태 소비에트
1927년 이후 모택동과 주덕이 강서 소비에트를 건설하던 시기에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앞서 말한 서해동의 악예환 소비에트와 서북
내륙에서 풍운아 유지단이 기초를 마련한 섬서, 감숙, 영하 소비에트가
그것이다. '난세의 영웅'이라고들 하는 유지단은 섬서성 북북 보안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황포군관학교를 나온 혁명가이다. 4.12쿠데타가 터지자 상해에
숨어 숙청의 칼날을 피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와 농민폭동을 일으킨 유지단은
부자를 미워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인물이었다. 그래서 유지단이라는
이름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희망과 구원을 의미했지만 지주와 관리와 부자들
사이에서는 공포와 재난과 죽음의 상징으로 통했다.
유지단은 여러 해에 걸쳐 폭동, 실패, 탈출로 이어지는 만화경 같은 인생을
살다가 1931년 보안으로 쫓겨 왔다. 유지단이 그곳에서 붉은 깃발을 꽂고
유격대를 조직하자 공산주의자와 빈농과 국민당 탈영병이 속속 모여들었다.
유지단의 유격대는 관리와 지주와 세금징수원들을 닥치는 대로 습격, 약탈,
처형하면서 섬서성 북북 11개 현을 장악했다. 그러자 공산당이 그곳에
정치부를 설치하여 소비에트를 수립했으니 이것이 1933년의 일이었다. 이들의
세력은 더욱 커져 1935년에는 5천이 넘는 병력을 보유하고 무려 22개의 현을
지배하면서 남경 정부를 괴롭혔다. 견디다 못한 장개석은 장학량이 이끄는
만주 동북군을 보내 유지단 부대와 싸우게 했다.
여기서 서해동이 홍군 8천 명을 이끌고 성서성 남부 유격대에 합류했고
뒤이어 모택동과 주덕이 도착함으로써 섬서성 일대는 거대한 소비에트 지구가
되었다. 1936년 창설자 유지단이 항일원정에서 전사했지만 공산당은 정강산
시절에 쌓은 경험을 살려 러시아에서 출현한 소비에트 원리를 중국 땅에서
실현했다. 그것은 '노동자 농민의 대의정치'였다.
모든 마을에서 사람들은 대표를 뽑아 소비에트를 구성했고 그들이 지구 , 현,
성, 중앙 소비에트를 상향식으로 만들었다. 16세가 넘은 사람은 누구나
투표권을 가졌고 소작농과 빈농과 노동자는 더 큰 권리를 누렸다. 각급
소비에트는 교육, 생산, 위생, 재정, 군사훈련을 책임지는 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공산당원이 그 조직들을 지도했다. 치안은 농민 무장대가 스스로
유지했고 홍군 병사들은 대부분 전선에 나가 있었다.
공산당은 달아난 지주들의 땅을 가난한 농민에게 나누어주고 고리대금업을
금지하였으며 간접세를 폐지했다. 농민들은 생산조합과 소비조합을 활발히
조직했고 공산당원, 유격대, 소비에트 관리들까지 누구나 매주 하루 이상
농사일을 했다. 중국 전역에 만연하고 있던 아편, 편족, 변발, 유아 살해,
인신매매, 매춘, 여성과 어린이에 대한 차별, 일부다처제, 민며느리제도,
결혼지참금제도, 구걸행위 따위는 말끔하게 없어졌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글자를 배우면서 동시에 사회주의사상을 배웠고 성인 문맹자들은 소비에트
사회교육센터에서 글을 배웠다. 그래서 대다수가 문맹이었던 다른 지역과는
달이 소비에트 지구에서는 80%가 넘는 사람들이 생활에 필요한 만큼은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땅을 받은 농민들은 "땅을 가지게 되면 혁명에 등을 돌린다"는
교조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국민당 군대와 싸우려고 스스로 총을 들었고
아들을 기꺼이 홍군에 입대시켰다. 그들은 홍군을 '우리 군대', 소비에트를
'우리 정부'라고 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개인기업을 허용했지만 석유, 소금, 석탄, 피혁, 양모, 종이,
피복, 신발, 약품, 무기 등을 만드는 공장은 직영했다. 홍군의 아내와 젊은
여성들은 겨우 먹고 살 만한 정도의 급료를 받고 하루 여덟 시간, 매주 엿새
공장에서 일했다. 매일 열 다섯 시간 넘게 일하면서 더러운 공장에 갇혀
지내야 하는 상해 여성 노동자에 비하면 훨씬 나은 생활이었다. 주민들은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지는 못했지만 굶어 죽는 사람은 없었다.
1935년 한 해 동안 상해 거리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이나 키울 능력이 없는
부모에게 버림받아 죽은 아이들 시체가 2만9천 구나 발견되었다. 하지만
소비에트 지구에서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었다. 홍군 지휘관과 소비에트 관리,
당 간부들은 정해진 월급과 없이 일했으며 '제일 높은 사람'인 모택동조차
'요방'이라는 동굴 집에서 다른 병사들과 똑같이 살았다. 그가 홍군 병사들보다
더 가진 것이라곤 지주에게서 몰수한 모기장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그 밖의
재산이래야 담요과 군복 두 벌과 개인 소지품뿐이었다. 아무도 착취하는
사람이 없고 모두가 일을 하니 가난하기는 해도 굶어 죽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홍군 가족이나 농민들은 그 때문에 중국의 미래와 혁명을 위해
일한다는 확신을 지녔다.
그런데 홍군은 바깥세계에서 별로 좋은 평판을 얻지 못했다. 남경 정부가
"홍군은 흉악한 도적집단이고 사람을 하부로 죽이며 재물을 약탈하고 여자를
잡으면 공동 소유해 버리는 아편 중독자들"이라고 선전을 하는데도
외부세계로부터 고립 당한 탓으로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국민당
군대는 자기네 손으로 죽인 양민 시체와 자기네가 불태운 마을 사진을
내놓고는 홍군이 저지른 끔직한 만행을 보라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홍군은 그런 험담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름의 조직과 전술을
발전시켰다. 병사들은 동굴이나 날림으로 지은 흙벽돌 막사에 살았다. 먹는
것이래야 조밥과 절인 배추가 고작이고 가끔 양고기를 먹는 정도였지만
건강했다. 술 담배는 거의 하지 않았고 군사훈련과 한자공부, 전투와
정치학습이 일과의 전부였다. 그들은 자기의 인격을 지킬 권리를 누렸으며
벽신문을 통해 장교나 동료의 잘못을 비판할 수 있었다. 평균 아니 열 아홉인
홍군 병사는 60%가 농민의 아들이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공장 노동자와
농업노동자 출신이었다. 상인, 지식인, 지주 집안 출신을 별로 없었다.
병사들은 대부분 한문을 읽고 쓸 수 있었으며 사회주의를 이해하고
항일전쟁의 정당성을 확신했다. 그들은 중국 전역에서 왔으며 일본제국주의와
국민당 군대에 대해 이런저런 원한을 품고 있었다. 장교들 평균나이는
24세였으며 황포군관학교와 모스크바 적군대학, 동북군과 국민당, 유럽 유학생
출신이 많았다. 그들은 장교였지만 병사들과 똑같이 먹고 입었으며 전투가
벌어지면 앞장서서 용감하게 싸웠다. 이 청년장교들은 너무 용감하게 싸운
탓으로 죽고 다치는 비율이 지나치게 높아 당 지도부를 고민하게 만들
정도였다. 1936년 9만 명에 육박한 홍군 정규군의 무기는 거의 모두
백군한테서 빼앗은 것이었다.
홍군의 생명력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낸 것은 '꼬마빨갱이'라는 소년
선봉대였다. 열둘에서 열 일곱 살 사이인 소년 선봉대원은 약 4만 명으로 전령,
나팔수, 밀정, 무전병, 식수 공급병, 선전원, 배우, 마부, 간호원, 비서, 교사로
일했는데 더러는 백병전에까지 참가하기도 했다. 소매가 무릎까지 내려오는
옷을 입고 콧물을 찔찔 흘리며 다니기 일쑤였던 소년 선봉대원은 부모 이름도
모르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들은 지긋지긋한 굶주림과 무지한 부모의
학대나 월급도 없는 도제생활, 강제노동수용소 같은 도시의 공장에서 도망쳐
홍군을 찾아왔다. 이 아이들은 보통 병사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이유 없이
맞거나 혼나는 일도 없었고 굶거나 욕설을 듣는 일도 없었다. 지휘관이 되어
멋진 권총을 가지는 것이 그들의 꿈이었다. 어린 영혼에 새겨진 혁명이념은 이
아이들을 "두려움 모르는 붉은 악마"로 만들었다. 홍군 지휘관 팽덕회가 특히
이 아이들을 좋아했는데, 어린 시절 계모와 할머니에게 모진 학대를 받으면서
자간 그로서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팽덕회가 나타나면 어디서나
소년 선봉대 코흘리개들이 무리 지어 따라다니곤 했다.
이러니 국민당 비행기가 모택동, 주은래, 주덕, 팽덕회를 죽이면 엄청난
상금을 준다는 전단을 뿌리고 다녀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홍군 지도자들은
호위병도 없이 병영과 마을을 돌아다녔고 병사들은 전단 뒷면을 이용해
혁명학습을 했다. 이 모든 것이 국민당과 군벌이 지배한 다른 지역과 다른
점이었다. 장교들이 군수물자를 빼돌려 재산을 모으고 병사들을 제멋대로
구타하며, 돈도 내지 않고 농가의 소를 잡아먹는 국민당 군대는 홍군 병사와
소비에트 지구 농민들에게는 아무 매력이 없었다.
장정과 소비에트는 오늘날 중국 대륙을 지배하는 '붉은 공화국'을 잉태했다.
규율 있는 군대와 중국 실정에 맞는 지도이념, 산업을 공동으로 조직하는
이론과 방법, 소비에트 정치제도와 외교정책, 문학과 예술에 이르기까지 앞으로
건설할 새로운 나라의 모습이 원시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재미 삼아
운동경기를 예를 들어보자. 수십 년간 세계무대를 휘어잡은 중국 탁구의
위력은 일찍이 홍군이 백군 비행기를 피해 동굴 집에서 즐길 수 있었던 유일한
운동이 탁구였다는 사실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한때 속공을 무기로
세계를 정복한 중국 여자배구는 그 눈부신 기동성과 기만전술을 볼 때 홍군
유격전술을 응용한 것이라 해고 좋을 것이다.
그러나 1936년 소비에트 지구는 서북 내륙에 갇힌 작은 독립국에 지나지
않았다. 홍군이 점령한 지역에 사는 주민은 겨운 9백만 명 정도였다. 모든
면에서 젊고 활기 찬 나라였지만 남경 정부의 힘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43세 젊은 지도자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은 내륙 근거지를 튼튼하게
만들었다고 보고 대륙의 거의 전부를 지배한 남경 정부와 공산당 사이의 세력
관계를 뒤집어엎을 새로운 정책을 본격 추진하기 시작했다.
장학량과 서안사건
혁명은 전쟁을 뒤따라오는 수가 많다. 외국군대의 침략에 제대로 맞서
싸우지 못하는 정부는 특별히 큰 위기를 맞는 법이다. 장개석이 이끈 남경
정부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장개석이 다섯 차례나 초공전을 벌이는 동안
일본은 중국대륙을 한 귀퉁이씩 야금야금 먹어치웠다. 첫 번째 초공전을 틈타
만주를 실질적으로 손에 넣었고 두 번째 초공전 때는 상해를 침략했다. 세
번째에는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다음에는 하북성 동부를 집어삼켰다. 5차전
당시에는 하북과 찰합이 두 성에 손을 뻗쳤다. 일본은 이렇게 해서 중국
영토의 5분의 1, 철도 총 연장의 40%, 석탄과 철광자원의 80%, 수출무역의
40%, 제일 좋은 삼림자원의 37%, 제철업과 철광업의 75%, 그리고 섬유산업의
절반 이상을 움켜쥐었다.
남경 정부의 공세에 시달리던 공산당은 일본의 침략을 수수방관하는 남경
정부에 대한 민중의 불만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외부세계에 알려지지는
못했지만 공산당은 1932년 강서 소비에트 시절 벌써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리고 남경 정부에 대해서는 "중국 인민의 당본과 싸우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장개석을 오직 홍군과 싸우는 데만 집착하여 일본군의 침략을 못 본
척했다.
공산당은 서북내륙 근거지를 튼튼히 세운 1936년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남경 중부에 협력하겠다는, 이른바 '민족통일전선 전술'을
채택했으며, 이것을 국민당 군대에 선전하기 시작했다. 일본군과 싸울 의지를
가진 모든 세력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홍군은 백군이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싸움을 피했다. 포로를 잡으면 자기네 정책을 알아듣게 설명한 다음
돌려보냈다. 백군 부대에 편지를 보내는가 하면 선전원을 보내 설득하기도
했다. 홍군 병사들에게는 백군 무기를 빼앗지 말라고 교육을 시켰다. 그러나
장개석은 공산당의 이런 노력을 비웃으면서 또 한 차례 대규모 전쟁을
준비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공산당은 중국과 외교관계를 가진 자본주의 열강에게 일본에 대항하는
'반파시즘 국제동맹'을 맺자고 제안했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은 4.12쿠데타를 일으킨 남경 정부와 '반공동맹'을 맺어 갖가지
이권을 챙기고 신무기를 팔아먹는 데만 열심이었다. 러시아 공산당은
중국공산당이 국민당과 갈라선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별 지원을 해주지 않았고
농촌 소비에트를 조직한 모택동이 진짜 공산주의자인지 의심하기까지 했다.
이런 가운데 남경 정부는 미국과 독일 등에서 비행기와 탱크를 대량
구입했으며, 그 대가로 미군 장교들이 조종사를 훈련시켜 주었고 독일과
이탈리아 장교들은 직접 폭격 원정에 참여하거나 장개석의 군사고문 역할을
해주었다. 홍군이 장개석이 준비하고 있던 여섯 번째 초공전을 견뎌 낼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1936년 10월, 일본은 괴뢰 만주국을 앞세워 내몽고를 침략했다. 전국에서
항일전쟁 선포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하지만 장개석은 이를 무시하고
홍군 토벌에만 골몰했다. 최정예부대라는 제 1군을 감숙성에 파견하고
서안에는 폭격기를 백 대 넘게 수용할 시설을 갖추었다. 장개석은 "길어도 한
달 안에 홍비를 완전히 소탕해 버리겠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독가스를 쓸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떠돌았다. 장개석은 홍군과 싸우는 데 소극적인 동북군
사령관 장학량을 질책하고 싸움을 독려하기 위해 전용기를 타고 서안으로
날아갔으니 이 때가 1936년 12월 7일이었다.
그로부터 닷새가 지난 12월 12일 새벽 장개석 총통은 잠옷 바람에 맨발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장학량의 명령을 받은 동북군 병력이 그가 머물고
있는 온천장을 덮쳤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북군 병사들은 뒷산
바위틈에서 추위와 공포에 덜고 있는 총통을 찾아냈다. 수색대 장교는 예의
바르게 경례를 붙였다. "각하를 쏠 생각은 없습니다. 저희들은 단지 각하께서
조국을 이끌고 일본과 싸우기를 바랄 뿐입니다."
장개석은 병사의 등에 업혀 산을 내려왔다. 장학량은 중앙정부와 각성의
지도자, 그리고 중국인에게 짤막한 성명을 발표했다. "총통이 각성하도록
당분간 서안에 체류하도록 요청"했으며 총통과 수행원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다. 장학량은 총통에게 8개항으로 된 '나라를 구하기 위한 요구'를
내놓았는데 주요 내용은 남경 정부가 모든 정치세력과 손잡고 일본과 싸우자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항일전쟁을 위해 4.12쿠데타로 깨진 국공합작을 복구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이 세계를 놀라게 하고 중국 현대사를 뒤바꿔 놓은 서안사건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공산주의자가 아닌 장학량이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북 군과 장학량이 남경 정부와 홍군과 맺고 있던
복잡한 관계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장학량은 악명 높은 비적 출신으로서 만주를 지배한 군벌 장작림의
아들이다. 장작림은 북벌에 나선 국민당 혁명군과 맞서 싸웠다. 그런데
혁명군이 들어오면 만주를 침략하는 데 불리하다고 본 일본군이 1928년 그가
탄 열차를 폭파하였다. 혼란을 틈타 남 만주를 장악하려는 음모였다. 장학량은
아버지의 권력을 이어받았다.
도박과 골프를 즐기며 아편을 피운 이 젊은 독재자는 관대하고 능력도
있어서 아버지보다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런데 1931년 9월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하면서 불운이 찾아들었다. 마침 장티푸스에 걸려 북경 병원에 입원하고
있던 탓으로 장학량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장개석은 그와 의형제를 맺은
사이였지만 홍군과 싸우는 데만 정신이 팔려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장개석은 그와 의형제를 맺은 사이였지만 홍군과 싸우는 데만 정신이 팔려
만주의 동북 군에게 후퇴명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만주를 내준 데 대한 비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장학량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웠다. 장학량은 공직을
내놓고 유럽 유학 길에 올랐고 동북 군은 만리장성 남쪽 본토로 이동해 홍군과
싸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1934년 아편을 끊은 믿음직한 모습으로 돌아온 장학량은 동북군 장병들
앞에서 고향 만주를 되찾고 민족의 굴욕을 벗는 데 목숨을 바치겠노라고
맹세했다. 동북군 병사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하였다. 여전히 장개석을 따른
장학량은 지휘본부를 서북으로 옮겨 홍군에게 대들었다. 그러나 1935년 가을
전투에서 3개 사단을 잃는 대 참패를 당하였다.
장학량은 싸움을 몇 번 치르면서 놀랄 만한 사실을 발견했다. 무엇보다도
적군인 '붉은 비적'을 이끄는 지휘관들이 매우 유능하고 항일정신이 높은
애국자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홍군과 싸우는 동안에는 항일전쟁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네로서는 아무 의미 없는 전투 때문에 동북 군이
궤멸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욱이 홍군은 동북 군 포로를 죽이지
않고 항일교육을 시킨 다음 되돌려 보냈다. "중국사람끼리는 싸워서는 안
된다" "우리 힘으로 빼앗긴 국토를 되찾자"는 홍군의 구호에 동북 군 병사들은
마음을 빼앗겼으며 장학량 자신도 큰 감명을 받았다. 장학량은 동북대학이라는
교육기관을 만들어 항일학생을 교육하고 있는 터였다.
1936년 들어 '외교의 천재' 주은래가 나서서 장학량과 비밀협약을 맺은
뒤부터 홍군과 동북 군은 은밀하게 협력하기 시작했다. 서로 적대 행위를
중지한 것은 물론이요 홍군 참모 진이 동북 군 장교들에게 정치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런 가운데 남경 정부의 정에 제 1군이 감숙성 전투에서 대
참패를 당했다. 홍군은 항일투쟁을 위해 협력하자는 선전을 하면서 계속
후퇴하다가 갑자기 되돌아서서 기습공격을 가했다. 1936년 11월의 이 전투에서
남경 정부군 2개 보병여단과 1개 기병연대가 전멸 당하고 1개 연대는 통째로
사로잡히고 말았다. 장개석은 불같이 노했지만 장학량은 속으로 콧노래를
불렀다.
동북 군은 오로지 고향으로 돌아가 일본군과 싸우려는 일편단심뿐이었다.
그들은 공산당이 1935년 8월 1일 발표한 "항일 구국을 위해 전국 동포에
호소한다"는 선언을 환영했다. 여기서 공산당은 항일전쟁을 위해서라면
국민당은 물론이요 우익테러조직인 남 의사와도 협력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이 선언은 국민당 점령지역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사회주의자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국민당 점령지역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사회주의자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국민당 민족주의자들에게까지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전국 각지에서 구국위원회를 조직하고 중소도시와 농촌에서까지 여러 가지
항일운동조직을 만들어 수백만 명이 참가한 항일시위를 벌였다.
동북 군은 이러한 중국민중의 항일의식을 가장 솔직하게 대변하는 부대였다.
병사들은 전투가 없는 날이면 너나없이 고향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이런
노래를 불렀다.
우리 집은 만주 송화강 기슭
수풀과 삼림과 탄광이 있고
산과 들에서 수수와 콩이 자라고 있었지
우리 집은 만주 송화강 기슭
내 고향은 바로 그곳
늙으신 부모님도 그곳에 살고 있다네
9.18, 9.18(9.18은 1931년 9월 18일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침략을
본격 시작한 날이다.)
그 비참했던 날부터
9.18, 9.18
그 비참했던 날부터
나는 고향을 떠나왔네
사랑하는 부모를 내버려두고
장개석은 동북군의 '배신행위'를 어렴풋이 눈치 채고 서안으로 날아 왔다.
그는 조만간 동북군내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를 일망타진하고 장학량의
권한을 박탈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장학량도 앉아서 당할 만큼 멍청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래서 장개석 몰래 동북 군과 서북군 사단장 합동회의를 열어
전격적으로 쿠데타를 감행, 총통을 체포해 버렸다.
제2차 국공합작
장개석의 목숨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홍군과 공산당은 장학량이
내놓은 8개 항 요구를 전폭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제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 유명한 공산주의자 셋이 장학량이 보낸 비행기를 타고 서안에
날아왔다. 홍군 군사위원회 부주석 주은래와 참모장 엽정, 그리고 소비에트지구
정부 주석 박고였다.
12월 14일, 동북 군 13만과 서북 군 4만, 홍군 9만 등 모두 26만 규모의 항일
연합군이 탄생했다. 연합군 군사위원회 주석은 장학량이 맡았다. 항일 연합군은
그 일대 남경 정부군을 순식간에 무장해제하고 섬서성과 감숙성을 완전히
장악했다. 서로에 대한 전투 명령은 모두 무효가 되었고 서안 감옥에 있던
정치범 4백 명도 풀려났다. 신문 검열이 사라졌고 학생과 항일운동단체
회원들은 농촌에 들어가 자유롭게 선전활동을 폈다. 농민들은 그들에게
항일의식을 배우고 무기를 받았다.
장개석은 불안에 떨었다. 급진적인 동북 군 장교들은 총통을 인민재판에
회부해서 처형하자고 주장했다. 운이 좋아 처형을 면하다 할지라도 자기가
없는 동안 남경 정부의 야심가들이 총통 자리를 넘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남경의 배반자들이 서안의 공산주의자들보다 더 교활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의 허락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장개석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바로 이때 황포군관학교 시절 정치주임으로 일했던 주은래가 나타났다.
총통은 이제 홍군 손으로 넘어간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주은래와
장학량의 입에서는 뜻밖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들은 여전히 장개석을 총통으로
대접하면서 "중국이 직면한 국가적 위기"에 대한 공산당과 동북군의 입장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주은래는 총통이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석방하지
말아야 한다는 청년 장교들의 주장에 반대하면서 총통이 약속을 지키리라고
믿는다는 뜻을 비추었다. 장개석은 이 약속을 지키려면 자기가 '체면이 깎이지
않은 상태에서' 남경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곧 남경 정부
재정부장 송자문이 협상 대표를 이끌고 서안에 와서 장개석과 참모본부요원을
만났다.
장개석은 앞으로 내전을 하지 않겠다고 "개인적으로 보장"했다. 그러나
어떠한 문서에도 서명하지 않았다. 항일전쟁을 위한 상호협력, 동북 군과
서북군의 지위 인정, 정치적 자유 확대 등 원칙적인 문제에 대한 구두 합의가
이루어졌을 뿐이다. 장개석은 이렇게 해서 총통의 체면을 깎이지 않고
남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는 약속을 지켰다. 또 하나
놀랄 만한 일은 서안사건 주모자 장학량이 "처벌을 받기 위해" 자기 전용기로
총통을 모시고 함께 남경으로 갔다는 사실이다.
이때부터 일어난 일은 서안사건 그 자체보다 더 흥미진진하다. 공산당은 당
한 장의 문서도 받지 않고 장개석을 돌려보냈다. 총통은 남성에 도착하기
무섭게 "반란을 미리 다스리지 못한 부덕"을 이유로 총통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는 물론 이 사표를 반려했다.
이런 연극은 세 차례나 반복되었으니 이것이 첫 번째 '가짜 놀음'이다. 두 번째
'가짜 놀음'은 장학량에 대한 것이다. 장학량은 군법회의에서 10년형을
받았는데 총통은 그 다음날 곧 바로 특별사면을 베풀었다. 그 후 장학량은
한순간도 장개석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고향 만주 땅도 다시는 밟아
보지 못했다. 장개석은 홍군에게 져서 대만으로 달아나면서도 잊지 않고
장학량을 끌고 갔다.
1937년 2월 10일, 공산당은 남경 정부에 역사적인 문서를 타전했다. 내전
중지,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자유 보장과 정치범 석방, 항일전쟁 계획 제시,
손문 박사가 제창한 삼민주의로 복귀 등 네 가지 조건을 수락하면 홍군의
이름을 '국민혁명군'으로 바꾸어 총통 지휘를 받게 하고, 소비에트 정부도
'중화민국 특별 구 정부'로 이름을 바꾸며, 소비에트 지구에 완전한 대의 적
민주정부를 세우고, 토지 몰수정책을 중지함으로써 인민의 힘을 항일전쟁에
모으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장개석은 이 제안을 겉으로는 거부하면서 실제로는 수락했다. 그는 서안에
구금되어 있을 때 자기가 "공산당의 요구를 얼마나 단호하게 거부"하였으며
어떻게 "반란군이 총통의 애국심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도록 설득"하였는지를
빠짐없이 설명한 다음 "공산주의자들에게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를
주겠노라고 했다. 이로써 국공내전은 일단 끝이 났고 양측은 '협력'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최소한 '공존'할 수는 있는 터전을 만들었다.
이 협정으로 국민당과 공산당은 제각기 이득을 보았다. 장개석은 소비에트를
제외한 중국 전역에서 확고한 권위를 세울 수 있었다. 그는 아직도 남아 잇는
지방군벌의 힘을 제압하여 소비에트 주변지역을 장악하고 나면 다시 한번
홍군에게 치명타를 가할 기회가 올 것이라고 믿었다. 반면 공산당은 백군의
봉쇄망이 풀린 틈을 타 부족한 물자를 보충하고 새로 찾아오는 젊은이들을
육성함으로써 항일전쟁과 사회혁명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서로를 훤히 알고 서로에 대해 어떤 환상도 품지 않는 두 세력 사이의 기묘한
협력 관계는 국민 당군이 홍군을 공격하기 시작한 1940년까지 계속되었다.
붉게 물든 대륙
1937년 7월 8일 중일전쟁이 터졌다. 북경 근처에서 군사훈련을 하던
일본군이 중국 군에게 공격을 받았다는 이른바 '노구교사건'을 빌미로 일본군이
북경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전쟁이 터지자 제2차 국공합작이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홍군은 붉은 깃발을 내리고 붉은 별을 떼고 소비에트 정부를
자치정부로 바꾸었다. 홍군은 '제8로 군'이라는 새 이름을 받아들였고 상해
부근 여기저기 남아 있던 병력을 모아 '신4군'을 편성했다. 장개석은 홍군이
궤멸되기를 바랐지만 북부전선으로 나간 홍군은 일본군을 맞아 선전 분투했다.
모택동은 중일전쟁이 터진 다음 "지구전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일본이 중국 본토를 침략할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에서도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 내다보았다. 따라서 홍군은 매우 넓은 지역에서 장기간
유격전을 전개하기 위해 유격대를 농민들 사이에 침투시켜 그들을 항일전쟁에
동원해 내어야 한다는 것이 이 논문의 요지였다. 그리고 이러한 지구전을
수행하려면 남경 정부에 많은 양보를 하고 공산당의 정책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혁명을 이끈 레닌은 "역사는 가장 우수한 정당과 가장 선진적인
계급과 가장 계급의식이 투철한 전위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풍성하고
다채로우며 복잡하고 활기차며 미묘한 법"이라고 한 적이 있는데, 중국혁명이
바로 그랬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 달리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어렴풋이 나마 예측했고 나날이 마주치는 새로운 상황에 슬기롭게 대처할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모택동이 내다본 대로 일본군은 도시를 점령했다. 수없이 많은 마을을
불태웠고 민간인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으며 여자들을 겁탈했다. 그러나 백만을
자랑하는 일본군도 광활한 중국대륙에서는 점(도시)과 선(철도와 도로)밖에
점령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도시를 거점으로 한 국민당 행정조직과
군사요새는 쑥대밭이 되었다. 그런데 노련한 홍군 유격대는 일본군이 점령한
점과 선의 배후로 스며들어 피난민 대열에서 보충병을 모집했다. 일본군의
만행에 치를 떠는 젊은이들과 국민당 패잔병들이 줄지어 홍군에 들어왔다.
홍군은 일본군을 증오하는 농민들에게 총을 쥐어 주고 자위대와 유격대를
조직했다. 점령한 마을에서는 부재지주의 땅을 농민에게 나누어주고 글을
가르쳤다. 남녀평등, 일부일처제, 보통선거, 소작료 경감 등의 사회경제 개혁도
실시했다. 농민들은 홍군을 열렬히 환영했고 스스로 평의회를 만들어 나름의
민주주의를 시행했다. 이렇게 해서 홍군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가장
대표적인 부대가 유승백이 지휘한 8로군 최정예 129사단이다. 이 부대의 6천
병력은 동쪽으로 행군하여 산동성까지 가는 동안 점점 작은 부대로 갈라져
결국 흔적 없이 녹아 버렸다. 군대는 힘을 집중해야 살아 남는다는 것이
상식인데도 이런 터무니없는 군사전술을 택한 것이다. 그런데 유백승 부대는
이러한 상식을 비웃기라도 하듯 불과 몇 년 뒤에 수십만이나 되는 강력한
항일부대가 되어 나타나 세상을 놀라게 했다.
홍군이 점령한 지역은 하루가 다르게 넓어졌다. 양자강 계곡에서부터 몽고의
초원과 만주의 험한 산악지방에 이르기까지 수만 개 마을에서 홍군 유격대와
농민들은 일본군의 배후를 치는 일종의 인민전쟁을 치러냈다. 그리고 그만큼
국민당의 힘은 사그라졌다. 테오도르 화이트라는 미국 언론인이 쓴 보고서를
보면 국민당은 1920년대와 다름없는 정책을 편 탓으로 민심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수없이 많은 농민들이 길바닥에서, 산에서, 오막살이에서, 들판 곳곳에서
죽어갔다. 그런데 관리들은 세금을 한푼이라도 더 짜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국민당 정부는 소출보다 더 많은 세금을 강요했다.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았다. 느릅나무 껍질과 마른풀로 연명하는 농민들은 종자 알곡까지 관청에
갖다바쳐야 했다. 우리는 호남성 농민의 가슴 밑바닥에 죽음처럼 냉정하고
잔인한 분노가 들끓고 있음을, 국민당 정부에 대한 신뢰라고는 한 톨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국민당군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1940년 상해 남쪽에서
일본군 배후지역으로 이동하던 신4군이 국민당 군대의 공격을 받았는데 여기서
홍군이 4천 명이나 죽었다. 이 사건으로 제 2차 국공합작은 끝장이 났고
양측은 공공연한 주도권 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장개석은 신 4군과 8로군에
대한 군수품 지원을 끊어 버렸다. 하지만 홍군은 그런 어려움에 익숙한 부대라
별 타격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홍군과 공산당은 나날이 세력을 키워
1945년에는 90만 무장병력과 7백만 명의 민병대, 그리고 120만 당원을
자랑하는 거대 조직이 되었다. 홍군 유격대는 중국 북부 '일본군 점령지역'
안에서도 그 3분의 2를 사실상 점령했다.
미국, 영국 등 연합국은 태평양전쟁이 터진 후 중국에 엄청난 지원을
퍼부었는데 이 모든 것을 남경 정부가 독점하였다. 그러나 홍군은 부패한
국민당 관리를 통해서, 또는 국민당 군대에게서 노획함으로써 이 무기들을
손에 넣었다. 러시아 정부는 여전히 홍군을 믿지 못해 남경 정부를 홍군보다
더 중요한 동맹세력으로 간주하였다.
1945년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자 모택동은 국민당에게 연립정부를 세우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일본이 원자폭탄을 맞고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자 일본이
점령했던 화북과 만주지방을 놓고 다시 주도권 싸움이 벌어졌다. 1946년
연립정부 수립을 둘러싼 협상이 결렬되자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는 전면전이
터졌다.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 열강은 장개석에게 대량의 군수품을 지원했다.
그러나 장교들의 부정부패로 사기가 떨어진 데다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국민당 군대는 우수한 무기를 가지고도 홍군을 당해 내지 못했다. 미국이 줄
수 있는 것은 물질뿐이었다. 하지만 홍군의 힘은 무기와 군수품이 아니라
그들의 의지와 정신이었다. 남경 정부군은 1949년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홍군의 공세에 허물어졌다. 그런데 장개석을 도와주러 온 미국 장군들은
이러한 결과를 제법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중국은 강력한 군사력의 침범을 받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념의 도전을
받은 것이다. 이 새로운 이념에 이기는 길은 그보다도 더 큰 호소력을 지녀
민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이념으로 대항하는 것밖에 없다. 이러한 이념이란
정부가 정부와 사회의 모든 분야 모든 계층에서 정치적 경제적 부패를
도려내고 무능과 안일을 제거하여 민중에게 평등과 사회정의를 제공하고 무든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며 개인을 존중하는 것을 말한다. 공산주의를 군사력으로
이기려고 한다면 중앙정부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그것은 오직 정치적
경제적 개혁으로 민중의 고통을 덜어 주며 그들의 충성과 열성과 지지를
얻어야만 이룰 수 있다.
(알버트 C. 웨드마이어 중장이 중국 행정원과 국민당 정부 각료
전원합동회의에서 한 종합 정세평가, "중국백서", 1947. 8. 22)
1948년 홍군은 만주지역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국민당 군대는 둑이 무너지듯 일거에 허물어져 패주를 거듭했다. 더
버틸 곳이 없게 된 장개석은 몇 안 되는 병력을 끌고 대만으로 달아났다.
1949년 3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북경에 입성했다. 인민해방군이라는 정식
명칭을 가진 홍군은 중국 대륙 모든 마을과 도시에 붉은 깃발을 꽂았다.
노동자, 농민, 지식인, 민족부르주아지 대표들로 구성된 '인민정치협상회의'는
'중국인민정부'를 수립하여 모택동을 주석으로 선출했다. 미국정부의
"중국백서"는 중국을 '상실' 한 책임이 장개석이 이끈 '반동파'에게 있다고
지적했다.
1927년 한 무리 청년 공산주의자들이 정강산에 모여 붉은 깃발을 꽂은 데서
시작된 중국 사회주의혁명은 대장정과 서안사건이라는 우여곡절을 거쳐 1949년
10월 1일 북경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탄생을 선포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이 기나긴 드라마의 절정은 아무래도 서안사건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
사건이 아니었다면 제 2차 국공합작도 없었을 것이고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힘의 우열이 그토록 짧은 기간에 뒤집히는 일도 일어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학량은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지만 민족과 고향에 대한 사랑과
열정 때문에 "결과적으로 공산당을 돕는" 일을 했다. 장개석에게 끌려
대만으로 간 장학량은 "겨우 외출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자유만 허용되는"
생활을 하며 붉게 모든 대륙을 착잡한 심경으로 바라보아야 했다.
이상만 먹고는 살 수 없다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혁명을 창조했다. 유럽의
후진국 러시아에서는 산업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도시봉기를 일으켜
전제군주제를 무너뜨리고 불과 몇 달 동안의 과도기를 거쳐 곧바로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갔다. 중국은 러시아보다도 산업발전이 훨씬 뒤진
농업국가였다. 남부 해안 도시와 몇몇 대도시를 제외하면 자본주의
근대산업이라 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도이념은
사회주의였지만 혁명을 이끈 것은 농민의 지지를 받는 유격대였다. 게다가
러시아와는 달리 중국은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은 반식민지
종속국이었다. 중국공산당은 장기 항전을 통해 민족해방, 민주주의,
사회주의라는 세 가지 과제를 동시에 이루려고 하였다.
모택동은 중국공산당이 세운 정치체제를 '새로운 민주주의'라고 했다. 그러나
이 체제는 러시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대의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마르크스의 사상 밑바닥에는 개인이 법률적 형식적으로는
물론이요, 물질적으로도 자유롭게 사는 사회에 대한 꿈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러시아공산당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해 주지
않았다. 물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청 왕조나 지방 군벌 정권, 국민당
정권보다는 훨씬 나은 사회를 만들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중국공산당은 어쨌든 지난 반세기 동안 10억 인민을 먹여 살렸고 편족이나
인신매매 같은 비인간적인 낡은 관습을 일소하였으며 외래 제국주의의 간섭과
수탈을 뿌리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드넓은 땅과 많은 인구밖에는 가진 것이 없이 출발한 사회주의정권은
인민의 생활수준을 만족스러울 정도로 향상시키지는 못했다. 냉전시대에 자기
힘만으로 공업화를 하려 했던 대약진운동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사회주의혁명을 수호한다는 기치 아래 진행된 문화대혁명은 사회를
공포분위기에 몰아넣었을 뿐이다. 사회체제를 바꾼다고 해서 생산력을 높이는
데 필요한 자본과 기술이 하늘에서 떨어질 리는 없는 일이어서 중국 산업과
자본주의 진영 나라 산업 사이의 격차는 70년대 이후 날이 갈수록 벌어졌다.
지금 중국 정부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이름 아래 거대하고 위험스러운
실험을 하고 있다. 정치면에서는 공산당 일당독재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경제면에서는 시장체제를 받아들이는 개혁개방정책이 그것이다. 중국 기업들은
이제 정부가 내려보낸 생산목표를 채우는 대신 잘 팔리는 물건을 적은
비용으로 만들어 이윤을 남겨야 살아 남을 수 있다. 외국기업이 들어와 영업을
하고 이윤을 가져갈 수 있도록 문을 열었다. 외국에서 기술과 자본을 들여오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증권시장도 만들고 가격통제도 많이 풀었다. 이런
정책 덕분에 경제가 벌써 여러 해 뒷걸음질을 치는 러시아나 동유럽 나라들과
달리 중국경제는 지난 10여 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성장률을 기록할 만큼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미래가 밝은 것만은 아니다. 지금가지 이룬 산업화만으로도
벌써 숱한 문제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우선 지역간 격차가 엄청나게 벌어졌다.
개혁개방정책의 심장부인 광동성과 몇몇 경제특구 지역은 해마다 수십
퍼센트씩 성장하는 데 비해 내륙지방은 여전히 수십 년 전과 별 차이가 없다.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기 때문에 발전이 뒤떨어진 지역 주민들은 대도시로
이사할 수가 없어 속을 끓인다.
둘째로는 경제특구 안에서도 개인간 소득격차가 너무 벌어져 문제가 된다.
나이 어린 여성 노동자들은 60년대 말 70년대 초 우리 나라 여성 노동자들과
비슷한 생활을 하는데도 시장경제에 발빠르게 적응하여 졸부가 된 사람들은
밀수한 외제 승용차를 버젓이 굴린다. 이것은 평등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사회주의체제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요소라 할 수 있다.
셋째로는 관리들의 직권남용과 부정부패이다. 공산당과 정부와 군부의
고위층은 보통 사람들보다 고급 정보를 얻는 데 유리한 위치에 있다. 사람들이
돈맛을 알고 정부가 돈버는 일을 권장하자 이런 사람들이 뇌물을 받거나
공금을 횡령하고 일가와 친척에게 특권을 나누어주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다. 모택동 탄생 백 주년을 맞아 중국 정부가 "오류를 범한 적도 없지는
않지만 평생 청렴 검소하게 살다 아무 재산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난
모택동에게서 배우자"는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인 것을 보면 이 문제도 제법
심각한 지경에 이른 듯하다.
넷째로는 지식인을 냉대하는 제도와 사회풍토이다. 현대는 기술집약산업
또는 지식산업의 시대이다. 그런데 중국사회는 반세기 동안 지식인을 박대했다.
아무리 노동자 농민을 위한 정부를 표방한다 할지라도 지식인의 소득이나
사회적 지위가 노동자나 상인보다 못한 상태에서는 고급 과학기술이 발전하기
어렵다.
또 하나 들 수 있는 것은 환경문제이다. 공산당이 지배하는 중국에서는
시민운동이나 환경운동이 자리잡을 곳이 없다. 환경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기업이 생산량 달성에만 혈안인데도
환경오염을 감시하는 시민운동이 없었던 옛 소련과 동유럽 나라들은 지금
구체제가 만들어 놓은 오염물질과 안전성이 부족한 핵 시설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 중국 경제특구 산업도시의 공기와 주변하천 오염은 벌서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만약 외국 공해산업까지도 마구잡이로 받아들이는
성장제일주의 경제정책을 수정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이 실험의 결과는 아무도 정확하게 점칠 수 없다. 만약 중국 정부가 앞에서
든 문제들에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한다면 심각한 정치 사회적 혼란을 맞을지도
모른다. 시장경제는 경제면에서 국가통제가 약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천안문 사태에서 본 것처럼 무력으로 일당독재를 밀고 나간다면
아마도 당분간은 중국 판 '사회주의개발독재체제'가 유지될 것이다. 점진적으로
시장경제를 도입한 것처럼 어느 시점에서 점진적이고 계획적으로 일당독재를
완화하고 직접선거와 복수정당제도를 도입한다면 정치적 안정과 경제발전을
조화시켜 나갈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중국의 지도층이 낡은
교조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이 만약
교조주의에 대한 모택동의 비판을 명심하고 있다면 이 거대한 실험실이
폭발하는 것만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종교적인 교의처럼 여기는 사람들은 자기의 맹목과
무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내놓고 점잖지 못한 말을
해야 합니다. "너의 교의는 똥만도 못하다." 개똥은 들판에 거름으로라도 쓸 수
있고 사람 똥은 개가 먹을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교의라는
것은 들판을 기름지게 할 수도 없고 개를 먹일 수도 없으니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ff
아돌프 히틀러
벌거벗은 현대 자본주의의 얼굴
@ff
"이봐, 나는 살아서 이 관저를 나가지 않을 것이네."
1933년 3월, 정권을 잡은 히틀러가 자기 승용차 운전사에게 한 말이다.
실제로 그는 제 2차 세계대전에서의 패전이 임박한 1945년 4월 30일 오후 자기
숙소에서 권총 자살했다. 합법적인 선거에서 유권자의 절대적 지지를 받아
권좌에 오른 정치가, 인종이론 광신자, 유태인 학살로 악명 높은 살인마, 세계
제패를 추구한 전쟁 광, 무한 권력을 구축한 희대의 독재자, 미술과 음악에
심취한 예술가, 그리고 군중의 마음을 휘어잡는 유능한 선동가... 히틀러의
얼굴은 실로 변화무쌍했다.
그는 독일 국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평화적으로 집권했지만, 합법적으로
권좌에서 물러날 의사를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영광과 오욕으로 점철된
히틀러의 생애는 동시에 독일과 세계 민중의 수난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과연 히틀러는 어떻게 해서 합법적으로 집권할 수 있었으며, 독일은 왜
대량학살과 전쟁의 구렁텅이로 줄달음칠 수밖에 없었을까? 이 문제를 아돌프
히틀러의 생애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굉장한 거짓말을 하라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북동부의 산간지방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숙부 집에서
자랐다. 알려지지 않은 알로이스의 아버지, 즉 히틀러의 할아버지가
유태인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결국 확인되지 않은 풍문일 따름이다. 세관
관리였던 알로이스는 두 번이나 아내와 사별한 후 스물 네 살이나 어린
클라라와 결혼해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중 맏이가 바로 아돌프 히틀러였다.
초등학교 시절의 아돌프는 공부를 썩 잘했으며 그림도 제법 잘 그렸다.
하지만 아버지의 요구에 밀려 린츠의 실업학교로 진학한 뒤로는 학업성적과
품행이 불량하다는 이유로 4년 만에 퇴학당하고 말았다. 그는 죽은 아버지의
연금으로 살아가는 어머니 곁에서 빈둥거리다가 1907년 빈의 미술대학에
응시했지만 정규교육을 마치지 못한 탓으로 좌절을 겪었다. 그러다가 같은
해에 어머니가 사망하자 유산과 고아연금에 의지하여 3년 동안 빈의 무료
숙박소에 살면서 그림엽서나 작은 풍경화를 그려서 팔았다. 그런데 이때는
자본주의 열강이 식민지 쟁탈을 위해 서로 암투를 벌이고 있던 시기였으며,
여러 나라에서 사회주의 혁명운동이 점점 고조되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히틀러가 이 같은 시대적 조류에 영향을 받은 일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강대한 독일제국에 대한 동경심과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에 대한 경멸이
소년 아돌프의 가슴속에 자라고 있었다.
히틀러가 빈에서 본 것은 "어둡고 가난하며 추잡한"하층민들의 세계였다.
그리고 이 같은 경험 가운데서 그 유명한 '대중조작' 기술의 기초를 터득하게
되었다. 히틀러가 쓴 "나의 투쟁"에 등장하는 가장 유명한 경구들, 예컨대
"거짓말을 하려면 굉장한 거짓말을 하라" "대중은 이해력이 부족하고 잘
잊어버린다" "대중은 지배자를 기다릴 뿐, 자유를 주어도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식의 대중 관을 가지게 된 것이다. 수많은 혁명가들이 대중을
"자주적인 존재요, 혁명의 동력"으로 파악하고 그들을 자각시켜 스스로
"자기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한 혁명 투쟁에 일어서게" 하기 위해 세계 각국의
모든 계급 계층 속에서 심신을 다 바치고 있던 시기에 그는 오히려 하층민의
가장 타락하고 낙후한 면을 포착하여 그들의 심리를 조작하는 기술을 익혀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돌프는 1913년 5월, 오스트리아 당국의 징병검사를
피해 평소 동경해 왔던 독일제국 뮌헨으로 도망쳤다. 이로써 궁핍한 예술가의
'빈 시대'는 막을 내렸다.
뮌헨에서 히틀러는 제 1차 세계대전을 맞았다. 그리고 이 전쟁과 더불어
그의 눈앞에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그는 별 볼일 없는 그림을 팔아
따분하게 살아가는 생활에서 탈출했다.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독일제국의
병사가 된 것이다. 자유와 창의와 상상력을 생명으로 하는 예술가의 세계에서
갑자기 명령과 복종과 의무만이 지배하는 병영으로 뛰어든 아돌프는 그곳에서
안식처를 찾았다. 참호에서 나누는 전우애와 상호부조정신이야말로 "가장
고귀하고 거룩한 인간정신"이라고 확신하게 된 것이다. 변변한 친구 하나
없었던 아돌프는 용감무쌍하게 전투에 뛰어들었다. 부상당한 상처가 채 낫기도
전에 곧장 전선으로 달려갈 정도로 투철한 군인정신의 소유자가 되었다.
여기서 익힌 군대 규율과 명령 복종의 조직원리를 가장 이상적인 사회관계로
생각한 히틀러는 뒷날 국가 자체를 이 같은 원리에 따라 조직하게 된다.
1918년 11월, 패전과 더불어 혁명이 일어나 독일제정은 무너지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이다. 사회민주당이 정권을 잡았지만 다시 한번
'마르크스주의의 교리'를 등졌다. 1914년에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전쟁의
내전으로의 전화', '제국주의 강도 전쟁 반대'라는 제 2인터내셔널의 결의를
버리고 '조국수호전쟁'으로 달려갔던 독일 사회민주당은 독일제국의 옛
지배세력과 타협했다. 따라서 그 혁명은 독일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 독일제국의 지배계급이었던 독점자본가와 지주들은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유지했으며 관리와 재판관, 군부는 마찬가지로 행정과 치안,
군대를 권위주의적으로 지배했다. 아이들은 여전히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자라나 예전과 같은 분위기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군이든
행정조직이든 민간단체든 상부에 대한 비판은 금지되었다. 독일 사회의 모든
곳에 반동적이고 비민주적인 풍토가 팽배하기 시작했다.
같은 좌익진영인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은 서로 격렬한 비난을 주고받으면서
대립했다. 그들은 제정의 잔당과 우익 보수진영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좌익진영 내의 다른 정파를 고립시키고 궤멸시키는 투쟁에 온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독점자본가와 지주, 관료와 군부는 우익의
골수분자들을 집결시키면서 공화국에 대한 반동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한편
패전 후에 군복을 벗고 도시로 쏟아져 나온 수많은 젊은이들, 아무런 기술도
없이 배운 것이라고는 오로지 군대 규율과 전투 기술뿐인 제대군인들은
실업자가 되어 거리를 떠돌았다. 수공업자와 소상인, 중소기업가와 관리들은
불만족스러운 일뿐인 전후생활에 울분을 터뜨렸다.
바로 이와 같은 전후 독일 사회의 상황에서, 처음에는 별로 눈길을 끌지
못했던 조그만 우익단체가 반혁명의 구심점으로 성장할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1919년 1월에 결성된 '독일노동자당'이다. 이 단체는 1920년에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반대파는 이 당명의 앞부분
즉 '국가사회주의'를 가리키는 Nationalsozialist의 앞뒤에서 Na와 zi를 따서
Nazi(나치)라고 했다. 이 정당은 군부의 지원을 받고 있었는데, 평소 뛰어난
웅변술을 인정받고 있던 히틀러 상등병은 여기에 파견되어 금방 이름난 연사가
되었다. 그는 1920년에 제대하여 이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나치당은 군부와 남부 독일 바이에른 지방정부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으면서
급속하게 성장했다. 중앙정부는 사회민주당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지만
바이에른 지방은 지독히 반동적인 왕당파와 군부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치는 여기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히틀러는 당의 '이론가', 선동적인
'연설가'로서 뿐만 아니라 '조직전문가'로서도 재능을 발휘했다. 그는 나치당의
정치집회에서 야유를 퍼붓는 반대자들을 쫓아내려고 테러조직인 돌격대를
만들었다. 주로 퇴역군인과 어린 직공, 학생, 노동자로 구성된 돌격대는 '체육
및 스포츠 대'라는 정식 명칭을 가지고 있었지만 1921년 11월 당의 집회에
몰려든 사회주의 노동자들과 권총을 난사하며 대 격투를 벌인 후로
'돌격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들은 10명씩 분대를 지어 폭력을 휘둘렀으며
채찍, 곤봉, 단검, 권총 등의 무기를 소지했고, 군부대에 들어가 군사훈련까지
받았다.
'나치의 북잡이' 히틀러는 흔히 보는 극우파와 왕당파 인물들처럼 미리
준비한 원고를 읽어 내려가지 않고 청중들의 반응을 보면서 자유자재로
선동적인 연설을 했다. 그는 사회주의나 공화정에 대한 비난과 복수만을
외쳐대지 않았다. 독일민족의 단결과 외국의 위협으로부터의 해방,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통일과 조화, 국민군 창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사회보장제도
확충, 행복한 민족공동체 건설 등 '고귀한 목표'를 제시하여 청중을 사로잡은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혁명에 위협을 느낀 중산층과 사회주의운동에서
소외된 노동자들, 울분에 찬 실업자, 독일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시대착오적인
왕당파, 반동적인 군부, 노동운동을 목 졸라 버리고 싶은 독점자본가들이
히틀러의 연설에 열광적인 환호성을 올렸다. 히틀러는 자기 말마따나
"거짓말을 하는 김에 엄청난 거짓말을 한" 것이다.
전쟁경제의 눈부신 성공
그 동안 독일 경제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1923년 8월의 마르크화 시세는
전쟁 전의 110만 분의 1, 9월에는 2,354만 분의 1, 10월에는 60억 분의 1로
폭락했고, 인플레와 식량 부족에 항의하는 폭동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가운데 나치당원은 5만을 넘어 바이에른의 극우파는 남부독일을 점령한 후 북
독일로 진격하라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히틀러도 폭동 계획을 세웠다.
자신의 정치철학을 실현하고 싶었을 뿐만 아니라 수가 엄청나게 불어난
돌격대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라도 "하루바삐 베를린으로 진격하여 독일을
구원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돌격대가 노동자들이 파업을 폭력으로
분쇄해 주는 대가로 바리에른의 대자본가들에게서 많은 지원을 받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그렇지만 폭동의 시기가 방법을 놓고 히틀러와 군부는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다.
1923년 11월 8일, 히틀러는 군부 지도자들이 뮌헨이 맥주홀에서 연 왕정복고
연설회에 돌격대를 이끌고 나타나 폭동을 일으켰다. 이른바 '맥주홀 폭동'이다.
그러나 군부의 반대 때문에 이 폭동은 실패하였고 히틀러는 제 1차 세계대전의
영웅으로 떠받들어졌던 루덴도르프와 함께 체포되었다. 나치당에 대해서
정부는 해산명령을 내렸다. 히틀러는 5년형을 선고받고 란츠베르크의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이 때 자신의 정치사상을 담은 "나의 투쟁"을 썼다. 이 책에서
히틀러가 서술한 나치당 조직이론은 후에 독일 국가조직에도 적용된 독특한
것이었다.
나치운동은 철두철미한 게르만 적 민주주의 원칙, 즉 선거로 지도자를
선출하고 일단 선출된 지도자는 무제한적인 권위를 부여받는다는 원칙을
주장한다. ... 어떤 지역의 책임자라도 모두 선거로 뽑히지만, 선출된 후에는 그
사람만이 그 지역의 책임 있는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 읍, 면, 군 등 상위의
조직에도 언제나 그 책임자는 선거로 뽑으며 ... 결국 당 전체의 지도자에
대해서도 같은 방법을 적용한다. 즉 의장은 선출되지만 운동의 독점적인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초판의 한 대목이다. 그러나 1930년 판 이후에는 '게르만 적
민주주의'라는 구절이 삭제되고 당 조직의 "책임자는 그보다 한 단계 높은
상급 지도자에 의해 임명되어 책임 있는 지도자가 된다"로 바뀌었다. 그리고
"오직 당 전체의 지도자만이 전 당원이 모인 집회에서 선출된다"고
규정하였다. 말하자면 상향식의 민주적 선 출제가 폐지되고 철저히 하향적인
임명제가 도입된 것이다. 이것은 선거로 집권한 다음 민주적 선거제도 그
자체를 말살해 버린 히틀러의 행위와 그대로 일치한다.
히틀러는 1924년 11월 석방되어 다음해 2월 당을 재건했다. 그리고
친위대라는 비밀조직을 당내에 만들었다. 나중에 나치 독일의 선 전 장관이 된
젊은 선동과 괴벨스는 이때부터 '지도자 히틀러' 신화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폭동을 일으켰다가 왕당파와 군부의 후원을 잃어버린 나치당은 합법
대중정당으로 변신하여 독자적인 활동을 벌여 나갔다. 이제 히틀러는 전국에
알려진 대중 정치인으로 성장하여 권력을 획득할 기획을 잡았다.
미국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초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독일을
"사회주의혁명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전쟁배상금을 탕감해 주어
독일 경제를 회복시킨 다음 막대한 돈을 투자했다. 그러나 1929년의
대공황으로 인해 미국 자본의 뒷받침을 상실하자 독일 경제는 송두리째
흔들리는 위기를 맞이했다. 공황의 그림자가 독일을 뒤덮었다. 그러자 독일
국내정세는 혁명과 반혁명의 일대 격전이 불가피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임금
인하와 실업에 분노한 노동자계급은, 종전 후 줄곧 집권하거나 우익과
연립하여 정부에 참여해 왔던 사회민주당을 외면하고 사회주의혁명을 주장해
온 공산당 진영으로 속속 전향했다. 나치당은 주춤했으며 공산당 세력은 계속
확대되어 갔다. 그러나 중산층과 농민들은 중도파 정당을 버리고 나치를
지지했다. 사회주의혁명에 대한 공포를 느낀 금융자본가, 중화학공업의
대자본가, 지주계급, 왕당파, 보수주의자들은 나치의 깃발 아래 황급히
모여들었다. 히틀러는 보수진영의 모든 정파와 손잡고 1933년 1월 드디어
내각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정세는 여전히 불투명하였다. 독일은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었다.
공산당과 노동자계급은 대중에게 대공황이라는 파멸적인 고난을 안겨 준
자본주의체제를 타파하고 러시아혁명의 뒤를 따를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나치를 필두로 한 반혁명 진영은 막대한 사회정책 비용이 필요하고 혁명을
초래할 위험이 농후한 민주주의를 폐지하고 독재 정부를 수립하자고 외쳤다.
이 같은 상황에서 1933년 3월 5일의 총선거를 며칠 앞두고 나치는
국회의사당에 불을 지른 다음 이를 좌익의 소행으로 조작했다. 일반 국민
사이에는 사회불안에 대한 공포와 반공분위기가 번져 나갔다. 그 결과
나치당은 총 선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히틀러는 정력적으로 독일을 재조직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는 가장 먼저
6백만 지지자와 36만 당원을 가진 공산당을 폭력으로 해산시켰다. 공산당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독일 국민들 가운데 너무나 많은 '명백한 반대자'가
있었던 탓으로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았다. 다음 희생양은
사회민주당이었다. 나치는 사회민주당 지방조직과 경영조직에 무자비한 테러를
가하고, 관공서와 기업체, 조합에서 당원들을 축출함으로써 당의 뿌리를 뽑아
버렸다.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무장항쟁을 결의한 하급 당원들의 열의에도
불고하고 당의 합법성과 상층부에 대한 나치의 관용 조처에 연연하여 눈
깜짝할 사이에 지리멸렬 무너졌다. 곧이어 나치는 노동조합운동을 전면 금지한
다음 정당 결성과 활동의 자유를 봉쇄했다. 그리고 신문, 방송에 대한 철저한
검열을 실시했으며 심지어 고용주들의 협회나 농민과 상인의 이익단체까지
모조리 해산시켰다. 대학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각급 학교의 교육내용을
나치정신을 선전하는 것으로 바꾸어 버렸다. 자유주의적이거나 양심적인
목사와 신부들 역시 이 같은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
나치는 강력한 조국의 건설, 국민생활의 안정과 사회복지 확충을 주장하는
그들의 '민족주의적' 구호에 반대하는 자는 누구나 '반역자'로 처단하였고
'국가'의 이름을 내세우면 못할 일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국가사회주의'라는 이름과는 달리 나치체제는 '사회주의'아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다. 그것은 독점자본가와 군부, 관료의 민중에 대한 가장
적나라한 계급 독재였으며 가장 노골적인 전체주의 국가였을 뿐이다. 일찍이
대중을 '조작의 대상'으로 여겨 온 히틀러는 각계 각층을 철저히 하향식으로
조직했다.
돌격대, 친위대, 나치 자동차 운전사단, 히틀러 유겐트, 나치 여성단, 나치
독일 학생연맹, 의사동맹, 교사동맹, 공무원 동맹, 기술자동맹, 노동전선 등
사회의 모든 계급 계층이 나치당과 그 보조조직으로 전락했다. 사회 전체가
총통 히틀러를 정점으로 한 군사조직으로 바뀐 것이다. 이 모든 단체들은
나치당과 친위대의 직접 통제를 받았다. 한마디라도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은
어느 곳으론가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20세기
문명사회에 가장 무시무시한 '조직된 야만'이 등장한 것이다.
나치는 성공했다. 정치뿐만이 아니라 경제에서도 일련의 눈부신 성과를 거둔
것이다. 독일 경제의 부흥은 형태는 다르지만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이 실시한
뉴딜 정책과 같은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 의도했든 아니든 히틀러는 케인즈의
가르침을 가장 먼저 이행했다. 그는 도로 건설과 토지 개량사업, 대규모의
병영과 비행장 건설사업을 일으키고 기계 대신 인력을 사용하게 했다. 그리고
군대와 경찰, 감옥을 대폭 늘리고 군수산업을 진흥하였다. 미혼여성에게는 결혼
대부금을 주어 직장을 떠나게 하고 그 일자리를 남자들에게 주었다. 친위대만
해도 5만 이상에, 징집 제를 실시하여 군사력을 대폭 증강했다. 이리하여 무려
6백만이 넘던 실업자가 불과 몇 년 안에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줄어들었다. 케인즈의 표현대로 하자면 정부의 '재정지출'이 '유효수요'를
증대하였고 '유효수요'의 증대는 '국민소득'의 증대를 몰고 와 대공황의
그림자가 사라진 것이다. 나치는 늘어나는 산업 수요에 발맞추어 합성고무와
인조석유 생산에 열을 올림으로써 전쟁물자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나치는 이 같은 경제적 성공과 더불어 일종의 평등주의 정책을 도입했다.
군부와 관료, 대자본가와 중산층, 농민들은 선거에서 나치를 지지했었고, 하층
계급은 출신에 관계없이 충성스럽고 능력 있는 젊은이들을 대량으로 등용하여
각 방면에서 활동할 수 있게 한 나치의 정책에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다. 결코
나치가 공포정치만으로 독일 국민을 통치했던 것은 아니다. 이 같은 새로움에
도취되어 독일 국민은 나치에 대한 갖가지 의혹에도 불구하고 거리낌없이
나치당과 히틀러를 추종했던 것이다.
유태민족의 눈물과 저주
그러나 '게르만 민족의 영광' 뒤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참혹한 재앙을
당해야 했던 유태인의 눈물과 저주가 있었다. 그들은 나치 독재의 가장
비극적인 희생자였다. 당시 유럽에 거주하던 유태민족의 절반인 572만 명이
나치에게 학살당한 것이다.
중세와 근대 유태민족 생존 사는, 일견 찬란해 보이는 유럽문명의 어두운
뒷골목을 더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가롯 유다가 예수를 팔아 넘긴 이후
로마 기독교 교회로부터 예루살렘 입성을 금지 당한 유태인들은 "신을
부정하고 예수를 살해한 음험하고 타락한 민족"이라는 죄로 유럽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모진 박해를 받아야 했다. 그들은 '천민'으로서 '게토'에 살면서
특별한 옷을 입도록 강요받았다. 그들은 정상적인 직업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기독교 교리가 금지한 고리대금업이나 전당포를 주로 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자리잡은 후에는 노동자계급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유태인은 프랑스혁명과 계몽사사의 영향으로 많은 나라에서 법적인
평등을 얻어 언론, 출판, 변호사, 의사, 금융업 등의 새로운 분야로 진출할 수가
있었다. 그러자 전통적으로 유태인을 멸시해 온 귀족이나 지주, 소상인, 농민
등 자본주의의 여러 현상에 불만을 가진 낡은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유태인을
향해 그 불만과 증오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로 인해
중세적 공동체가 해체됨으로써 고립된 개인으로 떨어져 버린 유럽인들은
자기네 율법과 생활, 공동체 문화를 꿋꿋이 지키는 유태인들을 어딘가
'부러우면서도 무서운' 존재로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같은 유태인 공동체에
대한 동경과 공포, 근대사회의 병폐에 대한 절망의 부산물로 생겨난 것이
프랑스의 별 볼일 없는 학자 고비노의 인종이론이었다. 요컨대 "유태인은
열등하고 비열한 민족이고 기독교도의 생활과 문화를 더럽히는 기생충이기
때문에 격리하여 없애 버려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극히 비과학적이고 편견에 가득 찬 이 이론이 히틀러의 광신적
국가주의, 게르만족의 세계제패 욕구, 인종적 우월성에 대한 망상과
결합함으로써 습기 풍기는 책갈피에서 튀어나와 유럽을 휘저었다. 이 사이비
과학자의 엉터리 이론은 유태인이라는 바로 그 이유 하나만으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조리 죽여 없애도 좋다는 사형언도가 된 것이다. 이 같은 인종이론
광신도들의 눈에 유태인은 인간이 아니라 '더럽고 위험스런 바이러스'나
다름없이 보였다.
나치 돌격대는 처음에는 길거리에서 유태인을 두들겨 패거나 그들의 집과
상점을 약탈하고 불태우는 일부터 시작했다. 독일 국민들은 조금 불안한
심정으로 그저 지켜 볼 뿐이었다. 그러던 중 보수세력과 군부, 지주,
대자본가들이 나치 독재 및 침략정책과 더불어 인종이론까지 예찬하고 나섰다.
그들은 유태인을 '극히 위험스런 외부의 적'으로 조작함으로써 독일인의
통일성을 강화하는 동시에 독일민족의 우월성과 국가의식을 높일 속셈으로
이를 지지했다. 유태인을 추방하거나 공장과 수용소에서 강제노동을 시켜
노동력을 착취하고 그들의 재산과 직업을 독일인이 차지하게 할 수 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이러한 인종이론은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게르만족의
세계제패라는 망상을 퍼뜨리는 데 쓸모가 있었다. 실제로 나치는 유전학과
우생학 연구를 대폭 지원하고 일부일처제를 폐지하여 유태인은 물론이요
슬라브인까지도 노예로 삼아 전세계에 게르만인 만이 번성하도록 하겠다는
허황한 계획을 세우기까지 했다.
나치 정부가 광적인 침략전쟁에 열을 올리게 되면서 친위대와 관료기구
꼭대기는 인종이론 광신자로 가득 차 드디어 유태인 절멸정책을 실행하기에
이르렀다. 1천백만 유럽 거주 유태인은 나치가 거의 온 유럽을 점령함에 따라
모두 사형 당할 운명에 놓였다. 노인과, 환자, 부녀자와 어린이들은 동유럽
각지의 수용소에 도착하는 즉시 살해당했다. 건강한 사람들은 노동력이 완전히
고갈될 때까지 강제노동을 한 다음 가스실로 끌려갔다. 나치 학살자 들은
유태인을 목욕탕 같은 가스실에 넣은 뒤 환기구로 가스를 집어넣어 대량
학살했다. 옷과 소지품을 모두 빼앗긴 뒤 살해당한 벌거벗은 시체들은 재빨리
금이빨을 뽑힌 다음 소각실에서 태워졌다.
뿐만 아니라 독일 군을 유태인들을 상대로 갖가지 생체 실험을 했다. 공기가
없는 곳에서 얼마나 견디는가? 영하 몇 도에서 인간은 죽는가? 이런저런
병균에 감염되면 어떤 증세가 일어나는가? 이런 것이 실험의 주제였다. 독일
국민은 이 같은 참상을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나치 만행에 찬성한 적도
반대한 적도 없었다. 연합국 정부조차 실제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가스실에 대한 소문을 믿지 않을 정도였다. 이 끔찍한 대학살은 나치 독일이
저지른 범죄 가운데서도 가장 잔혹하고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현대문명과
원시적 광기가 결합하면 얼마나 무서운 재앙을 초래하는가를 인류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전세계에 흩어진 유태인들은 이 대학살에 치를 떨면서 팔레스타인 땅에
유태인의 나라를 세우려는 시오니즘운동에 더욱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 결과
유태인을 박해해 본 일이 없는 아랍민족이 이유 없는 박해를 당하는 역사의
악순환을 낳았다.
나치즘의 본질
한편 나치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때와 거의 같은 이유로 또 한번 전쟁을
일으켰다.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인해 잃어버린 식민지를
회복하려고 했다. 표면적으로는 '위대한 게르만민족의 세계 지배'라는 광적인
신념이 전쟁의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쟁의 진짜 원인은 독일
영토 안에서는 더 이상 살길을 찾을 수 없게 된 독점자본의 활로 찾기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1937년 12월에 히틀러의 오른팔 괴링이 연설이 그것을
대변한다.
정치적 필요성 때문에(즉 전쟁 준비를 빨리 갖추기 위해서) 지금으로서는
채산이 맞지 않더라고 생산을 강행할 수밖에 없다. 비용은 얼마가 들어도
관계가 없다. 전쟁에 이기면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당시 생산에 열을 올리고 있던 인조석유와 인조섬유는 원가가 너무
많이 먹혔고, 합성고무의 경우 천연고무보다 무려 7배나 비쌌다. 거대한
중화학공업 분야 자본가들이나 금융자본가들은 값싼 원료와 넓은 시장, 수지
맞는 투자 대상을 제공해 줄 해외 식민지를 목마르게 원하고 있었다. 더욱이
비생산적인 전쟁 준비를 몇 년이나 계속하느라 경제력을 소모한 탓으로 독일은
국외에서 단단히 한몫을 약탈해 오지 않는 한 더 이상 견디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나치는 국제적 비난 여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무장을 갖춘 다음 1936년
라인란트를 침공함으로써 1차 대전 패전 수에 조인한 베르사이유조약을
파기했다. 그리고 곧이어 1938년 3월에 오스트리아를 합병했고, 10월에는 체코
영토인 주데텐 지방을 집어삼켰다. 1939년 3월에는 체코를 합병했고 며칠 후
리투아니아의 메메르 지방을 합병했으며 곧이어 폴란드 단치히를 점령했다.
나치는 그해 8월,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자마자 9월 1일에 폴란드를
침공했다. 참을 수 없게 된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마침내 두 번째 세계대전이 터졌다.
게르만족이 청동기시대부터 행운의 상징으로 사용해 온
하켄크로이츠(갈고랑이 십자가)는 이제 재앙과 살육의 상징이 되었다. 불과
전쟁 시작 반 년 만에 나치는 덴마크, 노르웨이,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점령했다.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독일. 일본과 3국
동맹을 맺었다. 나치는 불가침조약을 깨고 1941년 6월 소련으로 진격했으며
일본은 동남아에 진출한 다음 12월에 미국의 진주만을 선전포고도 없이
공습했다. 이리하여 독일. 일본. 이탈리아의 파시즘 진영과 영국. 미국. 소련.
프랑스 등의 반파시스트 연합국 진영 사이의 일대결전이 5대양 6대주에서 불을
뿜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는 민간인 3천만 명이 폭격과 집단학살로 생명을 잃었으며
1천6백만 명의 군인이 전사했다. 초기에 승승장구하던 독일은 시간이 지날수록
육. 해. 공군 모두 열세에 빠졌으며, 1945년 5월 7일 항복을 선언했다.
전쟁범죄자 히틀러는 그간 동거해 왔던 에바 브라운과 4월 29일 새벽에 황급히
결혼식을 올렸고, 다음날 오후 동반 자살로 생을 끝마쳤다. 에바는 독약을
마셨고 히틀러는 권총으로 자기 머리를 쏜 것이다. 5월 9일 베를린을 접수한
소련군은 총독 숙소 정원에서 히틀러와 에바의 불탄 시체를 찾아냈는데
히틀러의 치과의사와 간호원은 시체의 치아가 두 사람의 것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후 시체의 행방이 불분명해진 탓으로 "히틀러가 살아 있으며
어디선가 제국의 부활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끈질기게 떠돌아다녔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의 영욕에 찬 생애는 이날 끝장난 것이 분명하다. 그의
죽음과 더불어 '게르만족의 세계지배'라는 시대착오적 망상도 물거품이 되었다.
점령군 나치에 목숨을 걸고 저항한 유럽 각국은 해방을 맞았으며 볼셰비키
군대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던 유고, 불가리아, 체코 등 동유럽 국가들은
사회주의체제를 받아들였다.
나치즘은 제국주의의 본질을 남김없이 보여 주었다. 약소국에 대한 침략과
군사적 점령, 식민 통치가 독점자본주의체제의 대회정책이라면 민주주의를
완전히 말살한 것은 그 대내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동등한 투표권을
갖는 평등한 정치제도인 민주주의와, 소수의 자본가가 생산과 유통, 금융을
지배하는 불평등한 경제체제인 자본주의가 저절로 조화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나치체제는 더없이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민주주의의 전통이 강력하고 민중의
정치의식이 높았던 미국과 영국은 국가권력이 개입하여 자본주의체제를
수정함으로써 적어도 나라 안에서는 민주주의를 유지했지만, 그렇지 못한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의 지배계급은 3권 분립과 자유선거,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각계각층 이익단체와 정당정치를 모조리 폐기하고 강력한
독재체제를 수립하였다. 이것이 '파시즘'이며 나치즘은 그 극단적인 형태였을
따름이다. 인종주의와 광신적 반공주의는 결코 나치즘만의 특징이 아니었다.
국가의 이익이라는 명분을 들이대면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말살하고,
안정이라는 이름 아래 소수자의 이익을 위해 다수자의 이익을 짓밟는 변종
파시즘은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도 세계 각지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 안에서 민주주의를 지킨 이른바 '자유세계' 열강들도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해서는 결코 침략적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을 버리지 않았으며 백인 우월
주의에 입각한 인종차별 역시 계속되고 있다. 베트남과 알제리에 대한
프랑스의 식민지전쟁, 미국이 벌인 베트남전쟁, 이제서야 끝장이 난
남아공화국의 가혹한 인종차별정책과 60년대 미국 흑인 민권운동에 대한 탄압,
이란. 니카라과. 칠레. 아르헨티나. 파나마. 한국 등등 이미 무너졌거나 지금도
엄존하고 있는 제3세계 파쇼체제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나 배후조종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나치 독일이 인류에게 남긴 교훈은 끝나 버린 과거에만
국한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되돌아보기에도 끔찍한 나치의 범죄를 두고두고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ff
거부하는 팔레스타인
피와 눈물이 흐르는 수난의 땅
@ff
1972년 8월 26일, 제20회 올림픽이 서독의 뮌헨에서 화려한 막을 올렸다.
세계 인류의 대제전, 평화와 상호 친선의 큰 잔치는 처음 열흘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9월 5일, TV 중계를 지켜보던 세계각국 구민들을 경악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사건이 터졌다. 검은 복면으로 몸을 감싼 무장
게릴라가 올림픽 선수촌을 습격하여 이스라엘 선수 둘을 사살하고 아홉 명을
인질 삼아 경찰과 대치한 것이다. 그들은 '검은 9월 단'이라는 가장 과격한
팔레스타인 게릴라 조직의 전사들이었다. 평화의 제전은 순식간에 팔레스타인
아랍민족과 이스라엘 시온주의자 사이의 격렬한 증오와 투쟁의 무대로
돌변하였다. 게릴라들은 결국 모두 사살되고 말았지만 팔레스타인문제를
더없이 충격적인 방법으로 인류 앞에 제기하는 데 성공했다. 9월 8일 이스라엘
공군은 시리아와 레바논에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무차별 보복 폭격을
퍼부었다.
이 사건은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팔레스타인 무장 게릴라와 이스라엘
정부가 수없이 교환한 테러와 보복공격을 가장 명료하고 극적으로 보여
주었다. 잊을 만하면 또다시 신문 외신면에 대문짝 하게 보도되곤 했던 크고
작은 폭탄테러와 이스라엘의 보복공격은 본질적으로 이 사건과 맥락을 같이 한
것이며, 이스라엘과 인접 아랍국가 사이의 끊임없는 무력충돌 역시 같은
이유로 일어난 것이다. 팔레스타인은 그야말로 중동의 화약고이며, 그 화약고가
폭발할 때마다 기름으로 가득한 중동 일대에는 으레 화염이 치솟았다. 이집트,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사우디 아라비아, 이라크 등 아랍국가들의 정치체제의
차이점과 각국의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특수성 때문에 중동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명확히 이해하기는 몹시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는
팔레스타인문제를 중심으로 복잡한 중동문제를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시온주의와 유태민족주의
이스라엘 건국을 가져온 시온주의가 싹튼 것은 공교롭게도 프랑스를 대
혼란으로 몰아놓은 드레퓌스 사건의 폭풍우 속에서였다. 1896년 드레퓌스를
비난하는 프랑스 군중의 반유태주의 폭동에 놀라 "유태국가"라는 책을 집필한
유대인 언론인이 있었다. 유럽 문화에 철저히 동화되어 있던 비엔나의 언론인
헤르즐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유태 민족주의자로 전향했음을 고백하면서,
유럽의 유태인들이 박해를 피하려면 자기들끼리 따로 떨어져 나와 독립한 순수
유태국가를 세울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전에도 이 같은 주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자만 헤르즐의 책은 시온주의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유태인들은 어디에다 유태국가를 세울 것인지를 검토한 끝에 유태인들이 2천
년 가까이 떠나 살았던 팔레스타인을 선택했다. 시온은 유태교성지 예루살렘에
있는 산의 이름인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 천국, 이상향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시오니즘이란 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를 건설하려는 운동을
의미한다. 신앙심 깊은 유태인들의 메시아를 향한 열정, 성서가 일깨우는
정감들, 세다가 유태교를 등진 유태인들에게까지 영향력을 갖는 민족적
전통들에 비추어 팔레스타인이야말로 가장 매력적인 약속의 땅이었다. 1977년
11월,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가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수상 베긴이 한 연설은 이 같은 유태인의 열망을 가장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외국 사람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니,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
조국에 돌아왔을 뿐입니다. 우리 민족과 이 땅(팔레스타인)의 역사적 연계는
영원한 것입니다. ... 바로 이곳에서 우리의 예언자들이 성스러운 말씀을 하셨고
그 말씀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들려 오며, 이 성벽(예루살렘의 성벽) 속에서
울리고 있습니다. 옛날 유태 나라 임금님들과 이스라엘 임금님들이 이곳을
통치하셨습니다. ... 이 땅에서 폭력에 의해 쫓겨나 있던 동안에도 우리는
하루도 이 땅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 시온으로 돌아오는 것, 이 권리와
특권은 발포어 선언에 의해 우리들에게 승인된 것입니다.
시온주의자들은 인종차별의 철폐를 포함하는 사회주의혁명에 뛰어든
동유럽과 러시아의 유태인들과는 달리 팔레스타인 땅을 사 이민을 갔다.
그러나 이들은 그 당시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아랍계 주민들의 권리를
무시했다. 이는 당시 유럽을 풍미한 철학 사조에 물든 탓이었다. 유럽인은 유럽
밖의 영토를 자기네 마음대로 점령하고 지배할 수 있는 '주인 없는 땅'처럼
여기고 있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했다. 유태인들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시온주의가 고개를 든 바로 그때, 오스만 터키가 지배하던
팔레스타인의 아랍민족 역시 같은 성격의 이념, 즉 아랍 민족주의에 눈뜨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결정하는 민족자결의
미래를 그리면서 이민족 지배자에 대한 복수의 칼을 막 갈기 시작했다. 이
같은 사실은 비록 시온주의자들이 인식하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이미 두 민족
사이에 던져진 크나큰 불행의 씨앗임에 분명했다.
1880년대에는 두 민족이 평화롭게 어울려 살았다. 당시 팔레스타인 총인구
50만 중 2만5천이었으며 민족적 차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에서
유태인 박해가 시작되면서부터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에 유태인 정착촌을
건설하는 일에 열을 올려, 1914년에는 총인구 74만 가운데 유태인이 8만5천
명으로 늘어났다. 아랍인들은 경계심을 품고서 터키 의회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터키의 부패한 관료들은 단지 형식적인 이주 제한조치만을 취하면서
제몫을 챙겼을 뿐이다. 이 같은 시점에서 터키가 독일의 편을 들어 제1차
세계대전에 가담하자 팔레스타인 땅에는 회오리가 일어났다.
영국은 1915년 10월, 아랍인이 전쟁에 협력할 경우 전쟁이 끝나면
팔레스타인을 아랍인에게 넘겨주겠다는 소위 '맥마흔 서한'을 발표했다. 그렇지
않아도 터키의 억압에 분노를 느끼고 있던 '메카의 수호자' 후세인은 1916년
6월 5일을 기하여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아랍민족의 왕임을 자처했다. 그의
아들 파이잘과 영국인 T.E. 로렌스가 이끈 베두인(사막 유목민) 부대는
신화적인 전투 끝에 터키군을 궤멸시키고 다마스커스에 입성했다. 그런데 영국
외상 발포어는 1917년 미국 유태인의 협력을 얻어 미국을 전쟁에 끌어내려고
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지지하는 '발포어 선언'을 발표했다.
이로써 시온주의와 아랍 민족주의 사이에 던져진 불씨는 불꽃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제국주의 열강은 전쟁이 끝난 뒤 다시 한번 아랍민족을 배신했다. 통일
아랍국가를 세우려는 아랍 민족주의들의 열망과는 달리, 시리아와 레바논을
분리하여 이 두 나라를 프랑스가 신탁통치하고,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을 영국이
신탁통치하기로 마음대로 결정해 버린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연합국은 터키가
지배했던 아랍지역을 무려 20여 개의 식민지로 분할점령하고 말았다.
프랑스군은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시리아왕 파이잘을 공격하여 다마스커스를
점령했다. 영국은 발포어선언을 이행하려 했다. 그러자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반
시온주의 폭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영국군의 비호를 받으며 이민을 계속한
유태인들은 1930년대 히틀러의 박해가 시작되자 홍수처럼 밀려들어 1936년에는
총인구 150만 가운데 28%인 43만에 이르렀다. 더욱이 우수한 기술과 자본을
가지고 온 유태인들을 효율성이 높은 농업 정착촌과 협동조합, 각종
산업시설과 금융기관, 노동조합과 정당, 행정조직들을 활발하게 건설함으로써
실질적인 국가체계를 갖추어 나갔다. 과격 시온주의자들은 비밀리에
군대조직까지 만들었다. 그러자 아랍인들은 시온주의와 더불어 영국 정부에
대해서까지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도처에서 무장 게릴라가 출현하여 테러를
가했고, 영국을 규탄하는 파업과 시위가 잇달았다. 영국은 이 같은 분쟁에
골머리를 썩이던 끝에 유태인의 수를 제한하고 팔레스타인을 유태국가와
아랍국가로 분할하는 중재 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유태인 지도자들은
이를 거부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전역이 유태민족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메시아 사상을 내세운 것이다.
건국인가 침략인가
1945년 3월, 이집트. 사우디 아라비아.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예멘
등 아랍국가의 대표들이 카이로에 모여 아랍연맹을 결성하고 아랍민족의
상호협력과 결속을 다짐했지만 분쟁에 휘말린 팔레스타인 대표는 참석할 수
없었다. 유태 비밀군대는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입국을 제한한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언했다. 테러와 습격, 맹목적인 보복이 난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넌더리가 난 영국은 이 문제를 국제연합에 떠넘겼다. 1947년 11월,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을 둘로 분리 독립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을 둘로 분리 독립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국제연합은 그
결정을 집행할 힘이 없었고 영국군을 무책임하게도 1948년 5월 15일을 기해
철수하겠다고 선언했다. 두 민족 사이의 유혈투쟁을 불가피해졌다. 영국 군대가
철수하기 전에 한 뼘이라도 넓을 지역을 확보하려고 양측은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아랍 게릴라의 기습과 극우 시온주의
민병대의 잔혹한 보복공격이 몇 달간 이미 팔레스타인을 전쟁터나 다름이
없었다. 특히 유태인 특공대가 한 아랍인 마을에서 254명의 남녀노소를 무차별
학살한 48년 5월 9일의 사태는 전 아랍민족의 가슴에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1948년 5월 15일, 영국군은 마침내 골치 아픈 땅 팔레스타인을 버리고
철수했다. 그리고 같은 날 시온주의 지도자 벤 구리온은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언했다. 이는 아랍민족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었다.
이집트, 요르단 등 아랍국가들의 연합군인 아랍 해방군이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들었다. 제1차 중동전쟁이 터진 것이다. 유태 군대는 훈련이 잘 되고
사기가 높은 데다가 시온주의에 헌신적이었으며 무기 구입과 지원병 모집,
수송과 군가 전술 등 모든 면에서 효율적이고 조직적이었다. 반면 아랍
해방군은 전투경험이 부족한 데다 장교들이 나태하고 부패한 탓으로 사기가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서로 다투는 일이 많아 합동작전을 펼 수 없었다.
이스라엘은 모든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시온주의자들은 우세한 입장에서
휴전협정을 맺어 팔레스타인 유태국가의 수립을 기정사실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일단 만족했다. 그러나 아랍민족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외래 식민주의자들이 자기네의 영토 위에 수많은 동포를 쫓아내고
세운 국가라고 생각했다. 요르단에 46만, 이집트에 20만, 레바논에 12만,
시리아에 8만 등 거의 100만 가까운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침략자 이스라엘을
저주했다. 하루아침에 집과 농토와 생업을 잃어버렸고, 사랑하는 가족의
생사조차 알 길 없이 피난만 신세로 전락해 버린 자신들의 처지를 도저히
'기정사실'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배후에 미국의 검은
손이 작용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스라엘은 벤 구리온과 그가 속한 마파이당의 행정부와 의회를 수립하고
모든 유태인의 이주를 허용하는 '귀환법'을 제정했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귀환 대열이 밀려들었다. 그 결과 전쟁 직전에 65만 유태인과
74만 아랍인이 거주하던 이스라엘 영토에는 1956년에 이르러 167만의 유태인이
살게 되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버틴 아랍인 겨우 2만에
지나지 않았다.
이상은 극히 간략하게 살펴본 이스라엘 건국사, 또는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침략사이다. 이것이 건국사인가 아니면 침략사인가를 둘러싼 논쟁은 그리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석유파동이 일어난
74년 이전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을 편드는 주장만이 판을 폈고 아랍의 처지를
옹호하는 의견을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았다. 이 같은 사태는 한국이
'서방세계'의 일원으로서 특히 외교 면에서 미국의 입김을 결코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국제 여론은 결코 이스라엘에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물론 유태민족이 2천 년 동안이나 극심한 인종차별을 당한 민족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특히 나치 독일이 저지른 대량학살은 그것을 방조하거나 적어도
방관한 유럽의 다른 민족들에게까지 상당한 죄의식을 안겨 줄 정도였다.
유태인이 그 같은 박해를 받아야 할 그 어떤 잘못도 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그러한 인종적 종교적 박해는 전적으로 부당한 것이며, 유태민족이 모든
박해에 저항하여 평등한 민족적 권리를 찾거나 자기들의 나라를 세우려
노력하는 것은 너무나 정당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팔레스타인에 유태국가를 세웠다. 과연 유태민족에게 그럴
권리가 있는가. 그들 조상의 일부가 2천 년 전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땅이기 때문에 그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결코 그렇다고
할 수 없다. 말세가 되면 황금시대가 팔레스타인에서 열리게 될 것이라는
유태교의 종말론적 예언이 그 땅의 소유권에 대한 유태인의 주관적 확신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 는 없다. 더욱이 팔레스타인 땅에 자손을 퍼뜨리고
땅을 경작하면서 나름의 언어와 문화와 역사를 가진 민족공동체를 가꾸어 온
것을 아랍인이었다. 그들에게는 자기네 종교의 메시아적 상상과 예언을 앞세워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온 유태인들은 어디까지나 침략자에 지나지 않았다.
더욱이 시온주의자들은 자기의 불행한 처지와 고난에 대한 호소와 설득으로
협력을 구하지 않고 그 땅에 살고 잇던 원주민을 무력으로 몰아냄으로써
이스라엘을 세웠다. 그 숱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끈질기게 종교와 문화전통을
지켜 온 눈물겨운 과거와 그들이 이룩한 과학기술의 발전, 내게브사막을
옥토로 가꾼 눈부신 업적과 나름의 민주주의가 아무리 훌륭한 것일지라도,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아랍인이 아무리 몽매하고 그들의 정체체제가 아무리
낙후한 것일지라도, 식민주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아랍민중이 나름의 민족
주체성에 눈떠 그것을 수호하려는 열망을 가진 20세기 중반에 유태인이 휘두른
무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더욱이 미국과 영국, 프랑스의 식민주의를 거부한
아랍민족이 유독 이스라엘의 식민주의만을 이해하고 용납할 리는 만무하다.
이런 의미에서 시온주의는 유태민족주의 같지 않다. 시온주의는 다른 민족을
물리적인 힘으로 내쫓고 그 땅에 순수한 유태국가를 수립하려는 침략적
민족주의이기 때문이다. 자기 나라를 세움으로써 수 천 년에 걸쳐 당해 온
박해와 불행을 종식시키겠다고 결심한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에게 그 불행을 고스란히 떠넘기는 방법으로 목표를 달성했다. 만일
이러한 행위가 정당하다면 나치의 유태인 박해 역시 전적으로 나쁜 짓이라고
단죄하기 어려울 것이다.
식민국가 이스라엘이 밀물처럼 밀려든 이민자들을 먹여 살리고 삼면을
포위한 아랍국가들을 꺾어 자기의 존재를 기정사실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을
거의 전적으로 미국 유태인들이 보내 준 성금과 미국 정부의 차관, 그리고
나중에는 독일의 배상금에 힘입은 것이었다. 물론 미국이 시온주의를
의도적으로 조장한 것은 아니지만, 개입과 간섭을 대외정책의 기본으로 삼고
있던 미국은 이스라엘을 아랍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교두보로 이용했다.
때문에 아랍인들의 반시온주의 항쟁은 반미투쟁으로 자연스럽게 나아가게
된다.
팔레스타인문제는 중동 일대 아랍국가 모두의 문제가 되었다. 통일
아랍국가에 대한 강한 열망을 지니고 있던 아랍민중은 이스라엘을 심장 깊숙이
들어와 박힌 제국주의 첨병으로 간주하였으므로 어느 나라의 지도자이든
이스라엘과 타협할 경우 민중의 저항에 부딪힐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반면 이스라엘은 모든 기회를 활용하여 아랍국가들의 기세를 꺾음으로써
유태국가의 토대를 더욱 튼튼히 할 필요가 있었다. 한편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아랍 각국의 혁명세력은 국내의 지배권력을 타도하기 위해
팔레스타인문제를 활용하여 했다. 이리하여 팔레스타인문제는 아랍 진영
내부갈등과 복잡하게 얽히게 되었다.
제2차 중동전쟁, 이른바 수에즈전쟁은 이런 사정을 뚜렷이 드러냈다. 1952년
7월에 혁명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이집트의 나세르는 혁명 4주년을 맞이하여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했다. 수에즈운하에 대해 영국과 프랑스가
보유하고 있던 모든 권리를 박탈한 것이다. 그러자 격분한 프랑스와 영국은
이스라엘과 비밀협정을 맺어 수에즈운하를 탈환하려고 계획했다. 1956년 10월
29일, 이스라엘 군은 갑자기 시나이반도를 가로질러 수에즈운하로 진격했다.
다음날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이집트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운하 입구의 도시
포크사이드를 공격했다. 일주일간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승리했고 이집트는
영토의 일부를 잃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시대착오적인 침략전쟁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고 미국이 막대한 경제원조를 중동에
제공하면서 그 공백을 메꾸었다. 나세르는 전쟁에 지고서도 아랍의 영웅이
되었다.
무기와 올리브 나무 가지
이스라엘이 건국 초기에 부딪친 난관은 주로 인접 아랍국가들의 도전이었다.
그러나 1964년부터는 새로운 사태와 마주하게 되었다. 1월에 열린 아랍
정상회담의 결정에 따라 같은 해 5월 팔레스타인사람들을 대표로 하는
팔레스타인의 유엔 대표로 임명하였으며, PLO는 아랍 전역에 흩어진 난민들을
무장시켜 해방군을 조직했다. 바야흐로 주변 아랍국가들의 시혜와 힘에
의지하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영토를 되찾기 위해 총을 든
것이다. 그러나 PLO의 앞길이 순탄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대부분 군주국가인
아랍 나라들은 이스라엘과 정면충돌할까 두려워 PLO의 군대를 자기 영토 안에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사회주의 국가들과 이집트, 시리아만이 PLO를
지원했다. 지지부진한 PLO의 활동에 분개한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들은 몰래
소규모 테러조직을 만들어 이스라엘에 대한 기습공격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기습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난민촌을 공격했다. 이 같은 사태가
계속 확대 심화되어 갔다.
제3차 중동전쟁은 1967년 6월 5일에 이스라엘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되었다.
6일간의 전쟁에서 아랍연맹은 또다시 참패했고 이집트는 시나이반도를 완전히
빼앗겼다. PLO의 온건노선에 반발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을 비롯하여 수많은 급진적 게릴라조직을 결성하여
이스라엘의 시온주의자는 물론이요, 제국주의에 봉사하는 아랍세계의 수구
집권층, 미국까지를 공격 목표로 삼았다. 68년 7월, 팔레스타인 민족평의회는
아라파트를 제3대 PLO의장으로 선출했다. 70년 9월 아랍 민족주의와
비동맹운동의 기수였던 나세르가 암살됨으로써 PLO는 더욱 불리한 정세에
직면하였다. 사회주의로 기울었던 나세르와는 달리 후임 대통령 사다트는 국유
사업체를 민영화하고 미국에 접근하는 등 우경 화된 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PFLP는 서방 항공기 4대를 유럽 상공에서 납치하여 이집트와 요르단의
사막에서 폭파했다.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던 요르단과 후세인은 즉각
미제 전투기를 동원하여 팔레스타인 게릴라 섬멸작전을 전개했다.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은 동족상잔을 기억하기 위해 좌익 게릴라들은 '검은 9월 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뮌헨올림픽 선수촌 기습사건의 주인공들이다.
사다트는 제3차 중동전쟁 참패를 설욕하고 시나이반도를 되찾는다는 명분을
걸고 1973년 10월 6일 수에즈운하를 건너 이스라엘 기지를 공격했다. 그는
자기 군대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아랍 민중의 정치적 열광을 불러일으키고
싶었던 것이다. 이 전쟁은 팔레스타인문제를 전세계적 긴급문제로 부각시키는
결과를 낳았는데, 다름 아닌 석유 금수조치 때문이다.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사우디 아라비아, 카타르, 아랍 토후국 연방 등 페르시아만 연안 여섯 나라는
석유의 공시가격을 배럴당 70센트 인상했다. 이란을 제외한 다섯 나라는 석유
생산의 25%를 삭감하고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과 네덜란드에 대한 석유
수출을 금지했다. 석유 자원을 무기 삼아 서방세계에 도전한 것이다. 아랍의
힘은 세계를 뒤흔들었다. 닉슨은 계속해서 하루 1천 톤씩 이스라엘에 무기를
제공했지만 아프리카와 유럽, 제3세계 나라들, 심지어는 미국의 오른팔
일본까지도 재빨리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사다트는 3주간에 걸친
이 전쟁에서 부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지난 몇십 년 동안 우리는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벌인 결사적인 테러행위와
그에 대한 이스라엘의 보복 폭격, 난민촌 습격, 학살과 파괴를 수없이
목격하였다. 폭탄을 가득 실은 트럭을 몰고 미군 숙소 건물에 뛰어드는 소녀
테러리스트의 행동은 세계인을 소름끼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75년 이후에는 35만 난민이 거주하는 레바논이 이스라엘 민병대와 게릴라의
군사충돌로 인해 무정부상태의 전쟁터로 변하였으며, 그 상태는 15년이 넘게
계속되었다. 사다트는 1979년 3월에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보증하는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을 체결한 대가로 시나이반도를 되돌려 받았지만
팔레스타인에는 평화가 찾아들지 않았다. 사다트는 아랍 민족주의의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이란. 이라크 전쟁과 페르시아만을 두고 이란과 미국이 벌인 군사 충돌,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략으로 일어난 걸프전쟁 등 큼직한 사건 때문에 한동안
팔레스타인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난 듯 보였다. 1971년 1월 이슬람 승려
호메이니를 앞세우고, 미국 정부와 석유 메이저와 앞잡이처럼 행동했던
팔레비를 몰아낸 이란혁명을 사회주의혁명이 아니라 반미 민족혁명이었다.
그래서 미국 정부는 이란 혁명정부에 이를 갈며 이라크 독재자 후세인을
지원했다. 그런데 그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야심가 후세인은 미국
정부한테서 지원 받은 무기를 들고 쿠웨이트를 집어삼켰다. 기르던 개한테
물린 꼴이 된 미국은 유엔연합국은 이끌고 들어가 이라크 군대를 쑥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후세인은 힘 한번 쓰지 못하고 패전했지만 미국을 혐오하는
아랍 민중에게는 영웅 대접을 받았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보복이 두려워 자기
땅에서 팔레스타인 게릴라를 내쫓은 아랍의 반동적 군주들은 다른 한편으로는
이란과 같은 민족주의혁명이 일어날까 두려워 나라 안에서는 무자비한
독재정치를 실시했다.
이 모든 비극은 본질적으로 시온주의자의 침략과 미국의 제국주의
간섭정책에 대한 아랍 민중의 거부에서 비롯되었다. 아랍민족의 바다 위에 뜬
유태인의 섬 이스라엘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미국 정부의
지원 덕분이었다. 시온주의자들은 선지자가 예언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찾아 팔레스타인에 나라를 세웠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수천 년
살아온 고향이 "피와 눈물이 흐르는 수난의 땅"으로 변하고 말았다.
팔레스타인 난민의 운명과 그 땅에 정착한 시온주의자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무도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 박해가 박해를 낳고 불행이 불행을
부르며 증오가 증오를 일으키고 테러와 보복학살이 꼬리를 물고 되풀이되는
수난의 땅 팔레스타인. 분명한 것은 세계의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과 양심 있는
지식인들이 민족의 자결권과 그리고 고향을 되찾으려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노력을 지지한다는 것뿐이다.
1974년 11월 13일 팔레스타인 게릴라 차림으로 만장의 박수를 받으며
유엔총회 연단에 오른 팔레스타인 행방기구 의장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에서
평화가 이루어지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하면서 미국 국민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팔레스타인 인민의 민족자결을 위한 투쟁은 전세계의 지지를 받아야 하고
무력과 탄압에 의해 강제된 팔레스타인 인민들의 비자발적 유배 상태는
종식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강토와 재산, 그리고 한 민족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되찾고야 말 것입니다.
나는 전세계에 대하여 우리 민족이 우리 자시의 고유한 영토 위에
민족주권국가를 되찾고야 말 것입니다.
나는 한 손에 올리브 가지(화해의 상징)를, 다른 한 손에는 자유를 위한
전사의 무기를 들고 여기에 왔습니다. 내 손의 올리브 가지를 던져 버리지
않게 하십시오. 지금까지 팔레스타인에는 전쟁이 벌어졌지만 그곳에서 평화가
다시 살아날 날이 올 것입니다.
나는 PLO의 공식 대표로서, 또 팔레스타인 혁명운동의 한 지도자로서 현재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모든 유태인, 그리고 팔레스타인에서 우리들과 더불어
평화스럽고 평등하게 살고자 하는 유태인들에게 선언합니다. 내일의
팔레스타인을 위한 우리 모두의 희망을 이야기 할 때 우리는 당신들을
우리들의 전망 속에 포함시킬 것입니다. ... 우리들은 가장 관대한 해결책으로
팔레스타인 단일민주국가를 수립하여 우리 모두가 정의로운 평화 속에서 같이
살 수 잇도록 유태인들에게 권고합니다. 그곳에서야말로 기독교도, 유태교도,
그리고 이슬람교도들이 정의 평등 우애, 그리고 발전하는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혁명운동은 그것이 탄생한 이래 인종적, 종교적 동기에 의하여
고무된 적이 없으며, 팔레스타인 혁명운동의 투쟁 목표는 유태인 개개인의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종차별적 시온주의와 노골적인 침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혁명은 인간으로서의 유태인을 위한 혁명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유태교와 시온주의를 구별합니다. 우리는 시온주의적 식민주의
책동에 반대하지만 유태교의 신앙은 존중할 것입니다. ...
이 위대한 건물(유엔 본부) 앞에서 벌어지고 잇는 적대적이고 호전적인
데모가 과연 미국의 진정한 의견인지 나는 미국 국민들에게 묻고자 합니다.
다시 묻노니, 팔레스타인 인민이 당신들(미국)에 대하여 저지른 범죄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당신들은 우리들과 싸우려 하는 것입니까. 정당화할
수 없는 적대감은 당신들의 이익에 실제로 아무 도움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 나는 미국과 아랍세계 전체 사이의 진정한 우호 관계가 보다 새롭고 높은
차원에서 설정되어야 하다는 사실을 미국인들이 알아주기를 희망할 뿐입니다.
평화와 전쟁의 갈림길
그로부터 19년이 지난 1993년 9월 13일 아라파트는 미국 워싱턴 백악관 뜰에
나타났다. 그는 여기서 '철천지원수'인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과 화해의
악수를 나누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이스라엘 정부가 이스라엘
점령지역인 가자지구와 예리코 시에서 팔레스타인 민족의 자치를 인정하는
평화회담에 서명한 것이다. 이 행사를 이끈 것은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이었고
미국 국무장관과 러시아 외무장관이 증인 자격으로 서명했다.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라파트는 '전사의 무기'를 버리고 '올리브 가지'를 치켜들었다. 암살을
피하려고 매일 잠자리를 옮기며 살아온 이 혁명가를 이제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정치가로 변신한 것이다. 아라파트는 실로 '쓰디쓴 결단'을 내렸다. 2천 년 전
조상들이 살았던 땅이라는 이유로 팔레스타인을 침략한 유태인들은 이 협정을
통해 자기네가 세운 나라를 인정받은 셈이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고향 땅
한 귀퉁이에서 자치정부를 세우도록 허락 받았다." 역시 국제사회에서는 힘센
자가 왕 노릇을 하는 모양이다.
80만 명의 가난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몰려 사는 가자 기구는 이스라엘의
점령에 저항하는 팔레스타인 민중봉기의 중심지인 동시에 해방기구와 그보다
더 과격한 무장투쟁 조직들의 거점이기도 하다. 또한 이곳에서 정착촌을 만든
유태인도 5천 명이나 되는 탓으로 팔레스타인 게릴라와 이스라엘 군대의
유혈충돌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 자주일어나 이스라엘 정부는 골치를 썩이는
터였다. 요르단 강가 유명한 휴양지인 예리코 시는 예수가 기도하는 중 사탄의
유혹을 물리쳤다는 산 가까이 있는 도시이다. 아라파트는 튀니스에 있는
해방기구 본부를 이곳으로 옮길 생각이라고 한다. 예리코 시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장차 경제 재건을 위해 외국자본을 끌어들이는 중심지 역할을 할
것이다.
이 평화협정은 냉전체제가 무너진 상황에서 국제사회의 심각한 분쟁을
협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협정의 산파노릇을 한
사람은 노르웨이 외무장관 요한 외르겐 홀스트였다. 그는 이스라엘과
해방기구의 공식 평화협상이 벽에 부딪치자 말 그대로 "쥐도 새로 모르는
사이에" 양측 밀사를 자기 집으로 불러들여 숙식을 함께 하며 회담을
중재했다. 반세기가 넘게 목숨 걸고 싸운 두 진영 대표들은 이런 과정을 거쳐
서로가 받아들일 수 있는 협정 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점령지에 정착촌을 만들어 이스라엘 영토로 만드는 정책을
밀어붙였지만 국제사회의 따가운 비난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강력한
인티파타(민중봉기)에 부딪쳐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리고 반세기 넘게
군사력으로 나라의 생존을 확보하려고 해보았지만 중동 평화를 파괴하는
효과만 낳았을 뿐 수천 년 박해와 수십 년 전쟁에 시달린 유태인들에게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무력충돌이 되풀이되는 가운데
해방기구보다 더 과격한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 더 큰 힘을 얻게 되자 이제는
대화상대조차 잃어버릴 지경에 빠졌다. 해방기구를 인정하고 타협하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던 것이다.
해방기구도 비슷한 처지였다. 아라파트는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져 외부의 군사지원을 잃어버렸다. 걸프전쟁 때 미국과 싸우는 이라크
지도자 후세인을 지지한 탓으로 인근 아랍국가의 경제원조마저 끊어졌다.
이렇게 되자 조직 내부에서 아라파트의 지도력에 도전하는 세력이 고개를
들었다. 그에게는 땅을 내주어 평화를 얻어 보려는 라빈 수상과 타협하는
것만이 유일한 돌파구였다.
아라파트는 "이 협정으로 한 세기나 계속된 고난과 괴로움이 끝나기를
진정으로 갈망하여 평화와 공존의 시대, 모두가 같은 권리를 누리는 새 시대가
열리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자치협정에 따라 이스라엘 군대는 철수를
시작했고 해방기구는 경찰병력을 만들어 치안을 넘겨받았다. 이스라엘은 감옥
문을 열어 팔레스타인 정치범을 풀어 주었고 수만 명에 이르는 추방당한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용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과도정부로 변신했고 이 협정을 두손들어 환영한 서방 선진국 정부들은
앞다투어 팔레스타인 재건을 돕기 위해 경제원조를 제공하겠다고 나섰다.
이스라엘 정부는 팔레스타인 주변 모든 아랍국가와 평화회담을 맺어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받으려고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에 평화가 왔다거나 올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잇는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 이 땅에 얽힌 문제가 너무나 복잡한 데다 그 동안 치른
희생이 너무나 컸고 쌓인 원한이 너무나 깊은 탓이다. 그래서 화해를 추구하는
라빈 정권과 팔레스타인 과도정부가 과연 험난하기 짝이 없는 갖가지 장애물을
넘어 평화와 공존과 번영의 땅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가장 골치 아픈 장애물은 이스라엘의 과격 시온주의 세력과 팔레스타인의
회교 원리주의 세력이다. 이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상대방과 함께 사는 것을
해결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자치협정을 비난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아라파트를 암살하겠다고 공공연하게 협박한다.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과 민주해방전선 등 급진파는 PLO와는 별도로 수천 명 규모의
게릴라 부대를 거느리고 잇다. 이들은 벌써 이스라엘 점령지구 안에서
자치협정에 반대하는 총파업과 시위를 벌였고 독자적으로 이스라엘 정착촌을
공격하기도 했다. 마약 자치정부가 짧은 시간에 경제를 재건하고 치안을
확립하여 민심을 수습하지 못하면 이들 과격파가 득세하여 자치협정이
무의미해지는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
위험요소는 이스라엘 쪽에도 있다. 정착촌을 건설하면서 민병대를 만든
유태인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데, 1994년 2월 25일 새벽에 일어난 헤브론사원 사건이 그 본보기이다.
요르단강 서쪽 헤브론의 한 이슬람 사원에서 한 유태인 정착 민이 예배를 보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기관총을 마구 쏜 이 사건으로 50명이 넘게
숨지고 수백 명이 다치는 대 참사가 일어났다. 학살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나자 이스라엘 군대는 시위를 진압하면서 팔레스타인 젊은이를 여럿 쏘아
죽였다. 경비를 맡은 이스라엘 군인들이 무장한 유태인이 사원에 들어오는
것을 방관하였다고 해방기구가 강력하게 비난하고 나서 자치협정의 앞길에는
잔뜩 먹구름이 끼었다. 이스라엘 정부가 정착 민들이 자긴 무기를 회수하는 등
몇 가지 조처를 취하여 사태를 진정되는 했지만 과격 시온주의자들이 이런
사건을 벌일 가능성은 변함없이 남아 있다.
팔레스타인 자치협정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지난날의 잘잘못을 덮어둔 채
지금 존재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적응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성립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일단 군사력 행사를 절제함으로써 아랍세계에서 자기의
존재를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가슴 밑바닥에
쌓인 증오와 원한을 푸는 데는 여러 세대가 걸릴 것이다. 그리고 유럽
기독교도들에게 수천 년간 박해와 수모를 당한 불행한 유태민족이 과격
시온주의를 잠재우고 솔로몬과 같은 지혜를 발휘하지 못한다면 이웃과
화해하는 일도, 팔레스타인 땅에서 평화와 안식을 찾는 일도 불가능할 것이다.
@ff
미완의 혁명 4.19
자유의 비결은 용기일 뿐이다
@ff
김주열의 죽음과 3.15 부정선거
낚시꾼은 굉장히 큰놈이 물린 거라고 생각하고 기분 좋게 낚싯줄을 당기기
시작했으나 얼마 후 물위에 나타난 것을 보고 그만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몸이
굳어져 버렸다. 더러운 마산항의 수면으로 떠오른 것은 열 여섯 살 난
김주열이라는 소년의 시체였던 것이다. ... 마산 시민들은 눈앞에 끌어올려진
시신을 보고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AP통신, 1960년 5월 2일'
1960년 4월 11일 오전, 실종 28일 만에 마산 중앙부두에서 발견된 김주열
군의 시신은 눈에서 뒷머리까지 길이 20센티미터의 미제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이었다. 그가 실종된 것은 제4대 대통령 및 제5대 부통령 선거가 실시된
3월 15일이었다.
여당인 자유당에서는 이승만과 이기붕을 정. 부통령 후보로 내세웠고 야당인
민주당은 조병옥과 장면을 후보로 내세웠다. 그러나 선거를 한 달 앞두고
조병옥 박사가 미국에서 위수술을 받던 중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사망함으로써
관심의 초점은 이기붕와 장면이 대결하는 부통령 선거 쪽에 집중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갖가지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경찰과
공무원을 선거운동에 동원하고 군소 정당 후보들의 입후보 등록서류를
강탈하는가 하면 학생들이 야당의 선거 유세 장에 가지 못하도록 일요일에도
등교를 시켰다. 또 70억 환이나 되는 선거자금으로 금품을 물 쓰듯 뿌려대고
야당인사들에게 테러를 가했다.
이런 일들이 진행되는 가운데 2월 28일 대구에서 전국 학생데모의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경북고, 대구고, 대구사대부고 등의 학생 수천 명이 자유당
정권의 횡포에 대해 반기를 든 것이다. 이날 민주당 선거유세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이승만 정권은 일요일 등교를 명령했다. 학생들은 이를 규탄하며
거리로 뛰어나와 경찰과 충돌했다. 나중 이날의 의거를 기념하는 2.28기념탑이
세워진 대구 명덕 로타리에서였다. 이날 이후 부산 동아고. 대전고를 비롯하여
인천. 수원. 마산. 충주. 서울. 포항. 광주 등 전국 각지 중고등학생들이 날마다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공명선거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3월 15일 마침내 정, 부통령 선거 투표 및 개표가 실시되었다. 자유당 정권은
정치깡패들을 시켜 투표소를 습격한 후 투표함을 바꿔치기 하거나 무더기표를
집어넣었다. 곳곳에서 경찰이 야당의 투표 참관인을 폭행하여 쫓아내었고,
행정력을 총동원하여 유권자들을 3일조, 5일조로 짝지어 투표하게 함으로서
야당을 지지하지 못하게 감시했다. 또 대표를 하면서 야당표에 인주를 묻혀
무효로 만들고, 전기를 끊어 놓고 표를 바꿔치기 하는 등 투, 개표 부정이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결과 자유당이 얻은 표가 전체 유권자의 수보다
더 많이 나오자 개표 결과를 조작하여 이승만, 이기붕이 80%이 지지를 받은
것으로 발표했다.
민주당은 이날 오후 "3.15선거는 불법, 무효임"을 선언했고 마산에서는 제1차
데모가 일어났다. 수천 명의 마산 시민들은 저녁 7시 30분 경부터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면서, 민주당으로 당선된 후 자유당으로 넘어간 허윤수
의원의 집과 자유당 마산시당부 등에 돌을 던졌다. 이때 경찰이 군중에게 칼빈,
M1, 권총, 기관단총 등을 막 쏘아 16명이 죽고 72명이 다치는 대 참사가
벌어졌다. 그러나 당시 내무부장관이던 최인규는 이 시위가 공산당이 배후
조종했다고 조작하기 위해 죽은 사람의 호주머니에 불온문서를 넣기도 했다.
이 사태로 한국은 세계 매스컴의 초점이 되었으며 4월 11일까지 서울. 부산.
진해 등에서 간간이 시위가 일어났다. 그런데 3월 15일 1차 마산봉기 때
행적이 묘연해진 마산상고 1학년 학생 하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주열이다.
그의 시신을 목격한 마산 시민들은 "살인선거 물리치자" "시신을 인도하라"고
외치며 경찰서와 자유당 의원의 집, 시장 관사, 서울신문사 등에 돌을 던지고
서류를 불태웠다. 이날 밤 9시 35분 마산경찰서에서 경찰은 수백 발의 총알을
쏘았고 마산은 다시 한번 피로 물들었다. 두 젊은이가 죽고 수백 명이
중경상을 입은 것이다.
제2차 마산사태는 사흘간 계속되었다. 매일 수만 명의 시민들이 거리를
행진하면서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 "이기붕 죽여라" "협잡선거 다시 하라"고
외쳤다. 마산 시내의 각종 행정사무가 완전히 마비되고 상가는 대부분 문을
닫았으며 부산의 학생들이 데모에 참가하기 위해 마산으로 몰려들었다.
초등학교를 제외한 전국의 모든 학교에 등교중지명령이 내렸고 마산시청의
서류와 기물은 남김없이 파괴되었다.
신도성 경남지사는 국회조사단에게 "마산의 2차 데모는 공산당 수법과
흡사하다"고 말했으며 경찰은 소요 및 공공건물 파괴혐의로 30명을
구속하였다. 4월 15일 이승만은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마산에서 일어난 폭동은 공산당이 들어와 뒤에서 조종한 혐의가 있다고
한다. ... 몰지각한 사람들이 또 선동하여 난동을 하다가 필경 이러한 불상사를
만들어 놓았으니 이것을 우리가 그냥 둘 수는 없는 것이다. ... 난동을 일으켜
결국 공산당에게 좋은 기회를 주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 것이니 이러한 일이
없도록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노력해서 만전을 기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남쪽 끝 항구도시 마산에서 솟아오른 민주화투쟁의 불길은 그냥 꺼져 버리지
않았다. 김주열 군의 죽음이라는 한 점 불씨는 제2차 마산사태를 거치면서
들불이 되어 전국 방방곡곡으로 번져 나갔다.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함성은
소백산맥을 타고 북으로 북으로 올라갔다.
4월 14일 진주시와 진양군의 중고등학생들이 시위를 벌였고, 다음날에는
전주의 민주당원과 부산 동래고교생들의 시위가 있었다. 4월 16일 청주공고생
전원이 청주역 광장에서 "불법선거는 무효다" "경찰의 만행을 쳐부수자"고
외쳤으며 17일에는 인천과 진주, 하동, 창녕 등지에서 민주당원들의 데모가
있었다.
오빠 언니에게 총을 쏘지 마세요
4월 18일은 대학 중에 최초로 궐기한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시위로 유명한
날이다. 부산의 동래고교, 경남공고, 부산공고, 항도고교생 수천 명과 청주의
청주고교, 청주상고, 청주여고생 3천여 명이 거리로 뛰쳐나가 시위농성을
벌였다. 그리고 오후 1시경 4천여 명의 고려대학생들이 학교에 모여 선언문을
낭독한 다음 일제히 스크럼을 짜고 안암교, 종로를 거쳐 아홉 번이나 경찰과
충돌하면서 2시경 국회 의사당 앞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민주역적 몰아내자"
"자유, 정의, 진리를 드높이자"는 플래카드를 걸고, "기성세대는 자성하라"
"마산 사건 책임자를 처단하라" "오늘의 평화적 시위를 방해 말라"고 외치며
연좌 농성하였다.
고대 학생들은 7시경 농성을 풀고 학교로 행진해 왔다. 이때 경찰의
바리케이드 때문에 데모에 합류하지 못했던 수만 명의 시민이 그 뒤를 따랐다.
이들이 청계천 4가 천일백화점 앞을 지날 무렵 그곳에 잠복해 있던 1백여 명의
정치깡패들이 부삽, 쇠갈퀴, 몽둥이, 벽돌 등을 마구 휘두르면서 습격하여 학생
10여 명과 기자 3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학생들은 학교에 도착하여 교수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애국가를 부른 뒤 해산하였다. 이날 고대생을 습격한 깡패들은
반공청년단의 이정재를 두목으로 하는 '동대문 특별 단부'라는 이름의
조직폭력배들이었다.
4월 민주혁명의 과정에서 가장 치열한 시위와 잔인한 총격, 참혹한 유혈과
죽음으로 얼룩진 날이 4월 19일이다.
긴 칠흑과 같은 밤의 계속이다. 나이 어린 학생 김주열의 참시를 보라!
그것은 가식 없는 전제주의 전횡의 발가벗은 나상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저들을 보라! 비굴하게도 위하와 폭력으로 우리들을 대하려 한다. 우리는 백
보를 양보하고라도 인간적으로 부르짖어야 할 같은 학구의 양심을 강렬히
느낀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임을 자랑한다. 일제의 철퇴 아래
미칠 듯 자유로 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형들과 같이!
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영원한 민주주의 사수파는
영광스럽기만 하다.
보라! 현실의 뒷골목에서 용기 없는 자학을 되씹는 자까지 우리의 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자유의 비밀은 용기일 뿐이다.
우리의 대열은 이성과 양심과 평화, 그리고 자유에의 열렬한 사랑의
대열이다. 모든 법은 우리를 보장한다.
(서울대학교의 선언문)
서울대학생들은 이렇게 선언하고 국회의사당 앞으로 뛰어 나갔다. 서울 시내
중심가 일대에는 건국대, 동국대, 서울사대, 서울의대, 약대, 고려대, 중앙대,
연세대, 성균관대, 경희대, 단국대, 국민대, 한양대, 대광중고, 동성고,
흥국(지금의 동국)중고, 강문중고 등 십만을 헤아리는 학생들이 운집하였다.
"이놈저놈 다 글렀다. 국민은 통곡한다" "빼앗긴 민권을 도로 찾자" "썩은 정치
수술하자" 국회의사당, 중앙청, 경무대, 이기붕의 집, 동대문, 종로와 혜화동 등
곳곳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함성이 터져 올랐다.
경무대와 이기붕의 집, 각 경찰서에서 경찰은 시위군중에게 총격을 퍼부었다.
오후부터는 학생과 시민이 합세, 백차와 소방차를 탈취하여 차량시위를 벌였고
40여 군데 파출소를 불질렀으며 문교부. 부흥부, 중앙청 등 행정관청을
파괴하는 등 사태는 걷잡을 수 없니 악화되어 갔다. 대광고, 동성고, 흥국중고,
양정중고, 휘문중고, 강문(지금의 용문)중고 등 시내의 거의 모든 중고등학교가
일제히 궐기하는가 하면 부산의 경남공고, 부산상고, 데레사여고, 광주의
대부분의 고등학교, 청주농고, 인천공고, 경북대학교 등 지방도시의 학생,
시민들도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날도 경찰 발포로 모두
1백15명이 숨지고 1천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오수 1시를 기해 마침내 계엄령이 선포되고 전국에 임시휴교령이 떨어졌다.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학생에 대한 보복금지를 약속하고 평화적인 시위자는
폭도가 아니라고 말했다. 계엄군은 총을 쏘지 않았고 송요찬 장군은 숨진
학생의 시신 앞에 경의를 표했다. 사태는 일단 수습되는 듯했다. 서울시경은
7백4명의 연행자 중 6백67명을 석방했다. 시위는 계엄군에 의해 거의
진압되었으나 인천. 수원. 대구. 전주. 이리. 임실. 광주. 군산. 포항 등지에서는
시위가 계속되었다. 국민들의 요구는 4월 19일을 전후하여 "부정선거 다시
하라"에서 "이승만 정권 물러나라"로 바뀌었다. 이승만은 이기붕과 자유당에
책임을 돌리기에 급급했고 이기붕은 부통령 당선을 사퇴하였다.
서울시내 대학의 교수 2백 58명이 25일 서울의대 도서관에 모였다. 이들은
시국선언문을 발표한 다음 태극기와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민의 열렬한 환영과 박수갈채를 받으며 종로를 거쳐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였다. 인산인해를 이룬 시민들과 더불어 이항녕 교수가 14개항으로 된
시국선언문을 낭독하였다. 그리고 정석해 교수(연세대)의 선창으로 만세삼창을
한 후 해산하였다. 한국 최고의 지성인으로서 국민들로부터 더할 나위 없이
깊은 신뢰와 커다란 존경을 받던 대학교수들의 시위는 국민들에게 큰 힘을
주었다. 교수들은 전국 학생들의 데모가 공산당의 조종이나 사주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부정과 불의에 항거하는 민족정기의 표현이라고 했다. 그리고 부정
축재자와 3.15부정선거를 조작한 주모자와 발포 책임자 및 하수인을 처벌하고
정, 부통령 선거를 다시 해야 하며, 학원의 정치도구화를 배격하고 구금학생을
모두 석방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학생들에게는 학업의 본분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하였다.
여기에 자극 받은 시민들은 오후 7시 반, 통행금지를 알리는 사이렌을
신호로 세종로에 집결하여 철야 시위하면서 임화수, 이정재 등 정치깡패들의
집을 부수고 이기붕의 승용차를 탈취하였다. 이때 이기붕의 집에서 실탄사격을
하여 다시 수십 명이 살상 당하였다(이기붕의 집은 서대문 적십자병원 옆의
4.19도서관 자리에 있었다. 후에 그 집을 헐고 4.19 기념관을 세운 것이다).
경무대 등 일부 지역에서는 탱크가 출동하였다. 계엄사령부는 구속 학생
전원을 석방하였으며 미국대사 매카나기는 이승만을 만나, 예정되어 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한국 방문을 취소하고 미국이 원조를 중단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하였다. 뉴욕, 워싱턴,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동경, 오사카
등의 해외동포들도 이승만 정권의 만행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승만
정권은 이제 막다른 골목까지 몰리게 된 것이다.
마침내 운명의 날이 왔다. 이날 아침 7시부터 3만여 명의 서울시민들이
이승만의 하야를 요구하면서 계엄군의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를 누볐다.
시민대표들은 이승만과 면담하여 하야를 요구했다. 시위대는 이기붕의 집을
부수고 가구를 불태웠으며 파고다공원에 있던 이승만 동상을 끌어내렸다. 또
시민들에게 실탄사격을 하여 수십 명을 살상한 동대문 경찰서를 불태웠다. 3.15
부정선거의 원흉 중 하나인 당시 내무부장관 최인규의 집도 불길에 휩싸였다.
수송초등학교 생들을 중심으로 한 어린이들도 "오빠 언니에게 총을 쏘지
마세요"라고 호소하며 애절한 데모를 벌였다.
한편 대구시민들은 28군데 파출소와 자유당 간부의 집을 파괴하였고 포항,
울산, 밀양, 김천, 안동, 상주, 경주 등지에서도 자유당, 반공청년단, 서울신문사
지국 건물이 파괴당했다. 목포에서는 3만 명의 학생, 시민들이 시위를 벌였고
5만 명의 부산시민들은 도청을 점령하고 자유당 지부 7군데와, 40여 군데
경찰서와 파출소를 파괴하고 불태웠다. 전국 방방곡곡이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는 함성으로 들끓었다. 이날 시위에서는 24명이 숨지고 수백 명이
다쳤다.
오후 1시, 드디어 대통령의 하야 담화가 전국에 녹음 방송되었다. 학생, 시민,
계엄군이 하나로 어우러져 환호성을 올렸다. 이 위대한 민주혁명의 승리에
너나없이 하나가 되어 기뻐했다. 이 순간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국회는
3.15 선거가 무효라고 선언하고 개헌과 총선거 실시를 내용으로 하는 시국수습
안을 제시하였다. 국립방송은 '해방의 노래'를 방송하며 4월 혁명을 힘찬
어조로 찬양하였고 방송인들은 편파보도 거부를 결의했다. 시인들은
민주혁명의 승리를 노래했고 온 나라가 새로운 희망으로 들떴다. 3.15 부정선거
관련자들과 노동조합의 어용간부, 발포 책임자들이 쫓겨나거나 구속되었다. 온
국민의 원성을 산 이기붕 일가족은 온갖 악행을 일삼아 온 아들 강석이 쏜
총으로 집단 자살하는 비극적 종말을 맞았다.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옮겼는데 국민들은 어제의 원한을 잊고 그의 마지막 결단에 박수를
보냈다. 학교에서는 학도호국단이 폐지되었고 자율적인 학생회가 조직되었다.
석 달 후 총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민주당은 대통령에 유보선,
총리에 장면을 선출하여 제 2공화국을 수립하였다. 1백86명이 생명을 바치고
6천 명이 피를 흘린 대가였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4월 혁명은 단지 부정선거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 3.15 부정선거는
민중의 저항이 폭발한 계기에 불과하였으며 김주열의 죽음은 그 뇌관 역할을
했을 뿐이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민중의 불신과 불만은 더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은 일찍이 미국에 머물면서 외교를 통한 독립을 추구하여 미국 정부에
청원서를 넣으며 소일했던 2류 독립운동가였다. 미, 소가 38도선 남북을 각기
점령하고 동서 양 진영 사이에 냉전이 시작되자 그는 외교론자답게 냉전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 주장을 들고 나왔으며 강대국의
신탁통치 안에 반대하는 반탁운동을 이용하여 일약 민족지도자로 부상하였다.
간도와 만주에서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일본제국주의와 싸워 이기려는
무장투쟁이 전개되고 있던 시기에 재미동포들이 모은 성금으로 자파 세력을
확장하는 데 몰두했던 인물답게, 이승만은 귀국 후에는 친일 지주와 일제에
복무했던 일본군, 관리, 경찰 출신을 주위에 불러모았다. 백범 김 구 선생은
스스로 임시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철했지만 이승만은 대통령직이 아니면
임시정부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했을 정도로 권력 지향적 인물이었다. 그래서
단재 신채호 같은 철저한 민족주의자는 이승만의 사대주의적 청원운동을
경멸하면서 임시정부와 모든 관계를 끊었다. 그가 남한만의 단독선거
단독정부를 주장했을 때 백범은 "삼팔선을 베고 죽을지언정" 남북 분단을
용서할 수 없다며 남북을 오가면서 협상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해방이 되면서 달아났던 매국노들은 남한에 반공정부를 세우려는 한 가지
목표에만 집착한 미군정의 정책에 따라 모두 제자리에 돌아왔다. 일본
특별고등계(사상문제 담당) 형사 출신들은 경찰 수뇌부를, 일본군 출신들은 군
지도부를, 친일 관료 배들은 행정조직을 점령했고, 천황 숭배에 앞장섰던
교육관료들이 학교를 차지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천황의 충복'임을 자랑하던
자들이 하나같이 '반공투사'라는 허울을 쓰고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토지개혁으로 땅을 잃을까 두려움에 떨던 친일 지주들에게도 미군정과
이승만은 구세주였다. 철저한 반공주의자 이승만은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반공정책을 충실하게 수행할 대리인으로 손색이 없었다. 이승만은 겉으로는
극단적인 반일주의를 내세웠지만, 국회 결의로 친일 매국노들을 처단하기 위해
결성한 '반민족행위 조사 특별위원회(반민특위)'를 불법적으로 해산시킴으로써
매국노들을 모두 하수인으로 끌어들였다. 비민주적인 군대 규율과 부정부패,
경찰의 상습적인 고문과 인권유린, 국민을 통제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행정조직의 관료주의, 교육기관의 어용성 등 비민주적인 제반악습은 모드 이
같은 과정에서 온존된 일제의 유물인 것이다. 이승만은 매우 호전적인
북진통일론을 주창하면서 "3일이면 평양을 점령한다"고 큰소리를 쳐댔지만
북한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고 6.25가 터지자
불과 며칠만에 수도 서울을 내주었다. 또 "아군이 반격중이니 안심하고
있으라"는 녹음 방송을 되풀이하면서 자기들만 피난한 다음 북한 군대의
추격이 두려워 한강교를 폭파함으로써 수많은 시민들을 빠져 죽게 하고 서울을
아비규환에 빠뜨렸다.
일본군 장교 출신들이 지배하는 군대의 부패는 극에 달하여, 1.4 후퇴 당시
급조한 국민방위군을 후송하면서 까지도 군 예산을 착복함으로써 수천 명의
장정들이 굶어 죽고 얼어죽고 병들어 죽었다. 아무 죄도 없는 경남 거창의
남녀노소 수백 명을 골짜기에 몰아넣고 학살한 다음 공비소탕 전과로
보고하는가 하면, 진상을 조사하러 내려간 국회의원들에게 인민군 복장을 입은
국군 병사들로 하여금 총격을 가하게 하여 조사를 방해하기까지 했다.
'사바사바'가 횡행하여 특권층의 자식들은 마음대로 병역을 기피했으며,
농림부와 은행들이 착복과 부정대출로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가 2백만의
실업자가 거리에 흘러 넘쳤고 농민들은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해 부황이
들었다.
뿐만 아니었다. 자유당이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한 종신집권을 위한
개헌안을 국회에 냈다가 1표 차로 부결되자, 이틀 후에 사사오입9반올림)으로
통과된 것으로 선포하는 웃지 못할 희극을 연출하는가 하면, 정부를 비판한
대구매일신문을 어용 깡패들이 습격하자 "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며
그것을 옹호했다. '백골단' '땃벌떼' 등의 깡패집단을 육성하였고, 허황한
북진통일론에 반대하여 '남북한 총선거에 의한 평화통일' 안을 내놓은(이는
지금 대한민국정부의 통일정책과 비슷하다) 죽산 조봉암을 북한 간첩으로 몰아
죽이고 진보당을 해산시켜 버렸다. 한편 일본인이 버리고 달아난 토지와 공장,
각종 재산을 그것을 관리하던 한국인 하수인들에게 넘겨주거나, 터무니없이
싼값에 불하함으로써 권력자들은 천문학적인 액수의 뇌물을 착복했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야당의 집회와 활동은 모두 좌익으로 몰아 탄압하였다.
이 같은 이승만 정권의 행패를 대변한 것이 소위 '가짜 이강석 사건'이다.
강성병이라는 상습 사기꾼 청년이 이승만의 양자이자 이기붕의 아들인
이강석을 사칭하여 전국 주요 관청과 기업체를 찾아다니면서 고관대작과
재벌들에게 호화판 향연과 뇌물을 받았다. 내노라 하는 고관대작과 재벌들은
이강석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기 무섭게 앞다투어 달려가 갖은 아부를 다했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명령으로 암행어사로 나섰으니 나를 보았다는 말을
절대 퍼뜨리지 마시오"라고 엄하게 분부했다. 한 민완기자가 추적하여 폭로한
이 사건은 이승만 정권에 대한 온 국민의 경멸과 조소를 불러일으켰다.
3.15 부정선거는 이 같이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발악이었으며, 4월 혁명은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무능, 독재, 가난과 불평등에
대한 민중의 항거였다. 그 항거가 부정선거를 계기로 폭발하여 민주혁명으로
승화한 것이다. 그러나 이 혁명은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이승만 정권보다 더 혹독한 독재정권이 들어섬으로써 4.19 정신이
모두 짓밟혀 버렸기 때문이다.
4월 혁명은 정의로운 학생들의 가두시위에 시민들이 동참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학생들은 그저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끓어오르는 정열만 있었을 뿐
새로운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주체는 아니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후원을
받아 정권을 잡았고 미국의 비호와 원조가 있었기 때문에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주한 미국대사 매카나기가 이승만의 사퇴를 종용한 것은 한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더 이상 그처럼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인을
가지고서는 한국에서 미국의 정책--강력하고 안정된 반공정부의 유지--을
집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4.19의 주역들은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에 감사의 꽃다발을 걸어 놓을 정도로 한미관계의 실상에 어두웠다.
국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의분을 못 이겨 학생들에게 호응하기는
했지만 눈앞에 열린 민주주의의 새 길을 밟아 나갈 강력한 조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교사조직과 노동조합에서 농민단체에 이르기까지 당시 존재하던 모든
조직은 어용조직이었기 때문이다. 민주당 역시 친일파 지주들에게 뿌리를 둔
보수야당으로서 신구파로 갈라져 권력투쟁을 일삼았을 뿐, 혁명을 책임지고
완수할 만큼 강력하고 혁명적인 조직은 아니었다. 이승만 정권의 오랜 탄압
때문에 혁신세력은 별 힘이 없었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이 어느 정도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자 각계각층 민중은
빠른 정치적 각성을 이루면서 조직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민주노조를
결성한 노동자들은 어용노총을 배격하면서 자주적으로 결집했고 교사들도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사회대중 당과 사회당을 중심으로 만든
민족자주통일연맹은 즉각적인 남북협상과 외세 배격, 통일 협의를 위한 남북
대표자회담을 제의하고 중립화 통일 주장했다. 혁명의 주력인 대학생들은
"모든 형태의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민족 주체세력을 총집결하고 내외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적절한 시기에 서신왕래와 인사교류 및 기술협정 등 단계적
남북 교류를 단행할 것"을 주장했으며, 전국 17개 대학 학생대표가 모여
결성한 민족통일 전국학생연맹은 남북 학생회담을 5월에 열자고 제안했다. 5월
13일에는 민족자주통일연맹과 통일사회당 등의 혁신정당이 이 제안을 지지하는
통일촉진궐기대회를 열어 통일운동을 대중화시켜 나갔다.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남북 학생회담이 며칠 앞으로 박두했다. 4.19는
이승만의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주의 운동으로 출발했으나 민주당 정권이
수립된 후에는 우리 민족 최대의 고통인 분단을 극복하는 통일운동으로 나아간
것이다.
국내 보수세력과 미국은 이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만일 중립화통일운동이
국민들의 마음을 얻게 되면 분단을 존립 조건으로 하는 군부의 기득권과
아울러 남한의 반공정권을 유지하여 극동의 냉전체제를 강화하려는 미국의
아시아정책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5.16군사쿠데타가 터졌다.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정치장교들이 민주당
정권의 무능과 사회혼란을 틈타 4.19이전부터 준비해 온 군사쿠데타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민족통일운동은 물론이요, 민주주의운동마저 총칼과 탱크의
캐터필러에 찢겨 짓밟히고 말았다. 그리고 그 후 30여 년 동안 대통령의
이름만 몇 번 바뀌었을 뿐 포악한 군사정권이 한국사회를 지배했다.
미완성 혁명 4.19
4월 혁명은 '실패한 혁명'이 아니라 '미완의 혁명'이다. 4월의 주역들이
숱하게 변절하고 좌절하여 군사정권에 빌붙거나 체제에 적응해 버렸지만
해마다 4월이 오면 수유리 묘지에 수천 수만의 참배 객이 모여들어 최루탄
가스를 마셔 가며 "4월 정신 계승하여 민주주의 이룩하자!" "독재지원 미국
반대!"라는 구호를 외친 것이 바로 어제까지의 일이었다. 이런 점에서 4월
혁명은 아직도 진행형의 혁명이며, 87년 6월 민주항쟁도 4월 정신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문민정부임을 내세우는 김영삼 대통령이 4.19묘지를 참배하고
그곳을 새로 단장하도록 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비록 미완성의 혁명이라 하더라도 4.19는 세계사를 빛낸 혁명으로서
부족함이 없다. 일찍이 주은래, 유소기 등 청년, 학생들이 주동한 중국의
5.4운동 선언문은 "저 조선 인민을 보라! 우리가 생명의 불이 끊어진 것으로
알았던 조선 인민은 맨 가슴을 펴고 일본제국주의 총칼에 맞서 싸우고 있다.
우리 중국 인민이 조선인들보다 비겁하고 무력하단 말인가! 조선인을
본받아라! 일어나자, 중국의 혁명을 위해!"라고 절규한 바 있다. 그 위대한
3.1운동이 있은 지 40년만에 우리 민족은 4.19로 다시 한번 전세계에 민족의
기개를 과시한 것이다. 터키청년, 학생과 시민들은 4월 혁명을 숨죽이며
지켜보던 끝에, 4월 28일 독재자 멘델레스를 축출하기 위한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다. "우리국민의 긍지와 자부심이 한국 국민들보다 어찌 못하랴!" 그들은
이스탄불 거리에 나타난 계엄군 탱크 앞에 연좌한 채 한국 학생들의 거룩한
희생을 찬양하는 구호를 외쳤다(AP통신, 4월 28일). 일본의 "요미우리 신문"은
"한국의 제 2해방을 ... 우리는 환영한다"고 보도했다. "한국에 민주주의가
꽃피기를 희망하기보다는 쓰레기통에 장미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편이 낫다"는
악담을 퍼부었던 영국 언론도 경의를 표했다. "마치 이 나라가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1945년 8월 15일과 같았다. 스스로 자유로운 몸이 된
것이다. ... 역사적인 지난 한 주일은 외국의 비평가들이 생각했던 것과 달리
한국인이 자유정부를 향유할 자격을 가지고도 남음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런던 타임즈", 4월 27일). "나는 최근 한국 학생들의 행동이 보여 준
바와 같은 그 고귀한 정신과 그들의 용기, 그리고 애국심에 크나큰 존경심을
품고 있다. 나는 프랑스 국민의 축의를 한국 국민에게 전하고 싶다"(5월 10일
드 브레 파리시 의회 의장의 성명).
4월 혁명은 드골 정부를 주저앉힌 프랑스 학생운동과 미국 대륙을 휩쓴
대학생들의 베트남 전 반대운동 등 세계 각국을 휩쓴 학생운동의 서곡이었다.
그러나 일본, 미국, 프랑스 등 다른 모든 나라의 학생운동이 70년대에
들어오면서 잦아든 데 반해 한국의 학생운동은 70년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폭과 깊이를 달리하면서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이는 우리
국민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이라는 4월 혁명의 과제를 아직도 완수하지 못한
때문이다. 그래서 4월 혁명은 지금도 진행형의 역사로 남아 있다.
@ff
베트남전쟁
골리앗을 구원한 현대의 다윗
@ff
베트남은 인도차이나반도의 등뼈 격인 안남산맥을 경계로 라오스,
캄보디아와 접하고, 북으로는 중국의 운남성, 광서성과 이웃하고 있는 그리
크지 않은 가난한 나라이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이 나라는 운남성에서
흘러드는 송코이강 하류 델타지역 통킹과 안남산맥 동편의 안남, 그리고 남부
메콩강 하류 평야지역인 코친차이나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인구 3천만밖에
안 되는 이 나라가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 기나긴 싸움을 벌인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골리앗 미합중국 군대는 피투성이가 된 채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성조기를 들고 참가한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것은
한국전쟁에서의 무승부뿐이었던 미국 군대가 역사상 첫 패배를, 그것도 지극히
뒤떨어지고 가난한 약소국에게 당한 것이다. 더군다나 미국은 동정을
받기는커녕 국제사회에서 비난과 조소의 대상이 되었고 이 전쟁이 절정에 오른
1960년대 말에는 첨예한 국론분열과 사회적 대립으로 남북전쟁 이후 가장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빠지기까지 했다.
어떤 이는 베트남전쟁을 현대 인류의 양심을 시험한 전쟁이라 한다. 어째서
그런가? 그리고 '현대의 다윗' 베트남 민중의 '람보'의 모습으로 재현된 바 있는
골리앗 미국 군대를 꺾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며, 그들은 어째서
'자유세계의 경찰'을 자처한 미국 군대를 상대로 목숨 건 싸움을 해내지 않을
수 없었던가? 미군을 따라 베트남에 군대를 보낸 한국과 베트남이 정식 국교를
맺은 오늘날 이 문제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골리앗의 침략, 통킹만사건
월남정책 수립을 위한 조사 연구에서 시작하여 정책 결정의 핵심적인
지위까지 올라갔던 다니엘 엘즈버그는 전쟁이 본격화한 직후 "뉴욕 타임즈"를
국가기밀 누설혐의로 고발했으며 엘즈버그는 정부와 군부, 우익 언론의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연방 대법원은 언론에 대한 사전검열을 금지한 헌법
제 1조를 엄격히 적용하여 무죄를 선고하여 또 한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그 국방성 기밀문서의 내용 그 자체였다. 그것은
미국이 월남전에 개입하게 된 동기와 과정, 그리고 미국이 전개한 월남정책의
잔인성, 반 민주성, 추악성, 기만성을 세계인 앞에 남김 없이 펼쳐 보였기
때문이다. 우선 그 문서가 폭로한 개입의 진상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1964년 8월 4일 오전 미국 대통령 존슨은 "북 베트남 통킹 만 밖 공해를
순찰하던 미국 구축함 매독스호가 북 베트남의 어뢰정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미국 항공모함 탑 재기가 반격을 가했다"고 발표했다. 다음날 미국 공군은 북
베트남 어뢰정 기지와 석유 저장소 4군데를 폭격하고 선박 25척을 격침시켰다.
존슨은 즉각 의회에 '전쟁 권 부여'를 요청했고 의회는 거의 만장일치로 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공식적인 미--베트남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미국이 '북
베트남의 무력 도발'을 '응징'하기 위해 나서자 북 베트남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보였다.
그러나 엘즈버그가 폭로한 국방성 기밀문서는 미국이 북 베트남을 공격하는
구실로 삼은 '통킹만사건'이 완벽한 조작임을 보여 주었다. 미군은 1964년 2월
1일, '34알파작전'이라는 군사작전을 세워 놓고 북 베트남 철도, 교량파괴,
연안시설 포격, 공습, 요인 납치 등 은밀한 공격을 진행시켰다. 그리고 7월
30일 밤, 해군 기습부대를 파견하여 통킹만에 있는 두 개의 섬을 공격한 후
8월 3일가지 해군 구축함을 접근시켜 연안을 포격하거나 비행기로 북 베트남
영토를 폭격했다. 북 베트남 외무부는 이 같은 사실을 공개하고 비난했지만
미군은 이를 '허위조작'이라고 역공했다. 따라서 8월 2일 밤 미국 구축함대가
통킹만에 접근했을 때 북 베트남 군은 이를 미 해군의 본토 상륙이나
공격작전으로 볼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말하자면 미군은 구축함에 대한
북 베트남의 공격을 치밀하게 유도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매독스호가 어뢰
공격을 받았는지조차 사실은 불분명했다. 매독스호 선장은 어뢰정을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8월 2일 밤에 일어났다는 소위 '통킹만사건'을 빌미로 존슨 대통령은
북 베트남에 대한 폭격명령을 내리고 의회에서 전쟁에 대한 백지위임장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국방성에서 5월에 미리 작성해
놓았던 치밀한 사전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이 시나리오에 따르면 미국은 북
베트남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베트남문제 해결을 위한 모든
국제회의와 협상을 반대하거나 지연시키며, 북폭이 시작된 다음에야 전쟁
해결을 위한 국제회의를 소집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행정부에 전쟁
권을 부여해 버린 의회는 이후 행정부, 특히 군부의 음모와 전횡을 제어할
힘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면 미 행정부는 어째서 이 같은 조작극을 벌여 가면서까지 베트남
전쟁에 뛰어들어야만 했을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척 복잡한 베트남
근대사와 중국 공산화 이후에 형성된 냉전체제, 그리고 제 3세계 일반에 대한
미국의 새로운 제국주의 정책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베트남 독립운동의 전통
베트남의 역사적 전통은 한국과 매우 비슷하다. 베트남은 중국과 국경을
접한 탓으로 고대부터 중국의 침략에 자주 시달려 왔다. 한자를 사용하는 등
중국의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베트남이 한족의 침략에 완전히 굴복했던
적은 없었다. 때로 군사적 점령을 당했지만 기회를 봐서 중국 군대를 영토
밖으로 몰아내곤 했다. 따라서 베트남 사람들은 장기간에 걸쳐 형성된 강렬한
민족의식을 지녔고 그들의 역사 속에는 외부침략에 맞서 투쟁한 민족 영웅들이
숱하게 등장한다. 한마디로 그들은 이민족의 침략에 굴복하지 않는 강인한
혼을 가진 민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이라고 해서 19세기에 전세계를 분할 점령한 제국주의의
마수를 피할 수는 없었다. 숙적 영국에게 인도를 빼앗긴 프랑스가 황급하게
기수를 돌려 인도차이나를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침략했을 때
베트남에는 우엔왕조라는 중앙집권적인 봉건국가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자급
자족적인 자연경제의 토대 위에 광업과 수공업, 상업이 미약하게나마 발전하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즉 우엔왕조는 일제 침략기 조선과 비슷한 나라였다.
프랑스는 1847년 천주교 박해와 선교사 살해를 이유로 베트남을 무력
침공했다. 그야말로 교과서대로 한 것이다. 프랑스는 각종 이권을 빼앗고
베트남을 무력 침공했다. 그야말로 교과서대로 한 것이다. 프랑스는 각종
이권을 빼앗고 베트남의 여러 항구를 점령하더니 1883년 군사력으로 왕조를
협박하여 보호조약을 체결하여 베트남을 보호국으로 만들어 저렸다. 그 후
프랑스는 캄보디아와 라오스까지 병합함으로써 인도차이나반도의 절반 이상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베트남은 프랑스의 교활하고 가혹한 식민통치에 편입되었고, 이후
백여 년에 걸친 고난에 찬 민족해방투쟁의 역정이 시작되었다. 프랑스는
베트남의 봉건적 사회에 부분적으로 자본주의를 이식하면서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인도차이나 은행'을 선두에 내세운 프랑스는 온갖 교활한
방법으로 총 경지면적의 20%를 취득했다. 그 땅을 소작시켜 50%가 넘는
고율의 소작료를 받아 내거나 고무, 커피, 차, 면화 농장을 만들어 저임금으로
농민들을 혹사했다. 그들은 이 농산품을 수출해서 재미를 보는 한편 주석,
텅스텐, 아연, 납, 구리, 철 등 풍부한 광물을 무제한으로 채굴했으며, 본국에서
생산하지 않는 담배, 술, 유리, 종이 등을 현지에서 독점 생산하여 막대한
이윤을 거두었다. 이리하여 베트남의 농민과 수공업자, 토착 기업들은 거의 다
망하고 말았다.
또한 프랑스는 중세기의 유물인 인두세를 강화하고 술, 아편, 소름의
소비세를 무겁게 매겨 베트남 민중을 쥐어짰다. 그들은 또한 베트남을
코친차이나, 안남, 통킹으로 분리하여 각각 다른 통치제도를 세움으로써
전형적인 분할지배정책을 실시하고 우엔왕조의 왕족과 관리, 촌락의 장로와
지주, 카톨릭 교도들을 식민통치의 하수인으로 삼아 민중의 반발을 무마했다.
이처럼 제국주의 식민통치와 수탈에 관한 한 영국, 독일, 일본, 미국, 프랑스
등은 나라 이름만 다를 뿐 냉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베트남 민족주의가 그냥 꺾이고 만 것은 아니었다. 보호조약이
체결된 직후, 구 지배계급의 하급관리들이 민중을 규합하여 최초의 항불봉기를
일으켰으며, 전국 각지의 밀림에서 프랑스 군대와 게릴라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또한 각지의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벌인 일종의 '의병운동'도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프랑스의 침략에 대항하여 우엔왕조를 복구하려는
낡은 사상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들은 제국주의 침략을 물리치고
새로운 근대국가를 세울 정치적 전망과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20여
년이나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막강한 신무기를 지닌 프랑스 군대에 끝내 궤멸
당하고 말았다.
20세기에 접어들자 베트남에는 비로소 근대화를 기초로 한 민족 독립을
추구하는 하나의 사상, 운동으로서의 민족주의가 나타났다. 문신(유학자)들이
유럽 자유주의사상에 눈뜨면서 보급하기 시작한 민족주의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아연 활기를 띠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동양의 선두주자'
일본에 유학하였다가 신해혁명과 국민당의 활동에 감화를 받은 혁명적
민족주의자들이 생겨났고, 다른 한편에서는 청년 교육과 농민 계몽에 힘쓰는
온건한 민족주의자 집단이 형성되었다. 특히 혁명적 민족주의자들은 손문의
신해혁명에서 큰 역할을 한 '동맹회'를 본받아 '광복회'를 결성하고 프랑스
총독과 관리, 공공기관에 대한 테러와 파괴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수많은
난관을 무릅쓰고 제 1차 대전을 틈타 세력을 확장했고, 또 농민을 중심으로
천지회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어 형무소와 악덕 관리에 대한 테러를 감행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식민통치를 위협할 정도로까지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1차대전이 끝나자 새로운 세력이 나타났다. 전쟁 중에 병사나
노동자로 유럽에 파견되었던 약 10만의 베트남인들이, 그곳에서 민족주의와
노동조합, 사회주의와 혁명운동을 보고 가슴 벅찬 열망을 품은 채 귀국한
것이다. 이들은 이후 베트남의 민족해방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꾸준하게 계몽운동을 벌여 온 지주, 귀족 출신의 온건한
민족주의자들이 민주주의운동과 정당 결성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
합법운동은 프랑스 총독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난관에 부닥쳤으니 그때가
1920년대 초반이었다. 이렇게 되자 합법운동 지도자들은 식민주의자들과
타협하였고, 이후 인텔리와 청년층 혁명가들 중심의 지하운동 시대가 열렸다.
그리고 이 운동을 지도한 것이 바로 베트남혁명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
받는 호지명이다.
호지명과 베트남민주공화국
베트남의 명문집안 출신인 호지명은 19세에 선원이 되어 세계 각지를
돌아다닌 후 1918년에 처음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차대전이 끝난 직후, 그는
전당포에서 빌린 양복과 모자를 단정하게 차려 입고 윌슨과 프랑스 수상
클레망소, 로이드 조지 영국 수상 등이 모인 베르사유 궁전의 회의실을
기웃거렸지만 이들 강대국 지도자들과 면담하는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다른 '자칭 대표'들과 더불어 '즉시 독립'도 아닌 '베트남인과 프랑스인의 평등',
'기본권 보장' 등의 온건한 요구를 들고 그곳에 갔지만, 결국 제국주의자가
평화적으로 식민지를 포기하는 경우란 없다는 교훈만을 얻은 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배신감과 식민지인의 굴욕감을 가득 안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겨우 스물 여덟 살 먹은 이 청년의 뒷날 자기 나라 군대를
궤멸시킬 혁명지도자가 되리라고는 윌슨도 클레망소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호지명은 자본주의 열강의 번지르르한 말재주에 환멸을 느끼고
프랑스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리고 모스크바 코민테른 대회에 참석하여
베트남해방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프랑스공산당을 엄중히 비판했다.
호지명은 1924년 중국 광동으로 가서 국공합작의 국민당을 지도하던 러시아인
고문 보로딘의 비서가 되어 중국혁명을 몸으로 겪었다. 그는 베트남의 노동자
농민 대중을 민족해방투쟁에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지식인들과 청년들을 대중
속으로 보내야 한다고 판단하고 1925년 '베트남 혁명청년 동지회'를
결성하였다. 그는 광동에서 민중의 민족의식을 높이고 사회주의사상을 전파할
청년 학생들을 교육시켜 국내로 들여보내는 한편, 베트남혁명을 "제국주의와
봉건제를 타파하는 민족해방 민주주의혁명"으로 규정하여 혁명의 진로와
방도를 밝히는 글을 반입시켜 국내의 혁명적 민주주의운동을 사회주의
혁명사상의 영향력 아래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7년 4월 장개석의
쿠데타로 국공합작이 붕괴된 후에는 상해를 거쳐 모스크바로 옮겨갔다. 그는
1930년 2월 3일 홍콩에서 혁명청년동지회의 영향력 아래 국내 각지에서 당
결성을 시도하던 여러 공산주의자 그룹을 규합하여 베트남공산당을 정식으로
창립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당의 앞길은 결코 평탄하지가 못했다. 대공황이 이 낙후한 나라를
덮친 데다가 가뭄과 홍수마저 매년 계속돼 각지에서 농민 폭동과 노동자
파업이 일어났다. 1930년 한 해 동안 일어난 농민 시위는 4백 건, 파업은
98건에 달했다. 공산당은 이 같은 상황을 적절히 활용하여 1년 동안 1천5백
명의 당원과 10만 명의 지지자를 획득할 수 있었다. 식민지 당국은 군대를
동원하여 농민 시위와 파업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1930년 9월 마침내 참다
못한 안남 예안성 농민들이 죽창을 들고일어나 현지 관청을 점령한 후
공산당과 노동자들이 지도를 받아 '인민정권'을 선포하였으니 이것이 베트남
최초의 소비에트 정권이다. '예안 소비에트 정부'는 지주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해서 빈농들에게 나누어주었지만 프랑스군의 공격으로 금방 무너지고
말았다. 공산당과 베트남 농민들은 귀한 경험을 쌓았지만 너무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프랑스 정부는 무자비한 백색테러를 휘둘러 1930~31년 사이에
1만여 명의 '적색분자'를 체포하고 수백 명을 처형했다. 공산당은 중앙위원을
비롯한 간부들이 잇달아 체포되어 궤멸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 같은
혁명투쟁에 깜짝 놀란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에 유학 중이던 허수아비 황제
바오 다이를 귀국시켜 민중의 불만을 무마하려 했다. 그러나 이 시기를
전후하여, 문신들의 항불운동에서 시작한 독립운동의 주도권은 개명한
유학자와 온건한 민족주의자의 손을 떠나 공산당이 지도하는 혁명적 민족주의
진영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공산당은 1935년에 당을 재건했지만 여전히 약체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들은
1935년 코민테른 제 9차대회의 결의에 입각하여 "세계 인민의 가장 위험한
적인 파시스트 제국주의자와 투쟁하기 위해" 사회주의혁명을 잠시 미루고
노동자 농민 이외에도 독립을 바라는 모든 계층과 연합하기로 노선을
바꾸었다. 중국공산당이 그 이전부터 집요하게 추구했던 통일전선전술을
베트남공산당도 받아들인 것이다.
그들은 온건한 요구를 내걸고 각계각층의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항불
선전활동을 정력적으로 벌여 나갔다. 그리고 그때 호기가 찾아들었다
유럽에서는 2차대전이 터지자마자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정복했다.
인도차이나에서는 일본군이 프랑스군을 궤멸시키고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했다.
공산당은 즉각 '불, 일 제국주의 반대'라는 슬로건을 들고 민중을
궐기시켰으며, 패주하는 프랑스군의 무기를 빼앗아 통킹지방의 밀림에서
최초의 유격대를 조직했다. 서로 사우는 두 제국주의 국가를 상대로 한 베트남
민중의 무장투쟁은 여기서 그 본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베트남의
게릴라부대는 우세한 일본군에게 계속 패배를 맛보았다. 베트남공산당은 중국
홍군의 경험 속에서 승리하는 비결을 연구한 끝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인도차이나는 프랑스, 일본 파시스트에 의한 이중의 억압 아래 놓여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는 공산당과 노동자 농민의 당파적, 계급적 이익이 민족의
독립에 종속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독립과 자유를 찾지 못하면 민족
전체가 노예가 되어 당파적, 계급적 이익도 영원히 잃어버릴 것이다."
"각계각층의 민족혁명 세력을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으로 불러모으기 위해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 조직한다."
"'지주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분배'한다는 구호를 철회하고 '제국주의자
및 매국노의 토지를 몰수하여 빈농에게 배분'한다는 구호를 내건다."
"각 분야에서 무장봉기를 준비하여 무장조직의 지도를 강화하고 게릴라
근거지를 건설한다."
이 같은 방침에 따라 결성한 베트민은 노동자 농민은 물론 민족 부르주아와
애국적 지주도 포함하는 민족통일전선 조직으로,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수립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베트민은 각계각층 속에 '구국회'를 결성하고
일본의 패배를 예측하면서 무장봉기를 준비해 나갔다. 일본은 1945년 3월
프랑스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바오 다이 황제를 앞세워 괴뢰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전황은 기울어 패망을 눈앞에 둔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수락한 직후인
8월 13일, 공산당은 일제 봉기를 일으켜 통킹, 안남, 코친차이나 전역을
점령하고 각지에 행정위원회를 설치한 다음 바오 다이를 쫓아내고 호지명을
수반으로 하는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1945년 9월 2일의 일이다.
그들은 "인도차이나에 연합군이 도착하기 전에 일본제국주의와 그 앞잡이의
손에서 권력을 빼앗고 일본군을 무장 해제시켜 나라의 주인으로서 연합군을
맞이하기 위해" 제때 '8월 혁명'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들은 마치 예언과 도
같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우리는 이 독립을 프랑스인이 아니라 일본인의 수중에서 쟁취하였다. ... 우리
인민은 백 년 가까이 우리를 짓눌러 온 압제의 쇠사슬을 분쇄하고 베트남을
독립국으로 만들었다. 우리 인민은 동시에 수십 세기에 걸쳐 이어 온 군주제를
넘어뜨리고 공화국을 건설하였다. ... 제국주의 프랑스와 맺은 모든 조약을
폐기하며 프랑스인이 우리 국토에서 소유해 온 모든 특권을 폐지할 것을
선언한다. 한결같은 의지로 힘을 북돋아 온 베트남 인민은 프랑스
제국주의자의 일체의 침략 기도에 대하여 최후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한다. ...
우리는 전세계를 향해 엄숙하게 선언한다. ... 우리 인민은 자유와 독립을
수호하기 위해 정신적, 물질적 힘의 전부를 다하여 생명과 재산을 지킬 것이다.
돌아온 제국주의--제1차 베트남전쟁
예언은 적중하였다. 북부에는 장개석의 중국 국민당 군대가 진주했고
남부에는 영국 군대가 상륙했다. 한편 베트민은 지방의 행정기관을 계속
강화해서 명실상부한 정부가 되어갔다. 그러나 영국군의 뒤를 따라 쫓겨났던
프랑스 군대가 다시 들어와 "질서 유지를 보조한다"는 명분 아래 재무장을
갖추었다. 9월 22일 프랑스군은 마각을 드러내어 베트민의 남부 행정기관을
점령했다. 베트민은 총파업을 결의했고 사이공 시민들은 봉기를 일으켜
프랑스군과 맞붙었다. 그리고 다음 날 "젖과 꿀이 흐르는 식민지 베트남"을
도저히 잊을 수 없었던 프랑스가 파견한 본국 군대가 상륙하여 봉기를
진압했다. 사이공의 거리에 붉은 피가 흐르자 드디어 베트민과 프랑스의 전면
전쟁의 불붙었다. 나치 독일의 점령군에 항거하여 실로 영웅적인 항쟁을 했던
레지스탕스의 나라 프랑스는 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로 돌변했다. "제국주의에
대항한 장기 저항전쟁", 혹은 "프롤레타리아가 지도하는 농민 혁명전쟁"이라고
하는 베트남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베트남 게릴라는 엄청난 열세에 놓여 있었다. 프랑스군은 유럽 전쟁에서
맹위를 떨친 비행기, 장갑차, 대포를 가지고 왔다. 그러나 베트남 군은 식량과
무기와 탄약을 등에 지거나 자전거에 싣고 다녔으며 무기래야 소총뿐이었다.
프랑스는 개전 초기에 하이퐁항을 폭격하여 6천 명의 사망자가 생기는 대
참사를 빚어냈다. 그들은 베트남 민주공화국인 수도인 북부 하노이시를
습격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베트남군의 전력은 강화되었다. 그들은
점령지역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농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농민들은
정글 속의 게릴라들에게 식량을 가져다주었고 프랑스군이 점령한 도시의
주민들은 약품과 정보와 기계 등속을 끊임없이 공급해 주었다. 침략자 프랑스
군대는 매우 적대적인 주민들에게 포위 당했다. 베트남 군은 밀림 속에서
죽창과 원시적인 함정을 사용하여 침략군을 괴롭혔다. 프랑스군이 비행장을
만들면 그들은 귀신같이 방어망을 뚫고 들어와 활주로를 정확히 폭격하여 망쳐
놓았다. 게릴라들은 소총으로 비행기를 격추하였으며, 적이 전의를 상실했다.
싶을 때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그들은 프랑스군의 봉쇄망과 보급로와
콘크리트 진지를 모조리 쓸모 없게 만들었다. 1949년 6월, 프랑스 정부는
파리로 달아난 바오 다이를 다시 불러들여 사이공에 '프랑스 연방 베트남
왕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세웠다. 최악의 경우 베트남의 절반만이라도 계속해서
지배하려는 흉계였다. 영국과 미국은 프랑스가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
각각 수립한 비슷비슷한 괴뢰정부를 정식 국가로 승인했으며 장개석 군대는
'프랑스를 위해'일찌감치 손을 뗐다. 그러나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베트남 군은 1953년부터 총반격을 개시하여 1954년 봄, 그 유명한 '디엔 비엔
푸'전투에서 프랑스 원정군은 그야말로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프랑스
정부는 군사적으로도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고, 정치적으로도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국내 양심 인들의 평화운동 때문에 곤경에 빠졌다.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눈물을 머금고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은 백 년 전에 "나는 이제 죽지만 나로서는 의무를
다했다"고 유언한 유학자의 저항은 굴복시킬 수 있었지만 "나는 비록 죽지만
살아 남은 동지들이 끝까지 투쟁할 것이다"고 외치며 총살을 당하는 새로운
전사들을 꺾을 수는 없었다. 프랑스는 8년 전쟁 끝에 만신창이가 되어 무릎을
꿇었다. 1954년 7월 21일 베트남 민주공화국과 프랑스는 제네바에서
휴전협정을 맺었다. 프랑스는 휴전선 이남에서 총선거를 실시하겠다고
서약했다. 만약 베트남 전역에서 자유선거를 실시할 경우 호지명이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지도자로 선출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선거는 56년 7월
안으로 실시될 예정이었다. 휴전선은 아무 의미도 없는 잠정적 경계선일
뿐이라고 명시되었다. 마침내 베트남에 평화와 독립, 민주주의가 찾아온 듯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전쟁의 계기에 불과했다. 세계 제일의 강대국이
이미 검은 손을 뻗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트남 민중은 프랑스에 이어
일본제국주의, 다시 프랑스와 싸웠으며, 이제 최강 미합중국과 싸우게 된
것이다.
세계 최강대국과의 싸움--제2차 베트남전쟁의 뿌리
미국이 일으킨 제 2차 베트남전쟁은 1964년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미국이
베트남에 손을 뻗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의 일이며, 제1차 베트남전쟁
시기에 이미 두 나라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괴뢰정부인
바오 다이의 '베트남 왕국'을 1950년 2월에 외교적으로 승인하였다. 그리고
사이공항에 군함을 정박시켰으며 다음해에는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군사고문단을 파견했다. 더 나아가 1953년에는 "자유세계의 방위를 위해" 4억
달러의 전쟁 지원 금을 쏟아 부었다.
미국이 이렇게 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장개석 군대가
패주함으로써 '중국을 상실'한 이후 미국 정부는 반공 히스테리는 걸려있었다.
더욱이 한국전쟁이 터지면서부터 이 히스테리는 매카시즘이라는 일종의 정신병
발작으로 도졌다. '매카시'라는 한 광신적 반공주의자가 행정부와 의회 안에
수백 명의 공산주의자가 암약하고 있다는 아무 근거 없는 정치선동을 한 데서
시작된 이 병은 1950년대 미국사회를 공포 분위기와 반지성적 사상통제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시민이 그 이웃을 적이나 간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살피도록 명령받을 때 그 사회는 벌써 와해의 과정을 걷고 있다"는
양식 있는 이들의 경고에도 불고하고 '빨갱이 사냥'은 미국이 자랑하는 모든
가치와 전통을 짓밟았다. 그것은 "정신과 영혼의 병"이었다. 종교재판의 이단자
탄압이나 히틀러 주의, 스탈린주의, 쿠 클락스 클랜과 같은 사악한 세력을
모조리 합친 병이었다.
33개 주가 법률을 제정하여 교사와 교수에게 충성서약을 하게 했고,
조금이라도 반공주의를 비판하는 책들은 자유주의자의 것까지도 불살라 버려서
도서관과 문화원 서고에서는 읽을 만한 책이 자취를 감추었다. 많은 훌륭한
학자들이 대학과 연구소에서 밀려났고 8백만 공무원과 방위산업체 노동자들이
누군 지도 모르는 밀고자의 말 한마디 때문에 당국에 출두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심지어는 전임 대통령 투르먼이 러시아 간첩을 은닉했다는 혐의로
고발당했고 루즈벨트, 아이젠하워, 케네디도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언론은 비판의 자유를 봉쇄 당했고 대학은 사상과 학문의 자유를 빼앗겼다.
세계 최강 미국은 자기의 엄청난 힘을 스스로의 발전과 창조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반대'하기 위해서만 사용했으며, 수십 만의 젊은이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세계 약소국 민중의 절실한 독립염원과 이상을 짓밟는 데
열을 올렸다. 미국은 매카시즘이라는 광신적 반공주의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모독하고 파괴한 것이다. 미국은 '세계의 경찰'임을 자부하면서 '사탄의 제자'인
공산주의자와 한 오라기라도 관련이 있다고 의심이 들면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개입하고 간섭했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베트남 공산주의자
호지명의 활약을 도저히 묵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단지 심리적인 충동 때문에 미국이 월남전에 개입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거기에는 엄연한 장삿속이 끼어 들어 있었다. 미국은 2차대전 후
막대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사회주의 권을 제외한 거의 전세계에
군사기지를 건설하고 미군을 주둔시키면서 그 나라들을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따라서 베트남이 비록 아무런 경제적 가치가 없다 할지라도
경제적 효용성이 높은 다른 지역을 사회주의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지배권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베트남은 인도차이나와 동남아시아, 나아가
태평양에서 러시아의 팽창을 봉쇄하는 데 필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게다가
베트남은 경제적으로도 매우 쓸모 있는 지역이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1953년에 한 말이 이것을 증명한다.
우리가 인도차이나를 상실한다고 가정해 보자. 몇 가지 문제가 생긴다. 우선
반도의 방위가 어려워진다.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주석과 텅스텐을 잃어버릴
것이다. ... 따라서 미국이 이 전쟁에 4억 달러를 제공하는 것은 토벌 계획이
아니다. 우리는 미국과 미국의 안전, 미국의 힘, 인도차이나와 동남아의
보물창고에서 필요한 물자를 입수할 능력과 관련하여 어떠한 걱정할 만한
사태도 일어나지 않게 예방하는 가장 값싼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다.
더욱 긴밀한 이해 관계를 가진 것은 국방성의 장성들과 군수산업체의
자본가들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평화란 자신의 존립 근거를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어쨌든 전쟁을 벌여야 했다. 매카시즘이 미국 사회를
휩쓰는 상황에서 군부의 발언권은 날로 강화되어 행정부 전체를 쥐락펴락했다.
군수산업 자본가들은 이들과 결탁하여 연방예산을 가져오고 그 대신
젊은이들의 손에 무기를 쥐어 전쟁터로 내보냈다. 그 전쟁의 성격이 어떠하든,
베트남 민중과 미국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죽어가든 그들에게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국방성과 군수산업의 결합체가 배후에서 미국 정부의
정책을 은밀하게 조종했다. 이것이 바로 그 악명 높은 '군산복합체'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미국은 점점 더 깊이 수렁에 빠져 들어갔다. 한편
프랑스군은 총선거 시한을 3개월 앞두고, 제네바협정에 명시한 의무를 전혀
이행하지 않은 채 휴전협정 조인 당자사인 주둔군 사령부를 해체하고 철수해
버렸다. 이것은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이 저지른 가장 큰 배신이었다. 베트남에
독립과 통일을 가져다 줄 전국 총선거가 유산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베트남사태는 더욱 복잡해졌다. 미국은 너무나 명확한 괴뢰정부인 바오 다이를
가지고는 "자유세계의 방위를 위해서"라는 구호를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
프랑스, 일본에 이어 프랑스를 섬긴 외세의 꼭두각시 바오 다이는 새 주인의
마음에 들지 않아 쫓겨났고, 그 대신 미국의 새로운 총아로 떠오른 고 딘
디엠이 원수가 되어 1955년 10월 공화국을 선포했다. 디엠은 '월남의
이승만'으로 미 CIA가 발탁한 인물이었다. 존 F.케네디는 1956년 6월
'미--베트남 친선협회' 연설에서 미국과 디엠 정권의 관계를 부자관계에
비유했다.
우리가 베트남이라는 아이의 실제 아버지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에게 이름을
지어 준 아버지라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그 아이의 탄생에 즈음하여 ... 그
성장을 도와 스스로 장래를 결정할 수 있도록 원조하고 있다.
이리하여 잠정적인 군사경계선이었던 휴전선은 국경선으로 굳어졌고
베트남에는 두 개의 정부가 세워졌다. 제네바협정은 의미가 없어졌고 미국은
남 베트남에 수천 명의 장교를 파견하는 한편 폭이 1백 미터나 되는 활주로용
군사도로와 거대한 군사시설을 지었다. 그리고 남 베트남의 굶주린 민중에게
달콤한 소비재와 팝송, 퇴폐적인 상업문화를 대량 투입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프랑스 대통령 드골의 충고를 무시했다. 드골은 피투성이가 된 프랑스 군대를
철수시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지역에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당신은 끝없는 미로에 빠질 것이다.
민족이라는 것이 한번 눈을 뜨고 궐기한 다음에는 아무리 강대한 외부 세력도
자기의 의사를 강요할 수 없다. ... 당신이 내세우는 이데올로기는 ...
지배욕으로 간주될 것이며, 당신이 반공주의를 내세워 깊이 개입할수록 그곳
민중은 공산주의자를 민족 독립의 기수로 보게 될 것이다. ... 우리는 그것을
싫도록 경험했다. 한마디 더 충고하고 싶은데 아무리 돈과 사람을 쏟아 부어도,
오히려 당신네 들은 그곳에서 밑도 끝도 없는 군사적 정치적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 몸을 가눌 수 없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케네디가 암살된 후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존슨의 특별보좌관으로
베트남전쟁 개입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경제학자 윌트 로스토우의 연설에
따르면 당시의 미국 행정부는 드골의 충고를 전적으로 무시하였다.
어느 사회든지 내부의 혁명이라는 것은 외부의 지원을 받아 이루어지므로
이것을 끊으면 그 힘을 고갈시킬 수 있다. 남 베트남 사태는 북 베트남의
지원과 교사에 의한 것이므로 ... 북 베트남의 공업력을 폭격하여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위협하기만 하면, 하노이의 지도자들은 놀라서 베트콩에게
활동을 중지하라고 명령할 것이다.
남 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의 탄생
그렇다면 미국이 프랑스가 떠난 자리를 차지한 후 남 베트남에서는 어떤
사태가 일어났을까? 미국이 발탁한 고 딘 디엠은 유권자보다 투표자가 많았던
선거에서 98%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으로 들어앉았는데 남 베트남을 철저한
반공국가로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동분서주한 결과, 남 베트남 정권의 멸망을
재촉함으로써 역설적이지만 베트남의 해방에 공헌했다. 그는 '칸라오'라는
5인조 1조 테러조직을 만들어 정부. 군. 야당. 사회단체 각 분야에 침투시켜
사찰. 음모. 테러를 감행했다. 카톨릭 교도로 구성된 이 조직은 특히 불교
탄압으로 악명을 드높였다. 디엠은 또한 치안 유지법을 제정하여 모든 형태의
반정부운동을 무차별 탄압했다. 디엠 정부는 46만 헥타르의 토지를 몰수하고
프랑스인 소유 25만 헥타르를 돌려 받았는데 그중 25만 헥타르만 농민에게
분배하고 나머지는 지주에게 넘겨주었다. 그들은 게릴라 지역을 점령하면
빈농의 토지를 다시 빼앗아 지주에게 돌려주는 '뒤집힌 토지개혁'을 실시했기
때문에 농민들의 저주를 받았다. 장교들은 군 예산을 착복했고 관리들은
탈세를 눈감아준 대가로 재산을 모았다. 이 모든 것이 장개석 정권 말기와
비슷했다. 더욱이 디엠 군대 장교들은 대부분 프랑스 식민정부에 복무한
경력을 가진 매국노들이어서 민중의 지지를 받을 수가 없었다.
디엠은 1958년부터 농촌에서 일기 시작한 무장 게릴라 활동을 말살하기
위하여 9천여 군데 '전략촌'을 건설하여 농민을 강제로 집단 수용했다. 그러나
정든 집에서 끌려 나와 포로수용소 같은 전략촌에 수용된 농민들은 더욱 디엠
정부를 혐오하게 되었고, 그래서 애써 만든 전략촌은 농민들이나 '베트콩'이
대부분 파괴해 버렸다. 더욱이 베트민 병사로서 프랑스군과 싸우다가
제네바협정 후 고향으로 돌아온 6천여 명을 색출하기 위해 디엠은
농촌지역에서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감행했다.
이 같은 디엠 정부의 무능한 부패, 전횡과 탄압에 항거하여 농촌에서는
무장투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방어와 자위를 위한 자발적
행동이었지 북 베트남에서 지령한 것이 아니었다. 디엠과 미국 정부는 그들을
'베트콩(베트남 코뮤니스트)'이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대개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디엠 군대와 미군한테서 빼앗은 총으로 무장했고 붉은
깃발이 아니라 나름의 다양한 깃발을 들었으며, '인터내셔널'이 아니라
애국가를 불렀다. 무장투쟁이 점점 확산되어간 1960년, 마침내 남베트남
혁명세력은 '남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하여 전면적인 무장투쟁에 나섰다.
초기 해방전선의 주력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진보적인 지식인과 불교 및
소수 종교단체, 산악의 소수민족이었으며, 해방구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노동조합을 끌어들임으로써 그 사회적 지반을 넓혀 나갔다. 심지어 디엠
정부의 공무원과 군대 내부에서까지 많은 협력자를 확보했다. 해방전선은 중국
홍군이 그랬던 것처럼 세계 전쟁 사에서 일찍이 찾아볼 수 없는 무궁무진
창조적인 전술을 사용하여 디엠 정부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해방전선은 몇 년
안에 남 베트남의 3분의 2를 장악하고 세금을 걷는 '실질적인 정부'로
성장했다.
이리하여 '베트남의 이승만' 고 딘 디엠이 미국의 신뢰를 잃자 63년 11월 돈
반 민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빼앗았다. 그러나 민 역시 불과
2개월만에 또 다른 쿠데타로 무너졌다. 이 같은 군부 쿠데타는 미군이
패주하기까지 몇 번이나 반복되어 구엔 반 티우 정권에서 그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한편 미국은 베트남 주둔 병력을 계속 증강하였다. 59년에 2천 명이던
미군은 62년에 8천, 64년에 3만으로 급증했다. 그리고 남 베트남 정규군은
17만, 경찰은 9만으로 늘어났다. 미군은 1961년 10월부터 1년간 해방전선이
장악한 마을을 5천 번도 넘게 공습했다. 적어도 남 베트남에 관한 한 미국은
통킹만사건 이전에 이미 명백한 전쟁행위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진보적
정치가로서 미국 국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존 F. 케네디는 의원 시절에는
베트남 개입을 반대했지만, 대통령이 되고부터 베트남에 대해 매우 반동적인
침략정책을 실시했다. 그리고 63년 그가 암살된 수 대통령직을 승계한 존슨은
이를 더한층 노골화하였다.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
베트남에서 전면전을 전개하면서 미국 정부는 이를 "북 베트남의
침략으로부터 남 베트남의 민주주의와 자결권을 수호하기 위한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제네바협정에서 베트민과 프랑스군 사이의
잠정적 경계선으로 규정하였던 북위 17도선이 과연 국경선인지, 따라서 그것을
침범하는 것을 '침략'이라 할 수 있느냐는 의문에는 입을 다물었다. 또한 북
베트남 325사단이 남하한 시점이 미군 전투부대가 상륙한 다음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에 대해서도 눈을 감았다. 더욱이 남 베트남에 수립되었던 바오
다이 정권과 군사정권이 과연 보호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민주주의를
실시하는 독립주권국가인지조차 의심스러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으로 참가했던 서방국가들도 이번에는 개임을 거절했다. 따라서 미국은
단독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었으며 한국처럼 미국의 대외정책을 무조건
추종하는 나라들만 병력을 파견했다.
전세계는 숨을 죽이고 이 전쟁을 지켜보았다. 2차대전과 한국전쟁에서
위력을 과시하였고, 그 이후 발전을 거듭한 최신형 무기를 가진 세계 최상의
군대가 인구 3천만의 조그만 민족을 목 졸라 죽이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
미국의 승리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나 사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미 백 년씩이나 제국주의 군대를 맞아 고난에 찬 투쟁을 전개해
온 베트남 민중은 자기 땅에서 벌이는 저항전쟁을 필승으로 이끌 원칙과
방법을 완벽하게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베트남 민중은 세 개의 돌팔매로 미국을 쓰러뜨렸다. 무장투쟁과 정치투쟁,
그리고 적군 설득공작이 그것이다. 그들은 이 셋을 교묘하게 결합하여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을 폐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50만 미군은 5만 한국군과 뉴질랜드. 호주 군대에다 50만 남 베트남
괴뢰군까지 거느리고 북 베트남으로 진군했다. 그들은 B52 폭격기로 북
베트남에 융단폭격을 가하여 하노이 정부가 휴전기간 동안 피땀 흘려 건설한
보잘것없는 공업시설마저 잿더미로 만들었다. 하노이를 비롯한 하이퐁, 남딘 등
북 베트남 경제 중심지는 '석기시대'로 돌아갔으며 민간시설과 학교, 교회,
병원까지도 빠짐없이 공습을 당했다. 미군 비행기는 민간인에게 특히 큰
피해를 입히는 네이팜탄을 대량 투하했으며, 게릴라 근거지를 말살하기 위해
살포한 고엽제와 제초제 때문에 엄청나게 넓은 밀림이 황무지로 변했다. 또한
최루가스탄을 사용하여 부락을 폐허로 만들고 핵심적인 게릴라 지역을
불도저로 밀어붙였다. 그야말로 과학기술 전쟁, 또는 SF전쟁을 감행한 것이다.
그러나 해방전선은 이것을 이겨냈다. 그들은 세 종류의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민병과 게릴라, 지방군, 그리고 정규군이다. 베트남에 상륙한 미군은 맨
먼저 민병과 게릴라들을 만나야 했다. 그들은 도시와 농촌 어디에서나 민간인
속에 섞여 있었다. 게릴라의 기습적인 테러와 부비트랩에 시달리고 난 미군은,
그 다음에 소규모 지방군의 기동적인 기습공격에 넌덜머리가 날 만큼 시달려야
했다. 전쟁의 의미도 모른 채 바다를 건너온 병사들이 "빌어먹을 전쟁!"하고
투덜거릴 때쯤 해방전선 정규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밀림 속에서 정규군의
매복 공격에 걸려 심각한 타격을 입을 미군 주력부대는 신속히 퇴각한다.
그러면 포병과 항공기가 그 지역을 쑥밭이 되도록 두들긴다. 보병이 다시
들어가 보면 진지는 껍데기만 남아 있고 해방전선 병력은 보이지 않는다.
그때쯤에는 신속히 밀림을 빠져 나와 재무장한 해방전선 군대가 후방의
포병부대와 전투사령부, 기갑부대를 전격적으로 기습하여 혼란에 빠뜨린다.
이것이 전형적인 전투 양상이었다. 신출귀몰하게 미군부대 사이를 스며들어와
전후방도 없이 뒤엉켜 기습공격을 벌이는 탓으로 항공기화 포병을 속수무책이
되고 말았다. 전투 거리가 몇십 미터도 안 되는 상황에서 포격을 했다가는
미군까지도 날아가 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해방전선은 땅굴과 죽창, 함정, 벌, 원숭이 등을 교묘하게 사용하여 미군을
혼란에 빠뜨리는 원시적인 전술과 더불어 소련에게서 지원 받은 사거리
10킬로미터가 넘는 로켓포나 모터보트, 바추카포를 동시에 사용했다. 그들은
정글 속에 소형 레이더와 대공화기를 설치해 두고 미군 전투기의 접근을
감시했다. 최고로 숙련된 조종사가 모는 무시무시한 최신형 전투기를 맨발의
민병들이 격추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빈발했다. 민군은 1분에 2천 톤의
폭탄은 퍼부어 북 베트남을 폭격하고 3백억 달러의 전쟁 비용을 투입했지만
전세를 뒤집을 수 없었다. 그들은 군사적으로 철저히 패배했다. 그로 인해
본국의 재정적자는 날로 늘어나 '미스터 전자계산기'로 불렸던 국방장관
맥나마라마저 그 때문에 고개를 내저으며 사표를 던졌다. 물론 1965년 후
3년간 총액 15억 달러에 이른 소련의 북 베트남 원조가 이 같은 승리에 한몫을
한 것을 사실이지만, 미국이 쓴 전쟁비용과 비교하면 해방전선은 자기 힘으로
미군을 이겼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해방전선은 무장투쟁과 아울러 대중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했다. 사실 남
베트남 정부는 정처 적으로 한번도 해방전선과 맞서지 못했다. 바오다이에서
티우에 이루기까지 남 베트남의 최고 지도자들은 모두가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억압하는 프랑스를 위해 일한 자들로 부자와 부패분자, 그리고 미국을 위해서
봉사했다. 민중은 그들을 위해 싸우려 하지 않았으며 그들 스스로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한편 미국의 점령지구에서는 사이공 정부의 관료와 장교, 친미협력자,
인신매매 조직과 마약 상인, 미국 상품 수입업자 등이 점령군에 빌붙어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실업, 인플레, 뇌물수수가 판을 치는 가운데 민중의 기본적
생존권과 민주적 권리를 철저히 억압당했다. 해방전선은 미군 점령지역
민중에게 정치투쟁을 호소했다. 이에 호응하여 미국계 기업 노동자와 부두
노동자, 운수 노동자 등 사이공 시내의 1백 17개 노조가 1966년 말에 총파업을
벌이는 등 노동자들의 파업이 꼬리를 물었다. 청년 학생과 언론인들은
부정부패 척결과 언론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학생과 교수, 승려들이
지도하는 불교도 운동이 불붙었다. 미군 점령지역의 각계각층 민중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투쟁한 것이다. 이 같은 정치투쟁은 사이공 정부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으며 미국 내의 양심인들 사이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1963년 가을 사이공 거리에서 수천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티치 광
둑이라는 승려가 가부좌를 한 태 분신자결한 일은 미국 시민들은 전율케 했다.
자기 나라 군대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베트남에 가 있거니 생각했던 미국
시민들은, 비로소 미군이 무슨 짓을 하기에 저토록 처절한 저항을
불러일으키는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전파를 타고 안방의 컬러 TV 화면에서
펼쳐진 분신 장면은 실로 엄청난 충격이었던 것이다.
이 것은 해방전선의 승리에 큰 기여를 했다. 당시 미군에서는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백인 대학생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이끈 흑인
민주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들은 흑인과 백인간의 모든 법률적 관습적
차별의 철폐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복지정책을 확대하라고 요구했다.
케네디가 빈곤 추장을 선언하고 대대적인 사회복지 예산의 편성을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귀중한 예산이 베트남인의 자주적이고 정당한
요구와 염원을 말살하는 데로 흘러가 버리고, 영문도 모른 채 숱한 흑인들이
베트남의 정글에서 죽어 가는 것을 보고 흑인 민권운동은 양심적 지식인들이
벌이고 있던 반전 평화 운동과 손잡았다. 미국인들이 비로소 매카시즘이라는
반동적 광기에서 벗어나 진실을 불 수 있게 된 것이다. 미국 대통령 존슨은
토마토와 계란세례 때문에 거리에 나갈 수 없게 되었고 곳곳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했다. 베트남전쟁은 미국 사회를 남북전쟁 이후 가장 격렬한
대립과 증오 속으로 밀어 넣었다. 따라서 미국 행정부는 군사적 패배와 함께
닥쳐온 이 정치 위기 때문에라도 베트남에서 손을 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미군의 잔혹한 전쟁행위에 대한 국제적 비난 때문에 지국은
국제사회에서도 점차 고립되고 있었다. 결국 사이공에서 해방전선이 벌인
정치투쟁이 바다 건너 워싱턴의 심장부를 강타한 것이다.
해방전선은 또한 미군에 종속된 남 베트남 정부의 군인들을 설득하여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미군은 점령 구의 청년들을 강제로 징집하였는데
이것은 결국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해방전선은 친척관계나 친구관계를
이용하여 그들과 되도록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결정적인 시기에' 미군에게
타격을 입히고 탈주하도록 설득했다. 해방전선은 그들의 가족을 위해 토지를
정식으로 분배해서 남겨 두었다가 탈주해 오면 그것을 나누어주었다. 이런
이유로 남 베트남 병사들은 매년 10만여 명이 탈주하였고 그중 상당수가
해방전선에 가담했다. 이 같은 설득은 상당한 효력을 발휘하였는데, 예를 들면
1967년 쾅치시 공격 때는 수비대 부사령관이 사령관을 죽이고 성문을 열어
해방전선에 가담할 정도였다. 심야에 경계근무 중이던 베트남인 병사가
기관총을 돌려 잠자는 미군의 진지를 쑥밭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도
수두룩했다. 해방전선은 이 공작을 통해 숱한 정보와 군사기밀을 탐지해서
미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곤 했다. 해방전선은 그들을 변절자라든가 '구제
불능한 반동분자'로 비난하지 않고 넓은 도량과 끈질긴 인내심을 가지고
설득하여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리고 "언제 적으로 변할지 모르는"
보조군대를 곁에 거느리고 전쟁에 이길 수 있는 군대는 없는 법이어서 미군은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다. 호지명이 1952년 4월에 발표한 글에서 한 예언이
그대로 적중한 것이다.
그들이 점령지구에서 청년들을 강제 징집하여 괴뢰군대를 만드는 것은
사람이 배가 고프다고 폭탄을 삼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폭탄이 그들의
뱃속에서 터지는 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다.
미국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미군은 엄청난 비용을 퍼붓고 첨단무기를
들여왔지만 나날이 성장하는 해방전선의 힘을 제압하지 못했다. 미군은 극도로
적대적인 베트남 민간인과 게릴라에게 24시간 포위되어 있었다. 식수조차
필리핀에서 실어 와야 했으며, 베트남인의 손을 통해 들어온 음식은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먹을 것이라고는 통조림뿐이었다. 반면 해방전선은 전투에서
입은 손실을 눈 깜짝할 사이에 복구했다. 수백만의 농민과 노동자, 청년 학생과
지식인, 불교도와 산악 소수민족이 모두 자기편이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보충병을 모집할 수 있었다.
마침내 닉슨은 1970년 "미국의 국력에도 한계가 있다"고 선언하여 전통적인
정치, 군사 간섭정책에서 한 걸음 물러설 뜻을 비추었다. 그는 전후 30여 년간
고집해 온 냉전체제를 일부 포기하고 데탕트(평화 공존)를 추구하여 1972년
중국과 소련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1973년 2월 세계 최강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자랑하는 거인은 만신창이가 되어 보잘것없고 낙후한 약소민족과 협정을 맺고
30년 가까이 욕심을 불태웠던 파란 많은 땅에서 물러나겠다고 약속했다.
통킹만사건에 이은 제 2차 베트남전쟁이 국방성이 만든 치밀한 시나리오에
따른 것이었든 미국은 철수에 대비한 계획 또한 가지고 있었다. 국방성
비밀문서가 그것을 입증한다.
미국의 베트남 개입 목적
(64년 11월 29일, 국방성 비밀문서 제 27호)
1. 침략에 반대하는 보호자라는 명성을 지킨다.
2. 동남아시아에서 도미노 현상을 저지한다.
3. 남 베트남을 '붉은 손'에서 지킨다.
미국의 베트남전쟁 목적
(65년 3월 24일, 맥노튼 국방차관보다 맥나마라 국방장관에게 보낸 "남
베트남을 위한 행동계획")
70%: 미국의 굴욕적인 패배를 저지한다.
20%:남 베트남( 및 이웃 나라들)의 영토를 중공의 손에서 지킨다.
10%: 남 베트남 국민에게 보다 나은 자유생활을 보장한다.
그리고 수락 불가능한 폐해가 남지 않도록 하면서 위기에서 빠져나간다.
그러나 만약 미군 철수를 요청 받을 경우에는 그대로 남아 있기 어렵지만,
우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벗을 돕는 것이 아니다."
만일 최악의 경우 남 베트남이 붕괴 하든가, 그 행동을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어 남 베트남을 버리기로 결정할 경우 이때는 "훌륭한 의사가 최선을 다해
치료했는데도 환자는 죽고 말았다"는 인상을 대외적으로 주도록 노력한다.
("남 베트남 행동계획" 최종각서, 64년 8월 3일, 비밀문서 제 19호)
이처럼 미국은 시종일관 '벗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과 체면을
위해서' 행동했다. 따라서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을 때 일단 병력을
철수시켰다. 1973년 1월, 닉슨은 북 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전면 중지시켰고,
1월 27일 파리에서 미국, 북 베트남, 남 베트남, 해방전선 4자간의 평화협정을
체결한 후 8천여 명의 군사고문만 남기고 베트남 주둔군을 전면 철수시켰다.
그러나 사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미군은 무기와 장비를 지원 받은 사이공 정부는 병력을 증강하여 남
베트남에 남은 북 베트남 군대와 해방전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소규모
군사충돌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미국은 파리평화협정을 위반할 겨우 북
베트남과 해방전선을 강력히 응징하겠노라고 위협했다. 해방전선은 '남 베트남
임시혁명정부'를 구성하였다. 남 베트남의 두 정부 사이에 일어난 공공연한
무력충돌은 점차 내전으로 번져 갔다. 1974년 북 베트남은 사이공 정부가
붕괴하더라도 미국이 다시 개입하지 못하리라는 판단을 내렸다. 왜냐하면
워터게이트사건으로 닉슨 대통령이 사임하는 등정치 불신이 팽배한 데다
실업과 인플레, 석유 위기 등으로 미국도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판단에 따라 북 베트남과 민족해방전선은 75년 3월
11일부터 대공세를 전개하여 사이공을 점령했다. 사이공시는 지도자의 이름을
따라 호지명시로 바뀌었고 곧이어 남북 베트남에서 인구 10만 명당 한 사람을
뽑는 총선거라 실시되어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베트남전쟁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베트남 민중이 프랑스, 일본, 미국 군대와 싸워 독립과 통일을 이루는 데는
백 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세계 현대사에서 이렇게 셋이나 되는 제국주의
나라와 싸운 예는 달리 없다. 스스로 자기 운명을 선택하고 개척하는 것은
어느 민족이나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인데도 베트남 민중은 이 당연한 권리를
찾기 위해 말못할 고초와 희생을 치러야 했던 것이다.
베트남 민중은 "자기 땅에서 벌인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 그들에게 남은 것은 그야말로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북 베트남의
도시와 사업시설을 미군 비행기가 퍼부은 '융단폭격'으로 잿더미가 되었다.
미군이 화학무기를 뿌리고 불도저로 밀어붙인 탓에 황무지로 변한 지역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으며 고엽제 때문에 말라죽은 숲과 그 독성으로 인해 태어난
기형아들은 두고두고 전쟁의 아픈 상처로 남았다. 수많은 애국자들이 죽었으며
팔다리가 잘린 부상자와 전쟁고아들은 지금가지도 그 끔찍한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베트남 사람들이 얻은 것은 민족의 독립을 되찾은 기쁨과 앞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다는 가슴 벅찬 희망뿐이었다. 프랑스와 일본과 미국에
빌붙어 동족을 학대하고 착취한 자들은 쫓겨가는 제국주의 군대를 따라 밖으로
달아났다. 대다수 민중은 '독립과 해방'을 기뻐했지만 이런 사람들은 '나라가
망할 것'을 슬퍼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 자신의 운명일 뿐 그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통인 베트남은 사회주의를 선택했다. 그러나 베트남혁명은 러시아나 동유럽
사회주의혁명과는 전혀 다른 중국혁명과도 같지 않다. 러시아혁명은 제국주의
대외정책을 가진 낡은 봉건국가에서 일어났다. 볼셰비키는 도시봉기를 일으켜
권력을 잠은 다음 내정을 통해 반대세력을 제거했고 그 권력을 지키느라
외국군대와 싸웠다. 동유럽은 나치군대를 밀어낸 소련군이 감독하는 가운데
사회주의체제로 넘어갔다. 중국공산당과 홍군은 일본군의 침략을 배경으로
국민당 군대와 내전을 벌인 끝에 권력을 차지했다. 그러나 베트남혁명은
제국주의 군대를 상대로 한 전쟁 그 자체였다.
베트남전쟁이 19세기의 유물인 제국주의 침략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유럽의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미국 정부가 아무리 사정해도 끼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 정부는 북 베트남이 남 베트남을 '침략'했다는 구실을 달았지만 한국전쟁
때처럼 유엔군을 끌로 들어갈 수 없었다. 오직 한국처럼 미국의 대회정책에
무조건 끌려 다니는 나라만 전투병력을 파견했다.
성조기를 앞세우고 싸운 전쟁에서 져 본 일이 없다는 미국 군대의 오만은
베트남에서 여지없이 깨어졌다. 미국 군대는 전쟁에서 졌을 뿐만 아니라 '옳은
편'에 서지도 못했다. 베트남전쟁은 자기네가 하는 일이 무조건 옳고 또
이긴다는 미국인의 대국주의와 맹목적인 자기 과신에 경종을 울렸다. 그런데
이 패배는 결과적으로 "미국을 이롭게 했다." 미국 군민들이 영국 식민지에서
벗어난 이래 늘 자랑삼았던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다시금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베트남을 침략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조작을 일삼은 군부와
행정부의 범죄행위를 만천하에 폭로한 엘즈버그, "뉴욕 타임즈"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언론자유의 가치를 수호한 연방대법원 판사들, 베트남전쟁
반대를 외치며 거리로 나선 시민들, 감옥 행을 마다 않고 징집을 거부한 젊은
평화주의자들, 미국 정부의 횡포를 비판하여 국제사회에 올바른 여론을
불러일으킨 세계 여러 나라의 양심적인 지성인들, 이 모든 사람들의 노력이
어우러져 미국을 광신적 반공이데올로기와 매카시즘이라는 악령의 손아귀에서
구해 낸 것이다.
베트남전쟁이 끝난 지 20여 년이 흘렀다. 국제사회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는 말마따나 베트남과 미국의 관계는 크게 달라졌다. 미국은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체제가 무너진 뒤에도 베트남에 대한 무역금지조치를
풀지 않았다. 그러나 베트남 정부가 폐쇄적인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문제점을
깨닫고 개혁개방정책을 편 이후 미국기업인과 언론이 베트남과 관계를
개선하라는 압력을 넣자 1994년 초 클린턴 행정부는 마침내 이것을 해제했다.
두 나라 사이에는 이제 미국 기업의 베트남 진출과 전쟁 당시 실종된 미군
유해를 찾는 일을 둘러싼 협상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은 1992년 베트남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도로공사, 전화통시만 설치,
산업기술 이전, 지하자원 개발 등 여러 분야에서 합작이 이루어지고 두 나라
사이의 무역규모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베트남과 대한민국 사이에
드리운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는 아직 걷히지 않고 있다.
얼마 전 대한민국 국무총리가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이영덕 총리는
하노이시 바딘광장에 있는 호지명 묘소를 참배 헌화했다. 그러면서도 베트남
국민들이 추앙하는 호지명의 시신을 둘러보거나 묵념하지는 않았다. 이유는
베트남전쟁에서 숨진 한국군인들을 모욕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전에
외무부장관이 베트남을 찾았을 때도 한가지였다. 우리 나라 외무부장관은
베트남 정부 요인을 만남 자리에서 "냉전시대에 두 나라 사이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난 불행한 과거를 잊고 미래지향적으로 우호협력관계를 발전시키자"고만
했을 뿐 한국 정부가 베트남전쟁에 전투부대를 보낸 사실에 대해 명확한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다.
물론 베트남전쟁은 우리에게도 아픈 기억이기는 하다. 5천 명 가까운
젊은이들이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나라에 가서 아무 원한도 없는 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싸우다 죽었고 10만여 명이 부산을 입었다. 게다가 미군
비행기가 뿌린 고엽제 때문에 뒤늦게 병상에 눕거나 유전병에 걸린
참정군인들도 숱하게 많다. 만약 베트남 참전이 잘못이었다고 한다면 이런
사람들과 가족들은 가슴이 더욱 아플 것이다. 하지만 단지 이런 이유 때문에
베트남 참전의 잘잘못을 덮어두는 것은 결코 떳떳한 태도가 아니다.
"용맹하기로 이름난 따이한 부대"가 그렇게 많은 사상자를 냈다면 변변치
못한 무기를 들고 싸운 해방전선 쪽의 피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게다가 우리
군대와 기업은 한국남자와 결혼해 살던 베트남 여성들을 모두 버려 두고
황급히 빠져 나왔다. "패전하고 떠난 침략군의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아
가며 자란 그 아이들은 이제 성인이 되었고 그 수가 3만을 넘는다고 한다.
베트남 정부에서는 '부끄러운 문제'라며 그 아이들에 대해 한국 정부가 특별한
관심을 갖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처럼 베트남전쟁이 우리에게 아픈
상처를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해자'로서 입은 상처이다.
이 문제를 덮어놓고 한국--베트남의 우호관계를 떠드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동시에 남을 속이는 일이다.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합리화하지 못할 죄악이란
하나도 없다. 뒤에서 살펴보게 되겠지만 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는 일본인의
논리가 바로 그렇다. 조선 침략과 식민지배는 "제국주의가 전세계를 휩쓴
시기에 조선과 일본 사이에 불가피하게 일어난 불행한 일"쯤으로 넘길 수 있고
"좋은 미래를 위해서는 어두운 과거는 빨리 잊어버리는 편이 좋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베트남은 시장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외국 자본을 찾고 있다. 한국
자본도 물론 그 가운데 하나이다. 우린 정부고 과거 경제개발을 위해 일본의
도움을 받으려고 3억 달러 '푼돈'에 일제 침략과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는 일본 정부에 대한 우리 국민의
증오는 두 나라 국민의 진정한 우호 관계를 가로막는 걸림돌로 여전히 남아
있다.
베트남 민족은 자부심이 강한 민족이다. 그들은 세계 최장 미국을
물리쳤다는 긍지를 지녔으며 옛 소련이나 중국과 달리 혁명 1세대가 집권하고
있는 상황에서 개혁개방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아직은'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찾아볼 수 없으며 국민들의 교육수준과 근로의욕도 매우 높다. 말하자면
장래성이 있는 젊은 나라라고 하겠다. 만약 우리 정부와 국민이 베트남전쟁의
진실을 계속해서 외면한다면 동남아시아의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를 이
나라와는 결코 진짜 친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아시아를 침략하면서 저지른 전쟁범죄를 감추려고 아이들
역사교과서까지 왜곡하는 일본 정부를 욕할 자격도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리라고 본다. 더군다나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의 지원과 전쟁호황을 이용하여
경제성장을 추진하기 위해 파병을 결정했다며 베트남 참전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소위 '경제논리'야 말할 나위도 없다. 자식들 배불리 먹이기 위한
짓이라고 해서 도둑질이나 강도질까지 옳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래서 베트남은 오늘날 "우리의 추한 얼굴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거울"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ff
검은 이카루스, 말콤 X
번영의 뒷골목 할렘의 암울한 미래
@ff
백인은 악마다
1959년 말, 미국의 한 TV 방송국은 미국의 한 흑인 회교도 집단을 취재한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제목은 "증오가 낳은 또 다른 증오"였다. 알라신의
사도임을 자처하는 일라이자 무하마드의 설교와 흰 너울을 쓴 이슬람 여인들,
힘이 넘치는 흑인 남자들, 그들의 기이한 의식, 이슬람 사원의 정경 ... 그 모든
것이 시청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백인 시청자들을 진짜 경악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것은 일라이자 무하마드의 가장 충성스러운 제자인 말콤
X였다. 그는 외쳤다. "백인은 악마다!" "그렇다. 그 악마가 우리의 적이다!"
그는 흑인 이슬람교도들을 향해 말했다.
형제 자매 여러분, 백인들은 우리가 금발과 푸른 눈을 가진 예수만
쳐다보도록 세뇌해 놓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닮지도 않은 예수를 숭배하고
있습니다. ... 우리가 죽을 때까지 백인의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죽은 뒤에나
간다는 무슨 꿈 같은 천국을 그리면서 노래하고 기도하도록 가르쳐놓고서,
백인들 자신은 바로 여기 이 땅 위에서 황금과 달러가 깔린 거리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천국을 즐기고 있는 겁니다!
어째서 흑인지상주의와 백인에 대한 증오를 가르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그는 으르렁거리듯 대답했다.
백인이 흑인에게 "나를 증오하는가" 하고 묻는 것은 강간범이 강간당한
사람에게, 또는 늑대가 양에게 "나를 증오하는가" 하고 묻는 것과 똑같다.
백인은 다른 사람의 증오를 비난할 도덕적 자격이 없다. 우리의 선조들이 못된
뱀에게 물렸고 나 자신도 사악한 뱀에게 물려서 내 아이들에게 뱀을 피하라고
주의를 주는데, 바로 그 뱀이란 놈이 나더러 증오를 가르치는 자라고 비난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백인지상주의라는 범죄를 저질러 온 백인들이 내가 흑인지상주의를
가르친다고 해서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감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하는
일이 이 나라 흑인들의 정신과 사회적 경제적 조건을 향상시키려고 애쓰는
것을 뿐이다. 죄 많은 두 얼굴의 백인은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결정짓지
못하고 잇다. 노예 시절의 우리 선조들이 이른바 '흑백통합'을 주장했다가는
못이 잘렸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우리가 '흑백분리'를 주장하자 백인은
우리더러 증오를 가르치는 파시스트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말콤 X는 TV에 얼굴을 드러내는 그 순간 곧바로 백인 물론이요,
흑백통합을 주장해 온 '흑인 민권운동' 지도자들의 증오의 표적이 되었다. '흑인
인종차별주의자', '폭력분자', '흑인 파시스트', '반 기독교도', '공산주의자',
'무책임한 증오의 예찬자' 따위의 이름이 그가 죽을 때까지 카인의 표식처럼
붙어 다녔다. 더군다나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그는 뉴욕 빈민굴인
할렘가의 건달이요 중증 마약중독자에다가 뚜쟁이, 절도범, 무장강도였으며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한 전과자였다. 백인 주인들이 붙여준 성을 지워
버리고, 자신이 뿌리를 확인할 수는 없는 노예의 후손임을 잊지 않기 위하여
미지의 표식인 X를 성으로 택한 말콤은 2천3백만 미국 거주 흑인들 가운데
유일하게 백인들에게 집단 공포와 히스테리를 안겨 줄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
그의 등장은 미국 흑인해방운동의 새로운 흐름이 탄생했음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마흔 살로 끝난 그의 짧은 생애는 미국 흑인들의 비참한
처지와 절망, 타락과 반항, 희망과 투쟁, 암울한 현재와 미래까지는 더없이
명료하게 보여 주었다.
미국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독특한 나라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할
만한 일은 백인들이 원주민을 철저히 말살한 위에 세운 나라라는 점이다.
종교적 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로 건너온 청교도들은
처음에는 "자유와 정의를 실현하려고" 이 나라를 세웠다. 하지만 미국
건국사는 뒤집어 말하면 인디언 말살사 그 자체이다. 원주민의 평화로운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고 그들을 황량한 '보호구역'에 몰아넣었으며, 그들의 필사적인
저항을 참혹하게 쳐부순 학살의 역사를 백인들은 자랑스런 '서부개척'의 역사로
기록하였다. 미국은 출발부터 전례 없는 인종차별주의 위에서 건설되었다.
그것은 유색인의 인간적 존엄을 부인하는 백인지상주의 사상이었다.
백인들은 단지 신대륙의 유색 원주민을 짓밟았을 뿐만 아니라, 대서양 건너
검은 대륙 아프리카의 주민들을 납치하여 노예로 부리기까지 했다. 노예
사냥꾼과 싸우다가 대서양을 건너는 배 위에서, 아메리카 곳곳으로 팔려나가는
과정에서 약 1억 가까운 아프리카 흑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백인들은 흑인
노예들을 죽이고 겁탈하고 남부의 농장에서 쓰러질 때까지 혹사하였다.
흑인들은 백인 소유주가 지어 준 이름을 받아썼고 어머니가, 아내와 딸들이
겁탈 당하는 것을 보며 살았다. 몰래 글을 깨우쳤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당하기도 했으며, 가족을 이루지도 못하고, 이루지도 못하고, 이루었다
해도 머지않아 미국 전역으로 찢어져 팔려 가야 했다. 손톱 만한 반항조차도
죽음의 징벌을 받았다. 글자 그대로 '말하는 가축'이었다. 그래서 결국 조상의
고향이 아프리카라는 사실마저 모르게 되었다.
흑인들의 노예 상태에 최초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남북전쟁(1861)이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이 내전에서 북부가 승리하여
노예제도는 폐지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북부사람들이 흑인노예를 해방하기
위해 일으킨 것은 결코 아니었다. 현존하는 인종적 편견은 거의 모두 16세기
이래 유럽의 정복자들이 전세계 유색인종을 약탈하고 지배하고 노예로 삼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었다. 따라서 미국 남부에 노예제도가 도입되었을
때 인종적 편견이 함께 들어온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남과 북을
불문하고 모든 백인은 흑인이 백인보다 '열등한' 인종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흑인의 '열등성'을 입증할 근거를 그들은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었다.
문화생활의 혜택을 누릴 어떠한 기회도 가져 보지 못한 흑인노예들은 모든
면에서 '확실히' 백인보다 열등했다. 따라서 백인들뿐만이 아니라 흑인
자신들도 스스로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게끔 세뇌 당했다. 이 같은 상호 세뇌는
흑인과 백인 모두가 인종차별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그런데 북부의 공업도시에서는 노예제도보다는 적은 임금으로 이용할 수
있는 흑인 노동자가 필요했다. 반면 남부의 백인 농장주들은 흑인노예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북부인 들은 남부의 '혐오스러운 노예제도'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남부의 농장주들은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남부가
북부에 종속되어 간다는 사실에 위기감을 느꼈다. 이것이 남북전쟁의
배경이었다. 남부 농장주들은 잘난 체하는 북부 자본가와 지배층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노예소유주로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기 위해 북부 지배층에 도전했다.
북부 자본가들은 남부의 노예들을 신분제도와 토지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그들의 노동력을 저임금으로 이용하고 남부에까지 자본주의적 지배관계를
확장하려고 기꺼이 그 도전에 응했다. 노예제도 폐지는 바로 이 같은 백인들
사이의 권력투쟁의 부산물이었을 뿐이다.
흑인들은 자기 힘으로 해방을 이룬 것이 아니다. 따라서 '위대한' 미국
헌법이 개이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했지만 남부 여러 주에서는 법률로
인정차별을 인정하였으며, 북부에서는 '사실상의' 인종차별이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해방된' 남부 흑인들은 도시의 공장으로
밀려들었다. 20세기초까지만 해도 미국 흑인의 85%가 농업노동자나
소작인이었지만 1960년에는 80%가 도시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도시생활에 생소하고 교육 수준이 낮으며 미숙련 상태였다.
하지만 미국 역사에서 새로운 이주자가 이렇게 살았던 경우는 그 전에도
여러 차례 볼 수 있었다. 아니, 미국 자체가 이주자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첫
이주자는 물론 영국에서 건너온 청교도들이다. 이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후에는 기근에 시달리던 독일과 아일랜드 사람들이 찾아왔다. 폴란드와
이탈리아 사람들의 이민 행렬이 그 뒤를 이었다. 백인 이주자의 맨 끝 대열은
유태인들로 채워졌다. 이 새로운 이주자들은 그때마다 '고참' 이주자들로부터
조소와 경멸을 받아야 했고, 때로는 폭행과 약탈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소설
"분노의 포도"에 잘 묘사된 바와 같이, 대공황 때에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간
중서부의 백인 농민들조차 이런 일을 당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태는
백인들까지 벌이는 '텃세 과시'에 불과했다. 새로운 이주자는 도시의 일자리
가운데, 경제적 지위로 보아 가장 비천한 미숙련 반숙련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자리가 늘어난 숙련 사무직 전문직 노동력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계층상승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그러면
끊임없이 밀려오는 새로운 이주자들이 비어있는 맨 밑바닥 일자리를 메꾸었다.
맨 끝 순서인 유태인들조차도 그 같은 사다리를 밟아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흑인은 예외였다. 그들은 계층상승의 사다리를 오를 수 없었다.
'새로운 백인 이주자'들과는 달리 검은 피부를 가졌기 때문이다. 영국인,
독일인, 아일랜드인, 폴란드인, 이탈리아인들은 고향이 어디이든 백인이기
때문에 미국이라는 용광로에 녹아들었지만 흑인은 그럴 수 없었다. 교수, 의사,
변호사, 정치가 따위 전문직은 물론이요, 공무원이나 사무직 노동자가 되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흑인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이라고는 육체노동, 청소부,
점원, 구두닦이, 접시닦이, 호텔 종업원, 웨이터, 하인 따위의 하찮은
직업뿐이었다. 아니, 그 정도 안정된 직장만 있다면 흑인들 사이에서는 꽤
출세한 편에 속했다. 백인들이 사는 동네에는 함부로 출입할 수 없었으며,
정규교육을 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것이 북부에 존재하는 '사실상의
인종차별'이었다. 남부에서는 '법률적인 차별'이 존재했다. 흑인들은 학교, 식당,
극장, 상점, 공공건물들을 백인과 함께 사용할 수 없었다. 이것이 2차대전 후
미국 인종차별의 실태였다.
말콤 X는 흑인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한 백인은 하나도 없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굳이 말하자면 딱 두 사람 있는데 바로 히틀러와 스탈린이다"하고
대답한 적이 있다. 이것은 2차대전과 연이은 냉전으로 인해 군대와 방위산업의
규모가 커져 인력이 부족해지자 백인들이 어쩔 수 없이 사무직과 전문직에
흑인을 고용하기 시작한 사실을 비꼰 말이었다. 사실 흑인들은 수백 년
동안이나 아메리카의 농토를 경작하고 공장에서 일하고 전쟁에 나가서 피를
흘렸지만 백인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지 못했다. 모든 기업체와 땅은 백인
소유였으며, 심지어 할렘가의 식당과 슈퍼마켓, 셋집의 주인조차 백인이었다.
그들은 흑인 동네에서 번 돈을 가지고 저녁이면 교외에 있는 아담한
전원주택으로 돌아갔다. 흑인들은 도시 중심부 빈민굴에서 가난하고 타락한
삶을 살았다. 뉴욕 할렘가는 미국 모든 도시에 존재하는 빈민굴의 대명사였다.
그리고 말콤 X는 그 빈민굴 흑인들의 삶이 어떠했는가 단박에 알 수 있다.
범죄자에서 이슬람 목사로
말콤은 1925년 5월 19일 미국 중부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침례교 목사로서 마커스 가비 목사의 휘하에서 선조의 고향인
아프리카로 귀향해야 한다는 것을 설교하고 다녔다. 이 때문에 말콤 아버지의
다섯 형제는 광신적 백인 우월 주의 폭력단체인 KKK(쿠 클락스 클랜)
단원들에게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6남매의 네 번째 아이인 말콤은 일곱 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백인들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백인 주인에게
겁탈 당한 흑인 노예에게서 태어난 외모가 백인과 비슷했던 어머니 루이즈
리틀은 남편을 잃은 충격과 뒤이어 닥쳐 온 생활고 때문에 미쳐 버렸다.
루이즈는 자기를 닮아 피부가 적갈색이고 붉은 고수머리를 가진 말콤을
구박했다. 한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겁탈자 아버지를 지독하게 미워했기
때문이다. 주 복지국 직원들이 루이즈를 정신병원으로 데려갔고 말콤의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져 남의 집에 맡겨졌다.
말콤은 초등학교에 들어갔지만 끊임없이 말썽을 일으키는 불량학생으로
낙인찍혀 퇴학당하고 말았다. 1937년 6월 '갈색폭격기' 조 루이스가 백인
제임스 브래독을 KO시키고 헤비급 세계 챔피온 타이틀을 거머쥐었을 때 모든
흑인들이 '열등하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퇴학당한 말콤은 미시간주 랜싱
소년원에 수용되어 있으면서 다시 8년제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상당히
'감화'된 탓인지 학교성적이 수석으로 올랐고 반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졸업이 임박했을 때 또다시 인종차별이 그를 덮쳤다. 말콤이 "변호사가
되겠다"고 말하자 백인 선생들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비웃고 "넌 깜둥이라는
현실을 알아야 한다"면서 목수가 되라고 권유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교사들이
성적이 신통치도 않은 백인 아이들에게는 의사나 변호사, 교사 같은 '멋진
직업'을 권하는 것을 보면서 말콤은 '깜둥이'라는 말에 모욕감을 느꼈고
백인들에 대해 마음의 벽을 쌓았다.
학교를 졸업한 말콤은 이복누이 엘라를 따라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으로 갔다.
열네 살 소년 말콤은 여기서 처음으로 대도시 흑인 빈민굴을 보았다. 말콤은
갖가지 종류의 흑인들이 갖가지 방식으로 살아가는 록스베리 빈민가 풍경에
단번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록스베리 빈민가 풍경에 단번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뉴욕 할렘가로 진출했다. 이때부터
감옥에 들어간 1946년 2월까지 약 7년간을 말콤은 그야말로 타락과 방황,
도박과 범죄로 세월을 보냈다. 구두닦이로 빈민굴 생활을 시작한 말콤은 열차
판매원, 음식점 종업원, 매춘조직의 안내원, 마약 밀매, 절도, 강도 등 합법
비합법의 온갖 직업을 거치면서 도박과 마약에 깊이 빠져들었다. 요란한 옷을
입고 곱슬머리를 '콩크머리'라고 하는 빳빳한 스타일로 바꾸고 권총을 몇
자루씩이나 지니고 다녔다. '콩크머리'는 백인을 닮이 보려는 흑인의 열등감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흑인들은 머리껍질이 벗겨지는 것 같은 아픔을
참으면서까지 콩크머리를 했다. 말콤은 백인 유부녀 자매와 세 사람의
흑인으로 구성된 전문 절도 단을 만들어 백인들의 집을 털다가 체포되었다.
재판부는 2년형이 보통인 절도죄에 대해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그냥 도둑놈이
아니라 "참한 백인 아가씨들을 망쳐 놓은 빌어먹은 깜둥이"였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말콤은 말콤 X 목사가 아니었다. 단지 도시 빈민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건달에 불과했다. 미국 모든 도시의 빈민굴에서 수백만의 흑인 소년
소녀들이 말콤과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각종
범죄를 배우고 저질렀다. 그것은 범죄가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 남아야 하는
흑인들의 생존경쟁이었다. 자기가 겪은 가난과 불행, 체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잊어버리기 위해 상용하는 대마초나 독한 술을 도덕적 타락이기
이전에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유명한 갱이나 범죄자를 우상으로 받들면서
그러한 지위를 향해 달려가는 수많은 말콤들은 지금도 존재한다.
그러나 말콤은 할렘의 어두운 세계에서 구원받았다. 할렘에서 익힌
범죄세계의 생존법칙을 감옥에서도 그대로 따른 말콤은 같은 죄수들로부터
'사탄'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런데 그가 갇힌 지 2년쯤 지난 어느 날, 동생
레지날드가 찾아와 "흑인을 위한 진짜 종교"인 이슬람교에 대해 이야기했다.
"백인은 악마야, 형은 자기의 진짜 성도 모르잖아? 백인 악마들이 우리
선조들의 땅에서 살인과 강간을 하고, 말하자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형까지
거기서 강탈해 온 거야. 알라신의 사도 일라이자 무하마드 선생의 가르침을
따라 돼지고기와 술, 담배, 마약을 일체 끊어야 해. 백인의 세계는 이제
내리막길로 치닫고 있어. 우리가 고대 문명인의 자손이고 금은보화와 왕들을
가진 인종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백인들은 지금까지 감추어 왔어."
동생이 다녀간 다음, 말콤은 생전 처음으로 인간과 사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정글과도 같은 할렘의 생존법칙과 자신의 과거,
자기가 만난 백인들에 대해 회고해 보았다. "무하마드의 말씀"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는 무하마드에게 편지를 쓰고 책을 들었다. 거짓말처럼 담배를
끊었으며 죽는 날까지 술, 담배, 마약을 손에 대지 않았다. 말콤은 늘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행동주의자였다. 제대로 글씨를 쓸 수 없을 만큼
녹슬어 버린 머리와 몸으로 그는 책을 읽었다.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아서
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어 버렸다. 그는 감옥에서 한 5년간의 공부 덕분에
지독한 난시가 되어버렸지만 남들이 대학에서 배우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최초의 인간 화석이 발견된 곳이 아프리카라는 사실을, 흑인에게서는 백인이
나올 수 있자만 백인 염색체가 열성이어서 백인에게서는 결코 흑인이 생길 수
없다는 사실을, 노예 사냥꾼들이 아프리카에서 저지른 범죄가 얼마나
잔혹했으며 흑인노예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는지를, 16세기 이후 소위
'기독교 상인'인 백인들이 전세계의 유색인종을 어떻게 침략하고 약탈했는가를,
인도가 중국이 아프리카가 어떻게 짓밟혔는가를 알았다. 거의 모든 이름난
세계 사상 철학자들의 저서와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빛나는 고대문명에
대한 책을 읽었다. 미국 역사도 공부했다. 그는 일라이자 무하마드에게 매일
편지를 썼다. '알라의 사도' 무하마드는 그에게는 구세주, 바로 그것이었다.
1952년 가석방으로 자유를 찾은 다음 말콤은 X라는 성을 가진 이슬람 목사로
변신했다. 마약은 물론이요 술 담배도 전혀 하지 않았으며, 할렘의 옛 이웃을
찾아다니면서 백인은 악마고 흑인은 위대하다고 설교하는 그의 모습은 한
인간이 얼마만큼이나 달라질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살아 있는 증거였다.
흑백통합운동과 흑백분리운동
절망적이고 비조직적인 폭동과 그에 따른 참혹한 죽음 말고는 이렇다 할
저항운동을 일으키지 못하던 미국 흑인 사회에 본격적인 해방운동이 일어난
것이 바로 이때였다. 그것은 두 부류의 흑인들에 의해 극단적으로 다른 두
갈래로 나타났다. 그러고 이처럼 상극 하는 두 흐름의 운동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야말로 미국 흑인들의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현상이었다.
먼저 모습을 드러낸 운동은 '흑인 민권운동'이다. 그것은 제도적 법률적
인종차별이 공공연히 행해지는 남부에서 시작되었다. 1955년 말 남부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에서 작은 사건이 일어났다. 로자 파크스라는 한 흑인
여성이 버스를 타고 가는데 백인 운전사가 방금 탄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내주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녀는 이 요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모욕과 폭행을
당했다. 흑인들은 이 사건에 항의하여 버스 안 타기 운동을 벌임으로써
백인들을 놀라게 했다. '몽고메리 보이콧'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비폭력 흑인
민권운동의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전국적인 인물로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백인 인종주의 광신자들이 집에 폭탄을 던져 가족을 죽일 뻔했을 때,
폭동을 일으키려 한 흑인들을 비폭력으로 이끈 그는 '미국의 간디'라는 칭호와
도덕적인 영향력을 확보하였다. 이 운동은 헌법이 보장하는 평등을 침해하는
모든 법률과 제도, 관습에 저항하는 비폭력운동, 즉 흑인의 시민적 권리를 찾는
운동으로서 '흑백인의 평등과 통합'을 목표로 삼았다. KKK단의 린치와 암살,
폭파, 경찰의 파렴치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진보적인 백인
대학생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들불처럼 북상했다. 그 결과 몇몇 대기업이
흑인을 고용했고, 흑백 공학학교가 늘어났으며, 흑인과 백인이 함께 쓰는
식당과 호텔, 상점, 버스, 화장실이 늘어나는 등 흑인들은 '통합'을 위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통합을 통해 인종문제 해결을 추구한 흑인 민권운동은 주로 중산층 흑인, 즉
흑인들 가운데 백인의 지위에 가장 근접한 전문직 종사자를 비롯한 '흑인
상류층'이 주도하였으며 '진보적인고 양심적인' 백인들의 지원을 받았다.
'인종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공헌한 대가로 킹 목사를 나중에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흐름은 '통합'이 아닌 '분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운동이었다. 일라이자 무하마드가 이끄는 '이슬람민족' 운동이 그것이다. 매우
조그만 세력에 불과하던 이 세력에 불과하던 이 세력은 말콤 X의 활동 덕분에
비약적으로 발전해서 앞에서 말한 것처럼 1959년 말 TV를 통해 충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말콤 X는 백인을 물론이요 흑은 민권운동까지도 맹렬히
비판했다.
나의 진정 아름다운 흑인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검다'고 말할 대 그것은
희지 않은 모든 빛깔을 뜻합니다. 우리가 백인에게는 모두 검둥이지만, 사실을
수천 가지 빛깔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백인에 의하여 얼마만큼까지
오염된 아프리카 흑인의 후예입니까? 내가 건달로 지낼 때 가람들은 나를
'디트로이트 레드'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습니다. 강간자, 붉은 머리의 악마, 그가
나의 외할아버지입니다. 만약 내가 나의 몸을 더럽히고 피부를 더럽힌 그
악마의 피를 씻어 낼 수 만 있다면 당장 그렇게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
몸 속에 있는 강간자의 더러운 피 한 방울까지도 증오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창고나 부엌 또는 덤불 속에서 아내와 어머니와 딸이
강간당하면서 부르짖는 비명소리를 들으면서 공포에 떠는 흑인 남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선조들은 그 강간자를 너무 두려워했기 때문에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백인들은 이처럼 사악하고 짐승 같은 짓을
저지르고서는, 태어난 자손을 보고 '뮬라토(흑백 혼혈아)'니 '쿼드룬(백인과
뮬라토의 혼혈)'이니 하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냥 깜둥이라고도 부르지만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 악마들은 뻔뻔스럽고 오만하게도 희생자인 우리더러
자기네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왜 통합이 미국 인종문제의 해결책임을 부인하는가? 제정신을 가진
흑인이라면 어느 누구도 통합을 원하지 않습니다. 제정신을 가진 백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정신을 가진 흑인이라면 백인들이 자기네들의 체면 유지를
위한 통합 이상의 것을 주리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일라이자
무하마드 선생은 미국 흑인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이 백인으로부터의 완전한
분리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백인들은 자기가 흑인을 증오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흑인이 자기 '분수'를 알고, 그에 걸 맞는 요구를 고분고분하게 내놓는
경우에는 그것을 환영하고 격려하기까지 했다. 그들이 증오한 것은 흑인
일반이 아니라 만인이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믿고 그렇게 행동하는 '분수
모르는 흑인들'뿐이었다. 따라서 백인들이 이같이 '불순한 흑인'들이 발호하지
못하도록 흑인 민권운동의 요구들을 일부 수락했다. 이것이 이른바
'상징정책'이다.
도시에 몰려든 흑인들의 소득이나 교육이 전반적으로 높아지면서, 백인과
백인 기업체가 공급할 수 없거나 공급하고 싶어하지 않는 각종 수요가 생겼다.
교사. 목사, 의사, 변호사, 이발사, 미용사, 장의사, 보험업, 흑인신문 같은
분야에서 백인이 흑인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
같은 수요를 채워 주기 위해 흑인 전문직업인 집단과 소규모 기업들이
나타났다. 이들이 바로 '중산층 흑인' 또는 '흑인 부르주아지'들이다. 이 흑인
부르주아지들은 미국 흑인 사회에 대해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백인들은 이들의 충성심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백인들이 흑인
민권운동을 어느 정도 수용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법률적 제도적 평등을
보장해 줌으로써 이들이 흑인 대중과 더불어 미국사회 전체에 반가를 드는
사태를 예방하고 백인을 대변하는 흑인으로 붙잡아 두려는 것이다. 사실 시내
어느 레스토랑에 백인들과 함께 출입할 권리란 이들 중산층 흑인들에게나
필요한 것이지, 빈민굴의 흑인 대중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백인들은 흑백통합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상징으로 대기업과 행정관청의 일자리
일부를 흑인에게 나누어주고 '흑인향상협회', '인종평등협회' 등의 민권운동
단체에 자금을 지원하여 배후에서 권력을 행사했다. 이것이 '상징정책'의
이면이다. 흑인 민권운동 '지도자'들이 말콤을 그토록 격렬하게 비난하고 말콤
역시 그들은 '동족의 배반자', '백인 화된 흑인'이라고 비난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말콤은 할렘 건달 생활을 통해 흑백이 결코 통합될 수
없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는 흑인 '지도자들'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오늘날 엉클 톰(백인에게 복종하는 비굴한 흑인의 상징)은 머리에 수건을
매지 않는다. 이 현대적인 20세기 엉클 톰은 이제 실크 모자를 쓰고 있다. 그는
옷도 잘 입고 교육도 많이 받았다. 세련된 교양의 화신일 수도 있다. 때때로
예일이나 하버드 악센트로 말을 한다. 교수님, 박사님, 판사님, 목사님이거나
무슨무슨 주교님에다 박사님을 겸하는 수도 있다. 이 20세기 엉클 톰은
'전문직' 흑인이다. 백인을 위해 일하는 흑인 노릇이 그의 전문직이란 말이다.
그들은 흑인 몸뚱이에 백인 대가리를 달아 놓은 친구들이다.
말콤이 '분리'를 주장할 때마다 흑인 '박사님'들은 이슬람교도들이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과 똑같은 주장을 한다고 비판하고, 그가 흑인들로 하여금
"폭력을 쓰도록 선동한다"고 비난했다. 거기에 대해 말콤은 이렇게 답변했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당신들보다 더 단호하게 '격리'를 거부한다. '분리'는
'격리'와는 명백히 다르다. '격리'는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억지로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리'는 평등한 둘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 미국 흑인들이 백인에 종속되어 있는 한 우리는 언제나 백인에게
일자리와 의식주를 구걸해야 할 것이며, 백인은 우리의 생활을 규제하면서
언제든지 우리를 '격리'시킬 힘을 가지게 될 깃이다.
기독교가 미국에서 이룩한 가장 위대한 기적은 흑인들이 전혀 폭력적으로
되지 않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2천3백만의 흑인들이 압제자들에게 맞서
분연히 궐기하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기적이다! 어떠한 도덕적 기준으로 보든
간에, 심지어 민주주의 전통으로 보더라도 흑인의 봉기는 정당한 것인데도
말이다. 흑인들이 그렇게 계속해서 열렬하게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마저
대주는', 그리고 '죽어서 천당에 가는' 철학을 믿어 온 것도 기적이다! 흑인들이
여기 백인의 천국에서 내내 지옥 같은 삶을 강요당하면서도 평화스런 국민으로
살고 있다는 것도 기적이다! 그리고 백인의 꼭두가시인 흑인 '지도자들'이,
학위를 치렁치렁 달고 다니는 학식 높은 흑인들이, 불쌍하고 가난한 동포들을
등쳐먹으면서 살쪄 온 다른 모든 '지도자들'이, 흑인 대중을 지금까지 조용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도 기적이다!
어디든 가는 곳마다 온통 '민권운동의 진전'이란 말을 떠들고 있다. 백인은
흑인들이 '할렐루야!'하고 소리쳐야 한다고 믿는 모양이다. 4백 년 동안이나
백인은 우리의 등에 긴칼을 꽂아 두었다가 이제 그 칼을 반쯤 뽑기 위해
흔들어대고 있다. 우리더러 감지덕지하라고? 어림없는 말이다! 만약 그 칼을
다 뽑아 낸다 해도 상처가 남을 판이 아닌가!
미국 흑인은 스스로를 위해 자신의 사업과 품위 있는 가정을 세우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다른 민족들이 한 것처럼 흑인들도 가능한 모든 곳에서
모든 방법으로 동족끼리 사고 팔고 동족끼리 고용해서 흑인들이 자급자족할
능력을 가지도록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미국 흑인이 존경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백인이 흑인에게 절대로 줄 수 없는 것이 자존심이다.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를 위해 하고 있는 것을 흑인도 스스로를 위해 하고,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흑인도 갖기 전에는 흑인은 결코 자주적이며 평등한
인간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예를 들어, 빈민가의 흑인들은 자신의 물질적,
도덕적, 정신적 결함과 죄악을 스스로 바로잡아 나가야 한다. 흑인은 자기
자시의 가치관을 높여야 하는 것이다.
오직 과오만이 나의 것이다.
1960년대 전반기에 흑인 해방운동의 두 갈래인 '통합운동'과 '분리운동'은
동시에 진행되었다. 마틴 루터 킹 모사는 소수의 인종주의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백인과 흑인으로부터 찬양과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말콤 X는 자각한
소수의 가난한 흑인들을 제외한 모든 미국인들로부터 비난과 저주를 받았다.
그는 일라이자 무하마드가 이끄는 미국 '이슬람민족'의 제2인자로서
무하마드에게 거의 충성을 바쳤지만, 빈곤한 흑인 대중의 언어로 말하는
빼어난 연설과 논쟁 능력, 그리고 폭넓은 지식 덕분에 자주 매스컴에 등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비난과 칭송이 무하마드가 아니라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런데 빈민굴 흑인들은 이슬람과 말콤의 가르침에는 매주
빠르게 반응하면서도 무하마드의 휘하에 들어오기를 망설였다. '이슬람민족'의
매우 엄격한 도덕률 때문이었다. 결혼 전 성 관계의 엄격한 금지, 돼지고기를
비롯하여 담배, 술, 마약의 금지, 춤, 도박, 데이트, 영화와 스포츠 관람,
거짓말과 도둑질, 집안싸움까지도 철저히 금지하고, 그것을 어겼을 때에는
자격정지나 격리, 심지어 추방까지 하는 무하마드의 율법은 다수의 흑인
대중이 따르기에는 지나치게 엄격했던 것이다.
말콤은 무하마드와 결별하고 따로 '회교사원'을 조직했다. 첫째 이유는
무하마드와의 불화 때문이다. 무하마드와 측근들은 말콤이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는데도 말콤이 더 유명해진 것을 시기했다. 더욱이 무하마드가 두
여비서와 통정하여 사생아를 낳은 스캔들이 폭로되면서 말콤이 그에 대해
가졌던 존경심은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두 번째 이유는 말콤 X
자신의 변화였다. 그는 무하마드가 뚜렷한 이유도 없이 자격정지 처분을 내린
1963년 회교 성지 메카를 순례하면서 참다운 이슬람 교리와 '형제애'에
눈떴으며, 세계 각국 흑인 지도자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으면서 미국
흑인문제가 단순한 국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콤은 메카 순례에서 돌아온 1964년 '사단법인 회교사원'을 새롭게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의 변신은 또 한번 미국인을 놀라게 했다. 1964년 여름은 전례
없이 크고 끈질긴 흑인폭동이 전국의 도시를 휩쓴 '길고 무더운 여름'이었다.
빈민가에 만연해 있던 열악한 교육, 형편없는 주택, 그리고 실업 때문에 누구의
선동도 필요하지 않았다. 인종차별에 대한 적개심은 너무나 오랫동안 쌓인
나머지 도화선도 없이 터져 버렸다. 킹 목사, 흑인 민권운동 지도자, 말콤, 그
누구도, 닥치는 대로 부수고 불지르고 총을 쏘아대는 가난한 흑인들의
절망적인 저항을 지도하거나 통제할 수 없었다.
말콤은 아프리카계 아메리카인 단결기구(OAAU)를 조직했다. 그는 이제
편협한 태도를 버리고 미국 흑인들의 정치. 경제. 문화 공동체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말콤은 백인들 개개인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버렸다. 생애의 마지막
일 년 동안에 말콤은 무하마드의 그릇된 이슬람 율법과 사상을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사상과 태도를 가진 지도자로 변신했다.
OAAU는 완전한 흑인조직이다. 나는 "올바른 백인이 할 수 잇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아무 것도 없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나는 그것을
후회한다. 그러나 흑인 조직에 가담하고 싶어하는 백인들을 현실 도피로 자기
양심을 위로하여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자신의 양심을 증명해야 하는 곳은
희생자인 흑인 사이에서가 아니라 인종차별주의에 사로잡힌 동료 백인 사회
속에서이다. 나는 양심적인 백인들에게 말한다. 우리와 협력해서 일하자,
각자가 자기의 종족 속에서 일하면서.
나의 것과 마틴 루터 킹 박사의 비폭력 행진은 접근방식은 다르지만 목표를
항상 같아서, 그 목표는 무방비상태의 흑인들에 대한 백인의 만행과 죄악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나라의 인종적 풍토에서, 흑인문제에
대한 접근방식의 '두 극단'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가, 즉 '비폭력'의 킹
박사인가 아니면 소의 '폭력적'이라는 나인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OAAU는 가난한 흑인 사회에서 마약과 범죄와 도덕적 타락을 척결하고
자급자족 경제를 수립하며, 2천3백만의 흑인들이 하나의 정치적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스스로 자주적이고 인간적인 삶을 찾게 하려는 비종교적
조직운동의 모태였다. 그러나 두 번째 변신 이후 말콤의 생애는 너무나 짧았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말콤은 사랑하는 아내 베티와 네 딸들까지 참석한
1965년 2월 21일의 OAAU 연설회에서, 끝내 정체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은
괴한들의 총격을 받아 참혹하게 살해되고 말았다. 킹 목사 역시 1968년에 암살
당했다.
말콤은 할렘의 건달이 된 이래 언제나 죽음 가까이 에서 살았다. 그는
자기의 죽음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또 하루를 빌렸구나'하고 생각한다. 나는
'이슬람민족'의 회교도 손에, 또는 어떤 백인 인종차별주의자의 손에, 아니면
백인이 고용한 흑인의 손에 갑자기 죽음을 당할 것이다. 어쨌든 나는 지금
매일 죽은 것처럼 살고 있다. 백인들은 그제들의 언론에서 나를 '증오'의
편리상 상징으로 이용했던 것처럼 내 죽음도 이용할 것이다. 두고 보라. 나는
잘해야 '무책임한' 흑인이라는 딱지가 붙을 것이다. 하지만 백인들이 '책임감
있다'고 추켜세우는 '흑인 지도자'치고 흑인을 위해 무언가를 해낸 자는 없다.
나는 백인들이 나를 적대시하고 더더욱 세차게 공격할 때마다 내가 미국의
흑인을 위해 바른 길을 걷고 있다는 신념을 더욱 확고히 느낀다. 만일 내가
어떤 빛을 가져오고, 미국이라는 모에서 인종주의라는 악성 종양을 뿌리뽑는
데 이바지하는 어떤 뜻깊은 진리를 드러내고 죽을 수 있다면--그때 모든
공로를 알라에게 돌려야 하며, 오직 과오만이 나의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카루스, 그 아버지는 날개를 만들어 밀랍으로
이카루스에게 붙여 주었다. "절대 너무 높이 날지 말아라." 이카루스는
아버지의 경고를 잊고 태양을 향해 높이높이 날아올랐다. 마침내 태양의
열기가 날개를 녹이자 이카루스는 떨어져 죽고 말았다.
말콤 X는 할렘의 어두운 뒷골목에서 흑인의 자주와 자존, 인간성이 꽃피는
빛나는 미래를 향해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흑인 대중과 말코 사이의 유대와
결합은 아직도 너무 취약하여 그의 날개는 인종차별주의들이 내쏘는 증오와
비난의 열기를 견뎌 내지 못했다. 백인들은 말콤의 생애와 사상을 역사의
뒤안길에 묻어 버렸다. 3천만에 가까운 그의 동족들 역시 아직도 미국 문명의
뒤안길에서 그때나 다름없는 가난과 절망, 타락 한가운데 방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지금도 수십 수백만의 '디트로이트 레드' 말콤이 자라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세계경찰을 자임하면서 다른 나라에게 인권과 민주주의를
보장하라고 큰소리를 친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정말 떳떳하게 그런 말을
하려면 먼저 "제 눈의 대들보"부터 뽑아 내야 할 것이다.
@ff
일본의 역사왜곡
일본제국주의와 부활 행진곡
@ff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얼마 전 일본에서 장관 두 사람이 일본이 침략전쟁을 벌이지 않았다고 한 말
때문에 잇달아 장관 자리를 내놓았다. 법무장관 나가노와 환경장관 사쿠라이가
그들이다. 나가노는 일본이 "유럽제국주의 손아귀에서 아시아를 해방시키기
위해 전쟁을 벌였고 일본군이 중국 남경을 점령하면서 중국사람 30만을
학살했다는 이른바 남경사건은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쿠라이 역시
비슷한 주장을 했다. 이 두 사람은 아시아 여러 나라 정부가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서자 장관직을 물러났지만 자기네가 내뱉은 말을 시원스럽게
거두어들이지는 않았다.
물론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1988년 국토청장관 오쿠노가 "중일전쟁은
일본의 계획적인 침략이 아니라 노구교사건으로 인해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며
전쟁에서 일본인도 많이 죽었기 때문에 일본이 조선과 중국을 침략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했으며 그 몇 해 전에는 후지오 문부성장관이 "일본의 식민
지배가 조선과 조선인에게 유익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며 한바탕 외교 마찰을
일으킨 일도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때마다 장관을 바꾸는 정도의
형식적인 조치로 사건을 마무리지으려 했다.
금세기 벽두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까지 50여 년 동안 일본이
아시아에서 저지른 침략전쟁과 야만행위는 아직도 '역사의 창고'에 들어가지
않았다. 가해자인 일본과 피해자인 아시아 여려 나라 국민들이 그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현저하게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 나라들은
일본이 자기네가 저지른 전쟁범죄를 인정하고 깨끗하게 사과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일본 국민, 특히 일본 지배층과 정치가들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과거 전쟁범죄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태도는 조선강점과 중국침략에
대한 권력자들의 언행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몇 가지 사례만
살펴보더라도 나가노와 사쿠라이 장관의 역사관이 얼마나 뿌리깊은 것인지는
금방 알 수 있다.
1950년대에 수상을 지낸 이케다 하야토는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뒤로 무슨
나쁜 짓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고 장담했으며, 1970년대 초반
수상을 지낸 다나카 가쿠에이는 국회연설 도중에 "일본이 조선에서
의무교육제도를 실시했다"는 자랑을 늘어놓았다. 심지어는 1965년 박정희
정권과 벌인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 수석대표였던 다카스키 신이치란 사람은
이런 소리를 늘어놓을 정도였다.
일본이 조선을 20년쯤 더 가지고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일본더러 식민
지배를 사죄하라고 하지만 일본은 조선을 통치하면서 좋은 일을 했다.
창씨개명도 다 조선사람을 일본사람과 똑같이 대접하려는 정책이었다. 잘
해보려고 했는데 전쟁에 저서 허사가 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 일본은
공장과 가옥을 다 그냥 두고 왔다. 지금 한국에는 산에 나무 한 그루가 없는데
이것은 조선이 일본에서 떨어져 나간 탓이다.
1982년 한국 대학생의 대규모 시위를 불러일으킨 교과서 왜곡사건은 일본
정부 관리들이 이런 사고방식을 가졌기 때문에 일어났다. 일본 문부성은
교과서를 심사하면서 조선침략은 '조선진출'로, 3.1운동을 '폭동'으로 조선말
사용 금지를 '조선어, 일본어 공용'으로, 창씨 개명 강요를 '권장'이라고
서술하도록 필자들에게 압력을 넣었다. 조상들이 저지른 침략전쟁과
범죄행위를 청소년들이 알지 못하게 하겠다는 속셈이었다. 게다가 1982년
수상이 된 나카소네는 명치유신 이후 수많은 침략전쟁에서 죽은 일본제국
군인을 '모신' 정국신사를 공식 참배했다. 수상이 정국신사를 참배한다는 것은
과거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행동이었다. 이런 판국에 각료들의
망언까지 잇따르자 중국, 북한, 한국,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 정부가 외교경로를
통해 강력하게 항의했고 한국 대학생들은 여러 도시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당시 '만년집권당'이던 자민당 젊은 의원들은 엉뚱하게도 소위
'국가기본문제동지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이유 없는 외국의 비난과 그에
영합하는 정당의 각성"을 요구하고 "부당한 외국의 간섭을 배제하여
국가주권을 지키자"고 떠들어댔다. 그들이 비난한 정당은 일본이 침략전쟁을
저질렀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정하고 일본이 재무장을 갖추는 데 반대한
사회당을 말한다. 물론 양심적인 일본 지식인들과 사회당은 이러한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쟁범죄를 깨끗이 사죄하지 않는 일본 정부에게 반성을
촉구했다. 그러나 일본의 여러 우익단체들은 오히려 확성기를 들고 동경시내를
휘젓고 다니면서 "아시아 각국의 부당한 비난과 내정간섭을 규탄"했다.
일본 집권층의 일그러진 역사의식과 잇단 망언은 일본이 벌인 아시아
침략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은 단순한 문화 현상이
아니다. 한때 다른 나라들을 침략하여 약탈과 학살을 저지른 나라가 세계에서
손꼽는 경제대국이 되어 자기네가 저지른 죄를 부정하는 것은 기회만 닿으면
또다시 그런 짓을 하겠다는 의사표시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전범의 나라 일본
일본은 침략자 속성을 타고난 나라이다. 섬나라 일본은 외국 침략을 받은
일이 거의 없는 나라지만 여러 섬으로 나뉜 탓으로 1868년 명치유신
이전까지는 자기네끼리 쉴 사이 없이 전쟁을 벌였다. 각 지역에 할거한
봉건영주들은 농민을 지배하고 다른 지방을 정복하기 위해 무장한 가신집단을
길렀으니 이들이 바로 사무라이요 이 사무라이 집단의 무기가 바로 유명한
'일본도'이다. 그리고 영주를 중심으로 사무라이 집단을 결합한 중세
봉건체제를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가 흔히 일본정신이라고 하는 '무사도'였다.
무사도는 12세기 무렵에 나타난 유교사상과 결합하면서 '충성, 희생, 신의,
결백, 명예'를 숭상하는 일본 특유의 호전적 이데올로기로 발전하였다. 오늘날
일본 사람들이 가장 즐겨 보는 고전연극 '가부키'는 거의 다 주군을 섬기는
사무라이의 충성, 복수, 희생을 소재로 삼는다. 연극뿐만 아니라 실제 역사에도
전쟁에 진 영주를 따라 집단 할복자살하거나 평생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주군의 원수를 갚은 '용맹한 사무라이'들이 무수히 많았다. 무사도는 근대적인
중앙집권정부를 만든 명치유신과 더불어 총과 대포와 비행기를 가진 '천황의
군대'를 지배하는 중심이념이 되었고 나아가 모든 국민이 따라야 할
'일본정신'으로까지 승격되었다.
1868년 명치유신으로 마지막 봉건왕조였던 덕천막부가 무너지면서 무사들은
칼을 빼앗겼다. 하지만 무사도는 자급자족 봉건경제라는 좁은 틀을 벗어나
새로운 경제제도인 자본주의에 접목되었다. 봉건 지배층이 중심이 되어 유럽과
미국에 문을 연 후 급속한 산업발전을 이룬 일본에서는, 신흥 부르주아지가
봉건권력을 타도한 서유럽과는 달리 민주주의가 싹틀 수 없었다. 그래서 시민
정부가 있어야 할 자리에 '천년 역사를 이어 온' 천황제가 들어앉았다. 의회가
있기는 했지만 아무 실권도 없었다. 그래서 '천황폐하의 군대'는 칼 대신
신식무기를 들고 봉건영주 대신 '대 일본제국과 천황폐하'를 위해,
자기네들끼리 싸우는 대신 다른 나라를 침략하러 달려나갔다.
일본이 침략전쟁을 벌인 이유는 독일제국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명치유신
이후 일본 정치권력은 천황을 받드는 군부 관료집단이 움켜쥐었고 경제력은
이들의 비호를 받는 극소수 재벌집단이 독점하였다. 일본 국민은 민주주의
기초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하였다. 자본가들은 내수시장이 작고 원료가 부족한
터라 군부의 침략전쟁 계획에 적극 찬성하고 그 비용을 지워했다. 이렇게 해서
왕을 신으로 숭배한 일본국민은 군부 관료와 재벌 집단이 이끄는 대로 패전이
임박할 때가지 공장과 전선에서 열성을 바쳐 일했다.
패전은 일본 국민에게 일종의 혁명과도 같았다. 현역 군인으로서 수상직을
맡았던 도오죠 히데키를 비롯한 고위 장성과 관료들은 "사무라이 정신이
무색하게도" 자살하지 않고 전쟁범죄자 혐의로 미군에게 체포당하였다.
신이라고 하던 일본 '천황' 히로히토는 라디오 방송에 나와 자기도 남과 똑같은
인간이라고 고백했다. 백전백승한다던 대 일본제국의 영광은 어디에도 없었고
군대와 재벌은 해체되었다. 산업시설은 미군 비행기가 쏟아 부은 폭탄에
잿더미가 되었고 남은 것은 폐허가 된 도시와 원자폭탄이 가져다 준 끔찍한
공포뿐이었다. 연합군은 일본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려고 일본이
앞으로 군대를 보유할 수 없도록 헌법에 못을 박았다. 낡은 '대 일본제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운명에 빠졌다.
그런데 2차대전이 끝나기 무섭게 들이닥친 동서냉전이 역사의 흐름을 다시
한번 뒤집어 놓았다. 이른바 '전후 역코스'라는 것이다. 중국 대륙에서 장개석
군대가 패주를 거듭하고 동유럽에서 잇달아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서는 가운데
일본에서는 공산당과 사회당 세력이 이끄는 파업과 혁명운동이 불붙었다.
한반도 북쪽 절반은 소련 군대가 점령했다. 미국 정부는 이대로 가면 일본마저
붉게 물들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일본 사회를 안정시키고 경제를
되살리지 않는 한 '동아시아 반공기지' 일본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나자 미국 정부는 일본을 '미국의 동아시아 대리인'으로 키우기로
결정했다.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는 1948년 말 열린 동경 전범재판에서 도오죠히데키를
비롯한 전범 7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16명에게 종신형을 내리는 것으로 전범
처벌을 매듭지었다. 천황제도 그대로 유지하도록 했다. 점령군 사령부의 지원을
받아 첫 수상으로 취임한 사람은 전쟁 당시 외무관료로 일한 요시다
시게루였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연합군은 전쟁범죄자를 모두 사면시켰다.
쫓겨났던 전범 혐의자 1만여 명이 모두 공직에 복귀하여 정치, 경제, 군사,
사회, 문화, 치안, 교육 등 모든 분야를 재빠르게 장악했다. 해체되었던
재벌기업도 되살아났다. 1954년 경찰예비대가 자위대로 바뀌면서부터는 일본도
실질적으로 군대를 부유하게 되었다. 미국은 사회주의체제와 효과적으로
싸우기 위해 군국주의자, 제국주의자, 국수주의자, 파시스트, 천황제
광신자들을 동맹군으로 선택하여 사회주의운동을 탄압함으로써
제국주의자들에게 정치권력을 넘겨 준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다시
군사대국으로 만들어 보려는 군국주의적 보수세력의 음모가 싹텄다.
똑같은 시기에 독일에서 일어난 일과 비교해 보면 일본은 정말이지 전범들의
나라라고 할 만하다. 독일은 전쟁을 일으킨 죄로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에
분할 점령당하였다가 냉전이 시작되면서 동서독으로 갈라졌다. 나치
협력자들까지 철저히 숙청한 동독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고 연합군이 점령한
서독에서도 주요 전범들은 엄한 처벌을 받았다. 유태인 학살을 비롯한
범죄행위의 원인과 과정에 대해서도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주요 전범이
아닌 협력자들은 나중에 사면을 받았지만 그런 전력을 가진 사람들이
정치권력을 잡거나 사회 지도층으로 복귀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과거의 전쟁범죄를 대하는 독일 정부의 태도는 일본 정부와 전혀 다르다.
독일은 주변 국가와 유태인들에게 입힌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성의껏
배상했고 나치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학생들이 지겨워할 만큼' 교육을 한다.
수상이나 대통령 등 책임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직접 저지른
범죄는 아니지만 우리가 속한 민족공동체가 저지른 일이니만큼 젊은이들도
그것을 자기 문제로 내면화해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얼마 전
대통령이 된 로만 헤르초크가 취임연설에서 "그 당시는 전쟁통이었고 스탈린은
그보다 더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느냐"는 식으로 나치 만행을 합리화하는
극우파의 주장에 대해 "범죄를 저지른 자는 다른 사람의 죄와 자기 죄를
비교할 권리가 없다"고 한 것도 다 이런 맥락에서이다.
일본 정부 각료들은 남경대학살을 조작한 사건이라고 말하지만 독일
대통령과 장관들은 영화 "쉰들러 리스트"가 개봉되자 몸소 보러 가는 것은
물론이요 교사들이게 "학생들이 되도록 많이 보도록 권장하라"는 담화를
발표한다. 우익단체들이 전쟁범죄를 사과하는 데 반대한다며 확성기로 떠들고
다니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아우슈비츠수용소가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한
우익단체가 이런 주장을 하면 처벌하도록 한 독일 형법이 "의사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위헌소송을 냈을 때 일이다. 연방헌법재판소는 1994년 봄 이
형법조항이 합헌이라고 판결하면서 "유태인 학살은 전범재판, 생존자 증언,
각종 문서와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사실로 판명된 만큼 이러한 사실을
부정함으로써 독일에 사는 유태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주장은 헌법이 보장하는
의사표현 자유에 속하지 않는다"고 못박았다. 독일이 일본 못지 않는
전쟁범죄를 저지르고도 일본과 달리 이웃나라와 잘 지내는 것은 이처럼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국내의 극우파를 단호하게 처벌하기 때문이다.
군사대국 일본
한국전쟁을 지렛대 삼아 경제 재건에 성공한 일본은 그후 생산기술을
눈부시게 발전시켜 세계 최강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군국주의자들의 영향력도 점점 커졌다. 자민당 정권은 1960년대에 명치유신 백
주년 기념행사를 거창하게 열고 군국주의와 침략주의의 상징인 정국신사를
가꾸는 데 막대한 예산을 배정하였으며 국민들을 세뇌하기 위해
지국주의시대의 유물인 일본 왕의 '교육칙어'를 부활시키려고 했고 냉전
이데올로기를 퍼뜨리느라 열을 올렸다. 이 모든 일이 다 국민들 사이에
군사대국 일본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다.
군국주의자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양태를 가장 숨김없이 드러낸 사건은 1970년
10월 일어난 청년작가 미시마 유키오 자살사건이다. 그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 부활'과 '일본정신 회복'을 절규하며 매스컴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도로
'사무라이식 할복자살'을 감행했다. 어느 모로 보나 엄연한 문명국가요
아시아에서 으뜸가는 선진국에서 일어난 일치고는 너무나도 끔찍한
사건이었다. 일본 언론은 한편으로는 비판의 화살을 겨누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흥분에 들떠 찬사를 퍼부음으로써 미시마를 순국 영웅처럼
떠받들었다. 일본 보수파는 이런 소동을 틈타 사무라이 정신과 '대 일본제국'에
대한 향수를 대대적으로 선동했다. 연극, 영화, 소설 등 예술 분야에서도
사무라이와 전쟁을 미화하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미시마 유키오는
군국주의자, 복고주의자, 극우 민족주의자의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온 세계
문명사회와 아시아 이웃나라 국민들은 이런 소름끼치는 짓을 감행하는 일본
보수세력에 대해 새롭게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은 실제로 군사대국이 되었다. 일본 정부는 1957년 이후 오 년마다
방위비 예산을 곱절로 늘렸고 1984년 이후 몇 년간은 금기로 되어 있던 국민
총생산 대비 1%상항선을 무너뜨리면서까지 자위대 전투력 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국민총생산의 1%라면 별 것 아니라고 할지 모르지만 일본 경제
규모가 워낙 큰 탓으로 1992년의 경우 액수로는 무려 4조 5천억 엔이 넘는다.
우리 나라 일반회계 예산 총액과 맞먹는 규모인 것이다. 게다가 일본은
언제든지 군수산업으로 전화할 수 있는 중화학공업과 전자, 통신, 반도체산업의
선진국이며 세계 최대의 플로토늄 처리 능력을 가진 핵강국이다. 일본
군사력은 이미 남북한 군사력을 합친 것보다 더 강력하며 자위대는 이름만
바꾸면 언제든 침략군대가 될 수 있다.
국제정세도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부추기는 쪽으로 가고 있다. 오랜
경기침체로 세계 경제 주도권을 상실한 미국은 방위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일본이 동아시아를 '책임'저 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미군은 일본 자위대와
수시로 합동훈련을 벌이면서 전쟁이 터지면 대한해협을 봉쇄하고 한반도에서
군사작전을 펼 준비를 이미 갖추어 놓았다. 냉전시대 미일 군사동맹의 목적은
소련과 중국이 태평양으로 진출하지 못하게 봉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이
무너지고 중국이 개혁개방 노선을 걷는 요즈음에는 일본이 중심이 된
지역안보체제가 자리잡기를 원한다. 그러나 일본의 군국주의를 경계하는
주변국가 국민들의 저항 때문에 그러한 집단안보체제는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일본이 예측할 수 있는 미래에 옛날처럼 주변국을 침략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선 일본 국민들이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일본은 과거 다른 나라를 침략한 가해자이지만 그들 자신도 전쟁의
쓰라림을 톡톡히 맛보았다. 게다가 전후에 태어나 풍요로운 생활을 주리며
자란 젊은 세대는 그 어떤 사상이나 평화애호정신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과
가족의 평화로운 생활이 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재무장이나 전쟁에
찬성하지 않는다. 1960년대 일본 사회에 회오리를 일으켰던 학생운동은
'전공투'와 '적군파'의 테러활동을 끝으로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오늘날 일본
젊은이들은 모든 정치이념에 대해 무관심하며 오로지 인생을 즐기는 데만
골몰한다. 전쟁세대는 태평양전쟁의 끔찍한 기억 때문에, 그리고 젊은 세대는
개인주의와 정치 무관심 때문에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바라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것이다.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자살이나 문부성의 역사교과서 왜곡 사건은
군국주의자들의 초조감을 드러낸 사건이다. 그들이 사무라이 정신과 '위대한 대
일본제국'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려고 애쓰는 것은 국민 여론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라나는 세대가 배우는
역사교과서에 제국주의시대 일본역사를 아름답게 꾸미려 하고 예전에는 소련과
중국을, 그리고 지금은 북한과 중국을 가상적으로 삼아 대결의식을 고취하는
선동을 일삼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 젊은이들은 대부분 할아버지 세대 일본
군대가 조선과 중국에서 닥치는 대로 부수고 죽이고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런 점에서 '군사대국 일본'을 꿈꾸는 군국주의자들은 반쯤은 성공하고
반쯤은 실패했다. 그래서 그들은 가끔 생전에 꿈을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초조함 때문에 속에 든 말을 불쑥 내뱉곤 한다. 예컨대 1958년 제1차 군비증강
5개년 계획을 추진한 기시 노부스케 수상은 "일본 자위권을 남한과 대만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가 일찍이 1급 전범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심사를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1988년 5월에 조선과 중국 침략을 정당화한 말 때문에 장관직을
사임한 오쿠노 역시 제국주의시대 사상탄압으로 악명을 날린 특별고등경찰
출신이었다.
요즈음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다시없이 좋은 기회를 맞이하였다. 집권
자민당의 여러 파벌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가운데 자민--사회 양당제도가
무너져 그 동안 자위대가 위헌이라고 주장하던 사회당이 군소정당 가운데
하나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회당이 자민당과 연립정부를 만들어
무라야마 위원장이 수상자리에 오른 다음에는 아예 당 노선을 바꾸어 자위대가
평화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비록 만년 야당이기는
하지만 자민당 극우파의 군국주의 정책을 강력하게 저지한 사회당이 군소정당
가운데 하나가 됨으로써 일본 정치권은 그야말로 보수정당 일색으로 변한 대데
그 사회당마저 크게 우경화해 버린 것이다. 만약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정치대국, 군사대국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수우익 정당들이
연합하여 정권을 장악하게 되다면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게 될 것이다.
못난 한국 정부
그런데 문제는 일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 정부가 대한민국을 얕보고
각료들이 망언을 내뱉는 데는 못난 짓을 한 우리 정부도 어느 정도 책임을
저야 한다. 해방 후 친일 민족반역자들이 처벌받기는커녕 오히려 반공투사임을
자처하면서 미군정에 빌붙어 정치권력을 차지한 것이 문제의 출발이었다.
게다가 합법정부를 짓밟고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1965년
한일협정을 맺으면서 단돈 3억 달러에 일제 침략과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몽땅 넘겨주었다. 박정희 자신의 일본군 장교 출신이고 당시
정치, 경제, 군사, 치안, 교육 등 사회 모든 분야를 장악한 자들이 최소한
일제와 협력했거나 앞장서서 동족을 탄압한 장본인들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사람은 반드시 먼저 자기 자신을 모욕한 다음에야 남에게 모욕을 받는다"는
말처럼 대한민국은 스스로를 모욕했다. 그래서 전범 경력을 가진 일본 정부
고위관리와 자위대 수뇌부, 자민당 보수정객, 재벌, 민간인 군국주의자들이
하나같이 이른바 '친한파'를 자처했고 한국 정부는 이런 자들과 함께 '한일
신시대'와 '우호협력관계'를 쌓았다.
친일 민족반역자를 처단하지 못한 '일그러진 한국 현대사'는 오늘날까지 그
음침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1982년 일본의 조선강점을 정당화한 후지오
망언이 나오자 독립유공자들이 일본대사관 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였을 때
일이다. 시위를 한 사람들은 모두 종로경찰서로 잡혀갔다. 그런데 그 가운데
단재 신채호 선생의 아들인 신수범 선생이 끼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아버지
일로 끌려갔던 바로 그 경찰서에 60년만에 다시 잡혀 간 것이다. 신수범
선생은 끝내 민족정기가 바로 서는 것을 보지 못하고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일본 문부성의 교과서 왜곡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인 대학생들도 수십
명이나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유죄선고를 받았다. 1987년
12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를 관장한 국무총리도 일본 육사를 나온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다. 지금은 워낙 나이가 많이 들어 대부분 일선에서 물러나
앉기는 했지만 1980년대 후반가지만 해도 일본 육사나 만주 봉천군관학교를
나와 '천황폐하의 군대'에서 복무했거나 조선총독부의 관료를 지낸 소위
'사회지도층 인사'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한국 정부는 스스로 대한민국을 모욕하는 일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예컨대 박정희 정권이 대일 배상청구권을 넘겨주었다는 이유로 정신대
할머니나 징용 징병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거는 상황인데도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일본 왕 히로히토가 일제강점기에 조선에
저지른 일본의 범죄에 대해 한마디 사과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가 죽자
조문사절을 보냈다. 노태우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히로히토의 아들
아키히토는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이 겪은 고통에 대해 "통석의 염을 금할 길
없다"고 했다. 쉽게 말하면 '안됐다'는 뜻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정부는 이 말을
'뼈저리게 뉘우친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일본 왕의 사과를 받았노라고
자랑했다.
그나마 사과 비슷한말을 한 것은 1993년 11월 6일 김영삼 대통령과 경주에서
만난 호소카와 수상이다. 자민당을 탈당한 후 군소정당을 모아 연립정권을
세운 호소카와는 조선어 사용금지나 창씨개명, 종군위안부 등 몇 가지 사실을
들어가며 "가해자로서 반성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호소카와 개인 의견일 뿐이어서 그 직후 앞서 말한 나가노와 사쿠라이 장관이
그와는 전혀 다른 망언을 늘어놓았고 일본 보수파는 당장 호소카와를 욕하고
나섰다. 남의 집에 쳐들어와 사람을 마구 죽이고 재물을 약탈해 간 소행을
생각하면 이런 정도는 사과다운 사과라고 하기 어렵지만 한국 정부는 물론
많은 국민들이 일단 호소카와의 사과를 반겼다.
그러나 호소카와는 몇 달 못 가 수상자리를 내놓았고 우여곡절 끝에
사회당과 자민당 잔여 세력이 연립정부를 세웠다. 그런데 수십 년 동안이나
일본 전쟁범죄를 사죄하지 않는 자민당을 비판한 사회당 위원장 무라야마가
수상이 되었는데도 그 역시 시원한 '사과 말씀'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전쟁범죄를 부정하는 우익단체의 가두선전은 더 기승을 부린다고 한다. 수상이
솔직한 사죄를 한다 할 지라도 일본국내의 우익단체를 방관하는 것을 감안하면
그 사죄를 진심으로 볼 수 없는 터이다. 이런 판국에 마치 호소카와의 말
한마디로 "한일 시대의 기초가 마련" 된 양 흡족해 한 다면 그 또한 스스로를
모욕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광복 50년이 다 된 지금 조선총독부 건물을 헐고 1인당 국민소득이 8천
달러가 넘었다고 기뻐할 일이 아니다. 엄청난 무역적자와 재정적자에 시달리는
미국 정부는 방위비를 아끼기 위해 일본 자위대의 전투력과 작전범위를
확대하라고 부추긴다. 미군 철수는 시간문제일 뿐 언젠가는 현실이 된다. 그럴
경우 미군이 빠져나간 자리를 메울 세력은 일본 자위대밖에 없다. 만약
남북한이 평화공존과 교류를 이루지 못하고 대립을 계속한다면 "황실의 안전을
위해" 청나라와 일본 군대를 불러들인 이씨 왕조처럼 "불한의 위협에
대항하여" 일본 자위대를 불러들이자는 주장이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일본의 장래는 물론 일본 국민에게 달려 있다. 전쟁범죄의 진상을 아는 기성
세대가 스스로 반성하지 않으면서 새 세대가 그것을 알지 못하도록 교과서를
왜곡한다면, 그 결과 일본 젊은이들이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된다면,
일본의 침략으로 모진 고통을 겪은 아시아 여러 나라 국민들은 영원히 일본의
사과를 받을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도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비록 경제력이 크고 미국의 지원을 받는다 할지라도, 유럽과 아메리카가 모두
제나름으로 경제공동체와 지역안보공동체를 만드는 오늘날 아시아
이웃나라들에게서 따돌림을 당해서야 일본의 미래가 밝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비해야 하는 것은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승리를 거두어 일본이
군사대국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 거꾸로 돌아가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가장 먼저 피 흘릴 나라는 바로 우리 나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본에게 배울 것은 배우되 우리 사회 구석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일본제국주의 찌꺼기, 다시 말해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관료주의, 일제경찰의
유산인 고문과 인권 유린, 친일 친미 사대주의, 분별없는 왜색문화 모방과
일본에 의존하는 경제구조 등을 깨끗이 씻어 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
민족의 생존과 독립을 지켜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일본 정부 각료들이 시도 때도 없는 망언과 역사왜곡이 우리
민족에게 주는 값비싼 교훈이다. 호소카와 수상의 사과를 받고 우리 나라
외무부 당국자들은 "과거 역사문제가 앞으로는 외교현안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 나라와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나라들이 활기 찬 경제발전으로 자신감을 찾을수록 과거 역사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문제는 더욱 중요한 외교현안이 될 것이다. 만약 우리 국민
모두가 이런 외무부 당국자들의 '장님 행세'에 현혹 당한다면 또 한번
'경술국치'를 불러들일 뿐이다.
@ff
핵과 인간
해방된 자연의 힘이 인간을 역습하다
@ff
사회주의체제와 핵무기의 탄생
20세기 인류사를 뒤흔든 가장 큰 사건은 아마도 러시아혁명과 핵무기
발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칼 마르크스가 역사법칙의 이름으로 자본주의에
시한부 운명을 선고한 이후 그 후예들은 쉼 없는 도전과 좌절을 거쳐 마침내
정치권력을 잡고 사회주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위대한 실험'을 시작했다.
레닌, 스탈린, 모택동, 호지명, 티토, 카스트로, 김일성 등 사회주의 역사에
굵직한 이름을 남긴 혁명가들은 나름의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이 실험에 손을
대었다. 이 실험은 한때 자구의 절반을 붉은 깃발로 뒤덮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인류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사건은 핵무기의 발명이다.
20세기 자연과학자들은 수 없는 실패를 거듭한 끝에 원자핵 속에 숨어 있는
거대한 에너지를 세상 밖으로 불러내는 데 성공했다. 사회주의혁명사가 그런
것처럼 원자에너지 해방의 역사에도 뢴트겐, 퀴리, 러더포드, 페르미,
아인슈타인 등 걸출한 과학자들의 이름이 굵직하게 박혀 있다. 그들은 물질의
최소단위라고 하던 원자핵을 쪼개어 에너지의 비밀을 푸는 열쇠를 찾아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상상할 수 없었을지 모르지만 그로부터 불과 몇십 년이
지나기 전에 지구 곳곳에 지구를 몇십 번 폭파하고도 남을 핵무기가 쌓였다.
정치가들은 핵무기가 무슨 소원이든 이루어 주는 마술램프의 거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원자핵에서 뛰어나온 것은 인간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거인이
아니라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괴물이었다. 인간은 자기가 불러낸 자연의 힘
앞에서 두려워 떨면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이 괴물을 없애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 국민은 몇 십 년 동안 "핵무기를 베고 자면서도 그 위험을 모르고"
살았다. 미군은 전술핵무기를 이 땅에 가지고 들어왔으면서도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 주지도 않는 괴상한 정책을 실시했다. 몇 년 전에 '한반도
비핵화' 문제가 남북한과 국제사회의 현안문제로 떠올랐을 때에야 미국 정부는
"남한 핵무기를 모두 철거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 북한의 핵
개발 의혹을 둘러싸고 세계가 떠들썩하다. 그러니 만큼 핵무기의 역사와
정치적 의미를 따져 보는 것이 의미 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실험실에서 전쟁터 한가운데로
뢴트겐은 1886년 진공관 방전을 연구하던 중 방전관에서 흘러나오는
정체불명의 방사선의 사진 건판을 감광시키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X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것을 전해들은 프랑스 학자 베크렐은 방사능이
방전 실험재료로 사용된 우라늄 자체의 특성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것이 1896년의 방사능 발견이며 베크렐은 노벨상을 받았다. 2년 후 퀴리
부처는 우라늄보다 훨씬 강한 방사능을 가진 라듐을 우라늄 광석에서 분리해
내는 데 성공했다. 뒤이어 라돈, 폴로늄, 악티늄 등의 새로운 방사능 원소가
계속 발견되었다. 그리고 19세기말에 이루어진 이 같은 중요한 발견은 20세기
원자물리학이 싹트는 토양이 되었다.
20세기 이전 물리학은 운동, 열, 빛, 소리 등 감각할 수 있는 현상을
대상으로 삼았다. 따라서 물질이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원자설'은 아직 검증되지 못한 하나의 가설에 불과했다. 한편 X선의
정체가 차츰 밝혀져 X선은 알파, 베타, 감마선 세 종류로 나누어졌고, 특히
전기를 지닌 입자인 알파선의 무게가 전자의 8천 배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물리학자들은 원자의 내부 구조를 밝히지는 못했지만 크기나 무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알파 입자의 무게가 헬륨 원자와 거의
같다는 사실을 발견해 냈다. 영국 과학자 러더포드는 이 둘이 무게가 같은
이유를 밝혀내기 위해 정교한 실험을 거듭했다. 그는 원자의 중심에 양전기를
가진 무거운 입자가 있고, 그 주위를 음전기를 가진 전자 2개가 돌고 있는
헬륨 원자 내부 구조를 밝혀내고 중심 입자의 이름을 '원자핵'이 라고 붙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현대 물리학은 태양계의 운행을 지배하는 뉴튼 역학이
아무 힘을 쓰지 못하는 원자세계의 내부로 발을 들여놓았으니 이것이 바로
'양자역학'이다.
라듐을 공기 속에 놓아둘 경우 그것이 항상 기온보다 더 따뜻하다는 사실이
퀴리의 눈길을 끈 이후 원자핵 속에 막대한 에너지가 축적되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예를 들어 라듐 1그램은 매시간 1백 칼로리의 에너지를
2천 년간 서서히 방출하는데 그 총량은 수 십억 칼로리나 된다. 그리고
방사능은 크기가 10조 분의 1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원자핵에서 나온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작은 것'을 찾아 나선 원자물리학은 마침내 원자핵마저 쪼개어 그것이
양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냈다. 물리학자들은 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는 원자핵의 구조를 밝히기 위해 알파입자를 원자핵과 충돌시켜 그
파편을 조사해 보았는데 1919년 러더포드가 처음 이 실험에 성공해서 양자와
중성자가 원자핵의 구성 요소라고 결론지었다. 그의 제자 채드위크는 스승의
결론을 실험으로 완벽하게 뒷받침했다. 이렇게 해서 중성자를 찾아낸
원자물리학자들은 이 중성자를 원자핵과 충돌시키는 실험을 시작했다. 특히
이탈리아 학자 페르미는 모든 원자핵을 이런 방법으로 차례차례 파괴해
보았는데, 어떤 경우에는 중성자가 원자핵 속에 들어가 자리잡아 버리곤 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인공적인 원자핵도 모두 방사능을 띠고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방사성 동위원소'이다.
이때까지 원자물리학은 어디까지나 '실험실의 과학'일 뿐이었다. 그것은
실험실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갖가지 자연현상과 사회생활, 계급 투쟁, 혁명,
전쟁 따위와 아무런 관계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원자핵은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밖으로 빼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자핵과 충돌시켜 알파입자를 붕괴시킬 때 방출되는 파편은 적지 않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에너지는 알파입자를 충돌시키는 데
필요한 에너지보다 작아 대차대조표는 언제나 적자였다. 중성자를 충돌시킬
경우 그다지 큰 에너지가 없어도 되지만, 이 경우에는 파편의 에너지도 너무
작아서 역시 적자를 면할 수 없었다. 원자물리학은 실험실에서 태어나고 죽을
그런 운명을 타고난 학문인 듯 보였다. 그런데 1938년 독일 화학자 오토 한과
쉬트라스만이 중요한 발견을 했다. 그들은 수소에서 우라늄까지 원자핵을
차례차례 중성자와 충돌시켜 파괴한 다음 성분을 조사하는 실험을 했다.
그런데 다른 원자핵은 파편이 방출된 후에도 거의 무게가 변하지 않았지만
우라늄 핵만은 완전히 둘로 쪼개졌다. 그리고 이 두 파편은 대단히 큰
에너지를 가진 데 비해 중성자를 충돌시키는 데는 극히 적은 에너지로도
충분했다. 이 발견으로 인해서 바야흐로 대차대조표는 흑자로 돌아섰다.
중성자를 이용한 핵분열 연구로 1938년도 노벨상을 받은 페르미는
시상식장에서 곧바로 미국에 망명했다. 아내가 유태인 혼혈이었기 때문에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의 박해를 받을까 두려워서였다. 그는 미국에 건너와
지체없이 우라늄 핵과 싸움을 시작했다. 핵분열이 일어날 때에 방출되는
에너지를 이용하기 위해 '연쇄반응'을 일으킬 수 없을까? 이것이 그의
관심이었다. 그는 실험을 거듭한 끝에 우라늄 원자핵이 중성자와 충돌하여
분열을 일으킬 때, 두세 개의 중성자가 새롭게 튀어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 발견과 더불어 핵물리학은 실험실 뛰쳐나와 인간생활과 전쟁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과학의 저주 원자폭탄
당시 지구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불타고 있었다. 유태인 피를 받은 동유럽의
숱한 과학자들이 나치의 박해를 피해서 또는 전쟁 광과 협력하기 싫어서
미국으로 망명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 무시무시한 핵무기가 전쟁 광
히틀러의 손에 들어갈까 두려워한 이들은 프린스턴대학의 아이슈타인을
설득해서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이런 권고문을 보냈다. 1939년 8월 2일이었다.
지난 4개월간의 연구를 통해 대량의 우라늄에서 원자핵 연쇄반응을 일으켜
막대한 에너지를 만드는 동시에 라듐 같은 새로운 방사성 동위원소를
대량생산할 수 있음이 거의 확실해졌습니다. 이 새로운 현상은 폭탄을
제조하는 길을 연 것입니다. ... 이 같은 사태를 감안해서 미국에서 연쇄반응을
연구하고 있는 과학자 그룹과 귀하의 정부 사이에 어떠한 형태로든 항상
접촉을 갖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루즈벨트는 '우라늄 자문위원회'를 만들어 원자력 개발에 착수했다. 지속적
연쇄반응 실험이 처음 이루어진 1942년 12월 2일 시카고 대학 구내 낡은
경기장 스탠드 아래 창고에 비밀리에 설치한 원자로에서였다. 실험 팀은
이탈리아 포도주로 모기 한 마리 죽일 수 없지만 연쇄반응을 일으켜 측정
불가능한 에너지를 불러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 과학자들은
자기네가 불러낸 힘이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충분히 알지
못했다. 시카고대학 경기장 한 켠에 "1942년 12월 2일 인류는 이곳에서 최초의
지속적인 연쇄반응을 일으키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인류는 원자핵 에너지를
해방하여 통제하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기념 판이 세워졌지만, 인간은
아직 그것을 "통제하면서 사용"할 만큼 성숙해 있지 않았다. 탁월한
과학자였던 퀴리는 1903년도 노벨상 수상 강연에서 그것을 예언했다.
범죄자 손에 들어가면 라듐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그래서, 도대체 인간이
자연의 비밀을 안다는 것이 좋은 일인가? 그것을 잘 이용할 만큼 인간 정신이
성숙해 있는가 하는 의문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 저는 노벨처럼 새로운
발견에서 인간성이 악보다도 선을 많이 얻는다고 믿는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퀴리는 결코 괜한 걱정을 하지 않았다. 인간정신에 대한 노벨과 퀴리의
신뢰와 희망은 아직 사실로 입증되지 않았다. 원자력은 결코 알라딘이
마술램프에서 불러낸 거인처럼 고분고분한 하인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것을
불러낸 현대인 역시 알라딘처럼 순진무구한 소년이 아니기 때문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벌어진 대 참사가 그것을 뚜렷이 증명한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일본 히로시마 상공에 나타난 B29 폭격기가
단 한 발의 폭탄을 떨어뜨리고 사라졌다. 그것은 570미터 상공에서 1백만 분의
1초 사이에 폭발했다. 사람들은 무엇이 폭발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들이 본
것이 그저 번쩍하는 섬광뿐이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참상이었다. 폭발 중심지 부근에서는 건물과 가로수,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체가 3~4천 도의 고열을 받아 한 순간에 증발해 버렸다. 말 그대로
흔적조차 없어진 것이다. 반경 5백 미터 내에서는 기와가 녹아 버렸고
3킬로미터 지점에서는 숲이 불탔으며 4킬로미터 지점에서 노출된 피부도
화상을 입었다. 음속과 맞먹는 바람이 몰아쳐 반경 1킬로미터의 빌딩이 거의
다 무너졌고 3킬로미터 떨어진 목조 건물이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15킬로미터
떨어진 집의 유리가 깨어졌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전차 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B29 두 대가
꽤 높은 상공을 북동쪽으로 날아갔다.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다음 순간
번쩍! 맹렬한 빛이었다. 순간 그 자리에 엎드렸다. 그리고 그 다음은 모른다.
정신을 차리고 손발을 움직여 보니 움직여졌다. "아아, 살았구나, 살았다."
일어나 히로시마역 쪽으로 달렸다. 여기저기 길에서 사람들이 나왔는데,
큰길에는 머리를 흐트러뜨리고 유령처럼 양손을 흔들흔들하는 반라의 여자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로 넘쳐흘렀다. 눈도 귀도 입도 녹아서 얼굴이
수박같이 되었다. 여기저기를 헤매다가 마침내 해안에 도착, 거기서 군인들에게
물을 받아 마시고 멍석 위에 누웠다. 그러자 구토가 나 아침에 먹은 것을
토하고 잠들었다. ... 화상을 입은 얼굴에서는 고름과 피와 땀이 흘렀다. 왼쪽
귀가 녹아내려 구더기가 끓고, 매일 학질 걸린 것처럼 고열이 났다. ... 그해 말
귀국했는데, 윤곽만 남은 자식의 모습에 부모님은 피를 토하듯 우셨다.
(한국인 원폭피해자 협회장 신영수 씨의 증언)
열과 폭풍이 지나간 다음에 검은 먼지와 방사능 낙진이 히로시마를
뒤덮었다. 시커먼 강물에 시체가 떠내려가고 거리는 불길에 휩싸여 히로시마는
불구덩이가 되고 말았다. 살아 남은 삶들은 설사, 빈혈, 백혈구 감소, 탈모,
생식기능 장애, 갑상선 장애로 고통받다 죽거나, 위암, 간암, 폐암 등 만성
후유증에 평생을 시달려야 했다. 사흘 뒤 나가사키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12.5킬로 톤, 나가사키 것은 22킬로 톤이었다.
요사이의 메가 톤 급에 비하면 별 것 아닌 소형 폭탄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히로시마 주민의 38%인 16만 명, 나가사키 주민의 275인 7만
5천명 사망했으며, 두 도시에 징용, 징병, 정신대 등으로 끌려가 있던 한국인
10만 명 중 절반 가까운 수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살아 남은
주민들 대다수는 평생 방사능 병으로 고통을 받았다. 한국인 피폭자들은
귀국하여 그중 5만여 명이 후유증으로 사망하였고 현재 1만여 명이 살아 있다.
일본인 피해자들은 정부에서 치료 혜택을 받고 있지만 한국인 피해자들은
대부분 아직까지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우리 나라 정부가 일본이나 미국
정부에게 사죄나 배상을 요구한 일은 한번도 없다.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 핵전쟁의 유일한 사례이다. 칼로 사람을 죽일 경우
범인은 심대한 정신적 갈등과 죄의식 때문에 그 자신마저 인간성 파탄을
경험하게 된다. 총으로 하면 갈등과 죄의식이 약간 덜하다. 그러나 그 정도의
차이는 실로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본국에 사랑스런 가족을 두고 입대한 미군
파일럿은 폭탄 투하 버튼을 누르는 단순한 동작 하나로 수십만을 살상하고도
멀쩡하게 본국으로 귀환했다. 전투원뿐만이 아니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쟁
광들과 전쟁에 반대하는 지하 공산주의자들까지, 원자폭탄은 가리지 않고
살상해 버렸다.
만일 재래식 무기로 이 같이 두 도시를 짓밟았다면 어떤 나라든 인류의
적으로 비난받았을 것이다. 이것은 일본군이 중국에서 자행한 양민 학살이나
나치의 유태인 학살과 마찬가지로 끔찍스런 전쟁범죄였지만 미국 정부는
아무런 도덕적 비난을 받지 않았으며 미국인은 축배를 들며 승리를 기뻐했다.
물론 이것은 전쟁을 도발한 제국주의 일본의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민간인을 이렇게 대량 학살하면서까지 전쟁에 이기려 한 미국 정부의 행위
역시 인간성이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증거라 하겠다. 원폭
투하에 반대한 과학자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전쟁 승리라는 한 가지 목표에만
집착한 미국 정부는 "가장 고귀한 인간성의 소유자"로 구성되어 있지 않은
탓으로 이 항의를 묵살하고 말았다.
원자물리학은 전쟁의 소용돌이를 빠져 나올 수 없게 되었다. 미국은 세계
최강국답게 최강의 무기를 소유한 만족감에 젖어들었다. 그리고 중국 대륙에서
공산당의 승리가 분명해진 1949년 9월 소련이 원폭 제조에 성공했다고
선언함으로써 미국의 핵 독점 시대가 끝나고 핵 경쟁 시대가 시작되었다. 중국
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동유럽에서도 사회주의체제가 형성되자
동서 냉전시대가 개막되었다. 핵무기 경쟁은 더욱 불꽃을 튀기기 시작했다. 이
경쟁에 불을 당긴 것은 다름 아닌 히틀러의 유품, V2 로켓이었다.
날개를 단 핵 폭탄
히틀러는 연합군에게 제공권을 완전히 빼앗긴 2차대전 막바지에 신무기를
개발했다. 과학기술자 5천 명을 동원하여 8년간이나 연구와 실험을 거듭한
끝에 도버해협을 단숨에 건너 런던을 쑥밭으로 만들 수 있는 V2를 제작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1944년 말, 이미 연합군이 탈환한 파리와 런던에는
공습경보조차 없이 강력한 폭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고성능 폭약 1톤을 실은
14톤 짜리 로켓 V2호는 6개월 동안 런던에만 1천 1백 50발이 날아와 2천 7백
명의 사망자와 6천 4백 명의 중상자가 나는 일대 타격을 입혔다. 미, 소 양
대국은 이 신 무기에 눈독을 들였다. 베를린을 점령한 미군은 재빨리
하르츠산맥의 구릉 아래 있는 V2조립공장을 점령하여 부품 1백 발 분을
열차에 싣고 떠났다. 뒤늦게 도착한 소련군은 미군이 미처 가져가지 못한 1천
발을 접수했다. 사실 원폭은 엄청난 위력을 가지긴 했지만 공격 목표까지
운반하기가 어려웠다. 예컨대 B29가 공격 목표까지 접근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V2호는 이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주었다.
그것은 원폭에 날개를 달아 주는 셈이었다. 만일 나치가 하루라도 먼저 원폭을
제조했으면 연합군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었다. 날개를 단 핵 폭탄, 즉
핵미사일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병기였기 때문이다.
미, 소 양국은 V2를 개량하는 미사일 경쟁에 돌입했다. 소련은 55년경
사정거리 5천 킬로미터를 넘는 중거리탄도탄을 완성하고 2년 후에는 초장거리
대륙간탄도탄을 제조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미국은 항공기의 우월성을 과신한
공군 만능주의자들의 막강한 영향력 때문에 미사일 연구에서 소련보다
뒤떨어졌다. 그들은 소련의 ICBM개발 선언을 단순한 선전이려니 자위하고
있었다. 그런데 1957년 8월, 소련은 무게 83.6킬로그램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우주로 쏘아 보냄으로써 미국인의 자만심에 찬물을 끼얹었다.
과학기술에 관한 한 무적임을 자부하던 미국인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른바 '스푸트니크 추격'이 이것이다.
미국도 로켓 연구에 열을 올려 1958년에 익스플로러 1호를 가까스로 궤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우주시대 초기 경쟁에서는 소련이 단연 미국을 압도했다.
1959년 9월, 소련은 달 표면에 로켓을 명중시켜 인간이 보지 못한 달 뒷면을
촬영하는 개가를 올렸다. 미국도 박차를 가했다. 소련의 보스토크 1호는 가가린
소령을 태우고 지구를 한 바퀴 돈 다음 무사히 지상으로 돌아왔다. 최초로
지상 200킬로미터 고도에서 지구를 바라본 가가린 소령은 지상으로 타전했다.
"지구는 푸르다." 우주 캡슐 프랜드호를 타고 160킬로미터 높이에서 미국의
글랜중령이 푸른 지구를 본 것은 이보다 10개월 뒤의 일이었다.
한편 핵 폭탄 자체의 위력을 높이기 위한 경쟁 역시 숨가쁘게 이루어졌다.
핵 독점이 깨어진 다음 미국은 전술용 소형 핵무기를 개발하는 한편, 1952년에
액체수소를 재료로 한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했다. 불과 1년 후 소련도 수폭
실험에 성공했다. 그런데 소련의 것은 액체수소가 아니라 중수화 리튬이라는
고체를 사용한 '건식'이어서 항공기로 운반할 수 있었다. 미국도 1954년 3월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비키니섬에서 수폭 중위를 우라늄으로 감싼 15메가톤의
3F폭탄을 실험했는데, 이것은 폭발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방사능재를 사방으로
널리 흩뿌리는 극히 '야비한' 폭탄이었다. 그 때문에 인근 마살섬 주민 수백
명이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고, 부근을 지나던 일본 어선이 낙진을 뒤집어쓰는
바람에 어부 23명이 방사능 병에 걸렸으며 그중 1명이 사망하였다. 그리고 이
실험의 후유증 대문에 남태평양 일대의 생태계가 대량 파괴되어 방향감각을
상실한 거북이와 물고기들이 뭍으로 올라와 떼죽음을 당했다. 이 폭탄은
히로시마 원폭보다 무려 1천2백 배나 강한 것이었다.
이런 사건이 잇따르지 양식 있는 과학자와 지식인, 일본의 원폭 피해자들의
반 핵 운동 목소리가 높아졌고, 핵 확산에 반대하는 대중적인 운동이 일기
시작했다. 1955년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버트런트 러셀은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에서 "우리는 인류 최후의 시대에 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인류의 절멸은 과학 때문이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이들의 절규는 미, 소 정부의 심장부를 움직이지 못했으며, 원폭의
위력에 컴퓨터라는 첨단기계가지 겸비한 핵미사일은 사정거리와 정확도를 계속
강화하면서 '별들의 전쟁'이라 하는 SDI(전략방위구상)를 낳기에 이르렀다.
고르바초프가 등장할 무렵 미, 소 양국은 각각 1만 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었다. 모두 합쳐 8천 메가톤이나 되는 폭발 위력은 히로시마형 원폭의 60만
배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인류를 30번이나 거듭 전멸시킬 만한 양이었다.
핵무기 체계를 이야기할 대 보통 사람들은 IRBM, ICBM, MIR, MARV,
PGRV, ABM, SLBM 등등의 복잡한 이름에 기가 죽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실 이 같은 복잡한 명칭은 핵탄두를 운반하는 미사일의 사정거리, 탄두의 수,
정확도, 적의 방어망을 피하는 능력, 발사 방법 등이 점차 개량되면서 나타난
체계들을 가리키는 이름들일 뿐 그것 자체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V2로켓을 개량해서 사정거리 수천 킬로미터의 로켓을 만든 것이 중거리
탄도미사일인데 여기에 핵탄두를 장치하면 곧 핵미사일이다. 소련은 이것으로
유럽에 핵 공격을 가할 수 있었으며 미국 역시 유럽의 기지에서 소련 본토를
공격할 수 있었다. 대륙간탄도미사일은 사정거리가 훨씬 긴 것으로 미국과
소련은 본토의 기지에서 모스크바와 워싱턴을 잿더미로 만들 수 있었다. 또
양국은 잠수함으로 상대방 본토에 근접한 후 핵미사일을 수중에서 발사할 수
있었는데 이것이 SLBM이다. 또 여러 개의 핵탄두를 장착한 다 탄두
미사일이나 그 탄두들이 제각기 목표를 찾아 흩어지는 다 탄두 개별목표
재돌입체, 재돌입 단계에서 목표를 찾아 진로를 수정하는 진로수정 재돌입체,
컴퓨터를 장착하여 정밀하게 유도하는 정밀유도 재돌입체, 적에게 발사기지를
숨기기 위해 만든 수중발사 장거리미사일, 상대방의 탄도미사일이 자기 영토
내에 들어오기 전에 포착하여 요격하는 미사일인 ABM... 핵미사일의 종류는
참으로 다양하다. 모두가 인간이 인간을 대량살상하기 위해 최고의 수재들과
엄청난 돈을 투입하여 만든 교묘한 기술이다. 그 외에도 핵 폭격기와 핵 지뢰,
155밀리 포에 장착하여 소는 단거리 전술 핵무기 등 소형 핵무기의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더욱이 MX미사일 같은 신무기는 사정거리, 정확도, 지로 수정,
탄두 교체, 탄두의 수 등에서 앞서간 모든 미사일의 강점을 한꺼번에 결합한
것이다. 이에 맞선 소련의 중거리 미사일 SS-20도 크게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1980년대에 개발된 순항미사일의 경우에는 지상의 장애물과
지형을 탐지하면서 초저공으로 비행해, 레이다 감시체계를 피하면서 목표에
100% 명중할 정도로 정교해졌다. 양국은 이 같은 군비경쟁에 핵물리학과
항공과학, 그리고 컴퓨터 등의 첨단과학이 이루어 놓은 또는 조만간 이룰 모든
귀중한 성과와 가능성을 남김없이 집약시켰다.
미국 대통령 레이건은 1983년 3월 14일, 자신의 군비 증강 계획을 TV에서
연설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국민 여러분, 우리는 오늘밤 인류 역사의 도정을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한 사업에 착수했습니다." 소위 SDI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이 구상은 뒤에 '스타워즈 계획'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이 계획은 미국
내에서는 물론이요 세계적으로 격심한 찬반 양론을 불러일으켰다. SDI는
한마디로 소련의 핵무기 체계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지상 및 우주로부터 모든
최첨단 기술을 구사하는 거대한 미래형 기술 체계를 뜻한다. 소련의 미사일
체계를 재빨리 탐지하는 적외선 탐지 기술과 광속의 고 에너지 레이저빔을
사용한 강력한 요격, 탄도미사일을 파괴하는 킬러위성, 이를 통제할 우주기지,
해군과 공군이 각자 가지고 있는 우주 사령부의 통합, 이를 적의 공격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생존 기술 등등 공상과학 영화에 등장하는 갖가지 기술과 무기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SDI는 재래식의 모든 핵무기 체계를 쓸모 없이
만들어 버리는, 상상을 뛰어넘는 전쟁 체계인 것이다. 이쯤 되면 과학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엄청난 파괴력은 더 이상 알라딘의 통제 범위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데에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핵무기를 가진 나라는 미국과 소련에 그치지 않았다. 영국, 프랑스, 중국
등이 이미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일본, 캐나다, 서독 등은 제조 능력이
있다. 핵폭발의 위력과 그 후유증에 대한 연구 역시 어느 정도 발전을
이루었다. 현존하는 핵무기의 1%만 폭발해도 직접적인 피해를 제외하더라도
'핵겨울'이 찾아들어 지구상의 동식물이 절멸한 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주장이다. 칼 새건을 비롯한 5명의 미국 과학자들은 실로 소름끼치는 연구
결과를 제출한 바 있다.
우선 핵 폭탄이 터질 때 일어난 먼지와, 도시의 화재와 산불에서 분출되는
연기 때문에 대기에 투사되는 태양광선의 강도가 뚝 떨어져 기온이 영하로
내려간다. 북반구에서 핵폭발이 있을 경우 낙진이 피폭지역의 수십 배나 되는
넓이로 확산된다. 만일 현존하는 핵무기의 10%가 폭발할 경우 1억 톤의
연기가 지구를 뒤덮어 태양광선 95%가 감소, 어스름 달밤 같은 어둠이 몇
달씩이나 계속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낙진의 강력한 방사능에 노출된
사람의 반 이상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대류권에서는 기온역전 때문에
한파와 가뭄, 폭우 등 이상기후 현상이 전역에 걸쳐 일어나며 육지는 영하
20~40도로 기온이 떨어진다. 그리하여 모든 대륙에 '핵겨울'이 닥쳐오는 것이다.
이 같은 조건에서 과연 생물이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핵
연구자들은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고 있다.
핵 사고와 핵전쟁의 위험성
핵무기가 내포한 위험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곳곳에서 핵에 반대하는
대중운동이 일어낫다. 1984년 10월 미국 로드 아일랜드의 브라운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핵전쟁이 터질 경우 자살을 원하는 학생들을 위해 학교 보건진료소에
청산가리를 비치하라는 청원을 집단적으로 학교당국에 제출하는 웃지 못할
사태까지 있었다. 핵에 대한 공포는 이처럼 절박한 것이다.
그렇다면 미, 소 양 대국은 어째서 이 끔찍한 살인무기를 경쟁적으로
생산할까? 물론 양쪽 다 상대방의 세계 침략을 억제하고 세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핵의 균형' 혹은 '우위'를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두 차례
세계대전 이전에도 강대국들은 '세계 평화 유지'라는 명분을 내세워
군비확대경쟁을 일삼았고, 또 전쟁으로 귀결되지 않은 군비경쟁은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두 나라의 핵무기 경쟁 때문에 인류 전체가 한 걸음 한 걸음
죽음의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으며, 매년 수백 수천 억 달러를 들여 먹지도
입지도 못하는 핵무기를 만드는 동안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의 제
3세계에서는 수백만이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갔을 따름이다. 이런 면에서
핵무기 경쟁은 인류에 대한 이중의 범죄인 것이다.
특히 핵 경쟁은 2차대전 후의 전세계적 냉전체제를 근거로 시작되어 그것을
더욱 첨예하게 악화시켰으며 두 나라 지배층은 각자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냉전과 군비경쟁을 이용했다. 미국의 경우 국방성과 에너지성,
국립항공우주국을 장악한 군부, 각종 무기 생산과 연구개발을 담당하여 막대한
연방예산을 독점하는 방위산업 자본가 집단, 그리고 국방성의 지원금을 받아
핵 경쟁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는 연구단체의 '두뇌집단',
의회에서 이를 대변하는 보수주의 정치인들, 기타 군부와 산업계를 연결하는
민간단체가 하나의 유기체로 결합하여 미국 정치를 좌우하기 때문에 미국
정부는 군비 감축에 대해 지극히 소극적이었다.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후 소련
정부가 적극적으로 핵무기 감축을 제의했지만 레이건--부시 행정부가
마지못해 그에 응한 것은 미국 정부와 의회가 이들 군산복합체의 압력을
받았기 때문이다.
핵전쟁은 계산된 공격보다는 우발적인 사건 때문에 일어날 가능성이 더
높다. 아무리 최첨단 컴퓨터와 레이더를 갖춘 군사체제라 할지라도 결함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79년에서 80년 상반기 사이에 1백 47건의
핵미사일 공격 오보 사건이 있었는데 모두가 컴퓨터 실수 때문으로 밝혀졌다.
그중 세 차례는 실제 요격기가 출격했거나 출격 준비 태세에 돌입하기까지
했다.
1962년 가을의 '쿠바위기'는 실재하는 핵전쟁의 위험과 아울러 그것을 피해
나가는 인간의 지혜에 대해 한 가닥 신뢰감을 안겨 주었다. 1953년 7월 26일
쿠바섬 산디아고 교외의 쿠바 제 2병영을 아바나 대학생들과 함께 기습
점령했던 27세 청년 피델 카스트로는 이 습격이 실패하자 2년간 감옥 생활을
한 후 멕시코로 건너가 무장봉기를 준비했다. 그는 1년 6개월 후인 1956년
11월 25일에 '7월 26일 운동'의 동지라고 하는 무장 게릴라 82명을 이끌고
동해안에 잠입했다. 그중 시에라 마에스트라산까지 살아서 들어간 수는 불과
12명이었다. 그들은 산정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낸 후 1959년 1월 3일까지 2년
동안 실로 영웅적인 전투와 민중의 지지에 힘입어 미국의 앞잡이로서 독재와
수탈을 일삼던 바티스타 군대를 무찔렀다. 바티스타는 도미니카로 달아났다.
"미국 해안을 겨누고 있는 멕시코만의 비수" 쿠바를 잃어버린 미국은 CIA가
미국에서 훈련시킨 쿠바인 부대를 대규모로 상륙시키고 수도 아바나에 폭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불과 사흘만에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자 원래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던 카스트로 정부가 미국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련에 도움을 요청하여 미사일을 반입하려 했다. 옆구리를
겨눈 비수가 점차 붉게 물드는 것을 보고 미국은 함정 40척과 병력 2만을
동원하여 해안 봉쇄망을 쳐 전쟁 일보 직전의 사태로 돌입했다. 미국은 만약
소련의 물자수송 선단이 검문에 불응하면 격침시키겠다고 선언했다. 소련은
이를 해적행위라고 비난하는 강력한 성명을 발표했다. 소련 수송선은 미국
봉쇄망에 계속 접근하고 있었다. 쿠바에 미사일 기지가 설치되면 미국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이었던 만큼 소련은 그 기회를 잃고 싶지 않았다. 오판으로 인해
핵전쟁이 터질 위기가 발생한 가운데 세계는 공포에 휩싸였다.
그러나 미, 소 양국의 수뇌는 직통전화를 통한 대화 끝에 소련이 쿠바에서
공격용 무기를 철수하고 미국이 쿠바에 대한 무리한 간섭을 자제하기로
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했다. 오히려 이를 계기고 군축협상을 활발히 진행하여
1963년 8월 모스크바에서 지상 핵실험 정지조약을 체결하였다.
유일하게 핵무기의 피해를 입은 일본 국민은 비키니사건을 계기로 1954년의
원, 수폭 금지운동에 2천만 명이 서명을 했으며 1958년에는 3천 2백만이
서명했다. 이 운동은 비동맹국가들과 일본, 스웨덴, 오스트리아 정부를 핵실험
금지운동에 끌어들였으며 1955년 서독의 재군비, 핵무장, 나토 가맹 반대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유엔 총회에서도 반핵을 외치는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1958년 런던의 반핵 평화행진에는 10만 시민이 참여했다. 이 운동은 70년대 말,
80년대 벽두를 기점으로 폭풍같이 거세게 솟구쳤다.
1979년 12월 12일 나토 외상, 국방상 회의는 "소련의 SS-20 중거리
탄도미사일 배치에 대항하여 1983년까지 미국의 순항미사일 464기와 퍼싱 2
108기를 유럽에 배치함으로써 그 압력으로 미, 소간 핵무기 제한협정을
타결하도록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자 유럽은 반핵운동의 물결에
휩싸였다. "항의하여 살아 남자!" "히로시마는 되기 싫다!" "나토 탈퇴!"
"레이건--사형집행인!" "핵무기 반대!" 80년 10월 26일 런던 거리는 7만
군중으로 뒤덮였다. 81년 가을 서독 본에는 10만, 런던 하이드파크에는 15만,
나토 본거지인 브뤼셀에는 20만, 로마에도 20만 구중이 집결하여 핵무기
배치를 규탄했다. 1982년 6월 레이건의 이탈리아 방문에 맞춰 30만이
평화시위를 벌였다. 레이건은 런던에서도 30만 반핵 시위대의 '환영'을 받았다.
그가 본에서 나토수뇌회담을 열고 있는 동안 라인강 건너편에서는 45만 군중이
"평화를 위한 특별열차"를 타고 몰려들었다. 6월 12일 뉴욕에서는 100만 명이
참가한 반핵 평화행진이 벌어졌다.
이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은 참으로 다양하다. 진보적 지식인, 작가, 노동조합,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교사, 과학자, 의사, 회사원, 실업인, 자유직 종사자,
예술가, 학생, 주부, 농민, 기독교도, 가톨릭교도, 반핵 시민단체, 환경보호단체,
배우, 가수, 아이들 ... 그야말로 빈부와 남녀노소와 직업과 피부색의 차이를
떠나 반핵 통일전선을 맺은 것이다.
가장 감동적인 사건은 영국 그린햄코먼의 여성들이 벌인 운동이었다. 미국의
중거리핵미사일이 배치될 예정인 그린햄코먼 미사일기지 주위에 81년부터
'평화 캠프'를 치고 감시하던 여성들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밤이나 낮이나
눌러앉아 버티었다. 캠프가 강제 철거당하고 23명이 2주간 투옥되기도 했지만
그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순항미상일로 세계가 폭발하는 것을 막는다"는 목표
하나를 가지고 모인 여성들은 남편과 가정을 버리면서까지 캠프에 매달렸다.
그들은 "폭력데모나 하고 지도자 행세를 하는 남자들"을 쫓아버리고 82년 12월
12일 여자만으로 행동하기로 결의했다. "남자들에게서 장난감을 빼앗자."
이것이 그날의 구호였다. 날이 밝자 영국 전역과 세계 각지에서 3만 5천 명의
여성이 몰려들어 손에 손을 잡고 '인간 사슬'을 만들어 기지를 포위했다. 수천
남성들은 이것을 지켜보며 커피와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이들은 기지 울타리로
천천히 접근하여 각자가 심사숙고한 끝에 가져온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울타리에 걸었다. 연인과 가족의 사진, 화려한 옷, 반핵을 노래한 시,
플래카드 ...를.
1983년 부활절과 10월의 반핵주간 행동은 반핵운동의 절정을 이루었다. 유럽
각국의 미사일기지는 수천에서 수십만에 이르는 평화애호가들이 만든
'인간사슬'에 둘러 싸였으며 수천만이 반핵시위 대열에 참가했다.
이 같은 대중적 반핵투쟁은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반핵, 반전' 기치를 내건
독일 녹색당은 핵 정책에 애매 모호한 태도를 보인 사회민주당 표를 무더기로
빼앗아 원내 제 3당으로 급속히 성장했다. 런던, 암스테르담, 브뤼셀 등 1천여
개의 도시와 읍, 면 지방자치단체가 핵무기를 만들지도 취급하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비핵 자치단체 선언"을 채택했다. 1983년 5월 5일 미국 하원은 핵
동결법안을 통과시켰다. 미국의 비 군수산업 경영자들까지도 반핵 그룹을
결성했다. 체코, 동독, 소련 등지에서도 지식인과 학생들 사이에 반핵운동이
파급되었다. 뉴질랜드와 호주를 비롯해서 비핵 3원칙을 선언하는 나라들도
늘어났다. 핵의 위험에 대한 세계인의 경각심이 매우 높아진 것도 반핵운동의
결과이다. 1985년 이후 반핵운동가들은 '거리의 시위'에서 '다음 단계로의
발전'을 차분히 준비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예민한 이슈가 생기기만
하면 언제든지 1983년을 뛰어넘는 대중적 참여가 이루어질 것이다.
위험한 것은 핵전쟁만이 아니다. 핵에너지를 평화적으로 이용하는
원자력발전소 역시 사고가 나면 핵무기 못지 않게 큰 피해를 준다.
과학기술자들이 아무리 완벽하게 하려고 해도 인간이 하는 일에는 언제나
실수와 결함이 따르기 마련이다. 핵 강대국들은 한편으로 핵무기 경쟁을
벌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더 값싼 에너지와 원자폭탄을 만드는데 필요한
플로토늄을 얻기 위해 다투어 원자력발전소를 지었다. 그런데 이 원자력발전소
때문에 핵 강대국들은 종종 도저히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1957년 소련 우랄지역 지하 핵 쓰레기 저장탱크가 고온을 견디기 못해
폭발한 것이 첫 번째 대형사고였다. 이 사고 한번으로 서울과 경기도를 합친
것보다 넓은 땅이 방사능에 오염되어 못 쓰게 되었고 그 지역 주민들은
방사능병에 걸려 죽거나 다른 곳으로 집단이주하였다. 비슷한 때에 영국
윈스케일 발전소에서도 방사능이 대량 유출되는 사고가 났다. 두 나라 정부는
약속이나 한 듯 이 사실을 국가기밀로 분류하여 감추었다.
1960년대 핵 보유국들은 핵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천연우라늄 235가 날이
갈수록 희귀해지자 매장량이 풍부한 천연우라늄 238로 플로토늄 239를 만들어
핵분열을 일으키는 고속증식로 발전소를 세웠다. 이 고속증식로는
기술면에서는 훨씬 발전한 것이지만 그 이전의 것보다 더 큰 사고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미국도 원자력발전소 사고를 면제받을 수 없는 일이어서
1979년 3월 28일 미국 드리마일 원자력발전소에서 원자로 중심부분이 녹아
내리는 사고가 터졌다. 과학자들은 이 원자로에서 사고가 날 확률이 1백만
분의 1도 안 된다고 장담했지만 인간이 하는 일이 그렇게 완벽할 수는 없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을 능가하는 대형 핵 참사가 터진 곳은
1986년 소련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에서였다. 소련정부가 그렇게도
자랑했던 체르노빌 RBMX-1000 원자력발전소는 강철로 덮은 격납고 지붕까지
날아가 버리는 대 폭발을 일으켰다. 원전종사원과 가까운 곳에 살던 주민은
물론이요 불길을 잡으려고 날아간 방화헬기 조종사와 현장 사진을 찍던
사진기자도 모두 목숨을 잃었다. 반경 30킬로미터 안은 방사능에 오염되어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었다. 끔찍한 일이었다. 소련 정부는 뒷처리를 잘하려고
했지만 재정이 부족한 탓으로 겨우 반경 30킬로미터 안에 사는 지역주민들만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다. 그래서 지금도 4백만이 넘는 사람이 독립공화국이 된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 공화국 오염지역에서 살고 있다. 체르노빌 원자로를
빠져 나온 방사능은 바람과 물을 타고 동유럽 여러 나라로 흘러 들어갔다. 이
때문에 동유럽 농민들은 곡물과 야채와 우유를 서유럽에 수출할 수 없이
살길이 막히는 일까지 생겼다.
여기서 예로 든 것은 대표적인 대형사고일 뿐이다. 알려지지 않았거나
알려졌더라도 큰 피해를 내지 않은 크고 작은 원전사고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우리 나라는 미국, 러시아, 일본과 유럽 선진국에 이어 원자력발전소를
많이 갖고 있기로 세계에서 손꼽는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만약 우리 나라에서
체르노빌과 비슷한 사고가 난다면 나라 전체가 방사능에 오염되어 민족이
멸망하고 말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단지 경제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꾸
원자력발전소를 짓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짓이라고 하겠다.
제로핵 사회로 가는 길
인간성에 대한 퀴리 부인의 믿음은 온전히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냥 헛된 소망으로 끝나지도 않았다. 냉전시대 서방세계에서는 핵무기를
없애려는 거대한 시민운동이 일어나 핵 경쟁에 어느 정도 제동을 걸었다.
고르바초프가 등장한 후 소련 정부는 군비경쟁을 경제적으로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미국 정부를 상대로 적극적인 핵 감축 협상을
벌였다.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가 무너짐으로써 미국 군산복합체를 대표하는
강경파들도 핵 경쟁을 선동할 구실을 잃어버렸다. 게다가 미국 드리마일과
소련 체르노빌 원전사고를 보고 지구인 모두가 핵무기와 원자력발전소의
위험성을 몸으로 깨달았다. 이런 요인이 어우러져 다행히 핵무기 경쟁은 한
고비를 넘긴 느낌이다.
1993년 1월 3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모스크바에서 만나 제2단계 전략무기감축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이 지켜지면
다 탄두 대륙간 탄도 미사일이 완전히 사라지고 잠수함 발사 미사일은
절반으로 줄어들어 두 나라 핵무기 보유량은 20년 전 수준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 협정은 원래 고르바초프가 제안하고 추진하였지만 보수파 쿠데타를
이용하여 그를 밀어내고 권력을 잡은 옐친이 서명하게 되었다. 하지만 두
나라는 이렇게 하더라도 여전히 3천 개가 넘는 핵 폭탄을 보유하게 되며 그
위력은 히로시마 원폭의 30만 배가 넘는다. 인류는 아직 핵전쟁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핵무기 보유국 숫자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중국과 인도 등은
이미 핵무기 보유국이고 브라질, 아르헨티나, 이란, 이라크, 시리아, 대만,
남북한, 등 핵 개발 계획이나 개발 능력을 가진 나라도 하나둘이 아니다.
우크라이나, 카자흐, 벨로루시 등 옛 소련에서 갈라져 나온 독립공화국이
보유한 핵무기도 새로운 골칫거리이다. 여기에다 최근에는 나라꼴이 엉망이 된
러시아 쪽에서 플로토늄을 몰래 훔쳐내어 다른 나라 수요자에게 내다 파는
범죄조직까지 생기고 있는 판이다.
"핵무기 우세를 통해 세계평화를 이룩한다"고 한 핵 강대국들의 주장은
강자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반세기 가까이 계속된 핵 경쟁과
반핵운동 역사는 과학자들이 불러낸 핵에너지를 군인과 정치가의 손에 맡겨 둘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핵 개발에 종사하는 과학자들은 과학과
정치가 무관하다는 헛된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이 세상에 다른 것과 무관한
것을 없다. 원자 폭탄 개발에 참가한 과학자와 히로시마 원폭 투하 작전에
참가한 조종사들 가운데 몇몇이 자기의 행동을 뉘우치면서 반핵운동에 뛰어든
데서 알 수 있듯 과학자와 기술자라고 해서 자기의 행동에 따르는 도덕적
정치적 책임을 면제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아직도 미래는 불확실하다. 인류는 여전히 운명의 갈림길에 서 있다. 핵의
위험성을 똑바로 깨달은 사람들의 집단적인 참여와 노력만이 퀴리 부인이 말한
'인간성에 대한 신뢰'를 떠받칠 수 있다. 우리 나라에는 울진, 영광, 고리,
월성군에 모두 열 여섯 기나 되는 원자력발전소가 가동 도는 건설 중이다.
전술핵무기를 가지고 들어온 미군은 "이제는 핵무기가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미국과 한국 행정부 고위관리들 중에는 북한의 핵 개발에 맞서 핵무기를
들여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은 실정이다. 자기의 이익에 눈이
멀었거나 이른 바 '경제성'에만 집착하는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온 국민이
"핵무기와 원전을 베고 자게" 만들려는 사람들에 대항하여 대한민국과
한반도를 '제로 핵' 사회로 만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인류의 밝은
미래를 위해 봉사하는 길이라 하겠다.
@ff
20세기의 종언, 독일 통일
통일된 나라 분열된 사회
@ff
브레즈네프 독트린과 시내트러 독트린
1968년 8월 20일 한밤중 소련 군대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다.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목표로 내걸고 민주선거와 복수정당제도, 노동자의
기업자주관리제도 등을 도입하려 한 체코 정부의 정치 경제개혁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소련군은 체코 공산당 서기장 알렉산더 두브체크를 비롯한 개혁
지도자들을 모조리 체포하고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저항하는 수도 프라하
시민들을 탱크로 짓밟았다. 이리하여 이른바 '프라하의 봄'은 겨우 몇 달도
안되어 막을 내리고 말았다.
스탈린 체제를 조금씩 고쳐 나가던 흐루시초프를 쿠데타로 밀어내고 집권한
브레즈네프는 같은 해 10월 소련체제 본뜨기를 그만두고 독자노선을 걸으려 한
체코 자주화운동을 무력으로 말살한 일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런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개별 사회주의 나라의 이익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세계 전체의
이익에 종속되어야 하며 사회주의 세계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는 개별 나라의
주권은 제한되어야 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제한 주권론' 또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이다. 소련 정부는
1980년대까지 이러한 견해를 버리지 않고 동유럽 사회주의 나라들을 지배했다.
그런데 1985년 3월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는 서방세계 국민들을
위해 쓴 "페레스트로이카"라는 책에서 사회주의 나라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사회주의 나라 사이의 정치적 관계는 원칙적으로 개별 국가의 완전한
자주성을 전제로 해야 한다. 이것은 모든 우방국 지도자들의 공통적인
견해이다. 각 나라 집권당이 독자적으로 자기 나라가 당면한 문제에 책임 있게
대처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이 당연한 원칙이다. ...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은 독자적인 방식으로 자기변혁과 근본적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변혁의 범위와 형태, 속도와 방법은 각국의 지도자와
국민이 결정할 문제이다. 각국이 고유한 특징을 근거로 하여 자신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1989년 10월에 열린 바르샤바 조약지구 외무장관 회의에서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나라 외무장관들은 "모든 나라는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고
주권을 행사한다는 원칙을 존중한다"고 선언함으로써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공식 폐기하였다. 서방언론은 재빠르게도 '시내트러 독트린'이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프랭크 시내트러의 노래 '마이 웨이'에 빗댄
것이다.
"외교는 내치의 대외적 표현"이라는 말마따나 고르바초프가 선택한
'시내트러 독트린'은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정책이 낳은
자연스러운 외교노선이었다. 페레스토이카는 순수한 러시아말로 '고쳐
세운다'는 뜻이고 글라스노스트는 '소리낸다' 또는 '자유롭게 말한다'는 뜻이다.
이 두 단어는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개혁정책을 집약한 말이다. 소련체제의
약점을 인정하고 그에 관해 자유롭게 토론하여 바로잡으려고 하는 정부가 다른
나라가 그렇게 하려는 것을 막을 이유가 없다.
물론 페레스트로이카는 젊은 지도자 고르바초프가 집권함으로써
시작되었지만 그 혼자만의 발명품은 아니다. 그것은 소련 권력층이 "더 이상
어제처럼 통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국민들도 "더 이상 어제 같은
내일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을 깨달은 데서 생겨났다. 그러나 혁명가와
혁명연구자들이 애용하는 말 그대로 이처럼 "지배자들이 개혁을 하려고 나서는
때가 가장 위험한 시기"였다. 불과 몇 해 지나지 않아 소련은 해체되었고
동유럽 사회주의체제도 모두 주저앉아 버렸기 때문이다.
낯선 혁명, 무너진 사회주의
고르바초프가 내놓은 '새로운 사고'는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에 거대한
폭풍우를 몰고 왔다.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쌓이고 쌓인 모순이 폭발하여
세계 역사에서 처음 보는, 그리고 앞으로도 다시 보기 어려운 '낯선 혁명'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 것이다. 물론 이것은 고르바초프가 만들어 낸 혁명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그가 택한 개혁정책이 아니었다면 20세기 막바지 세계 역사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소련의 손에서 놓여난 동유럽 나라들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1980년 바웬사가
이끄는 독립노조 '연대'의 총파업으로 정권이 무너질 위기에 몰렸던 폴란드에서
제일 먼저 복수정당제도를 도입했다. 1989년 6월 4일 무려 42년만에 처음 치른
자유총선거에서 '연대' 노조 후보들은 전국에서 공산당 후보를 눌렀다. 1956년
동유럽에서 제일 먼저 반소 자주화 시위를 벌였던 헝가리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헝가리 공산당은 1989년 10월 복수정당제와 자유선거,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소련군의 철수를 명시한 새 강령을 채택하면서 당을 해체하고
사회당으로 변신했다. 불가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잇달아 공산당 일당독재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이 혁명은 그
이전에 일어난 혁명과는 달랐다.
공산당 정부들은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투입하거나 최루탄을 쏘지
않았다. 그러니 시위군중도 무기를 들 필요가 없었다. 큰 도시 중심 가에 모인
수십만 군중은 일제히 열쇠를 흔들어 '혁명교향악'을 연주했고 밤에는 너나없이
촛불을 켜들어 아름다운 야경을 만들어 냈다. 국민들은 개혁과 민주주의를
원했고 옛날과 같이 통치할 수 없다고 느낀 정부는 국민의 요구에 굴복했다.
유일한 예외는 가장 완고한 사회주의 국가로 이름난 루마니아였다. 1989년
12월 루마니아 국민은 독재자 차우세스쿠에 반대하는 전국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차우세스쿠는 "사회주의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사병이나 다름없는 보안
군과 헬기를 동원하여 무차별 총격을 퍼부었다. 시위는 폭동으로 번졌고
국민과 보안군 부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일찍이 나치 군대와 싸워
영웅으로 추앙 받았던 차우세스쿠는 아내와 함께 '구국위원회' 군대에 잡혀
비참하게 총살당하고 말았다.
집권층 스스로 개혁을 시작한 폴란드, 헝가리, 체코, 등과는 달리 에리히
호네커가 이끌던 동독공산당은 이웃나라의 변화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낡은
체제 위에 그냥 눌러앉아 있었다. 그러자 동독 국민들은 사회를 변혁하려
하기보다는 서독으로 탈출하는 데서 해결책을 찾으려고 했다.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탈출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1989년 7월 헝가리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던 동독 시민들이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하면서 이 이상한 혁명은 모습을 드러냈다. 헝가리 정부는 동독과 체결한
협정을 어기면서 무려 2만 5천명이나 되는 동독 사람이 국경을 넘도록
허용했다. 체코 프라하와 폴란든 바르샤바 서독 대사관에도 탈출 물결이
밀어닥쳤다.
이렇게 되자 개혁을 원하는 동독 지식인들이 1989년 10월 노이에스
포럼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정부에 등록신청을 냈다. 그러나 호네커 정부는 이
단체의 등록을 받아 주지 않았다. 동독 정부는 스스로 개혁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시민들이 벌이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운동'도 허용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때 고르바초프가 동독 정부 수립 4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동베를린으로 날아왔다. 고르바초프는 호네커에게 동독 정부는
모스크바의 생각과 관계없이 자기 문제를 스스로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충고하면서 "너무 늦게 오는 사람은 역사가 벌을 내린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호네커는 이 충고를 듣지 않았다.
정부 수립 기념행사가 열린 10월 7일 동베를린과 라이프치히 등 동독
대도시는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시위대로 뒤덮였다. 동독 국민들의 요구는
"자유선거와 여행자유 보장"으로 집약되었다. 시위가 날마다 계속되자 10월
18일 마침내 18년 동안이나 통치해 온 호네커가 사임하고 그의 오른팔 노릇을
하던 에곤 크렌츠가 그 자리를 이어 받았다. 하지만 그런 눈속임으로는 시위를
끝낸 수 없었다. 크렌츠는 개혁을 약속했지만 사태는 더 악화되었다. 11월 4일
동베를린에 모인 50만 시위대는 이제 여행자유 정도에 그치지 않고 공산당
일당독재 폐지와 정권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다. 공산당 지도부는 내각과 당
정치국을 전면 개편했다. 개혁주의자 한스 모르도프가 총리자리를 받았다.
그러나 '탈출혁명'은 가라앉지 않았다. 젊은 기술자들이 너무 많이 빠져나간
탓으로 공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의사와 간호원이 모자라 병원조차 제
기능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1970년대부터 동독 정부는 서독으로 탈출하려다
붙잡힌 사람들을 서독에 넘겨주고 그 사람들을 '교육하는 데 든 비용' 명목으로
엄청난 돈을 받았다. 그런데 한 해에 무려 20만여 명이 탈출하는 상황에서는
아무 대책이 없었다.
견디다 못한 동독 정부는 서독으로 통하는 국경과 동서 베를린을 갈라놓은
베를린장벽을 개방한다고 발표했다. 1989년 11월 7일에 일어난 사건이다.
1961년에 동독 쪽에서 쌓은 높이 4미터, 길이 45킬로미터나 되는 견고한 장벽,
반세기에 걸친 동서냉전과 대결의 상징, 이것을 몰래 넘다 사살 당한 동독시민
78명의 한과 체포당한 3천여 명의 눈물로 얼룩진 베를린장벽은 이렇게
무너졌다. 총을 든 국경경비대가 멀거니 지켜보는 가운데 사람들은 벽을
무너뜨렸다. 동서 베를린 시민들은 서로 얼싸안고 입을 맞추고 춤을 추고
샴페인을 터뜨렸다. 그야말로 "역사의 흐름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넉 달이 지난 1990년 3월 18일 동독지역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점진적인 통일을 주장한 사회민주당을 누르고 급속한 통일을 공약한 콜 수상의
집권 기독민주당이 대승을 거두었다. 서독의 물질적 풍요를 본 동독
유권자들이 하루 빨리 통일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불과 반년이
지난 1990년 10월 3일 0시 독일 민주공화국이라는 나라는 사라졌다. 그보다
며칠 앞서 동독 인민회의 의장은 동베를린에 있던 외국대사들을 한자리에 모아
작별인사를 했고 2차대전이 끝난 뒤 독일을 분할 점령했던 영국, 미국, 프랑스,
소련 정부도 독일 통일을 인정했다. 동서독으로 갈라선 진 41년만에 면적
36만여 평방 킬로미터, 인구 7천 9백만을 가진 통일독일이 등장한 것이다.
동독의 '탈출혁명'은 이렇게 하여 독일의 재통일로 그 막을 내렸다.
사회주의 유토피아와 공포정치
19세기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사라지고 자유로운
만인의 자발적인 결사체"를 꿈꾸었다. 칼 마르크스를 비롯한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사회제도를 바꾸면 인간의
의식과 가치관도 바뀔 것이라고 믿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물질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 사회적 연대감과 책임감에 따라 일하고 살 수 있는 존재로 본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볼세비키혁명 이후 혁명가들이 만든 사회는 그와는
거리가 멀었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는 폐지되었지만 인간에 대한 억압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회적 연대감과 책임감만으로 모든 사람을 오랫동안 일하게
할 수는 없었다. 이상은 아름답고 원대하였지만 그들이 택한 방법으로는 결코
그 '약속의 땅'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동독공산당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는 젊은 시절 나치체제에 저항하는
지하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옥고까지 치른 이상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권력을
잃은 후 러시아로 달아났다가 통일독일로 송화 되어 권력남용과 부정부패
혐의로 재판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이 재판이 정치재판이요
포로재판이라고 항의하면서 자기의 사상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독일 정부는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이 파산한 권력자를 딸이 살고 있는 칠레로
망명하도록 허용했다. 호네커는 칠레에서 "사회주의를 배신한 고르바초프"를
비난하고 "사회주의 혁명가로 살아온" 자기의 일생을 회고하는 글을 쓰다가
1994년 2월 82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일생은 끝없는 도전과 희생,
극적인 승리와 한때의 영광, 그리고 마지막에 찾아온 치욕스런 종말로
이어지는 소련 동유럽 사회주의 역사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동독은 동유럽의 '모범 사회주의국가'였다. 스탈린 체제를 충실하게 본떠 별
말썽 없이 유지해 왔다는 뜻이다. 원래 동유럽에서는 제일 발전한
산업국가였고 전쟁이 끝나자마자 나치 전범과 협력자들을 철저하게 숙청했으며
반 나치 투쟁에 참여한 열혈 혁명가들이 권력을 잡았으니 비록 소련 군대의
보호를 받았다 하더라도 결코 출발이 나빴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소련체제를 그대로 모방한 나라가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이 나날이 변하는
마당에서까지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으니 몰락의 운명을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동독이 서독에 흡수 통일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소련체제가 하루아침에 무너진 이유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스탈린 체제의 첫째가는 특징은 철저한 일당독재와 무자비한 정치테러였다.
스탈린은 1930년대에 농촌을 사회주의 집단농장으로 바꾸면서 수백만 명의
부유한 자영농을 강제노동수용소로 끌고 가 운하와 철도를 만드는 일에
동원했다. 1934년 12월에 일어난 키로프 암살사건을 빌미 삼아 벌인 대숙청에
희생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세르게이
키로프는 볼세비키혁명 당시 페트로그라드 무장봉기를 지도한 혁명영웅이다.
스탈린은 이 사건을 트로츠키 추종자의 소행으로 보고 무자비한 숙청의 칼을
빼들었다.
처음에는 공산당 고위간부와 고참 혁명가, 외교관, 고위 군장교, 작가들을
겨냥했던 대숙청은 시간이 흐르면서 보통 시민의 생명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공산당 중앙위원이자 원로 혁명가인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 투하체프스키
총사령관, 정치국원 로이코프와 부하린 등이 줄줄이 처형당하였고 노동조합
지도자 톰스키를 비롯한 수많은 혁명가들이 숙청이 두려워 자살했다. 죄명은
한결같이 국제 파시스트 앞잡이, 트로츠키주의자, 반당분자, 독일 스파이
등이었으며 일단 올가미에 걸린 사람은 정식 재판도 없이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비밀경찰은 언제나 새벽에 희생자의 집에 들이닥쳤고 한번 끌려가면
가족조차 생사를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소련 국민들은 서로를 밀고자로
의심하면서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않고 살아가는 법"을 익혀야 했다.
스탈린은 모든 반대파를 제거한 다음 "태양처럼 빛나는 지도자"가 되었다.
노동조합과 농민단체 등 모든 사회조직은 공산당의 손발로 전락했고 언론과
문학예술은 공산당 정책과 스탈린주의를 선전하는 수단이 되었다. 물론
시민혁명으로 이룩한 언론, 출판, 집회, 결사, 학문, 사상의 자유도 봉쇄되었다.
스탈린의 정체테러는 나라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나치군대와 맞서 소련군이
도움 없이 조국을 해방한 선반공 출신 혁명가 요십 브로즈티토가 '소련의
모범'을 따르지 않고 독자노선을 택하자 스탈린은 유고공산당을 제국주의
앞잡이로 몰아 국제공산주의운동 조직에서 축출하고 동유럽 공산당 지도자
가운데 민족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을 모조리 쓸어 냈다. 폴란드공산당 제
1서기 고물카, 헝가리 내무장관 루슬로 라이크, 불가리아 부수상 코스토프,
루마니아공산당 정치국원 파트라스카누, 체코공산당 제 1서기 루돌프
스란스키와 외무장관 클레멘티스, 알바니아 부수상 코치 조제 등이 그 대표적
희생자들이었다. 사형을 면한 사람은 오직 고물카뿐이었다.
스탈린의 횡포는 미국의 반공우익세력에게 훌륭한 명분을 주었다. 그들은
소련을 "철의 장막에 가려진 야만국가"로 규정하고 "소련의 세계적화 음모를
막기 위한" 군비증강에 불을 질렀다. 그들은 또 국내의 모든 진보적
사회운동을 "크레믈린의 검은 손이 조종하는 체제파괴활동"으로 몰아 탄압하고
세계 곳곳의 제 3세계 나라에 광신적 반공주의를 표방하며 부정부패와
인권유린을 일삼는 파쇼국가를 만들어 냈다.
1953년 스탈린이 죽고 흐루시초프가 집권한 후 소련에서는 스탈린
격하운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 운동의 초점은 스탈린 개인숭배의 폐해를
바로잡는 데 있었기 때문에 스탈린 체제는 인간 스탈린보다 훨씬 오래, 즉
고르바초프가 등장할 때까지 여전히 살아 남아 위력을 떨쳤다. 독 가시넝쿨에
풍성한 과일이 열릴 수 없는 것처럼 이런 방식으로 만든 사회가 인류사회의
진보를 가져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동독에서도 정도는 다르지만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동독 슈타지, 즉
국가안전부는 온 국민을 감시 대상으로 삼아 일상생활과 사회활동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민주화 시위 과정에서 동독 시민들이 슈타지 본부를 습격하여
기밀문서를 탈취하면서 그 모습을 드러낸 슈타지 문서는 통일된 후 일반
시민에게도 공개되었다. 동독 시민들은 속마음을 트고 지낸 친구와 친척,
심지어는 남편이나 아내까지 슈타지 협력자로 있으면서 자기의 언행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것을 보고 엄청난 심리적 갈등과 절망감을 맛보아야 했다.
눈부신 성공 날개 없는 추락
사회주의사상과 운동은 자본주의가 낳은 사회적 불평등과 모순을 극복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보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엄청난 생산력 발전을 이룩한
자본주의체제가 극심한 불평등을 불러들이지만 않았다면 사회주의사상이
나왔을 리가 없다. 사회주의가 그것을 요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세상을
증오하는 미치광이 학자'들이 만들어 낸 허황한 신념이라면 반세기 동안 지구
절반이 붉은 깃발 아래 놓이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회주의는 처음에는 눈부신 성공을 거두는 듯 보였다. 러시아는 1917년에는
유럽에서 제일 뒤떨어진 낡은 봉건제국이었다. 그런데 제 2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러시아는 나치군대가 벌이는 현대전에 능히 맞설 만큼 발전한
산업국가가 되어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1957년에는 우주선 스푸트니크를
우주로 쏘아 보내, 자만심에 빠졌던 미국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다. 1961년 유인우주선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지구궤도에 올라선 가가린
소령이 "지구는 푸르다"고 타전했을 때 사회주의 소련의 자신감은 하늘 끝까지
올랐다. 사회주의 나라들은 비록 그 수준이 그리 높지는 않다 하더라도 모든
국민에게 일자리를 주고 집과 식량과 교육기회와 의료혜택을 제공하는데
성공했다. 매매춘과 조직폭력 등 뿌리깊은 사회악이 자취를 감추었고 사회의
안정을 위협할 정도의 빈부격차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눈부신 성공'의
뒤안길에는 언젠가는 사회주의체제의 뿌리를 뒤흔들게 될 위험 요소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핵심은 생산수단을 개인이 아니라 "모든 인민 또는
사회가 소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추상적인 표현일 뿐 결국
누군가가 공장과 기계와 원료를 처분하고 운영하고 생산품을 관리하고 거기서
생기는 소득을 분배하는 일과 관련한 결정을 내리고 집행해야 한다. 개인
소유이건 국가 소유이건 생산수단 처분과 생산물 분배에 관한 결정권이
소유권의 핵심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사회주의 나라 노동자 농민은
그런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다.
농민들은 정부가 정한 값에 농산물을 공출해야 했고 노동자들은 국가에서
결정한 임금을 받으면서 위에서 내려온 생산목표량을 채워야 했다. 요컨대
노동자 농민은 자기가 만든 노동생산물을 마음대로 처분 할 수 없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자본가가 아니라 국가에서 임금을 받는다는 사실뿐이었다.
혁명가들의 바람과는 달리 이기심 대신에 사회적 연대감과 사회주의
혁명의식이 모든 사람을 오랫동안 열심히 일하게 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공포정치에 숨죽인 국민들은 국민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 당과 관리들의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인민들은 직장에서는 적당적당 시간을 보내고 실제로 이익이 되는
일에 매달렸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소련 경제의 침체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1978년 소련 농민들은 전체 경작면적의 3%도 안 되는 자기 집
텃밭에서 나라 전체 생산량의 61%, 29%, 34%나 되는 감자와 채소와 쇠고기를
생산했다. 텃밭 생산량이 이렇게 늘어난 것은 농민들이 그것을 시장에
자유롭게 내다 팔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련 지도자들은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작업량에 따라 보너스를 주는 인센티브제도를 실시했지만 효과는
잠시뿐이었다.
문제는 인간에게만이 아니라 제도에도 있었다. 중앙집권적 계획경제에서는
어떤 재화를 얼마만큼 생산할지를 공산당 간부와 경제관료들이 결정했기
때문에 소비자의 욕구가 생산에 반영되기 어려웠다. 게다가 기업 경영자들은
상부에서 정해 준 생산목표를 채우기 위해 귀중한 인력과 자본을 마구
낭비했고 새로운 과학기술을 생산에 응용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에너지와 철강과 곡물의 최대생산국인 소련에서 늘 원료와 에너지 부족 사태가
일어났고 최첨단 항공우주기술을 자랑하였지만 가전제품의 품질은 형편이
없었다. 한마디로 생산자가 소비자를 지배하는 비효율적 체제였던 것이다.
고르바초프가 집권하자마자 한 일이 알콜중독 퇴치사업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에서 감동적으로 묘사한
사회주의 건설 초기 청년 공산주의자들의 눈물겨운 헌신과 자기희생은 분명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수십 년 계속해서 그렇게 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인민들은 틈만 나면 술을
마셔댐으로써 괴로움을 잊어버리려 했다. 알콜중독은 이런 체제가 불러들인
사회 병이었다.
소련과 동유럽 나라들은 1970년대까지 부지런히 자본주의 선진국을
추격했다. 그런데 그 거리가 미처 좁혀지기 전에 새로운 산업이 출현하면서
동서 양진영 사이의 경제 수준 격차는 순식간에 벌어져 버렸다. 자본주의
선진국의 주력산업은 철강, 석탄, 기계제작, 금속, 화학공업에서 반도체, 컴퓨터,
신소재, 유전공학, 정보통신산업으로 옮아갔고 이러한 신 산업과 결합한
전통산업의 생산력도 뜀박질을 계속했다.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나라들은
스스로 이러한 신 산업을 개발하는 데 실패했고 자본주의 열강의, 새로운
산업기술과 신소재 수출금지에 묶여 밖에서 도입할 수도 없었다.
고르바초프가 "소련이 이등국가로 전락하였다"고 개탄하면서 서방세계와
평화공존을 추진하고 시장경제를 점진적으로 도입하려 한 것은 바로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동독 시민들이 집단적으로 서독으로 넘어가 '탈출혁명'을 일으킨
것도 바로 자본주의 선진국 국민들이 누리던 풍요로운 소비생활을 동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련과 동유럽공산당이 추진한 점진적 개혁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철벽처럼 보였던 그 체제는 한 귀퉁이가 헐리기 시작하자 무섭게
껌껌한 혼돈을 향해 곤두박질했다. 마치 날개 꺾인 새가 추락하는 것처럼.
1991년 8월 19일, 낡은 체제를 고수하려는 보수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고르바초프를 제거하려 들었다. 이 쿠데타는 '3일 천하'로 끝났다. 고르바초프가
시골 별장에 묶여 지낸 사흘 동안 타고난 선동가 보리스 옐친이 사태를
장악했다. 그는 고르바초프가 내세운 군과 정부와 공산당 간부들이 쿠데타를
공모한 사실을 약점으로 잡아 그를 밀어냈다. 소련은 해체되었고 공화국들은
독립국이 되었다. 아무도 이 '날개 없는 추락을' 막을 수 없었다.
자본주의를 선으로 사회주의를 악으로 규정한 보리스 옐친은 공산당 활동을
금지하고 계획경제를 단숨에 폐기하였다. 물자가 부족한 가운데 돈을 마구
찍어대는 바람에 물가는 걷잡을 수 없이 뛰어올랐고 생산수준은 해마다
뒷걸음을 되풀이했다. 연방 안에서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던 각 공화국
경제는 연방이 해체되어 있던 각 공화국 경제는 연방이 해체되면서 너나없이
마비 상태에 빠졌다. 고르바초프가 등장한 후 다시 나타난 매매춘은 이제
하나의 직업으로 자리잡아 모스크바를 비롯한 대도시 호텔 주변에는 외국인을
유혹하는 창녀들이 득시글거린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번 러시아
졸부들이 유럽 카지노에서 흥청망청 노름을 하고 러시아 정부가 전쟁선포를
해야 할 정도로 세력이 큰 마피아 조직이 도처에 똬리를 틀었다. 소련이라는
나라는 세계지도에서 사라져 버리고 그 대신 자본주의의 가장 천박한 증상이
판을 치는 혼돈스런 공화국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동독 국민들은 러시아와 비슷한 겪고 있는 다른 동유럽 나라 국민들보다는
행복한 편이다. 예전의 독일연방공화국 즉 서독에 흡수당함으로써 문제야
많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고생을 면했기 때문이다.
국가의 통일과 사회적 분열
독일 통일을 두고 사람들은 '역사가 준 선물'이라고 한다. 더 노골적으로는
'고르바초프가 준 선물'이라고까지 한다. 독일 사람들이 통일운동이라 할 만할
일을 하지 않고도 통일을 이루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통일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그것을 '사고'라고까지 한다. 갑작스런 통일이 가져온
부작용이 한두 가지가 아닌 만큼 그도 그럴 듯하다.
하지만 꼼꼼히 들여다보면 독일 통일은 역사가 내린 선물로 아니며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 사고 또한 아니다. 그것은 반 세기에 걸친
동서체제경쟁의 필연적 귀결이며 20세기 인류가 무엇을 이루었는가를 보여
주는 성적표이다. 사회주의 나라들에게 첨단기술과 신소재 수출을 금지한
자본주의 열강의 정책을 탓해 보아야 아무 의미가 없다.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열강의 공격이 아니라 그 체제 자체의 비효율과 국민의
창의성을 억압한 통치방식 때문에 제풀에 무너졌다. 그들이 택한 방식으로는
'사회주의 이상국가'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반세기에 걸친 사회주의 역사는
남김없이 보여 주었다.
반면 사회주의 혁명운동의 거센 도전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옛 서독사람들은
사회주의 혁명가를 자처한 동독 지도자들보다 실질적으로 더 사회주의 이상에
가까운 자본주의 사회를 만들었다. 패전의 후유증이 채 가시지 않은
1950년대에 우파인 기독민주당과 자유민주당 연립정권은 '사회적 시장경제'의
기초를 놓았다. 독일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를 낳은
19세기 자본주의의 결함을 인정했다. 단지 경제가 성장하고 실질소득이
높아진다 해서 좋은 체제일 수는 없다. 생존능력이 있는 경제제도라면 그
외에도 국민이 가진 사회정의 관념을 결정적으로 침해해서는 안되며 성장과
더불어 생활안정을 보장하여 사회평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독일
보수파의 견해였다.
서독은 동독을 흡수 통일할 만한 자격을 두루 갖춘 사회였다.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고도 경제성장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실업보험, 의료보험,
노후보험, 산재보험 등 각종 사회보장정책을 치밀하게 만들어 시행했다.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기 위해 모든 교육기관을 연방과 주정부에서 맡아
운영하며 대학에 이르기까지 등록금을 받지 않는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면 경쟁에서 불리하기 때문에 대학생들이 서류를 갖추어 내면
정부에서 부족한 생활비를 지원해 준다. 그래도 능력이 부족하거나 장애가
있어서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없으면 지방자치단체에서 충분하지는
않지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큼 도와준다. 노동조합의 활동은 정치활동과
파업에 이르기까지 거의 완벽하게 보장하고 대기업의 경우에는 감사위원회에
근로자 대표를 넣어 경영 내용을 알고 중요한 의사결정에 참여하도록 법으로
정해놓았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사상, 학문의 자유 등 시민적 자유는 말할
것도 없고 정당정치와 내각책임제, 지방자치제도 별로 흠잡을 데 없이 가꾸어
놓았다. 사유재산제도와 경쟁을 핵심으로 하는 시장경제를 지키면서도 19세기
사회주의자들이 추구했던 각종 정책을 대부분 수용한 것이다.
물론 준비 없이 맞이한 통일에 부작용이 따르지 않을 리가 없는 일이다.
가장 큰 문제는 기술이 뒤떨어져 경쟁력이 없는 동독기업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신탁관리청은 지난 몇 해 동안 무려 1만 개가 넘는 동독 국영기업을
정리하여 국내외 투자가에게 팔아 넘겼고 여기서 실업자가 대량으로 발생했다.
분단 이전에 동독에 집과 땅을 가지고 있었던 서독 사람들이 그 땅을 찾으려고
소송을 걸었는데 그 숫자가 무려 110만 명 250만 건이나 되었다. 독일 정부가
땅과 집을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주려고 하자 거기 살던 동독 시민들은 졸지에
거리로 나앉을 위험에 빠졌다. 해고를 모면한 동독 노동자들은 같은 일을
하면서도 서독에서 온 동료가 받는 임금의 3분의 2 정도밖에 받지 못했다.
슈타지와 협력했다는 이유로 동독 대학교수가 4천 명이나 쫓겨났고 같은
혐의로 쫓겨난 공무원과 군인들도 줄을 이었다. 동독 국영 방송국과
신문사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거의 모두 실업자가 되었다. 시민운동이 전혀
없었던 탓으로 옛 동독 산업지역과 소련군 주둔지의 땅이 너무 심하게
오염되어 어떤 땅은 거저 준다고 해도 정화비용이 너무 엄청나 가져가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동서독의 생활수준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동독
시민에게 주는 실업보험과 노후보험 지급금액을 배 이상 올려야 했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돈이 든다. 전문가들의 추정에 따르면 독일
정부는 동독 경제를 재건하고 생활수준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 오는 2000년까지
무려 2조 마르크, 우리 돈으로 1천 조 원을 쏟아 부어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연방재정이 빠듯해지자 정부는 실업수당, 의료보험금, 양육보조금, 주택보조금,
재해보상금 등 복지예산을 크게 깎아 버렸다. 서독 납세자들은 더 많은 세금을
내는데도 복지는 오히려 줄어든다고 불평했다. 여기에다 1990년대 벽두부터
유럽을 휩쓴 불황의 파도가 밀어닥쳤다. 서독에서만 실업자가 250만을
넘어섰고 옥일 전체로는 400만에 육박했다. 유고슬라비아에서 내전이 터져
난민들이 몰려들자 이들을 받아들여 먹여 살리느라고 연방재정은 더욱
빠듯해졌다. 그러자 대량 실업과 복지 감축이 외국인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네오나치들이 독일과 터키 정부가 맺은 협정에 따라 합법적으로 일하고 있는
터키인을 폭행하고 밤중에 집에 불을 지르는 등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사정이 이렇게 어려워지자 동서독 주민들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 동독
주민들은 서독 사람을 "돈만 밝히는 거만한 서독놈" 베씨라 욕하고 서독
사람들은 동독 사람을 "일은 안 하고 불평만 늘어놓는 동독놈" 오씨라고
비웃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독일이 국가의 통일과 동시에 사회적
분열을 얻었다고 걱정한다. 하지만 독일 통일은 되돌릴 수 없는 일이며 뒤늦게
후회하는 사람들 말처럼 천천히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고르바초프가
언제까지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가 불확실한 판에 손익 계산을 하느라
주판을 굴릴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열린 사회로 가는 길
사회주의혁명과 동서냉전을 특징으로 하는 20세기 현대사는 독일통일과
더불어 그 막을 내렸다. 중국과 베트남은 여전히 사회주의체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이미 시장경제를 도입한 이상 우리가 과거에 알았던 그러한 사회주의는
아니다. 쿠바는 30년 넘게 끌어온 미국의 잔인한 무역금지조치에 목이 졸려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다. 북한은 이른바 핵 카드를 지렛대 삼아 미국과
외교관계를 맺어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중이다. 반세기에
걸친 사회주의 실험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사회주의 이념마저 숨이 끊어진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만든 사회주의 국가는 무너졌지만 자본주의가 낳은 사회적 불평등과 생활의
불안정에 대한 항의와 비판으로서 사회주의가 가진 힘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사회주의 이상을 결합해 보려는 민주적 사회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는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독일 사회민주당은 통일 이전에나 마찬가지로 정권을 놓고 보수
기민당과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한때 통일이 되면 금방 서독 사람처럼 잘살
수 있다는 환상에 빠졌던 동독 시민들 사이에서는 옛 동독 공산당을 계승한
민주사회당이 20%에 가까운 지지를 얻고 있다. 헝가리,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에서도 옛 공산당을 계승한 정당들이 최근 선거에서 잇달아 승리하였다.
러시아와 소련에서 떨어져 나간 독립공화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정당들은 하나같이 시장경제에 사회주의 복지정책을 결합한
독일이나 북 유럽식 경제체제를 강령으로 내세웠다.
흔히들 현대를 불확실성 시대라고 한다. 문명 사회가 21세기에 어디로
나아갈지를 예측할 수 없다고도 한다. 그러나 적어도 경제제도와 정치체제에
관한 한 냉전시대가 막을 내린 지금 시점에서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복수정당제와 자유선거를 핵심으로 하는 의회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토대로
사회주의 이상을 결합한 경제체제이다. 혼합경제, 복지국가, 사회적 시장경제,
사회주의적 시장경제 등 그 이름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다. 다만 시장기능을
무시하는 중앙집권적 계획경제는 물론이요 기회균등과 공정한 경쟁,
사회정의와 생활안정을 보장하지 않은 채 약육강식과 같은 자본주의 경쟁을
무작정 권장하는 경제체제 역시 살아 남을 수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사회주의 몰락을 보고 마냥 환호성을 지르거나 독일식
통일을 꿈꾸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부모 재산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아이들의 인생이 달라지고, 모든 아이들이 태어나는 바로 그 출발점부터
'출발기회의 불균등'에 편입되고,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는 규칙이 존재하지
않고, 자기 책임이 아닌 가난이나 장애 때문에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고, 돈 많은 사람과 힘없는 사람에게 법을 다르게 적용하는 그런
사회는 오래 살아 남을 수 없다.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고, 서로 다른 의견을 자유롭게 나누면 올바른 의견이 승리를 거둔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힘있는 집단의 압력 때문에 그릇된 법과 제도를 고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회주의 몰락과 독일 통일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다양성을 존중하는
'열린 사회'의 모습이다.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가 몰락한 것은 비효율적인
경제체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안팎에서 나오는 다양한 의견과 비판을
봉쇄하는 '닫힌 사회'였기 때문이다. 닫힌 사회는 그 사회의 밑 둥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위기가 찾아들기 전까지는 그 위기를 감지하지 못한다.
마찬가지 이치에서 독일 사람들이 머지않아 통일 후유증을 극복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 독일은 대부분의 정치세력과 사회집단이 다른 생각을 가진
세력과 참을성 있게 대화하고 소수집단의 목소리에까지 귀를 기울이는 열린
사회이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비용 타령을 하면서 통일을 걱정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북한체제가 곧 무너질 것이라는 '희망 섞인' 흡수 통일 논리가 판치는 이
마당에 무척 한가한 소리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민족의 통일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북한 공산집단의 적화야욕 망상"도 아니오 "천문학적 통일
비용"도 아니다. 자기와 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못하고 이해관계와 생각이 다른
사람에 대해 귀를 막고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는 사회분위기와 정치풍토와
법제도야말로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이며 이런 면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남북한은 닮은꼴이다. 남북한이 제각기 안으로 열리지 않는다면 하나로
합치는 일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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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스티븐 달드리

출연 케이트 윈슬렛(한나 슈미츠 역), 데이빗 크로스(어린 마이클 버그 역), 랄프 파인즈(마이클 버그 역), 레나 올린(로즈 매더/아일라나 매더 역)


줄거리


그 남자의 첫사랑
10대 소년 ‘마이클’은 길을 가던 중 열병으로 인해 심한 구토를 일으키고 우연히 소년을 지켜 본 30대 여인 ‘한나’의 도움을 받게 된다. ‘마이클’은 감사 인사를 청하기 위해 그녀를 다시 찾아가고 순간 그녀에게 강한 끌림을 느끼며 비밀스런 연인이 된다. 그렇게 시간이 갈수록 ‘한나’에 대한 ‘마이클’의 마음은 점점 더 깊어지게 된다. 

그 여자의 마지막 사랑
‘한나’는 우연한 만남 이후 그녀를 찾아 온 ‘마이클’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고 그와의 사랑을 시작한다. 언제부터인가 ‘마이클’과 관계를 가지기 전 책을 읽어 달라는 그녀. <채털리 부인의 사랑>, <오디세이> 등 ‘마이클’이 ‘한나’에게 읽어주는 책의 수가 늘어 갈수록 둘의 사랑은 더욱 깊어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한나’의 알 수 없는 불안감은 커져만 간다. 그러던 어느 날, ‘한나’는 말 한마디 없이 ‘마이클’ 곁에서 사라진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리움 속의 8년 후, 법대생이 된 ‘마이클’은 재판에 참관했다가 우연히 피고인 신분의 ‘한나’를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에 대해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마이클’은 안타까움을 안은 채 그녀를 바라볼 수 밖에 없다. 모든 죄를 인정하고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한나’를 눈 앞에서 지켜봐야 하는 ‘마이클’은 또 다시 그녀와 20년간의 헤어짐을 맞게 된다. 감옥에 간 그녀에게 ‘마이클’은 10년 동안 책을 읽은 녹음 테이프 보내면서 그녀와의 애절한 사랑의 끈을 이어가는데…

그렇게… 비밀스러운 여인 ‘한나’로 인해 ‘마이클’의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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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 가슴이 먹먹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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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 있는 커피 바?


이젠 거의 바리스타 수준이라고 해도 될까? 커피를 뽑는 일련의 과정이 자연스러워 졌다.

수동식인 이 넘은 커피를 내리는데 디자인이 멋스럽다. 압에 의해서 푸쉭~~~ 하는 소리와 

김이 무럭무럭~~~~ 아마 커피라는 뽀대를 생각하면 역시 은은하게 퍼지는 커피향과, 

과정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이 맘에 든다. 단지 좀 귀찮지만...하핫

커피를 갈아주는 녀석인데 너무 예민하다. 조금만 굵기 조절이 달라져도 

커피 내리는 진함이 달라진다. 까칠한 녀석~~~~

얼~~~상표를 찍을려고 했는데...너무 지저분해 보이네...

뭐 이런 녀석들과 함께하고 있다. 커피점을 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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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 Yi 3번 죽더만 나가버리고...

이번판도 졌구나~~~하고 있는데 이게 왠일입니까?



판세가 우리쪽으로 점점 기울더니...

4v5에서 이렇게 제가 이겨 버리고 말았네요!

그것도 랭게임에서~~~우하하하하하하

이런날만 있음 lol정말 사랑하고 싶은데...에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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